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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부산 구덕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올스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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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은 한국 야구 100년의 해. 한국 YMCA의 초대 총무였던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Phillip Gillet)가 만든 '황성 YMCA 야구단'은 조선땅에 뿌리내린 최초의 '씨앗'이었다. 해방 이후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던 국내 야구는 1982년 프로야구 탄생으로 절정기를 맞는다. 강산이 열번 변하는 사이 야구엔 무슨일이 있었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야구 100년사의 '최초' 또는 '제1호'를 찾는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 YMCA' 최초였지만 최강은 아니었다
지난 2000년 개봉된 영화 'YMCA 야구단'의 포스터에는 '최초·최강의 베쓰볼팀'이라고 소개돼 있다. 하지만 한국야구사(대한야구협회·한국야구위원회 공동발행, 1999년)에 따르면 최강은 아니었던 듯 하다.
황성 YMCA는 1906년 3월15일 외국인 학교인 덕어학교와 최초의 경기에서 3점차로 패했다. 당시에는 스코어보다는 '몇점차로 이기고 졌느냐'가 관심거리였던 탓에 점수는 기록돼 있지 않다. YMCA가 패한 원인은 다양한 연령층과 직업 때문.
뒷날 스포츠 지도자로 큰 몫을 한 허성은 겨우 14세의 소년이었고 김종상은 영어학교에 다니던 21세 청년이었다. 당연히 오합지졸일 수 밖에. 반면 덕어학교는 고른 연령층에 학교에서 합동훈련을 할 수 있어 조직력이 뛰어났다. 두 팀은 엿새 뒤 다시 겨뤘지만 결과는 덕어학교의 2점차 승리였다.
YMCA는 1915년 11월 배재학당 보성학교 휘문의숙 청년회관 4개팀이 참가한 가운데 국내 첫 공식대회인 '경성시내 중등학교 야구대회'를 개최했다. 우승은 훗날 조선체육회 이사로 활동하며 메이저리그 올스타팀 초청경기를 주선했던 이원용의 청년회관이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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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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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자야구의 뿌리는 경남
봄 기운이 꿈틀거리던 1925년 3월6일 경남 진주에서 진귀한 경기가 열렸다. 마산 의신학교 낭자군 14명이 진주 시원여학교 학생들과 최초의 여자경기를 펼친 것이다.
이날 경기가 주선된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기술적인 숙련도가 매우 낮았던 탓에 1회에 벌써 7-1로 무더기 점수가 났다. 9회가 끝났을 때는 의신여학교가 농구점수와 비슷한 48-40이라는 스코어로 승리를 거뒀다.
의신학교 학생들은 이튿날 진주를 관광하고 귀환했는데, 이것이 국내 최초의 여자경기로 기록돼 있다. 현재 국내 여자야구팀은 서울의 '비밀리에'와 부산에서 활동중인 '빈'에 불과하다. 첫 경기가 열린 이후 80년 동안 한국 여자야구의 발전이 그만큼 미미했다는 반증이다.
◇ 1922년, 메이저리그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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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YMCA 야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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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4월7일 LA 다저스 소속이던 박찬호(31)가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한국인 사상 첫 메이저리그 첫승을 기록했다. 그는 2000년 8월25일 몬트리올 엑스포스와의 경기에서 메이저리그 데뷔 첫 홈런을 때리기도 했다.
최희섭은 2002년 9월4일 시카고 리글리 필드에서 열린 밀워키 브루워스와의 홈경기서 9-1로 크게 앞선 7회초 1루 대수비로 출전해 한국인 야수 최초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았고 5일 뒤 첫 안타를 131m 홈런으로 연결했다.
하지만 한국과 메이저리그의 국제교류는 이보다 훨씬 앞선 1922년 12월 시작됐다. 당시 조선체육회 이사이던 이원용은 일본을 순방중이던 미국 올스타팀을 초빙해 한강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용산 철도구장에서 친선경기를 주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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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동래고 야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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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팀에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웨이트 호이크와 허브 페나그가 포함돼 있었다. 특히 페나크는 1912년부터 22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240승162패를 거둔 대투수. 당시 조선일보는 '이 경기를 보기 위해 수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고 보도했다. 당시 서울 인구는 10만여명에 불과했다. 입장료는 지정석이 5원이었다. 당시 백미 1석값이 28원이었으니 엄청나게 비싼 입장료였다.
◇ '야구에 살고 야구에 죽는' 부산
'구도(球都) 부산'이라는 말은 언제 생겼을까. 혹자는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가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꺾고 우승했을 때를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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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2월26일 황성 YMCA와 한성학교의 경기.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야구 사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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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최동원은 1, 3, 5, 7차전을 완투승으로 이끌며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 롯데는 1991년 사상 첫 100만관중 돌파의 신화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부산의 야구열기는 초창기부터 뜨거웠다. 1895년 부산개성학교로 출발한 부산상고는 1923년 4월 부산 영주동에서 서면으로 이전할때 널찍한 운동장을 마련해 야구부 활동을 시작했다.
동래고보 역시 1920년부터 일부 학생들 사이에서 '야구놀이'를 하다가 1926년 정식 야구부를 창단했다.
부산 야구의 기개는 해방후인 1946년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부산상고가 1946년 열린 제1회 청룡기쟁탈전국중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 경남중을 8-6으로 물리치고 첫 주인공이 됐다.
그러나 2회 대회에서는 경남중이 중학야구 최초·최고의 스타인 장태영의 호투를 앞세워 대구중을 2-0으로 물리쳤다. 이때부터 영남야구는 전국 최강을 자랑할 만큼 각종 대회 우승트로피를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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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아시아선수권에서 우승한 대표팀이 최고회의 의장공관을 방문,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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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마침내 일본을 꺾다
1963년 9월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한국과 일본의 결승전. 한국의 선발투수 신용균이 일본의 마지막타자를 범타로 처리해 3-0 승리가 확정되자 덕아웃을 지키던 선수들이 한꺼번에 국라운드로 뛰어나와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다.
한국의 우승은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일본을 꺾었다는 점에서 대단한 쾌거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선수단을 위한 만찬을 열었을 정도. 김응룡은 1-0으로 앞선 8회 회심의 120m 중월 투런홈런을 터뜨리는 등 한국의 3타점을 혼자 책임졌다.
◇ 세계기록 22탈삼진
국내 프로야구 통산 한경기 최다 탈삼진은 1991년 선동열(해태)이 빙그레전에서 13회동안 세운 18개. 메이저리그에선 캐리 우드와 로저 클레멘스가 세운 20개이다.
하지만 한국 아마 야구사에는 2번의 22탈삼진이 기록돼 있다.
1928년 9월12일 열린 제3회 구락부연맹전에서 휘문구락부의 한기준이 배재구락부를 상대로 22탈삼진을 기록했다. 또 1975년 6월28일에는 철도고의 이진우가 22개의 삼진을 기록했다.
◇첫홈런, 첫 억대연봉 주인공은
국내 야구의 첫 홈런 주인공은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1928년 6월8일 배재고보의 이영민이 경성의학전문(현 서울대 의과대)과의 정기전에서 동대문구장 개장 1호 홈런을 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국내 프로야구의 첫 홈런은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3월7일 동대문구장에서 나왔다. 삼성과 MBC 청룡의 개막전에서 이만수가 프로 첫 홈런을 쏘아 올렸다.
그리고 2003년에는 '라이언킹' 이승엽(27·당시 삼성)이 아시아 홈런신기록을 세우고 일본 롯데 마린스로 진출했다.
이밖에 박철순은 1982년 22연승의 대기록을 수립했고, 선동렬은 최초의 억대 연봉을 돌파한 선수로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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