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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 | 안동장씨 경당종택(安東張氏 敬堂宗宅) | |
소 재 지 | : |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204 | |
건 축 주 | : | 장흥효(張興孝, 1564~1633) | |
건축시기 | : | 16세기말~17세기 초 | |
이건시기 | : | 1970년대 | |
소 유 자 | : | 장성진(관리자 : 장성진) |
건축 이야기 |
서후는 느낌이 좋은 곳이다. 서후의 들과 산을 보면 편안하고,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나지막한 산들 사이에 펼쳐진 좁직한 들 위로 양광이 한껏 내리쬐기라도 한다면, 그런 느낌은 더욱 강한 것으로 주어지게 마련이다. 서후로 들어서면 경광서당, 간재종가, 학봉종택, 광풍정 등이 나란히 길을 따라 좌우로 자리 잡고 있고, 그 끝에는 지금의 경당고가가 있다. 광풍정은 장흥효(張興孝, 1564~1633)가 당시에 살았던 곳이다. 이런 일련의 건물 배치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이 지역이 여러 사대부가 정착해서 살아 내려온 오랜 터전이라는 점을 뜻한다. 그리고 또 하나 김성일(金誠一, 1538~1593)과 장흥효는 한마을 사람이라는 것 또한 가볍지 않은 의미를 갖는 사실이다. 장흥효는 옆집에 사는 김성일을 찾아 배우게 되고, 장흥효의 학맥은 외손인 이현일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그 결과는 학봉 김성일 문파의 안동 퇴계 학파 역사 독점으로 나타난다. 학봉 김성일이 살았던 집과 경당 장흥효가 살았던 집이 지근거리에 있다는 사실 자체는 어떤 다른 문자기록보다도 더 분명하게 퇴계 학파의 중심 학맥이 김성일 중심으로 흘러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
건축 배경 |
경당고가는 새로 지은 지 3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옛날 그대로 지었다고 한다. 원래 경당고가는 ‘제월대’ 앞, ‘광풍정’ 앞에 있었다. 지금은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다. 현지의 관리자 장성진은 “내가 9살 때 이리로 옮겨 왔어요. 여기 口자 집이 있어서, 그 집으로 들어왔지요. 처음에는 그냥 보수하여 살려고 하였어요. 그러나 보수하려 하다 보니 워낙 상태가 좋지 않아서 새로 지었지요. 지손들이 많이 보탰어요.”라고 한다. 그 집이 낡아져서 25,6년 전에 다시 중수하였다는 말인 것 같았다. 그러나 집을 중수할 때, 사당은 중수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사당은 이리로 이사 온 후에 바로 지었어요. 광흥사 절집을 사 가지고 이리로 옮겼지요. 그러니까 한 50년 된 셈이지요.” 사당은 잘 관리되어 있었고, 특별히 퇴락한 부분도 없어 보였다. 나중에 사당으로 올라갔을 때 장성진이 말하였다. |
건축 구성 |
동쪽으로 문이 열려 있고, 좁직한 바깥마당이 마련되어 있다. 잔디가 심겨져 있다. 사랑채 건물에는 경당고가라는 현판이 보인다. 사당은 사랑채 건물의 동쪽 뒤편이다. 작은 집이고, 두 단의 울타리를 통해 올라가야 사당에 이를 수 있다. 3칸의 사랑채 건물 서쪽으로는 2칸의 행랑 건물이고, 그 사이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열려 있다. 얼마 전에 수리를 하였으므로 아직 단정하고 깨끗한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다. 바깥담은 흙을 다져 쌓고 그 위에 기와를 얹은 것이다. 바깥담 울타리 밖으로는 무성하게 잘 자란 국화가 일직선으로 심겨져 있다. |
현판 |
경당고가(敬堂古家) |
경당은 장흥효(張興孝, 1564~1633)의 호이다. 사랑채 처마 밑에 걸려 있다. 화강석 판에 생긴 둥글둥글한 글씨로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이다. |
문중 이야기 | |
- 장의의 춘파 정착 | |
한 때 안동을 떠나 타지로 흩어져 갔던 안동장씨가 다시 안동에 들어와 살게 되고, 안동장씨 ‘춘파파’를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은 20대 장의(張儀)가 안동 춘파(春坡)에 정착하게 되면서 부터라고 하겠다. 『대동보』에 의하면 장의는 초명은 유의(由義)로써 후릉참봉(厚陵參奉)의 직첩을 받았고, 벼슬에 뜻이 없어서 서울로부터 낙향하여 금계(金溪)의 위쪽 춘파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그 시조인 장정필이 가문의 역사를 시작하였던 곳으로 돌아와 다시 안동에서의 안동장씨의 역사를 열어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20대 장의 때에 안동에 다시 정착한 안동장씨의 역사 속에서는 그 6대 후에 장흥효가 배출됨으로써 이 가문을 영남 유학사 속에 편입시켜 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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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장씨 춘파파 | |
안동장씨는 태사공 장정필(張貞弼)을 시조로 하는 가문이다. 장정필은 ‘3태사’ 중의 하나인 장길(張吉)과 동일 인물이다. 『대동보』의 「태사공 행적」에 의하면 장정필은 후에 벼슬이 진현전(進賢殿) 직제학(直提學), 예문관(藝文?)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고창군(古昌君)으로 봉하여졌으며, 삼중대광보사벽상공신태사(三重大匡保社壁上功臣太師)로 불리어졌다고 하며, 고려 태조는 그를 아부(亞父)라고 칭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장정필은 만년에 중앙의 벼슬을 그만두고 안동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안동에서 타계하였다고 한다. 임종 시의 나이가 91세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의 호는 포음(圃陰)이고,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장정필로부터 시작된 ‘안동장씨’의 역사는 처음부터 화려하게 전개되어 나간다. 『대동보』에 의하면 2대 보천(寶千)이 이부상서(吏部尙書), 3대 금선(錦善)이 상장군(上將軍), 4대 광현(光賢)이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을 역임하는 등, 대를 이어 가면서 중앙의 높은 벼슬을 역임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왕조의 전 기간 동안에 ‘안동장씨’는 중앙의 크고 작은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5대 장사길(張思吉)의 대에 이르러 또 한 번 중흥의 기회를 맞이한다. 15대 장사길은 13대 장수명(張壽命)의 셋째 아들 장려(張儷)의 자식으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웠다. 『대동보』의 「희양공묘갈명(僖襄公墓碣銘)」에는 이 인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공의 이름은 장사길이고, 자는 창만(昌萬)이며 고려 태사 충헌공의 14대손 우정승 화령백(花寧伯)의 장자이다. …… 목은 이색(李穡)이 복제(復齊)라는 호를 붙여 주었다.” 장성진은 집안에 손이 귀하다고 한다. 그 점은 『경당집』에도 나온다. 경당 장흥효 선생도 제대로 친손자를 보지 못하여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몇 대를 양자를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경당 선생 이후 11대이지요. 지손들은 2백여 호 되지요. 안동하고 춘파 근처에 그 중 반 정도가 살고, 서울에 많고 …… 손이 귀하니,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였던 셈이지요. 재령이씨는 같은 대수인데 천 호가 넘었지요.” 장성진은 굳이 재령이씨와 비교하여 말하였다. 그만큼 재령이씨를 가깝게 느끼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었다. 하긴 경당선생으로 대표되는 안동장씨 ‘춘파파’ 종가는 재령이씨와 영광을 같이하는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경당 장흥효 선생의 학맥은 그 외손인 이현일(李玄逸)에게로 전해져 화려하게 개화하는 것이 사실이니까 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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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열의 소설 『선택』 | |
장흥효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그의 큰 딸은 이시명(李時明)에게 출가하여 6남 2녀를 낳았는데, 이현일 등의 자제들을 다 훌륭하게 교육시켜 냈으므로, 조선 역사가 배출한 모범적 여성상으로 칭송되곤 한다. 안동장씨의 자랑인 정부인 장씨는 이문열의 소설 『선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
관련문집 |
- 경당선생별집(敬堂先生別集) |
이 책은 안동권씨 정남문고에서 소장하고 있던 『경당선생별집』이다. 장흥효(張興孝, 1564~1633)의 시문들을 총2책으로 엮어 신축년에 석인본으로 간행하였다. |
관련유물 | |
- 경당집(敬堂集) | |
이것은 안동김씨 경당종택에 소장되었던 『경당집』의 목판본이다. 첫머리에는 권유(權愈, 1633 ~1704)가 1693년에 지은 서문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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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당속집(敬堂續集) | |
이것은 안동장씨 경당종택에 소장되었던 『경당속집』의 목판본이다. 장흥효의 시문이나 서간문, 잡문 등을 모아 엮은 책은 『경당집』이고, 이후 다시 누락된 글들을 모아 엮은 것이 『경당속집』이다. |
관련인물 |
- 장흥효(張興孝, 1564~1633) |
장흥효는 팽수(彭壽)의 아들로써, 자가 행원(行原)이고, 호가 경당(敬堂)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봉(鶴奉)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김성일의 타계 이후에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도 배웠다. 퇴계 학파의 중추를 형성하는 세 사람으로부터 배움으로써, 퇴계 이황의 사상이 전개되어 나가는 역사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는 것이다. 장흥효는 조선 유학사 속에서 김성일의 문도로 분류되고, 퇴계 이황의 사상을 김성일을 통해 받아들여서 그 외손인 이현일에게 전하여 주는 역할을 담당한 사람으로 말하여진다. 장흥효는 1564년에 금계리에서 출생하여 1633년에 70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그는 만년에 학행으로 조정에 추천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의 직첩을 받으며, 나중에 사림에 의하여 경광서원(鏡光書院)에 배향되었다. 후에 사림이 경광서원을 사액서원으로 만들어 주기를 청원하였을 때, 조정에서는 경당 장흥효 선생에게 사헌부지평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오늘날 ‘경당고가’를 지키고 있는 장성진은 시조 장정필로부터 전개되어 나온 안동장씨의 역사 속에서는 37세에 해당하는 사람이고, 춘파에 정착함으로 새롭게 안동장씨 ‘춘파파’의 역사를 시작한 장의의 17대손이고, 퇴계 학파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경당 장흥효의 11대손이다. 그의 아버지는 이름이 장석기(張碩基)이고, 자가 대관(大寬), 호가 청헌(淸軒)이며, 그의 어머니는 전주유(柳)씨 유연진(柳淵進)의 딸이다. |
안동 > 서후북후권 > 성곡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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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산의 줄기로 이루어진 골짜기 마을 | |
천등산의 남쪽 줄기는 주봉산(住鳳山)을 만들어 봉정사의 안산(案山)이 되고 서후에서 저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인 장등(長燈)을 내고 금계리로 이어지며, 천등산의 남서쪽 줄기를 내어 어깨 모양의 상산(商山)을 만든다. 이 상산의 좌우 줄기가 이룬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 성곡(城谷) 또는 재일(在日)이다. 성곡리는 성곡·재일, 덕거리, 독골·옹곡(瓮谷), 능골·능곡(陵谷), 춘파(春坡)의 5개 마을로 되어 있다. 성곡은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마치 성을 이룬 듯하여 성곡이라 하기도 하고, 골짜기이지만 오랫동안 햇빛이 머문다고 재일이라 부르기도 한다. 재일이라는 지명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1634)가 이 마을을 개척할 때 명명했다고 한다. 덕거리는 재일과 독실 사이에 있으며 춘파(春坡)와도 떨어져 있어서 덕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독골은 춘파에서 명리로 연결되는 도로에서 북쪽으로 갈라져 들어온 깊숙한 골짜기 상산 바로 아래의 마을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박환소(朴還素), 박해립(朴海立) 두 종형제(從兄弟)가 피난지로 여기에 왔다가 지형이 독같이 생겨 독실이라 부르고 머물러 살았다고 한다. 능골은 천등산의 안산인 주봉산의 서쪽 산기슭 골짜기다. 마을 뒷산에 안동권씨(安東權氏)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권태사(權太師) 묘가 있다 하여 능골이라 하였다. 이 마을에서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권태사의 묘소는 대단한 명당자리라 한다. 「권태사신도비」 아래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새터·신기(新基)는 독실골에 장태사(張太師) 묘(墓)를 쓴 뒤에 재사(齋舍)를 짓고 새로이 마을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새터에는 장태사의 묘단과 재사가 있다. 춘파는 서후면 소재지로 면사무소, 파출소, 농협, 우체국, 초등학교 등 각종 기관이 있는 성곡동의 중심지이다. 약 400여 년 전에 김인찬(金麟燦)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춘파라 하였다 한다. 경당의 종택은 새터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고, 종택의 남쪽 국도 건너 조금 아래에 경당의 후손인 안동장씨(安東張氏)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다. 이곳에 광풍각과 제월각이 아래위로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있다. |
경당 장흥효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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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엄정했던 유년 | ||||||||||||||||||||||||||||
언행록의 기록에 의하면 장흥효는 어릴 적 성정이 지나치게 단정하였다. 하루는 이웃의 여인이 그 뜻을 시험하려고 산수국을 꺾어 길가에 서서 장흥효가 지나가자 그에게 바쳤지만 돌아보지 않고 지나갔다. 다시 한 번 꽃을 주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갔다. 이처럼 지나치게 엄정한 성격에 대해 부모들이 고칠 것을 권하자 성정을 다스리는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너그러운 성격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 ||||||||||||||||||||||||||||
성실한 배움의 추구 | ||||||||||||||||||||||||||||
장흥효는 언제나 첫 새벽에 일어나 머리를 빗고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여 가묘에 참배했다. 그리고는 주자(朱子)의 영정을 배례하고 난 후 서실에 단정히 앉아 종일토록 독서하고 사색 궁리하였는데, 궁리하여 깨닫지 못하면 꼬박 뜬눈으로 밤을 밝히며 탐구했다. | ||||||||||||||||||||||||||||
은둔 속 광풍제월의 생활 | ||||||||||||||||||||||||||||
집 남쪽에 대(臺)를 짓고 소나무와 잣나무 등 아름다운 나무들을 심고는 ‘제월대(霽月臺)’라고 이름 붙여 강학하는 틈틈이 제자들과 거기에 올라 풍류를 즐겼다. 이렇게 하기를 수십 년 동안 안동 부성 내로 들어간 적이 없었고 이웃 마을 사람들도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 ||||||||||||||||||||||||||||
피란 중에도 식지 않은 배움에의 열정 | ||||||||||||||||||||||||||||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구가 쳐들어오자 사람들이 모두 지켜야 할 바를 잃어버렸지만, 장흥효는 홀로 양친을 모시고 안동 근처 재산(才山)의 산속으로 들어가 은거했는데, 위태롭고 힘든 가운데에서도 오히려 매일 같이 『중용장구』를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그만큼 배움을 향한 의지가 견고했던 것이다. | ||||||||||||||||||||||||||||
제자들과 함께 하는 풍류 | ||||||||||||||||||||||||||||
좋은 날이나 절기를 맞이하면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산을 오르거나 물가로 갔는데, 뛰어난 경치를 만나면 제자들에게 예(禮)를 실습하고 책을 외거나 노래를 부르게 했다. 외우는 것은 대개 주자의 ‘경재잠’ 진무경의 ‘숙흥야매잠’ 및 주자의 시들이었고, 부르는 노래는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 및 자신이 지은 노래였다. | ||||||||||||||||||||||||||||
맹자를 외우며 맞이한 죽음 | ||||||||||||||||||||||||||||
임종하던 날 저녁 『맹자(孟子)』 중의 ‘진심(養心)’장을 외우고 제자들에게 정성스럽게 일러주었다. 또한 “내가 꿈에서 하늘로부터 관을 받았으니, 다시 일어나지 못할 듯하다.”고 말하고는 담담히 세상과 이별했다. |
가 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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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이력과 후대 | |||||||||||||
장흥효는 고려시대 태사를 지낸 장정필(張貞弼)의 후예로, 증조는 장이무(張以武), 조부는 장흡(張翕)이고, 아버지는 장팽수(張彭壽) 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이다. 권사온(權士溫)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딸을 하나 두었고, 첫 번째 부인이 죽고 나서 권몽일(權夢日)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첫 번째 부인에게서 얻은 딸은 이시명(李時明)에게 시집을 가서 6남 2녀를 낳았는데, 그 아들 들 중의 맏이인 이휘일(李徽日)과 둘째인 이현일(李玄逸)이 외조부인 장흥효의 학문을 이은 인물들이다. | |||||||||||||
양친의 상을 당함 | |||||||||||||
1593년(선조 26) 장흥효가 30세 되던 해에 양친의 상을 당하여 안동부 봉림(鳳林)의 묘소 곁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했다. 이 때 지은 시가 ‘사향(思鄕)’이다. | |||||||||||||
장흥효의 딸, 정부인 장씨 | |||||||||||||
장흥효는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딸만을 하나 두었는데, 석계 이시명에게 출가한 정부인 장씨가 그이다. 정부인 장씨는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학자이며 현모양처의 전형적인 삶을 산 ‘여군자(女君子)’였다. 특히 뛰어난 초서 글씨 「백발가」, 격조 있는 그림 작품들, 조선시대 최초로 여성이 지은 요리서인『음식디미방』의 저자로 유명하다. 정부인 장씨는 문화관광부에서 1999년 11월 ‘이 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 |||||||||||||
동생과의 깊은 우애 | |||||||||||||
장흥효는 아우인 장흥제(張興悌)와 우의가 남달랐다. 마치 수족과 같아서 책을 읽을 때에 같은 평상에서 읽었고 잠을 잘 적에는 한 이불에서 잠을 잤다. 마치 죽음조차도 함께 할 것처럼 친하게 지냈는데, 어느 날 역병이 돌아 아우가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장흥효는 자신도 병이 위독함에도 불구하고 동생의 시신을 안고 오열하고서는 말하기를 “아우가 살아있을 적 예를 좋아했으니 상례를 치름에 예에 따라서 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일어나 장례절차를 지켜보면서 한결같이 위의를 지켰다. |
학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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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유인물 | ||||||||||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 | ||||||||||
제자들과의 강학 | ||||||||||
장흥효의 집 남쪽에는 아름다운 천석(泉石)이 있고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제월대(霽月臺)라 이름 짓고 제자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강학하고 자연을 벗 삼아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평생토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이처럼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 ||||||||||
도(道)를 추구한 공자를 본받음 | ||||||||||
장흥효가 하루는 제자들과 『논어』를 읽다가 공자가 “도에 뜻을 두었다.”는 구절에 이르러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부터 이 도를 알아서 그것을 지향하고, 이 도를 얻어서 그것에 의거하고, 이 도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아서 그것에 의존하며 이 도를 써서 그것에서 노닐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금수와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 ||||||||||
스승인 김성일 문집편찬에 참여 | ||||||||||
1631년(광해군 5) 겨울에 최현, 권산립 등 여러 벗과 함께 스승인 학봉 김성일의 유고를 수습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이때 최현에게 자호(自號)인 ‘경당(敬堂)’에 대한 기문을 부탁했다. 최현은 ‘경당기(敬堂記)’ 중에서 당시 일을 회고하면서 “나는 그가 게으르지 않고 말하고 웃음에 있어 방자하지 않음을 보고서, 내면에 쌓은 덕이 견고함을 알았다.”고 했다. | ||||||||||
퇴계 학파의 전승 | ||||||||||
장흥효는 스승인 학봉 김성일의 학통을 이어 외손인 존재(存齋) 이휘일, 갈암(葛庵) 이현일 형제에게 물려주었다. 이 학통은 다시 갈암의 아들인 밀암(密庵) 이재(李栽), 밀암의 외손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으로 이어지고, 대산의 외증손인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학봉의 후손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그는 퇴계 학파의 학통의 전수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
저 작
개인저작 |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 |
문집명 |
『경당선생문집』 『경당선생문집속집』 |
문장의 저술에 치우치지 않음 |
장흥효는 자연을 벗하며 자아의 수양과 강학을 통한 인재 양성을 일생을 바쳤지만 남긴 저작은 많지 않다. 이에 관해 외손자인 갈암 이현일은 장흥효의 문집 발문에서 “외할아버지의 학문은 오로지 내면의 심을 다스림에 치중하였고 문장 저술을 즐겨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문집 2편만이 전해져온다.”고 했다. |
역학 탐구의 성과, 「일원소장도」 |
장흥효는 역학(易學)에 특히 조예가 깊었다. 역학에 관한 연구 중에 호방평(胡方平)의 『역학계몽통석(易學啓蒙通釋)』의 ‘분배절기도(分配節氣圖)’에 오류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고증하고 연구하여 20년 만에 ‘십이권도(十二圈圖)’를 그려내었다. 여기에 12월에 배열하고 24절후를 분배하고 또 원회운세(元會運世)와 세월일진(歲月日辰)의 수를 그 위에 더하여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라 이름 붙였다. 장현광(張顯光)이 그것을 보고서 “실로 앞의 사람들이 밝혀내지 못한 것을 밝혀내었다.”고 극찬할 정도로, 경당 장흥효 학문의 진수가 「일원소장도」에 들어 있다. 「일원소장도」 뒤에는 문인이며 사위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의 「일원소장도발(一元消長圖跋)」이 있고, 외손이며 문인인 존재 이휘일의 평설이 있다. |
남행록(南行錄)을 지음 |
1617년(광해군 9) 한강 정구에게 스승인 학봉 김성일의 행장을 부탁하기 위해 성주(星州)의 신안(新安)에 가서 머물면서「일원소장도」에 대해 질정 받고 「심경(心經)」등을 강론했다. 당시의 전말을 기록한 것이 ‘남행록’이다. |
문집의 편찬과 간행 |
문집 원집은 외손인 존재 이휘일이 2권 1책으로 편집해 놓은 것을 사후 뒤 그의 아우 갈암 이현일의 주선으로 1693년(숙종 19)에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속집은 후손 장상규(張相奎)가 원집에서 빠진 글과 부록으로 장흥효 상례 때의 만사 등을 모아 원집의 체재와 같이 2권 1책으로 편집하고, 유범휴(柳範休)의 교정을 거쳐 1818년(순조 18)에 간행하였는데, 비용은 경광서원(鏡光書院)에서 담당하였다. 그 뒤 「광풍정중건기(光風亭重建記)」, 「광풍정중건상량문(光風亭重建上樑文)」, 「봉림정사기(鳳林精舍記)」를 더 모아 1921년에 성곡재사(城谷齋舍)에서 다시 간행했다 |
명 칭 | : | 광풍정(光風亭) | |
소 재 지 | : |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774 | |
건 축 주 | : | 장흥효(張興孝, 1564∼1633) | |
건축시기 | : | 1630년대 | |
중건시기 | : | 1838년(헌종 4) | |
소 유 자 | : | 안동장씨 경당공파 종중(관리자 : 장성진) | |
문 화 재 | :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2호, 1996년 12월 5일 지정, 1,928㎡ |
건축 배경 |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며 그와 동년배인 인재(?齋) 최현(崔?)이 장흥효(張興孝)의 요청에 의해 쓴 경당기(敬堂記)에는 경당, 광풍정, 제월대의 이름을 왜 사용하게 되었는지 밝히고 있다. “하루는 나에게 이르기를 ‘내가 삼가 정자(程子)의 뜻을 취하여 경(敬)으로써 서재를 이름하고, 인하여 자호로 삼았다. 또 삼가 여산의 기상을 사모하여 광풍(光風)으로써 정자의 이름을 짓고, 제월(霽月)로써 대(臺)의 이름을 지었다.” 고 되어 있다. 장흥효의 집은 춘파(春坡:봄파리)에 있었는데, 자신이 살던 집 남쪽에 정자를 지은 다음 서재와 정자 그리고 집 뒤 절벽 바위 대를 동시에 이름 짓고 이 취지를 알리며 최현에게 경당기를 부탁한 사정을 알 수 있다. 이 시기(1613년)는 최현이 금계에 와서 몇 달 머물면서 권준보(權峻甫), 장흥효와 더불어 학봉유고를 정리할 때이다. 이 내용으로 보면, 정자는 대개 이때 완성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러나 그때 지은 정자는 200여 년이 지나 허물어지고, 경당의 5대손 장세규(張世奎)의 노력으로 1838년에 원래의 자리에 중건되었다. 이병원(李秉遠)의 「광풍정중건기」에 의하면 1836년이나, 문소 김수락의 「광풍당중건기」에 의하면 1888년인데, 이는 8대손의 노력으로 경당을 중건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따라서 「광풍당중건기」가 아니라 「경당중건기」여야 맞을 것 같다. |
건축 특징 |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동북향이며 전체적으로 마루 공간과 온돌방이 대각선 대칭 형태로 구성된 독특한 정자다. 전면의 누 아래 기둥은 막돌기단 위에 큼직한 덤벙주초를 놓고 세워졌다. |
현판 |
광풍정(光風亭) |
백록동규(白鹿洞規) |
차광풍정운(次光風亭韻) |
근보광풍정운(謹步光風亭韻) |
광풍정중건운(光風亭重建韻) |
장세규(張世奎)가 지었다. |
광풍정중건기(光風亭重建記) |
이병운(李秉運, 1766~1841)이 지었다. |
경차광풍정중건운(敬次光風亭重建韻) |
경당기(敬堂記) |
최현(崔?, 1563~1640)이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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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잘 보고 대구중부산악회로 스크랩 하여 갑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