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산 정상서 솟은 햇살 창문으로 쏟아지던 천소마을
체육관 짓느라 당산나무 잘리고 문전옥답은 도로 잠식
사랑하는 사람들 삶의 자취 배어있는 고향 개발에 몸살
#샘이 있던 마을 천소
내 고향은 언양읍 반천리 천소마을이다. 우리 말로는 '샘소'라 하는데, '샘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조선왕조 숙종 37년(1711) 신묘식년 언양현호적대장에 이미 '천소리'라 기록되어 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마을은 뒷산 줄기가 내려온 언덕에 자리잡았고, 그 앞에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동남쪽으로 이등변감각형 문수산이 장엄하게 보이고, 그 아래에 언양에서부터 들판을 적셔주는 큰거랑이 유유히 흐른다.
나는 이 샘소마을에서 태어나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랐다. 50가호 남짓한 마을에는 우리 연안송씨 일족이 제일 많았다. 나는 마을에 있는 반천초등학교를 거쳐 언양중·고교를 걸어서 다녔다. 내가 공부하던 사랑방에는 문수산 정상에서 솟은 햇살이 곧바로 쏟아져 들어왔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고향에서 보낸 나는 지금도 눈감으면 마을의 골목길과 논두렁길, 그 길에 박혀있던 돌맹이까지 그려낼 수 있다.
고향 이야기는 언제나 철없이 뛰어놀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추억담이다. 숨바꼭질, 고무공차기, 소먹이기, 물고기잡기, 참외서리, 여자아이들 골려주기 등이 그것이다. 그 무대는 초등학교 운동장, 큰거랑과 서당산, 당산나무 숲, 마을 가운데의 뒷뻔덕, 그리고 골목길이었다. 함께 놀았던 친구는 모두 열 두명이다. 우리는 천소의 '泉'자를 따 '천우회'를 만들어 오늘도 명절마다 만나면서 정을 나누고 있다.
#세월 따라 변한 고향
서당산과 큰거랑은 여름 한철 내내 우리들 놀이터였다. 소먹이러 갈 골짜기는 많았지만 서당산에 가는 날이 가장 많았다. 기슭에 넓은 잔디밭이 있고, 그 아래에 큰거랑이 있기 때문이다. 소나무와 잡목이 어울린 산이니 소가 먹을 풀은 있으나마나였다. 소는 아이들 놀이터 행차의 동행일 뿐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짤구받기(공기놀이), 멱감기, 물고기잡기로 놀다가 해가 질 때면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대암댐 진입로 공사에 마을 형들과 친구들이 '노가다'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고향을 떠났다. 이후 명절에 한번씩 내려오는 고향은 그야말로 '발전'하고 있었다. 마을 뒷산 아래편에 언양-울산 고속도로가 개설되었는가 하면,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고 상수도도 설치되었다. 골목길은 포장되고 초가지붕은 스레트지붕으로 바뀌었다. 친구들은 대부분 울산이나 인근 도시의 직장에 들어갔다가 군대를 다녀오고, 결혼해서 처자식을 거느렸다.
고향의 발전에는 우리 연안송씨 일족의 공헌이 있었다. 300여년 지켜오던 선산을 외지에 나가있던 종손이 팔아먹어 동양나일론(현 효성) 공장부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후 공장은 고향마을과 위, 아래 마을의 젊은이는 물론 부녀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돈을 쥐어주었다. 80년대부터 고향마을에 대학생이 부쩍 많아진 것은 이 공장 덕분이다. 지역개발의 모범사례로 손꼽히리라. 고향 발전에 기여한 우리 종손의 공(?)은 참으로 지대하다.
#고향은 슬프다
고향은 오늘도 발전하고 있다. 큰거랑 하천부지는 외지인들이 불하받아 소유한지 오래이다. 여기에는 하필이면 골프연습장이 들어서서 부아를 뒤집고 있다. 문수산 정기가 곧바로 쏟아져 내려오던 초등학교는 군민체육관이 가로막아 서있다. 이를 짓느라 수백년 묵은 당산나무 여러 그루가 속절없이 잘려나갔다. 마을 앞 문전옥답은 새로 난 24번 국도가 크게 잠식해버렸다. 큰거랑 아래쪽 밤나무 숲은 1000여 가구의 아파트가 들어서서 산천을 가리는 벽을 둘러치고 있다.
지금도 고향에서는 '개발'설이 난무하고 있다. 어느 곳에 군청이 들어선다거나, 어디 어디에 고속버스터미널이 들어선다 하는가 하면, 뒷산 어디에는 골프장이 들어선다고도 한다. 여기에 더하여 모 재벌그룹이 커다란 무엇을 지으려고 이 일대 땅을 많이 사들였다고도 한다. 반연에 국립대학이 들어선 후 밑도 끝도 없는 이 소문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고향 사람들도 마을이 '개발'되면 내 땅 값이 얼마나 오르는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럴 것이다. 내 땅이 아파트단지가 되어 값이 크게 오른다면 어느 누가 땀 흘리며 농사짓겠다고 우기겠는가. 이미 많은 땅이 외지인의 손에 넘어갔다고들 한다. 돈과 관의 위력 앞에 시골 농민들이 무슨 힘이 있으랴. 내 고향이 무슨 무슨 단지가 되어 사라지는 날은 그리 멀지않을 것이다.
#합수 제방에서 한잔 술을
지금의 대암교 아래편 아우라지를 합수라 불렀다. 언양에서 내려오는 태화강과 둔기에서 흘러오는 지류가 합해져 붙여진 이름이다. 큰 비가 내리면 양쪽의 불어난 물이 합쳐져 황토빛 물살이 자못 용용하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 나는 이곳 제방에서 아이를 부르는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들었다. 어제 불어난 물에 떠내려간 창수 어머니였다. 외아들 창수는 3학년이었고, 어머니는 소아마비 장애인이었다.
고향이 추억의 샘이라는 생각을 나는 창수 어머니의 울음을 되새기면서 고개를 젓는다. 고향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터전일진대, 내 기억의 자리를 마련해 준 이들의 고단한 삶을 외면한 추억은 사치가 아니겠는가. 들과 산에서 손발이 부르트고, 언양장 가는 자갈길에서 무거운 짐 짊어졌던 부모님들의 끝없던 노동을 우리는 기억하자.
마을의 많은 부모들은 창수 어머니처럼 자식을 먼저 잃은 슬픔을 안고 돌아가셨다. 아들을 중학교에도 보내지 못한 아버지는 뼈도 여물지 않은 자식이 노가다 일 하는 힘겨움을 보면서 막걸리잔으로 시름을 달래곤 했다. 초등학교 갓나온 딸이 언양 삼도물산 공장에서 탄 임금을 결혼밑천으로 간수해 주던 어머니의 눈물은 또 얼마나 많더냐. 아름다운 추억 뒷면의 고향은 이렇듯 슬프다.
고향의 아우 철근이는 오랫동안 이장을 맡으면서 고향을 아름답게 가꾸려고 애써 온 청년이다. 나에게는 고향이 사치한 추억이지만, 그에게는 땅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런 그가 고향 지키기에 지쳤는지 얼마 전 합수 제방 곁에 순대국집을 열었다.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나는 거기서 아우와 함께 막걸리잔을 기울이면서 사라져 갈 고향을 슬퍼할 것이다.
송수환 역사평론가·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