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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하나로 세계를 주름잡다 | |||
——— 세계해외한인경제무역협회 증경 회장 미국 플렉스핏 조병태회장의 성공신화를 들어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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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8 흑룡강신문 | |||
(흑룡강신문 =서울) 김명환 서울 특파원=“35년전,저는 단돈 500달러를 들고 미국땅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오늘은 세계 모자시장에서 알아주는 자랑스런 코리안이 되었습니다...”
4월 30일 오후,한국 국회 대회의실은 광주광역시에서 개최된 세계한인수출상담회 참가자, 40여개 나라에서 온 500여명 해외동포들로 빈자리가 없었다.이날 주석대서 세계적인 모자메이크업체인 미국 플렉스핏 조병태회장의 소박한 이야기는 장내의 뜨거운 갈채와 감동을 자아내기에 남음이 있었다.
20만 달러 실적 하루밤새 빚더미로 변하고 허드슨강 투신자살 하려다 가족에 발목 잡혀...
1974년4월, 28세 열혈사나이 조병태씨는 이민자격으로 도미했다.태권도 4단이란 밑천과 한국에서 이름난 모자공장의 셈플 20여개를 갖고 양자택일의 심산으로 인생의 도전을 시작하였다.미국에 도착하여 거처를 정하기 바쁘게 병태씨는 어느 태권도 도장을 찾아갔다.하지만 거칠고 험한 동작이 엇갈리는 흑인들이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게다가 이따금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휘두르는 이들도 있어 그야말로 간담을 서늘케 했다.미국을 기회의 땅으로만 알았지 이처럼 살벌한 곳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병태씨는 태권도로 밥을 먹겠나는 타산을 그날로 접고 생존을 위한 두 번째 카드를 내들었다.그것은 바로 모자였다.그는 맨하탄의 한 백화점에 들어가 모자매대를 찾았다.여러 가지 디자인을 골라 세심히 살펴보고 나서 자신감이 생겼다.자기가 갖고 온 모자셈플에 비해 품질이나 디자인이 크게 떨어졌던 것이다.한국 모자는 세계서 알아준다고 자부했던 그였다.
하지만 30여년전 미국 모자시장은 유태인이 주도하고 있었다.모자와 관련된 정보가 전무한 상황에서 병태씨는 부착된 모자라벨에 적힌 정보를 바탕으로 모자셈플을 들고 판매자를 무작정 찾아갔다.문전박대 받기를 밥먹 듯 하였으나 생존을 위해선 모든 걸 개의치 않았다.하루에 보통 4-5명,많을 때는 10여명씩 만났다. 서투른 영어로 손짓몸짓을 보태여 가며 한국모자의 우수성과 자신의 구상을 역설하였다.
이렇게 6개월 동안 구두 여러 켤레가 닳아 떨아지도록 1000여명 바이어를 찾아다니다 기진맥진할 무렵의 어느 날,82세 되는 유태인바이어로보터 첫 오다가 들어왔다.조병태씨는 당장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하지만 기쁨도 잠깐,정작 사입에 착수하자고 보니 당시 섬유제품쿼터제의 높은 장벽을 넘지 못해 첫 희열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어서 천신만고 끝에 20만달러 가죽모자오다를 받아내였다.이번에도 희열은 백배였다.조병태씨가 고안한 디자인에 따라 한국의 가죽제품 회사에서 짜투리가죽을 풀로 도배하여 만든 멋진 모자였다.
컨테이너로 운송한 모자가 미국에 도착한 이튿날 바이어로부터 한번 와달라는 전화가 걸려왔다.그는 연이어 주문이 들어오는가 여겨 설레이는 가슴을 가까스로 달래며 부랴부랴 찾아갔다.그런데 하느님 맙시사!창고에 들어있는 모자는 전부가 곰팡이투성이었다.
가죽을 풀로 도배하여 만든데다 컨테이너선박의 운송기간이 45일 걸렸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바이어는 당장 20만달러 배상을 요구했다.그렇지 않으면 기소하겠다고 을러멨다.청천벽력같은 눈앞의 정경에 병태씨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온몸이 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조병태씨는 원래 한국에서 꽤 잘 나가는 체육교사였다.핸드볼선수 출신으로 중학교핸드볼 꿈나무에서부터 국가대표선수까지 당시 맹활약을 펼치던 선수들의 상당수가 조회장의 손을 거쳤을 정도다.여자핸드볼 국가대표코치까지 역임하며 한국에서 장래가 촉망되었던 자신이 왜 이 길을 택했는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는 뉴욕시를 가로지르는 허드슨강을 찾았다.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오래도록 바라며 서성대었다.이를 악물고 투신자살을 여러 번 시도했으나 눈앞에 집요하게 다가오는 가족의 그림자가 병태씨의 발목을 잡았다.
영주권과 가족사진 담보물로 나만의 발상으로 재기하였다
이대로 물러앉아서는 안 된다.다시 일어나 가족을 살리고 내 꿈을 실현해야 한다.집으로 발길을 돌리는 조병태씨는 비장한 결의를 다졌다.
이튿날 그는 바이어를 찾아 자신의 영주권과 가족사진을 담보물로 내놓았다.당장 돈은 없으나 도망가진 않겠다며,어떻게 하든 이 돈을 꼭 갚겠으니 시간을 달라고 사정하였다.
그리고는 한국에 들어가 부모님을 설득하여 자그마한 부동산을 처분하고 친척들로부터 돈을 꾸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였다.하지만 평범한 모자를 평범하게 판매해서는 성과를 거둘 수없다고 여긴 조병태씨는 처음부터 차별화를 시도했다.
면밀한 조사에 토대하여 모자를 좋아하는 미국인의 특성상 모자정면에 기업의 브랜드를 새겨 넣으면 광고효과가 클 것이라고 판단했다,남다른 발상으로 프린트가 잘 되고 벗겨지지 않는 재질을 선택해 야구모자와 비롯한 액션스포츠모자개발에 전력하였다.한편 기업체를 찾아다니며 모자에 브랜드를 새겨넣을 것을 제안했다.여러 달 고심과 분전끝에 디지인에서부터 품질에 이르기까지 흠잡을 데 없는 모자를 속속 시장에 내놓았다.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IBM,나이키,아디다스 등 다국적회사의 브랜드광고를 단 모자는 대박을 터뜨리었다.주문이 쇄도해 물량을 맞추지 못하는 즐거운 비명이 이어지다보니 생산규모는 확장일로를 달리었다.플랙TM핏모자에 광고를 실어달라는 업체도 줄을 지었다.
도미 3년만에 그는 셋방살이를 접고 자신의 아파트를 샀으며 당시 최고의 신분을 상징하는 캐딜락승용차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천성이 차분하고 냉정한 병태씨는 이어지는 호황에 만족하지 않았다.경쟁이 치열하고 또 모방하기 쉬운 제품이라 특허를 출원하는 동시 해마다 이윤의 20%를 시장조사와 새 제품개발에 투입하였다.전문일군을 세계 각지에 파견하여 미묘한 동향을 파악하고 트렌드를 분석하며 모자시장선도확보에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그 동안 자기 두발로 찾아다닌 나라만 100여개에 달하였다.
플렉스핏 모자는 전 세계 젊은이들 사이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정상의 자리에 우뚝 서게 되었다.현재 미국을 비롯해 한국,동남아 지역에 플랙스핏 모자공장이 도합 4개,직원은 만여명에 달한다.
“모자가 다 비슷한 모자지 특별할 것이 뭔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플렉스핏의 모자에는 특별함이 있다.바로 사이즈에 구애받지 않고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모자의 둘레를 탄성 있는 밴드로 처리하고 특수재질의 원단을 사용하여 자연스럽게 머리에 달라붙는다.착용감의 극대화는 물론,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모자를 크기와 상관없이 구입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플렉스핏의 이와 같은 아이디어는 현재 국제특허를 받아 원천기술을 확보한 상태여서 누구든 플렉스핏과 같은 모자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로열티를 지불해야 한다.연간 3000만개의 모자를 판매하고 있으며,시장점유율은 요지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기자가 중국시장에 대한 견해를 묻자 “다년간 중국은 ‘짝퉁천국’이란 말을 들어 엄두를 내지 못했으며 금년 4월에야 세계한상대회관련업무로 처음 베이징을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중국도 많이 발전하였고 또 세계 최대소비시장으로 부상했으니 도외시 할 수는 없는 나라입니다”하며 현재 중국시장진출을 검토중에 있다고 하였다.
한상(韓商)네트워크 구축에 사명감 안고 세계속 한국인의 역량을 남김없이 발휘
한국으로 보아 이민 100년사 이래 해외동포는 750만명으로 늘었으며 이들은 각자 나라에서 영향력 있는 기업인으로,정계인사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힘이 분산돼 있어 응집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조병태회장은 무척 안타까워하였다.월드 옥타(세계해외한인경제무역협회)증경 회장인 조병태씨는 이 조직을 활성화시키고 강화하는 일에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 무엇보다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사업을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우리에겐 하나같이 뭉친 힘이 필요합니다.글로벌시대의 오늘에 와선 해외동포간의 협력이 무엇보다 절실합니다.하여 저는 다년간 동포기업인들의 네트워크형성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습니다.월드 옥타 회장을 맡고 전 세계조직을 활성화하기 위해 10여명 월드 옥타임원들과 함께 23개 국가를 다니며 한상들을 설득했습니다. 물론 모든 비용은 제가 부담을 했죠.자신의 사업으로 시간을 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상당한 보람을 느꼈습니다.하여 1997년 세계 27개국 500여명 해외기업인들이 미국 뉴욕에 모여 첫 번째 경제공동체 대회를 열었습니다.그리고 1998년 IMF로 인해 어려운 고국경제를 돕기 위해 1000여명 해외 한인들이 서울에 모여 98경제공동체 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두 대회 모두 제가 월드 옥타 회장 재임시 펼친 획기적인 행사었습니다.이것이 오늘의 한상대회로 이어지게 되었으며,월드 옥타는 눈부시게 성장하였습니다.현재 월드 옥타는 세계 50개국에 150개 지회를 갖춘 세계적인 조직으로 성장했습니다.”
세계속의 한국인의 역량을 남김없이 발휘하며 플렉스핏을 동류업종 세계최고의 기업으로 성장시킨 조병태회장.그는 자신의 사업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오늘도 고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혼신은 힘을 쏟아붇고 있다.고국을 선진국반열에 올려놓는데 있어 주역은 바로 세계 각국에 널려 있는 동포들이란 점을 조병태 회장은 누구보다 확신하고 있었다.
“미국 44대 대통령으로 오바마가 취임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입니다.가능성이 열렸다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이제 미국대통령으로 한국인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말입니다.”
조병태회장의 메시지는 한낱 아름다룬 꿈일 수도 있다.하지만 꿈을 갖고 오늘의 성공을 이룩했듯이 세상의 모든 가능성이 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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