7.
회화에서 ‘자연’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크 이후이다. 바로크 예술을 하나의 독립된 예술사조로서 정립한 것은 뵐플린과 리글(Alois Riegl)로(물론, 이들의 작업 뒤엔 인상주의라는 사조가 존재한다), 그 중 뵐플린은 바로크 시대의 특징으로 예술적 세계의 주관화와 ‘시각적 인상’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드는데, 시각적 인상이란 측면으로 본다면 그것은 공간적 깊이를 부여하여 입체감을 만드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우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공간의 깊이를 나타내기 위해 바로크 예술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방법은 전경(前景)을 지나치게 크게 그리고 전경의 인물들을 보는 사람의 바로 눈앞에 돌출하도록 하며, 배경의 사물은 원근법적으로 급격하게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 공간은 그 자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는 인상을 줄 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은 화면에 극히 가까운 시점이 주어짐으로써 공간이 자기 자신에 종속되어 있고 자신에 의존하고 있으며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형식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우저, ꡔ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ꡕ)
우리가 김훈 소설의 정밀한 묘사나 스펙터클 장면에서 느끼는 ‘긴박함’도 이와 같은 입체감에 다름 아니다. 독자들은 화자(이순신)의 눈을 통해 세계(공간)를 보는 것에 쉽게 동화된다. 하우저는 바로크 예술을 ‘영화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김훈 소설에 쉽게 매료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특징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떤 영화평론가가 이야기한 것처럼, 영화란 ‘폐허’를 묘사하는데 적합한 예술장르이다. 바꿔 말해 입체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자연이란 ‘은총 없는 자연’인데, 그것이 우리를 안심시킨다. 인간에게 ‘자연’은 폐허로서만 경험된다. 이것은 결코 모순어법이 아니다. 왜냐면 ‘폐허’란 결코 무질서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크 예술은 일견 비건축적이고 비조직적으로 보이지만, 자신을 초월한 무엇을 항상 지향하고 있어 어떤 통일감을 부여한다. 그래서 리글은 회화 속 자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서 보이는 무자비한 투쟁은 멀리서 보면 협동과 단결, 하모니로 비춰진다. 이렇게 해서 일상의 생활에서는 하루도 그를 떠나지 않는 무거운 중압감에서 벗어나 구제되었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8.
김훈 소설은 ‘시원성’이란 하나의 이념에 입각해 있으며, 선험적으로 ‘자연사(自然死)’라는 이상을 존재하게 하는 어떤 필연성이 존재한다. 물론 이때의 필연성은 다른 말로 거리감을 통해 외적 자연을 내적 자연으로 변화시키는 멜랑콜리적 세계인식에서 나온다. 이와 같은 우발사가 배제된 고착된 질서에 의한 세계인식은 당연 그 질서 위에 환영들을 만들어내어 일종의 독특한 조화로운 ‘자연적’ 세계가 구성된다. 그리고 멜랑콜리는 질서의 환영을 먹으면서 진공 속 입체성을 구축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공간에 ‘시간’이나 ‘우발사’가 침투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적의 환영이 사라질 때) 순식간에 의사자연은 무의미로 전환되어 버리는데, 이것을 막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자연사’이다. 따라서 ‘자연사’라는 이상은 일종의 내적 자연의 퇴행이자 커다란 순환의 완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김훈의 주요 인물들(이순신, 장철민)에겐 인격이 존재하지 않는다. (1인칭이든 3인칭이든 마찬가지다) 그들에겐 오로지 개성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개성도 ‘자연사’라는 이상이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린 그를 로맨스 작가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김훈의 인물들은 돈 키호테처럼 의사자연의 본질을 꿰뚫고 그 근원지를 파괴하기보다는 의사자연의 위기를 방어하기 위해 ‘자연사’를 선택한다. 이는 그가 로맨스에 존재하는 위계 구조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라이는 소설과 구분하여 로맨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로맨스 작가는 개성을 취급한다. 이 경우 등장인물들은 진공 속에 존재하며, 몽상에 의해서 이상화된다. 또 로맨스 작가는 아무리 보수적이라 할지라도 그의 글에서는 무언가 허무적인 것 또는 야성적인 것이 계속 나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ꡔ비평의 해부ꡕ)
이렇게 마지막으로 프라이를 인용하는 것은 로맨스가 소설보다 저급한 장르라는 것도 아니고, 김훈 소설이 (프라이적 의미의) 로맨스라고 못 박는 것도 아니다. 다만 김훈 소설이 가진 구조의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2004. 8.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