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100주년 기념 2019. 3. 3
기독교의 3대 정신
신명기 26:5-9
올해는 1919년 3월1일, 3·1운동(혁명)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일제의 강제적 합방과 식민정책에 항거하여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한 날이 삼일절입니다. 이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역사적인 날입니다. 이 운동(혁명)으로 일제 통계로 7500명 넘는 애국 국민들이 순국하였지만, 이 일은 우리 민족의 자유와 평등의식, 독립에 대한 의지를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독립선언문’에 서명을 한 33인은 모두 종교인이었습니다[개신교 16명(감리교인 9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
당시 정치적인 지명도 높은 인물들(박영효, 윤치호, 심지어 이완용까지 언급됨)은 서명에 거절했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민족 독립에 열의와 용기가 있었던 종교인들이 앞장 설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서명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가장 젊었던 김창준(당시 중앙교회 전도사)의 회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언서에 일단 서명하면 다시 살겠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처음 생각에는 내가 죽으면 어린 처자는 누가 보호하나 하는 염려도 없지 않았다. (…) 가정보다 먼저 조국이다. 내 사랑하는 조국, 하나님의 유업이신 내 조국, 내 조국의 자유를 얻는 데 내 살과 피가 한 점의 보토(補土)가 될진대 이에서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이다.”
33인 가운데 ‘변절’한 사람은 최린, 정춘수, 박희도 정도고, 대부분은 계속 일제에 맞서 싸웠거나 최소한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 여생을 보냈습니다. 의견에 따라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후세 사람들이 쉽사리 폄하할 만한 이들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데 민족 대표 33인은 태화관 안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유혈 사태를 우려하였기 때문입니다.
탑골공원에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모여 그들을 기다렸지만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탑골 공원에서 만세가 시작되고, 그 운동이 전국으로 확대해 나갈 수 있었을까요?
중요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을 기다리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황해도 해주에서 올라온 감리교회 전도사 정재용이었습니다. 그는 2주일 전쯤(2월17일) 33인 대표 중 한 사람이었던 박희도 전도사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우국지사들이 비밀리에 획기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니 시급히 상경하시오.” 그는 즉시 올라와서 정춘수 등 개신교 대표들과 만났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거사 전날인 2월28일, 경성역으로 가서 원산에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갈 곽명리 전도사를 만나 독립선언문 보따리를 전달하는 임무였습니다. 그 때 독립선언문 한 장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 임무를 마치고는 다음 날 탑골공원에서 거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 대표들은 이미 일본 경찰에 잡혀간 뒤였습니다.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 수천 명은 기다리다 지쳐 허망하게 돌아갈 판이었습니다.
그 때 정재용전도사는 마음에 큰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주머니에 독립선언문 한 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 한복판에 이 많은 인파가 집결했는데 이 선언문을 읽어 내릴 사람이 없단 말인가. 내가 읽어버릴까. 민족 대표들이 유혈을 우려하여 태화관으로 독립선언 장소를 바꿨는데 혹여 내가 감당 못할 사태가 정말로 발생하면 어쩌나. 아무것도 아닌 시골 전도사인 내가 독립선언서를 읽으면 군중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잡혀가면 어떻게 될까. 일제의 처지에서는 반역을 꾀하는 셈인데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결국 시골 전도사 정재용은 팔각정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품 안에서 종이를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떨리는 큰 목소리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탑골공원에 모인 인파의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마지막 공약 3장을 읽으며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고 절규했을 때 마침내 모든 사람은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 만세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정재용 전도사가 독립선언문을 한 장을 빼두지 않고 원산 가는 전도사에게 통째로 넘겨줬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운명의 3월1일, 탑골공원에서 끝내 용기를 내지 못하고 독립선언서를 꺼내 읽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탑골공원에 모였던 수천 명의 학생들과 시민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평범했던 시골 교회 전도사 정재용이 우리 민족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위대한 역할을 해낸 것입니다.
언제 새겨졌는지는 모르지만 훗날 정재용 전도사는 북한산 백운대에 자신의 역할을 자랑스럽게 새겨놓았습니다.
“독립선언문은 기미년 2월 10일 경성부 천진정에서 육당 최남선이 작성하였으며 3월1일 탑골공원에서 병술년에 태어난 해주 수양산 사람 정재용이 독립선언 만세를 도창(導唱)했다.”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에서 인용 – 김형민 PD, 시사IN)
<기독교인들이 주축>
삼일절은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앞장 선 운동입니다. 33인 대표 중 16인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기독교인 수가 겨우 2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3%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독립운동에는 선봉에 섰습니다. 기독교가 주도했기에 비폭력운동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일제는 폭력으로 일관하였습니다. 이때 순국하거나 체포되어 복역한 수의 77%가 기독교인입니다.
이 때 수많은 교회가 파괴되었고, 목회자와 신도들이 죽거나 핍박을 받았습니다.
(화성 제암리교회 사건이 대표적-일제 경찰은 1919년 4월 15일 오후 제암리교회에 신자들을 모이게 한 후 문을 폐쇄하고 교회에 불을 지르면서 무차별 총격을 가했으며, 이 때문에 29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4월 5일 발안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제암리교회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이었다. 영국계 캐나다인 선교사 스코필드(Schofield, F.W.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가 현장에 찾아가 생생한 참상을 사진으로 찍고, 목격자의 증언을 수록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내외에 알리지 않았다면 묻혔을 학살 사건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핍박을 해도 교회는 독립운동의 요람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민족의 지도자 조만식 ‧ 이상재 같은 분들이 장로님이었고, 1896년 ‘독립협회’를 조직한 서재필 ‧ 윤치호 … 등 독립 운동가들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독립협회 지부도 거의 기독교인들입니다.
특히 상동교회와 전덕기 목사님은 독립운동의 산파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독립운동가 ‘이상재, 남궁억, 이동녕, 이회영, 신채호, 김구, 이준, 주시경, 안중근’ 등 위대한 인물들이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목사님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상동교회만이 아닙니다. 승동교회는 만민 공동회와 3.1 혁명에서 핵심적 역할을 합니다.
유관순 열사와 그의 가족들도 매봉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한국의 초기 선교는 주로 교육, 의료, 문화 사업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점차적으로 사회적 변혁의 주체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기독교인들은 반봉건 개혁 운동에 앞장서서 당시 관료들의 부정과 가렴주구적 행위에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지방 수령으로 발령받은 자 중에서는 예수교인이 많은 고을에 부임하기를 기피하고 다른 곳에 다시 발령을 내 줄 것을 정부에 건의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나아가 한국교회라는 전국적 조직을 통해 항일운동의 요람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는 강점 후 기독교 박해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조선 멸망 후 한국에는 기독교 외에 전국적 조직은 없었던 까닭에 일제의 박해가 집요했던 것입니다. 소위 ‘안악 사건’과 ‘105인 사건’이 그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앞장 선 이유>
그럼 왜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앞장을 설 수밖에 없었을까요?
기독교에는 그 근저에 독특한 세 가지 정신이 깔려있습니다. 이 정신이 독립운동에 기폭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출애굽 정신입니다.
‘출애굽’이 무슨 뜻입니까? 애굽으로부터 탈출한다는 것입니다. 즉, 애굽의 사슬을 벗어나서 자유를 쟁취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출애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모세가 광야 40년을 마감하고 다음세대를 위해 주신 마지막 설교입니다.
신26:5-9절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6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7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8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9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말하기를, 조상들의 역사를 내 것으로, 조상들의 경험을 내 것으로,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것으로 일치화시키면서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조상’을 “우리로” 바꾸어 말씀하셨습니다. 유대민족들은 이처럼 3인칭(조상들)을 1인칭(자신들)화 하고 있습니다. 즉 고대의 역사를 현재의 역사로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가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이 출애굽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신은 유대인들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이 출애굽 정신도 함께 전해집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억압과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 마디로 기독교 문화는 탈출문화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전하신 복음도 ‘해방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자신의 오신 목적과 사명을 선언한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눅4:16-19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도 “진리를 알지니 진리를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와 같이 출애굽 사상에 뿌리박은 기독교인들의 종교적인 열정은 곧 민족의식으로 연결되고, 이 민족의식은 드디어 자기 생명을 초개와 같이 내던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남은 자 정신입니다.
이 정신은 이사야서의 중심사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되어 이역만리에서 차례대로 죽어가도 최후의 남은 자가 돌아와서 이스라엘을 재건하리라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사10:20-21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그리고 마침내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메시야가 태어나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이라는 이스라엘 신앙의 대명사가 된 단어가 바로 ‘남은 자’(remnant)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의 남은 자 사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특별히 엘리야 때를 예로 들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성도를 7천 명이나 남겨놓았다고 하셨습니다(롬 11:1-7).
아합과 이세벨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이스라엘 온 땅에 바알우상들을 세워놓고 섬기던 때라 여호와 신앙을 지키는 자는 자기 한 사람 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7천 명이나 은밀하게 남겨놓으셨던 것입니다.
독립선언문의 공약 3장의 두 번째 나오는 내용에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에 남은 자(remnant) 사상이 엿보이고 있습니다.
일제의 압제가 점점 더 심해져도 끝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마지막 보루요, 전위대 역할을 감당한 자가 바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셋째, 부활 정신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의 무덤에 모셨습니다.
그러자 유대교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그리고 로마 제국주의는 예수님의 부활을 막고자 예수의 무덤을 돌로 막고 로마 군인으로 하여금 불철주야 감시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막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제국주의는 30여 세밖에 안 된 이 땅의 기독교를 완전 매장하고 인봉을 하고 철야감시 했지만 기독교의 부활신앙을 막지 못했습니다. 죽음조차도 초월한 부활의 정신으로 무장한 성도들을 저지할 수는 없었습니다. 죽음 저편의 부활의 세계를 분명히 보았기에 그렇게 죽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을 초월한 사람들이 아니고는 그렇게 용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정신은 죽음에서의 해방을 뜻합니다.
독립선언서에는 부활정신이 선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더불어 나아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음침한 옛집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삼라만상과 더불어 즐거운 부활을 이루어내게 되도다.”
이렇게 기독교 세 가지 기본정신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세 가지 정신(출애굽 정신, 남은 자 정신, 부활 정신)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든 억압과 압제에 저항하고 있습니까? 이미 기득권 세력이 되 현실에 안주하며 오히려 압제하는 자의 편에 서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최후의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고 있습니까? 한국교회는 사회개혁운동에 앞장서야 합니다.
이생으로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다시 부활할 것을 믿고 죽음조차도 초월한 신앙으로 무장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삼일절을 100주년을 맞아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선배 신앙인들이 보여주었던 신앙을 따라, 오늘 우리도 모든 억압과 압제를 물리치는 자유를 향한 출애굽 정신, 나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남은 자 정신, 그리고 죽음까지도 초월한 부활 정신으로 무장하여 악한 사단과의 영적 전쟁에서도 승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3·1절 100주년을 맞아, 피 흘린 선배 기독교인들을 앞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신앙인으로 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