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전면전쟁---④적진에서
결국 북경대학의 아시아 역사포럼은 주체하면서 문제는 부각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후지와라 교수 그리고 한국의 김대환 교수 중국의 왕립공 교수 등이 아시아의 왜곡역사가 주는 현실적 모순이란 주제로 주제강연을 하고 몇몇 교수들이 사례모음을 발표하는 것으로 역사포럼은 막을 내렸다.
서방언론들은 이 학술대화에 두 가지 의미를 부여하였다.
하나는 "잠에서 깨어나는 중국" ( get up the China) 다른 하나는 "아시아의 비밀이 풀린다"
등으로 타이틀을 잡아 전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상대적으로 속앓이를 하기 시작했다. 순수한 학회를 외교문제로 밀고 갈수도 없는 나라 중국에서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문제삼아 남경대학살 등을 전세계에 여과 없이 발표한 것이었다.
물론 이미 세계가 다 알고 역사적으로도 기록된 사건이지만 그 과정에서 숨어있던 몇 가지의 작은 사실들이 새롭게 표면으로 등장했다. 더군다나 후지와라는 일본의 군부는 이미 치밀한 시나리오로 역사적인 왜곡을 병행함으로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당위성을 부여하여 일본 자국의 국민을 현혹시켰고 더 나가서 이 시간까지도 그러한 왜곡된 역사를 중등 및
초등학교 교과서에 기록한다는 것을 폭로하였다.
그 예로 일본에서 학습되는 역사교과서를 증거로 학회에 들고 나왔다.
그 파장은 일파만파였다. 역사 왜곡이 표면적으로 외교 문제가 되기는 했지만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학자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가히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학회가 끝나고 일본에선 후지와라 교수를 제명하라는 각계의 압력이 대학으로 밀려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 교수는 후지와라의 신병에 이상이 생길지 모른다는 첩보를 이 팀장에게서 듣게 되었다.
일본 정부에서는 학자개인의 이견이라고 일축하였지만 그 파장이 워낙 외교적으로 큰 것이어서 쉽사리 표현하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오히려 극우파의 저항이나 항의에 눈을 감고 있는 형편이었다.
일본에서 철수한 김 교수는 선민만을 일본에 남겨둔 것이 영 꺼림직 했지만 지금으로는 후지와라에게 누군가는 도움을 주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선민도 자원하여 후지와라 교수를 돕기로 했다.
서울 일을 정리하고 오 상무와 몇 몇 지인 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 돌아오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더 심각한 문제는 일부 친일 정치인들이 외무부 조사국에 압력을 행사하는 눈치였다.
일단은 교수란 개인자격으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사태의 방향을 알지 못하는 안개 속에서 이 팀장은 우선 김 교수를 소환하였고 선민만 일본에서 상황을 파악하라고 하였다.
선민은 대사관에서 무관한사람이 신변보호와 업무지원을 위하여 팀을 이루고 있었다.
김 교수와 대사관에서 무한정 인력을 지원 받거나 혹은 현지의 교민들의 지원 그리고 주제상사직원들의 도움을 받던 것과는 너무도 판이한 상황이 되었다.
선민의 그런 안쓰러움을 김 교수가 모를 리 없지만 지금으로는 별 뾰족한 방안이 없었다.
다만 경과를 지켜보기만 할뿐이었다.
반격은 의외로 서울에서 시작되었다.
친일 세력의 태두라고 할만한 이 민국이 21C 의 새로운 비전이란 포럼을 준비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잘못된 역사관행과 과거사의 집착으로 인한 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식의 포럼을 주재하였고 그 모든 경비는 암암리에 일본에서 흘러들었음이 확인되었다.
문제는 이런 포럼에 일본과 무역관계가 있는 기업들이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어느 정도 스폰서를 하기도 하고 평일이지만 회사의 중역들이 청중으로 자리를 메우기 급한 상황까지 연출되었다.
각 대학의 사학을 전공한 학생들에게만 초청장을 발송하고 아르바이트도 파격적인 대우로 행사장에 사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을 대거 참여시키는 치밀함까지 연출되었다.
행사를 축하하기 위하여 각계의 인사들이 참여하고 겉으로는 우리의 경제발전이 한민족의 우수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발표하면서도 종국의 결론에선 일본의 경제 지원정책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호하게 못박고 나섰다.
적진은 조용하고 오히려 서울이 전장으로 돌변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일부 역사학자들과 모임의 사람들은 들끓기 시작했다.
누구도 겉잡을 수 없는 분노와 현실이란 이중적 잣대에서 사상적 방황이 시작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혹은 사상연구소 단군 이념 연구소 등에서는 을사오적 이후 최대의 적은 이민국과 김 총재, 김 창수 등을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벗우회란 친일단체를 이적단체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정부에서는 외교적인 문제를 의식하여 강력 대응한다고 하였지만 사실정부도 그 동안 일본의 여러 현안 등을 감안하여 적당한 선에서 눈치보기를 하는 인상을 보였다.
명섭은 오랜만에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은 후라 가급적이면 공식적인 장소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이번의 경우 시청 앞을 가득 메우고 서 있는 사람들을 외면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각계의 인사들과 그 사이로 정치인 몇 명도 눈에 띠였다.
"야 이거 장난아니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통제하나?"
이 변호사는 우선 그것이 걱정이었다. 이미 반일감정이 극에 달하면서 불거진 사건이라 쉽사리 진정될 기미는 없어 보였다.
주한일본 대사와 몇몇 외교관들은 시청 앞에 놓인 인파들이 혹시 폭도로 돌변할 것을 우려하여 경찰당국에 경계강화를 요구하였고 정부측에서도 신경을 곤두세우긴 마찬가지였다.
다행이 사람들은 질서를 유지하였다.
오 상무는 단상으로 안내되고 청중들 앞에서 민족자존심을 위한 우리의 마음가짐과 이미 제 2의 한일합방이 시작되었다는 연설을 시작했다.
청중들은 술렁였다.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던 제 2의 한일합방이란 단어는 또 한번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스스로 국산품에 대한 제2의 국산품애용운동을 통한 경제력 강화와 문화적 자존심을 지키자는 말을 끝으로 명섭은 자리에 앉았다.
명섭의 곁에는 권 사덕 의원이 눈을 감고 명섭의 말을 듣고 있었다.
"참 창피합니다. 오 선생의 활동이나 사고를 보면서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이 거추장스럽고 내가 하는 일이 없어 너무도 창피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니 별말씀 다하십니다 의원님께서는 만주 찾기 운동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요즘 젊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도록 좋은 아버지 운동도 하시면서 정신적인 꿈을 가꾸자고 역설하시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퇴근 무렵까지 많은 인원들은 스스로의 자성과 반성을 촉구했고 행사는 평화적으로 마감되었다 다만 대표 몇 사람이 일본 대사관으로 들어가 교과서 왜곡에 대한 항의 서한을 전달하고 집회를 마쳤다.
자연 사람들 사이에선 저녁뉴스시간에 시청 앞 집회가 회자되기 시작했다 누구도 날짜를 맞추어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벗우회의 역사포럼에서 한국경제 성장은 바로 일본의 36년 통치가 가져다준 민주적 밑거름 위에서 시작된 일이라고 한 것이 화근이 되었을 뿐이었다.
한국국민들의 반일감정은 영원한 수수계기인지도 몰랐다.
따지고 보면 정신대 문제나 양공주 문제나 별반 차이가 없는 굴욕적인 문화적 잔상이었다. 다만 일본의 정신대란 젊은 여자를 공출하여 전장에까지 몰고 갔다는 것과 일본군이 지불한 어음은 아무짝에도 사용할 가치가 없는 휴지에 불과했다는 것 그리고 양공주들은 한국전쟁당시 자발적인 형태로 성립되었다는 것과 그들이 실질적인 생계를 해결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자발과 타의에 의한 감정적인 골이 너무도 컷다. 따지고 보면 스스로 결정한 부분에 대한 책임의식이란 것이 사람에게는 누구나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시청 앞 광장에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다시 차량행렬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서울 발 외신으로 뉴스를 접한 후지와라 교수와 선민은 일이 점점 더 어려운 국면으로 접해 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