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자생물학사 개요: 분자생물학의 기원에 대하여
강광일(충남대학교 생물공학연구소 전임연구원)
1. 현대생물학과 분자생물학
2. 분자생물학사 개요
3. 분자생물학의 어원
4. 분자생물학의 정의
5. 분자생물학의 기원
6. 분자생물학의 탄생과 에이버리의 실험
7. 맺는 말
8. 참고문헌
1. 현대생물학과 분자생물학
현대의 생물학의 흐름은 유전체학 (Genomics) 및 생물정보학 (Bioinformatics) 및 인간생물학의 중요분야로 자리잡은 분자의학 (Molecular Medicine)이 그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의 경향은 1940년대에 그 사상적 배경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20세기 중후반을 통하여 자리잡은 분자생물학이라는 학문의 연장이다.
유전체학은 멘델의 유전법칙의 발견에서 가설적으로 요청된 요소 (element)가 잊혀졌다 재발견된 후 유전자로 다시 자리를 잡고 이 유전자의 화학적인 특성과 구조가 알려졌다. 그 후 유전자의 개념은 분자생물학의 발전과 맞추어 보다 구체적인 DNA의 한 부분으로 재정립되면서 인간이 가진 모든 유전자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인간이 가진 모든 DNA정보를 알아야겠다는 야심에 찬 계획에 의해 게놈 프로젝트의 등장을 보게되었다. 초기의 분자생물학에 관계했던 인물들의 관심이 유전현상에서의 유전자의 역할이었고 이들이 대거 분자유전학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게놈 프로젝트를 기점으로 유전체학은 발전을 보게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생물정보학은 좁은 의미로 보면 게놈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유전정보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이를 수용하는 학문은 너무 미미하여 이를 제대로 소화해 내기 위하여 갑자기 등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생물정보학은 분자생물학이 등장하던 시기가 정보학 (information theory 및 cybernetics)이 등장하던 시기와 일치하고 정보론의 대가였던 노이만(J. von Neumann), 튜링 (A. Turing), 위너 (N. Wiener) 등이 생물학에 대한 관심정도가 아니라 논문을 쓸 정도이니 이미 정보학은 그 탄생배경에서부터 생물학적 알고리즘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분자생물학이라는 용어를 만든 이도 수학자이자 정보론자였던 위버 (W. Weaver)였다. 이렇게 본다면 생물정보학은 이미 분자생물학이 등장하던 시기에서부터 준비되어져 왔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분자생물학의 등장에 공헌했던 많은 학자들이 정보론자 (informationist)들이 아니었던가? 분자의학은 분자생물학의 초기 패러다임이던 단백질에서 DNA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단백질과 유전자의 정확한 관계가 필수적이었던 시기에 등장하였다. 1951년 폴링 (L. Pauling)이 겸상적혈구빈혈환자의 혈구내 헤모글로빈이라는 단백질의 이상이 유전자형 (type of gene)과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 그 기원이 된다. 이 후 분자생물학이 발전하면서 암을 발생시키는 유전자와 이를 억제하는 유전자의 발견과 특정 질환에 관계하는 유전자의 이상이 발견되면서 질병을 보는 시각은 크게 전환된다. 유전자를 이용한 질병의 치료가 그 가능성을 연 이래로 현재에는 DNA 칩 (DNA chip)을 이용한 질환유전자의 진단이 그 첨단을 달리고 있다. 이렇든 현대의 생물학의 주류가 분자생물학에 기초하여 발전을 보게 된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분자생물학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처럼 생물학의 모든 형태를 바꾸어 놓았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지대하지만 우리 나라의 분자생물학은 그 역사나 그 철학적 메시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며 분자생물학의 실용성만 부각된 느낌이 있다. 분자생물학은 배경에서부터 이론적인 면에만 머물지 않고 응용적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 하나의 학문이며 응용학문이나 산업화된 기술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그 학문의 배경과 그 기원이 어떠했는가를 통하여 분자생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한번 살펴보려고 한다.
2. 분자생물학사 개요
생물학의 역사는 생물학 (biology)이라는 용어에 국한시키면 생물학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19세기초반에서 시작된다고도 볼 수 있다. 새로운 용어가 요청된다는 것은 새로운 연구의 프로그램이 기존의 틀과는 구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전의 자연철학 (natural philosophy) 및 박물학 (natural science)과 구분하고 생물을 다양성 속에서보다는 생물 개체의 조직화 (organization)를 보다 체계적으로 연구하려는 시도였다. 곧 이어 19세기 중후반 진화론 (evolution theory)이라는 생물학의 이론체계가 등장하여 생물학 연구 자체뿐만이 아니라 사회과학전반을 뒤흔들어 놓게된다. 그러나, 동시대에 등장한 유전법칙 (Heredity law)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20세기에 접어들자마자 멘델 유전법칙의 중요성이 다시 학자들의 사회에서 받아들여짐으로서 생물학의 역사는 유전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질문으로 다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랫동안 의학에 묶인 채 더디게 발전해 온 생화학은 19세기 화학의 발달과 19세기말엽 생화학적인 현상이 시험관내 (in vitro)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이 뷔히너 (E. B chner)에 의해 밝혀지면서 생화학은 독자적인 학문으로서의 독립성을 획득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고분자 (특히 단백질)의 성질을 밝히는 작업에 주력하였으나 이들 고분자들이 생체내 (in vivo)에서 어떻게 합성되며, 이 과정에 유전자는 어떻게 관계하고, 유전현상에서 어떻게 보존되는 지에 대한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이러한 유전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유전의 본질 즉 화학적 또는 생화학적 의문과 생화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고분자와 유전현상과의 의문은 고유 학문 자체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고 새로운 학문, 분자생물학의 출현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후 분자생물학은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여 이전의 생물 고유현상에 대한 기술 및 관찰에서 생물 고유현상에 실험적으로 개입해 들어갈 수 있는 바탕을 만들고 이러한 배경 위에서 자연스럽게 유전공학 (Genetic Engineering)이라는 매력적인 응용분야가 등장하여, 당연한 귀결이자 최후의 보루였던 인간의 유전내용에까지 개입하고 있다.
3. 분자생물학의 어원
분자생물학 (molecular biology)이라는 말을 누가 처음으로 사용했는가 하는 문제는 과학자와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였다. 오랫동안 이 말은 에스트버리 (W. T. Astbury)가 1945년 리즈 (Leeds) 대학이 생물분자구조 학과를 창설하고 그가 교수직으로 취임하면서 사용한 말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1968년 스턴트 (G. Stent)가 분자생물학의 기원에 관한 논문을 사이언스지(Science)에 기고하면서 정보론자(informationist)들의 중요성을 언급한 논문 이후, 헤스 (E. L. Hess)가 1970년 다시 사이언스지에 Origins of Molecular Biology라는 논문을 투고하면서 고분자연구자들인 구조주의자 (structuralist)의 중요성을 다시 언급하였는데, 이 논문을 물리학자이자 생물학자인 다이슨 (F. Dyson)이 1945년 이전의 학자들을 언급하는데 소홀했다는 지적을 하게되었다. 다이슨의 논문은 물리학의 미래에 관한 글이었는데, 여기에 1938년 무렵 영국 학계에서 분자생물학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흥미를 느낀 록펠러재단의 자연과학분과 국장인 위버 (Warren Weaver)가 다이슨과의 개인적인 정보를 교류한 후 자신이 1938년에 분자생물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짧은 글을 사이언스 지에 투고한 이후 역사가들에 의해 분자생물학이라는 어원은 록펠러 재단의 자연과학분과 국장으로 있던 위버 (W. Weaver)가 처음 사용한 단어로 정립되었다.
4. 분자생물학의 정의
분자생물학이라는 말을 대개의 경우는 생물학을 분자수준에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생물학이 근대로 들어오면서 분자를 다루지 않았던 시기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생화학에서 다루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분자이며 생리학이나 화학에서 다루는 생체고분자들은 분자가 아니고 무엇인가? 분자생물학은 생명체의 영속성과 생식을 가능하게 했던 생명의 본질적인 과정에 대한 분자적인 분석과 또 이러한 발견을 가능하게 만든 제반 기술적인 요소가 포함된 복합학문이다.
분자생물학이라는 말을 선호했다고 알려진 에스트버리의 경우에는 오늘날로 말하면 고분자생물학(macromolecular biology) 또는 크게 보아 구조생물학 (structural biology)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위버가 이 용어를 1938년에 사용했을 때는 록펠러 재단의 물리학 중점지원사업에서 물리학에 의해 발전된 분석방법, 기술 및 연구방법을 생물학적 문제에 응용하려는 새로운 방향으로 흐름이 바뀌고 있었고, 이 새로운 지원 영역에 분자생물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 같다. 그러나, 정의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분자생물학의 발전에 공헌했던 장본인들이 분자생물학자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없고, 분자생물학의 방향을 주도한 록펠러재단과 이러한 프로젝트를 주로 수행한 칼텍 (Caltech)의 연구소에서 주로 이루어진 작업이기 때문에 분자생물학의 정의를 내리는 일은 쉽지가 않은 일이다. MIT의 과학사가이자 분자생물학의 기원에 관한 한 탁월한 업적을 내고 있는 케이 (L. Kay)는 분자생물학의 영역에 해당하는 작업을 몇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어 제시하였다.
1. 분자생물학은 생명체의 다양성보다는 모든 생명체에 공통적인 생명현상의 단위에 관심을 가진다.
2. 연구하고자 하는 시스템은 가급적 단순해한다 (예를 들면,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3. 분자생물학의 프로그램은 생명현상을 지배하고 있는 물리화학적 일반법칙의 발견을 추구한다.
4. 분자생물학의 프로그램은 학문간의 경계를 무시하고 연구에 필요한 방법을 생물학의 여타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물리학, 수학, 화학 등에서 빌어 거대프로그램을 구성한다.
5. 분자생물학의 주된 관심은 고분자 (macromolecule)이다. 1950년 이전에는 단백질 패러다임 (protein paradigm) 하에서 항체에 대한 연구가 중요한 영역이었다
6. 분자생물학은 생명의 영역을 (물리학자들이 다루는 단위가 아닌) 거의 현미경적 영역에 해당하는 크기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규정으로 생물학의 연구범위와 형상이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7. 이러한 영역규정은 기존의 생물학 실험실에서의 연구기자재를 기술적으로 보다 복잡한 기자재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X선회절분석장치 X-ray diffraction, 방사성동위원소 isotopes, isotope 측정장치, 초고속원심분리기 ultracentrifuge, 전기영동장치 electrophoresis 등)
8. 분자생물학의 프로그램은 연구도구에 의존하게 됨에 따라 기존의 연구구조조직이 붕괴되고 새로운 형태의 연구조직 (예를 들면, team project)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케이의 분자생물프로그램의 카테고리는 분자생물학의 기원에서 그 토대를 쌓아가던 시기인 193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를 염두에 두고 이때 분자생물학의 역사범주에 들어가는 부분을 찾아보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분자생물학자들이 생각하는 DNA로 대표되는 분자생물학과 시각적인 차이를 보이지만, 분자생물학을 정의 내릴 때 사용할 수 있는 탁월한 기준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은 분자유전학이라는 학문이 거의 분자생물학을 대치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케이의 분자생물학의 정의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녀 자신도 기술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전의 생물학과 의학의 공조체계 또는 심하게 말하면 의학에 종속되었던 생물학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생물학의 주제가 질병에 관계된 것이 아니면 생존하기 어려운 의학 종속적 현실을 생각해 볼 때 그 시대에 당당히 생명의 질서를 전면에 내세워 자신의 몫을 찾아 하나의 학문영역으로 구축해간 분자생물학자들의 정신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질병 때문에 생물학이 발달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생물학 고유의 생명의 질서와 논리 관한 역사와 철학은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5. 분자생물학의 기원
분자생물학의 핵심주제였던 DNA의 구조는 1953년 왓슨 (J. Watson)과 크릭 (F. Crick)이라는 알려져 있지 않은 학생에 가까운 두 사람이, 학문적 풍토에서는 생소한 짜집기 방식으로 DNA 구조를 밝혀 이를 네이처지 (Nature)에 발표하면서 알려졌다. 이들이 밝힌 DNA의 이중나선 (Double Helix)이라는 구조는 모든 생물학자들 그룹에서 매우 빠르게 받아 들여졌고, 거의 동시에 허시 (A. Hershey)와 체이스 (M. Chase)에 의해 유전자는 DNA라는 결정적인 실험결과가 나옴으로서 유전자의 본체로서의 DNA와 Double Helix를 출발점으로 유전자의 복제 문제, 생명체의 구성분자인 단백질의 합성 문제 등이 해결되었다. 이들 문제들이 해결되자 남아있던 문제인 유전자의 조절문제가 밝혀져 비로소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DNA, 유전자, 유전자발현, 유전현상 등을 실험실에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분자생물학의 틀이 정립되었다. 이러한 분자생물학의 흐름은 미국역사가들 및 지지그룹인 파아지 그룹 (phage group)에 의해 확산되어 분자생물학의 원년을 1953년 왓슨과 크릭의 DNA 구조발견이라는 생각을 굳혀 놓았다.
그런데, 왜 DNA 구조가 중요했던가? 좀더 객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분자생물학의 기원은 대단히 논란이 많은 주제이며, 그 기원에 있어서도 복합적이다. 위에서 언급한 케이의 분자생물학 기준에 의거하면 한 두 사람의 천재적인 작업에 의해 분자생물학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스턴트의 논문에서는 그 자신이 정보주의자이기는 하지만 보어 (Bohr), 슈뢰딩거 (Schr dinger), 델브뤽 (Delbr ck), 루리아 (Luria), 왓슨 (Watson)으로 이어지는 생명체의 유전자와 유전현상을 생물학적 정보의 형태로 보려는 정보주의자들이 분자생물학의 탄생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고 주장하였고, 헤스의 논문은 이러한 스턴트의 견해에 반하여 초기의 물리화학자들의 공헌과 브래그 (Bragg), 켄드류 (Kendrew), 페루츠 (Perutz), 윌킨스 (Wilkins) 등의 생명체의 고분자물질을 연구했던 구조주의자들의 공헌이 분자생물학의 탄생에 더 중요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전의 생물학에서와는 달리 분자생물학에서는 유전정보 (genetic information), 암호 (code), 해독 (transcription; 전사), 전령 (message)등의 정보적인 요소가 강한 것은 전자의 견해에 대한 증거이겠고, 반면에 단백질이나 DNA의 물리화학적 성질이나 구조적 설명이 많이 나오는 것은 후자의 입장이겠다. 유럽사가들의 경우는 유럽의 학자들이 분자생물학의 초창기에 사유방식이나 실험적인 기반을 만들어주었다는 의미에서 유럽기원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프랑스의 경우는 분자생물학의 후발주자이긴 하지만 오늘날의 분자생물학의 핵심주제가 되는 유전에 있어 유전자의 개념 및 유전자의 발현조절 등과 같은 핵심적인 문제들의 해결이 분자생물학의 발달에서 중요한 지분을 차지한다고 주장하여 분자생물학의 프랑스 기원을 논하는 학자들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다른 외국과는 달리 직접 이 발견에 어떠한 지분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좀 더 자유스런 관점을 가져도 좋으련만 교과서적인 분자생물학사의 흐름을 비판 없이 수용하고 있는 점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분자생물학의 발달에서 가장 소외당한 계층은 전통적 생물학을 구사하던 분류학자들이나 동물학자들 또는 진화학자들이 아니라 생화학자들이었다. 분자생물학의 탄생배경에는 생물학에서 생체 고분자의 분리, 화학적 성질과 그 구조를 연구하였던 생화학자들의 공헌이 있었고, DNA의 구조 이후에는 DNA의 합성이나 복제에 관계하는 효소연구의 발달과 이러한 연구성과를 배경으로 DNA 합성과 복제를 시험관내에서 (in vitro) 가능하도록 인 비트로 시스템을 개발하였던 생화학자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분자생물학은 그 탄생도 늦었을 것이고, 그렇게 빠르게 발달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라 주장하는 입장도 분명히 있다. 분명, 과학사가들이 분자생물학의 탄생과정에서 생화학자들의 공헌을 무시하지는 않으나, 상대적으로 소홀히 평가하는 경향은 있었다. 콘버그 (A. Kornberg)는 한 책의 서론에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분자생물학의 기원을 논하면서 생화학자들의 작업이 분자생물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공이 있다고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 네 가지 기원이란 첫째, 의학적 기원으로서 형질전환 DNA 분자가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발견이고, 둘째, 미생물유전학적 기원으로서 박테리아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아지 (bacteriophage)에서 생체고분자들인 DNA, RNA, 단백질 등의 역할을 규명한 것이고, 셋째, 구조화학적 기원으로서 X-ray 결정화를 통한 단백질과 DNA의 구조해명연구가 있고, 네 번째로서 생화학적 기원으로 핵산이라는 분자를 생화학적으로 효소학적으로 분석 및 합성했던 노력이 있었다. 바로 이 후자의 노력으로 비로소 DNA는 실험실에서 다룰 수 있는 물질로 되었고, 분자생물학을 더욱 빛나게 한 유전공학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부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화학자들의 소외감은 다시 한번 재고되어야한다. 핵산의 화학적 성질과 그 생물학적 중요성의 정립이 분자생물학의 탄생에 중요한 인자였다면, 이를 연구했던 많은 사람들 중 누가 먼저 노벨상을 수여했던가? 노벨상의 역사는 분명 생화학자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왓슨과 크릭은 DNA의 구조발견 (1953년 발표)으로 1962년에 노벨상을 받았고, 왓슨과 크릭의 DNA의 중요성을 고취시키며 생물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던 파아지 그룹은 1969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그러나, 생화학자인 콘버그는 1959년 또 다른 생화학자이자 한때는 스승이었던 오초아 (S. Ochoa)와 함께 핵산의 합성 기전을 밝힌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정확히는 폴리뉴클레오티드를 합성하는 효소 (DNA 폴리머레이즈)에 관한 연구였다. 그러면, 콘버그는 왜, 언제부터 핵산의 합성에 관심을 가졌던가? 1955년 전까지는 핵산 합성에 관한 실험조차도 하지 않았으며, 1956년에 그 첫 실험결과가 발표되었고, 1958년에 핵산 생합성에 관한 본격적인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 이듬해 노벨상위원회는 이 논문의 중요성을 즉각 알아보고 노벨상을 수여하였다. 왜 DNA 합성문제가 중요했던가?
중요했던 것은 생명현상에서 유전자의 문제였고, 그 유전자의 실체가 DNA이며 그 구조는 이중나선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 그 다음 문제였던 유전자의 복제와 이러한 복제의 실마리가 되는 합성과정을 밝히는 일이 중요했던 것은 아니었던가?
6. 분자생물학의 탄생과 에이버리의 실험
분자생물학의 기원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정작 누가 생명현상에서 유전자의 중요성과 유전자의 실체가 DNA이며 유전자의 실체로서의 DNA가 생명연구에 핵심적인 주제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 될 것이다 (DNA의 구조를 밝히는 문제는 이러한 확신 위에서가 아니면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 문제는 좁혀보면 유전자의 본체로서 오랫동안 학자들이 믿고 있던 단백질에서 DNA로 전환을 시켜 놓았는가 하는 문제로 요약될 수 있겠다. 이 전환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생물학의 형태뿐만이 아니라 분자생물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의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에 이 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과 비교하여 분자혁명 (molecular revolution)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렇다면, 분자생물학의 탄생에서 코페르니쿠스는 누구였던가?
1944년 에이버리와 그 동료들은 중요한 논문하나를 발표한다. 논문의 제목은 <Studies on the chemical nature of the substance inducing transformation of pneumococcal types>이라는 다소 모호한 주제로 시작되지만 이 논문은 실험 기자재의 어려움과 세계2차대전이라는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유전자의 본체를 밝히는 일에 주력하여 그 어느 누구도 유전자가 단백질이라는 명제를 의심조차하기 힘든 시기에 유전자가 DNA라는 사실을 발표한 이 논문의 에이버리는 분자생물학의 코페르니쿠스라 부를만하다. 물론, 에이버리의 논문에는 유전자의 본체가 DNA라고 씌어 있지도 않았고, 유전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았지만 논문을 읽은 사람은 누구나 이 논문의 형질전환원리 (transformation principle)로서 동정된 DNA가 유전정보의 운반체로 작용하며, 유전물질의 성질에 대한 훌륭한 실험적 증거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이러한 인식이 DNA 연구에 크나큰 확신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라면 DNA의 염기에 대한 연구, DNA 모델에 대한 연구, DNA에로의 관심의 전환 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나, 오랫동안 분자생물학에서 이 논문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하였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이 논문의 요체가 무엇이었던 가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분자생물학의 텍스트에서도 이 논문의 중요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 폐렴쌍구균은 당으로 구성된 외벽을 가지는 병원성 S형과 외벽을 가지지 않는 비병원성 R형이 있다. 열처리하여 비병원성으로 만든 S형과 본래 비병원성인 R형을 섞어 생쥐에 주사하면 생쥐는 폐렴으로 죽게된다. 이렇게 죽은 생쥐에서 살아있는 병원성 S형이 검출되었고, 보다 정교한 실험에서 S형의 DNA가 R형을 살아있는 S형으로 전환시켰다. 이를 형질전환 (transformation)이라 하고 이것을 일으키는 형질전환원리 (transformation principle)가 DNA임을 여러 증거로 밝혔으나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하였다고 설명한다. 이어서 또 다른 실험결과를 나란히 설명하는데, 허시와 체이스에 의해 (에이버리의 시대에는 없었던) 방사성동위원소 (35S 과 32P)를 사용한 박테리오파아지 실험을 통하여 외벽인 단백질은 S로 내부의 DNA는 P로 각각 표지 하여 감염된 박테리아에서는 P가 검출되었고 박테리아내부로 들어간 것은 유전물질이며 이러한 유전물질은 P로 표지 되는 DNA이며 이 실험이 유전자가 DNA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유전자가 단백질인가 DNA인가라는 양자택일의 실험방식이었고, 결과도 많은 것을 미리 예측하고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방향으로 몰아간 의혹이 짙다. 반면에 에이버리의 논문은 폐렴쌍구균의 형질전환이 유전물질의 증명될 수 있다는 최초의 실험모델의 정립과 이 유전물질의 본체를 알아내기 위해 이를 간접적인 방법이 아닌 직접적인 순수분리라는 방식으로 부딪혀 들어갔고 당시로서는 사용할 수 있는 한의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순수 분리한 이 물질이 DNA임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질문과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또한 DNA를 분리할 당시의 기술상의 문제를 고려하면 이들이 분리한 DNA의 순수도는 거의 완벽한 것이었고, 반면에 박테리오파아지 실험에서 검출된 P의 방사성수치에는 무시할 수 없는 S방사성의 수치가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과학자 그룹에 의한 인정만이 과학적 사실이라면 모르겠으나, 과학적 진실이 은폐되거나 현재의 입장에서 과소평가 되는 것은 과학을 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진실은 어디에 있으며 그 진실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어떠했는가가 과학에서 중요한 것 아닌가? 에이버리와 그 동료들은 분자생물학사에 보다 더 정확히 평가받아야하고 보상되어야한다. 분자생물학사의 탄생에 관여한 중요한 인물들은 대부분 노벨상을 수상하여 그 업적을 인정받았으나 몇몇 이들은 노벨상은 고사하고 역사적 평가에서조차 박한 대접을 받았다. 에이버리의 경우도 후자에 속한다. 그런데, 이런 평가의 이유를 유전자는 DNA라고 쓰지 않았다는 논문 스타일의 모호성과 에이버리 자신의 조용한 성격 및 알려지지 않은 인물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과연 에이버리는 알려지지 않은 조용한 학자였던가? 미국은 1945년 이후부터 질병의 이해, 진단, 예방 및 치료 등에 업적을 가진 학자들에게 기초의학연구 및 임상의학 라스커 상 (Lasker Awards)를 수여한다. 이 상을 수여한 많은 학자들이 곧 이어 노벨상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미국 노벨상이라고도 부른다. 이 상의 최초 수상자가 에이버리라는 사실은 결코 그가 익명의 학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러나, 상의 수상동기는 박테리아의 표면 당에 대한 항체연구로서 였다. 에이버리는 어떻게 기억되어져야하는가? 그 어느 누구도 유전물질이 단백질이라는 명제를 의심조차하기 힘든 시기에 유전물질이 DNA라는 사실을 누가 보아도 뚜렷한 증거로 주장의 논문을 발표한 에이버리는 분자생물학의 아버지라 부를만하고 분자생물학사의 시작을 에이버리의 유전물질증명에서부터 시작하여야만 할 것이다.
7. 맺는 말
이상에서 DNA를 중심으로 분자생물학의 한가지 문제를 살펴보았다. 분자생물학은 현대의 모든 생물학적 중요성을 갖는 주제의 발판이 되었고 그 연구형태나 연구의 조직을 뿌리째 바꾸어 놓은 중요한 생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며 새로운 생물학이었으나, 그 철학적인 내용과 역사적 모체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에이버리의 형질전환 (transformation) 실험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유전자의 문제로 전환시켜 추상적인 생명의 문제를 구체화시켜 놓았고, 이를 발판으로 분자생물학은 생물학의 생명 (life) 개념을 정보 (information)개념으로 대치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전환은 정보의 해석문제에서 정보의 수정문제로 바뀌는 사상적 흐름이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점이 분자생물학이라는 학문의 메시지이다. 한 학문의 발달과정과 그 사상적인 내용이 바르게 수용되어야 학문이 뿌리를 내리고 제대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며 학문의 미래가 보일 것이다. 우리의 학문이나 그 응용에서 뒤쳐지는 이유는 과학이 흘러가는 방향을 잘 보고 있지 않은 데서 온다. 과학사의 흐름은 과학의 뒷이야기가 아니며 현재이고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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