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부정과 그 확실성 : 이데올로기를 위한 텅 빈 주체
로버트 팔러 / 이만우 옮김
코기토로부터 그 부정적 표상으로
“우리는 언술 주체와 언표 주체 사이의 라깡적 차이에 직면하게 된다. 내가 확실히 존재하는 모든 것, 내가 ‘그것이 나야!’라고 지적하고 말할 수 있는 모든 언표 내용은 ‘내’가 아니다. 나는 단지 모든 내용에 대해 텅 빈 거리로 남아있는 공동에 불과하다.” 보편적인 의심의 조건 하에서 모든 가능한 내용은 의심스러운 것으로 나타남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을 회피하는 하나의 수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의심이 발생하는 수준이다. 의심하는 행위자는 그 의심에 굴복될 수 있는 무언가와 동일시되지 않는다. 생각하는 것은 생각되는 것이 생각하는 주체 그 자체일지라도 생각되는 것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즉 ‘언술 주체’는 ‘언표 주체’, 발화의 내용 속에 형상화된 주체와 동일시되지 않았다.
라깡에 따르면 무의식의 주체는 언술행위의 수준에서 모든 담론 속에 발견되었다. 무의식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기제가 레플리컨트 문제를 푸는 열쇠를 제공해야 함을 의미한다. 발화 속에 존재하는 의사소통 방식이 언표내용 뿐만 아니라 언술행위의 수준이라면, 이것은 단지 가능한 몸의 거짓 현존과 마음의 내용이라기보다는 누군가가 그 또는 그녀 속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가능성일 것이다.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언표내용의 수준에서 내가 리플리컨트 지위를 확인할 때만 언술행위의 수준에서 나는 진정한 인간 주체가 된다. ‘나는 레플리컨트이다’는 가장 순수한 의미로 주체의 진술이다.” 언술된 명제의 반대 의미를 생산하는 역설적 기제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부정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너는 나에게 꿈속에서 이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그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다.”라는 발화는 그 반대의 의미로 즉각적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그 사람은 어머니이다.”
이 경우 명제의 내용이 첫 번째 메시지를 형성된다면 첫 번째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에 두 번째 메시지가 놓여진다. 메시지의 전달은 또 다른 메시지이다. 그리고 두 번째 메시지는 첫 번째 메시지와 모순된다. 이러한 분열, 즉 말해진 것과 말함으로써 부각된 것 사이의 이러한 모순은 언술행위의 수준을 시사한다. 부정에서 이러한 말의 파악하기 어려운 차원은 그것의 표상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행해지는 수단은 의사소통 상황의 전치이다. 의사소통의 틀을 형성하는 듯했던 그 상황은 주목할 만한 사실로 ‘도착된’ 소통의 명백한 내용으로 전이된다. 부정은 우리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고려한 것, 즉 우리 발화의 말해지지 않는 전제들을 동어 반복적으로 ‘되풀이’한다. 부정은 그것이 스스로 근거하고 있는 듯한 것을 확인하고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의심을 넘어선 듯한 것을 확인하게 한다. 그리고 부정은 어느 누구도 말하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부인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을 금지하며, 질문을 넘어선 듯한 것에 대답한다.
라깡 이론이 지탱하는 일련의 명제들이 있다.
(1) 긍정적 표상을 넘어서는 부정의 우위성이 있다. 따라서 부정은 직접적이고 긍정적인 표현으로 말해질 수 없는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다.
(2) 부정이 말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진실하다.
(3) 부정에 의해 부정적으로만 표상될 수 있는 것이 있다.
(4) ‘충만하고’ 상상적인 주체성을 넘어 부정에 의해 표상된 진실하고 텅 빈 주체성이 있다.
결론은 바로 이러한 텅 빈 주체성은 상상계 이론이 홀로 설명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적 효과의 원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테제이다.
이데올로기의 전 영역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호명의 피안”, 이차적 주체성, “주체화 이전의 주체”등이 고려되어야 한다. 호명이 전체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주체는 호명에 의해 ‘의미 있는’ 정체성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남겨진 듯하다. 이러한 ‘의미 없는’ 잔여물은 주체가 이데올로기적 의례와 장치들의 ‘의미 없는’ 명령에 종속되는 조건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부정, 텅 빈 주체, 그리고 이데올로기 이론
분열과 그 메시지의 진리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에서도 마찬가지로 ‘나는 이데올로기 속에 존재한다.’는 내가 진정으로 이데올로기의 악순환 또는 그것에 대한 스피노자식 해석을 회피하는 유일한 방도이다. 그 무엇도 필요에 대한 파악을 회피할 수 없음을 인지하는 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이다.”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데올로기는 ‘나는 이데올로기적이다.’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 바깥에, 즉 과학적 지식 속에 존재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이데올로기 속에 존재한다.’ 또는 ‘나는 이데올로기 속에 존재했었다.’라고 말하기 위해 그렇다.”
“나는 이데올로기 속에 있다.”와 같은 언급을 특징짓는 부정은 “나는 이데올로기 속에 있다.”와 같은 것을 말하는 데에 있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
“나의 지식은 추상적이다.”와 같은 명제는 언표내용의 수준과 언술행위 수준 사이의 분열에 의해 특징화된다. 이러한 분열은 ‘증후 발견적 독해’를 가능케 하는 ‘훌륭한 경청’에 의해 들릴 수 있다. 언술행위의 수준에서 그 명제는 “나의 지식은 구체적이다. 구체적이므로 나는 그것이 추상적인지의 여부를 안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화자가 그의 지식이 가진 바로 이러한 추상을 극복했음을 반드시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말의 두 수준들 간의 분열은 지식의 두 수준들 간의 분열, 즉 ‘인식론적 단절’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언표의 겸손함은 언술행위의 수준에서는 그렇게 겸손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표가 암시하는 언술행위의 위치가 상상적이기 때문에 거만한 것이다.
부정과 교활한 부정
주체는 그/그녀에게 자기 고발의 형태로(“나는 레프리컨트이다.”) 불쾌한 내용을 말한다. 그/그녀는 이러한 내용에 동일시하지 않고 그 내용을 의심하는 것으로 의미된 언술행위 수준을 동일시한다. 부정에 의해 화자는 그/그녀 자신을 이 내용을 넘어선 것으로 묘사하고, 이러한 ‘초험적’ 입장을 동일시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부정의 ‘교활한’ 유형구조를 기술하였다. “그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피하고 “나는 그 사람이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그것을 진실일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고 말한다. 교활한 부정자는 단지 첫 부분만을 말하고 두 번째 문장은 청자에게 넘겨서 남겨둔다.
정신분석 이론에서 부정은 하나의 약호이자 의미를 생산하는 방식이다. 부정이 말하는 모든 것은-심지어 그것이 언술행위의 수준에서 말하는 것조차도-그 언표내용에 속하기 마련이다. 부정이라는 사실만이 언술행위의 수준에 남게 된다.
명백한 내재성에 의한 위반
헤겔의 모순과 프로이드의 중층 결정 사이의 대립을 사용할 수 있다. 부정은 중층 결정되는 것이지 모순적인 것이 아니다. 부정은 무언가가 직접적으로 말해져서는 안 되는 조건 하에서 그것을 말하는 방법의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부정은 진리가 직접적으로 드러나거나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진실하게 만드는 방법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부정은 부재를 표상하지만 부재 그 자체의 현존은 아니다.
슬라보예 지젝이 제안한 헤겔적 해결은 ‘명백한 내재성에 의한 위반’이라는 공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공간들의 위반만이 부정적 위반임을 위상학적으로 전제한다. 폐쇄한 공간의 피안만이 텅 빈 피안인 셈이다. 알튀세르와 스피노자에게 위반문제의 해결은 부정의 ‘텅 빈 몸짓’에만 있을 수 없다. 우리가 하나의 공간을 위반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공간에 접근해야 한다. 이러한 위반에 의해 도달하는 공간뿐만 아니라 위반은 긍정적인 본질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안드로이드의 폐쇄된 공간들과 인간 불행
파스칼에게 인간 불행이 폐쇄된 공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위대함은 부정적으로 성취되고 검증될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인간의 자유와 같은 인간의 위대함은 성취될 수 없거나 또는 그것을 부인함으로써 믿을 만하게 검증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자유롭지 않다고 인지하는 것은 지식이 없는 공허한 승인으로서가 아니라 긍정적 지식으로서만 유용한 것이다.
알튀세르가 쓰고 있듯이 만약 “이데올로기의 바깥, 즉 과학적 지식 속에 존재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나는 이데올로기 속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나는 이데올로기 속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이 이 언술행위로 인해 과학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어떤 특정한 조건 하에서만 우리가 이데올로기 속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용인됨을 의미한다. 우리가 과학의 긍정적 공간에 도달했다는 조건 하에서만 우리가 이데올로기 속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부정의 파스칼 적인 몸짓은 두 모순적인 의미를 말의 두 수준에 전송한다는 점에서 중층 결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술행위 그 자체의 수준에서도 중층 결정되어 있다. 이 수준에서 그것이 위반을 가장하기 때문에 인간 불행의 폐쇄된 영역을 위반하는 소망을 드러낸다. 동시에 그 몸짓은 실제로 이러한 영역을 위반하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피안에 실재적 공간이 없다는 확실성을 주장하길 원한다. 그것은 피안에서 공간은 텅 비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알튀세르는 파스칼적인 태도를 상상적이라고 간주했다. 그 태도는 상상적 위반이고, 그 속에서는 위반의 소망조차도 상상적이다. 명백한 내재성에 의한 위반의 변증법적 개념은 이데올로기적 통합의 개념이다.
종교 이데올로기와 그 회의에 대한 그림자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유한한 존재인 우리 인간들은 ‘우리가 믿는 것을 믿도록’ 선고받는다. 우리는 결코 우리가 실제로 믿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이러한 영원한 회의의 입장, 즉 우리의 믿음이 영원히 위험스러운 내기를 남길 수밖에 없다는 이러한 인지는 진정한 기독교 신앙인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불확실성의 문지방을 넘어가는 자들은 그들이 정말로 믿는 것을 어리석게 확신하는 신앙인이 아니라 거만한 죄인에 불과하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진정한 기독교인은 “나는 내가 진정한 기독교인인지 아닌지 회의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일 수 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부정에 의해 작동되지 않는다. 키에르케고르가 가정하듯이 그러한 존재는 부정적 실존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정만이 부정적 증언에 대한 어떠한 거짓말 또는 오류의 가능성 없이 이러한 실존을 검증할 수 있다. 알튀세르에게 그러한 부정의 몸짓은 순수한 부정으로서의 거짓말일 것이다. 어떤 순수한 부정 또는 순수한 회의는 이성이 실존하고 비기독교 신앙의 폐쇄된 공간의 피안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장할 것이다. 그것은 사실상 현존 상태의 텅 빈 몸짓에 불과한 ‘중간 상태’의 모사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부정의 몸짓은 정말로 한 사람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 몸짓이 부인하는 것이 반드시 진실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정의 몸짓이 실재적이기 때문이다. 부인의 중요성은 그 술어적 수준에 놓여 있지 않고 수행적 수준에 놓여 있다. 그 부인이 말하는 것은 반드시 진실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지만 말해져야 한다. 부인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관습들의 일부분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부정은 화자가 기독교의 의례들에 참여한다면 모든 것이 그/그녀가 이미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 작동한다. “나는 기독교인처럼 보인다. 그리고 나는 기독교인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실제로 기독교인인 이유가 아니다.”
서술적 수준에서 부정이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의 진리는 수행적 수준에 놓여 있다. 이 부정을 수행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부정이 말하고자 가장하는 ‘잉여’이다.
(전적으로 실천적인 인정이 동반된) 의례적 부정에 의해 표현된 의례들의 중요성에 대한 이론적 오인은 이 이데올로기의 핵심적 특징이고, 아마도 알튀세르가 그렇게 간주했듯이 모든 종류의 이데올로기를 특징지을 것이다.
호명의 영도 : 주체와 그 텅 빈 닮음꼴
지젝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S로서의 주체는 이데올로기적 부름에 있어서 호명이나 인정의 효과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호명에 의해 나에게 수여된 정체성에 대한 의문의 몸짓을 표상한다”. 알튀세르에게 이러한 “호명에 의해 나에게 수여된 정체성에 대한 의문의 몸짓은 호명의 불가피한 부분이다.” 이러한 몸짓은 알튀세르가 ‘주체효과(effect-subjet)'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것은 상상적 주체성의 상상적 위반이다. 그것은 주체가 되는 바로 그 이데올로기를 향한 주체의 자율성을 가장한다. 이것은 주체가 항상 이미 주체였다는, 즉 상상적 주체성을 획득하기 이전조차도 주체는 주체였다는 상상적 주체의 이데올로기적 감정에 조응한다.
이데올로기적 본질은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이데올로기적 주체들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위해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의 중요성을 형이상학적으로 탈가치화하는 기능에 달려 있다. 심지어 이데올로기는 주체들이 이데올로기를 ‘위반하도록’ 그러한 형상을 제공해야 한다. 이데올로기는 주체들을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정체성을 넘어선” 것으로 호명해야 한다. 따라서 ‘완전한’ 정체성 그 자체는 주체들에게 그들의 ‘주체효과’를 영위하도록 하는, 즉 그들 자신의 이데올로기가 그들에게 수여하는 듯한 ‘텅 빈’ 정체성으로부터의 독립을 가능케 하는 불가피한 피안의 역할을 떠맡을 수 있다.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는 항상 적어도 정체성의 두 가지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지젝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이러한 비판에 라깡적 대답을 제공하기 위하여 자기 관련적 부정성의 순수한 공동으로서의 주체와 이 공동을 메우는 환상적 내용 사이의 구분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정신분석 과정의 목적은 물론 주체가 환상적 정체성의 핵심을 형성하는 ‘비밀스러운 보물’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다. … 그런데 호명-주체화 이전의 주체는 암묵적으로 호명과정에 앞서는 이러한 상상적 환상의 심연이 아니다. 그러나 한때 환상공간으로 남겨진 바로 그 공동은 그 내용이 텅 비어 있다.” 이데올로기는 바깥을 가지지 않는다. 공동은 여전히 정체성이고 ‘제로 호명’, 즉 ‘호명을 넘어선 호명’은 여전히 호명이다.
언술행위의 수준에 숨겨진 것은 우리가 언표 수준을 남김으로써 위반하기를 희망하는 오직 바로 그 주체, 상상적 주체일 뿐이다.
이로부터 정신분석 이데올로기 이론을 위하여 두 가지 결론이 이끌어질 수 있다. 첫째, 그 이론은 대상의 자기 이해를 공유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론은 이데올로기의 상상적인 자기 위반의 형태를 신봉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그리고 둘째, 긍정의 표상에 대한 부정의 우위성은 이데올로기의 자기 이해에 대한 암시 중 하나로 간주되어야 한다. 대상을 엄격하게 이론적 대상, ‘내재성의 계획’, 전적으로 긍정적인 전체로만 간주하는 것이다.
9장 데카르트적 주체 대 데카르트적 극장
슬라보예 지젝 / 김종주 옮김
독일과 미국에서 디터 헨리히를 따르는 추종자들로 이뤄진 학파의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제주의’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 이 학파의 기본 프로젝트는 독일 관념론의 의미에서 주체성이란 개념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주체의 ‘탈중심’이나 ‘해체’라는 오늘날의 다른 버전에 반발하는 것이다.
헤겔과 셸링 사이의 주요한 차이점은 정확히 주체의 ‘탈중심’에 관한 것이다. 헤겔은 주체성의 구성적 몸짓이 선행하는 ‘자연적인’ 실질적 균형의 과격한 반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 그 ‘주체’는 사후적으로 “그 자체의 전제조건을 조정하는” 가정된 실질적 전체의 어떤 종속된 순간이다. 헤겔한테는 이런 반전이 “실체가 주체가 되는” 변증법적 진행의 필수적인 통로가 되지만, 셸링한테는 주체가 존재의 근거를 그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수단인 이런 과격한 반전이 악의 근원이자 규정인 근원적인 오만이 된다. 윤리적인 목표는 정확히 이러한 오만을 포기하는 방법으로 잃어버린 균형을 되찾는 일이다. 이 말은 주체가 자신의 ‘탈중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고 전주체적 절대에 황홀하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인간의 마음속에서 헤게모니를 위해 투쟁하는 분산된 다양한 설화와 이런 팬디모니움(pendemonium, 혼돈)을 조화시키는 행위자의 결여에 관한 데넷의 명제가 흔히 해체에 근접한 것으로 들릴지라도 회피하려는 유혹은 정확히 성급한 결론으로 이끌어 가는데, 그것은 데넷이 경험과학이라는 양의 옷을 입은 해체주의적인 이리의 일종이 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인지과학과 신경학 및 인공지능 연구를 결합시킨 데넷의 과학적인 진화론적 설명을 철학적 담론의 (불)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해체주이적인 ‘메타 초험적’ 규명으로부터 영원히 분리시켜 주는 틈새가 있다.
데넷의 ‘타인현상’이란 기본 전제는 주관적인 경험이 이론가(해석자)의 상징적 허구, 즉 그의 가정이라는 것이지 주체한테 직접 접근할 수 있는 현상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관적인 경험세계는 우리가 소설세계를 그 텍스트의 독해로부터 재구성하는 방법과 정확히 동일한 방법으로 재구성된다. 데넷에게 그것은 ‘현실’에서 또 다른 사람의 경험과 동일한 것이다. 사람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단지 그 조각만을 구할 뿐인 완전한 자기 경험이 다른 사람의 정신 속에 깊숙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일이다. 그 외관마저도 구해낼 수가 없다.
대개 서로 모순되지만 실제적으로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두 가지 표준적인 입장은 1인칭 현상론과 3인칭 행동 조작주의를 말한다. 데넷은 ‘1인칭 조작주의’라는 개념으로 이러한 대립을 위태롭게 만든다. 틈새는 나의 1인칭 경험 속에 개입되는데, 내용과 그의 기록 사이의 틈새이고 표상된 시간과 표상의 시간 사이의 틈새이다. 따라서 우리의 가장 직접적인 시간의 자기 경험에서조차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의 틈새와 비슷한 틈새가 작동중이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그 현상들을 구해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직접 경험한 시간의 표상으로 (잘못)인식한 것이 이마 다른 표상의 시간으로부터 ‘중재된’ 구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인칭 조작주의’는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에서도 내용과 이런 내용을 주체가 구성하는 방법의 ‘조작’ 수준 사이에 틈새가 생기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항상 일련의 고쳐쓰기와 땜질을 하게 된다. 정확한 의미로서 주체는 그 자신의 허구이다. 그 자신의 자기 경험의 내용은 기억 흔적이 이미 개입하게 된 서술화이다. 관련된 주체 그 자신한테 중요해지는 것은 어떤 사건이 ‘쓰이는’ 방식, 즉 기억되는 방법이다. 따라서 기억은 나의 ‘직접적인 경험’ 그 자체를 구성하는데, 다시 말해 ‘직접적인 경험’은 내가 나의 직접적인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헤겔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직접성(immediacy)그 자체는 중재되어 있고, 그것은 흔적들이 중재되는 산물이다.
데넷의 요점은 판단 이전에는 그 어떤 ‘직접적인 경험’도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나의 경험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이미 판단적인 결정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틈새를 메우는 일”의 전반적인 문제점은 허위의 문제가 되는데, 왜냐하면 채워야 되는 틈새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데넷의 핵심은 “우리가 처음엔 데카르트적 극장에서 우리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그 다음엔 획득된 지식을 기초로 삼아 표현되도록 리포트를 고안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며…. 정확히 표현의 출현은 표현된 고차원의 사유내용을 창조하고 고정시키는 것이다. 거기에 추가적인 삽화적 ‘사유’는 있을 필요가 없다. 고차원의 상태는 문자 그대로 화행의 표현에 의존하는, 다시 말해 인과론적으로 의존한다.”
오토라인 부인한테 보낸 버트런드 러셀의 편지, 하이스미스의 『기차 승객들』, 키에슬로프스키의 『블라인드 챈스』의 사례의 요점은 세 가지 경우 각각에서 그의 인생을 전환시켜 주었던 그 우연성이 ‘억압되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그 주인공은 ‘뿌리 깊은 필요성’에 따라 최종적인 결과로 이끌어가는 서술로 구성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라깡이 ‘되었을 것’(will have been)이라는 무의식의 전미래(futur anterieur)라고 불렀던 것이 아닐까?
우리의 상징적인 세계는 서로 경쟁적인 세력들(단어들, 구절들, 통사론적 문채…)의 대 혼란으로서 땜질하기와 기회주의적인 참가의 세계이다. 주체가 의미하려는 막연한 의도를 갖고서 (우리의 평소 표현대로) “올바른 표현을 찾아내려고” 할 때 어떻게 그 영향이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나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이다. 그것은 다수의 경쟁적인 표현들 가운데 최고의 표현이 승리하게 된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어떤 표현은 의미하려고 하는 바로 그 의도를 상당히 바꿔주는 그 자체를 강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라깡이 ‘시니피앙의 능력’이라 불렀던 것이 아닐까?
인간의 마음의 구조는 중복결정의 구조이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은 경쟁 세력들 간의 대혼전이다. 단어들은 스스로 강요해서 말해지길 바라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우리가 말하길 원했던 바를 미리 알지 못한 채로 어떤 것을 말하게 된다. 따라서 언어의 기능은 궁극적으로 기생적이다.
데넷의 요점은 실재계에서 나온 일련의 궁극적인 우연한 반응들/신호들과 주체의 태도와의 조우로부터 나타나는 서술의 주인으로서 무의식을 제거하려는 의도이며, 서술이 어떻게 기회주의적인 땜질로부터 출현하는지 보여주려는 의도이다.
데넷의 요점은 꿈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실존의 거미줄울 형성하는 서술들까지도 기회주의적인 땜질과 우연한 조우에 의해 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서술 형태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여기에 반드시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소리 없이 가정된 형태가 데넷의 무의식이라 말하고 싶을 것이며, 그가 기술하고 있는 현상들 속에서 작동중이지만 그가 알고 있지 못하는 불가시성의 구조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근본적인 정신분석 이론 한 가지를 고려해두는 일이 중요하다. 내용을 앞서가는 형식은 언제나 ‘원초적으로 억압되어 있는’ 어떤 외상적인 내용의 지표가 된다는 것이다. 억압된 어떤 외상적인 내용의 지표로서 자율적인 형식이란 이런 개념은 특히 서술형식에 적용되는데, 제임슨에 따르면 그와 같은 서술은 이데올로기적이어서 이데올로기의 기본적인 형식이 된다. 따라서 억압된 어떤 대립을 증명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서술의 형식이 된다.
“우리가 모두 이야기 꾼”이라는 사실은 ‘원초적인 억압’의 행위 속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데넷은 동물의 물리적 환경과 인간의 환경 사이에서 설득력과 통찰력이 있는 비교를 끌어내고 있다. “[담론의 망을] 털어내 버리면 개별적인 인간은 깃털 없는 새처럼, 등껍질 없는 거북이처럼 불완전하다.” 언어가 없으면 인간은 불구의 동물이다. 데넷에게서 서술형식의 설명되지 않는 전제조건은 이런 통과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 즉 지속적인 진화의 서술 내에서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어떤 것이 그 둘 사이를 중재해야 하는데 이러한 중재인은 보충해 주는 실질적인 상징적 환경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더 이상 자연은 아니지만 그것은 정확히 아직도 로고스가 아니고 로고스에 의해 억압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이런 중재자에 프로이트가 붙인 이름이 죽음의 욕동이다. 칸트는 자신의 인류학적 저술에서 인간이란 동물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기괴한 ‘방종’을 길들이기 위해 훈육의 압력을 필요로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이란 동물이 훈련시킬 스승을 필요로 하는 것은 이러한 ‘방종’ 때문이다. 훈육은 인간의 동물적 본성이 아니라 이런 ‘방종’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또한 주체가 ‘서술적 중력의 중심’으로서 자기로 환원 될 수 없는 까닭은 이러한 중재인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 중재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주체는 ‘존재의 무한한 결여’이고, 그 자체의 밖에 있는 모든 존재를 부정하는 수축의 맹렬한 몸짓은 광기에 관한 헤겔 개념의 핵심도 형성한다. 헤겔이 광기를 실제적인 세계로부터 철수라고 규정하고 그 자체 속으로 영혼의 폐쇄, 그의 수축, 외부 현실과의 연결의 절단으로 규정할 때, 그는 너무도 빨리 이러한 철수를 ‘동물혼’의 수준으로 퇴행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상징적 질서, 말씀, 즉 로고스의 세계는 이러한 심연의 경험으로부터 나타날 수 있을 뿐이다. 주체는 더 이상 불투명하고 불가해한 요소와 대조되는 이성의 빛이 아니다. 로고스의 빛을 위한 공간을 열어두는 제스처인 바로 그의 핵심은 완전한 부정성으로서 ‘이 세계의 밤’이 되고 ‘부분대상들’의 환상적인 유령들이 두루두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완전한 광기의 지점이 된다. 따라서 이런 철수의 제스처가 없이는 주체성도 없다. ‘광기’의 존재론적 필요성은 자연환경 속에 잠겨 있는 순수한 ‘동물혼’에서 상징적인 실질적 환경 속에 머물러 있는 ‘정상적인’ 주체성으로 직접 이동해갈 수 없다는 사실 속에 들어 있다. 그 둘 사이의 ‘소멸하는 중재인’은 현실로부터의 근본적인 철수라는 ‘미친’ 제스처가 되고, 그의 상징적인 (재)구성을 위한 공간을 열어두게 된다.
헤겔이 ‘이 세계의 밤’이라 부르는 것(부분 욕동들의 환상적인 전상징적 영역)은 주체의 가장 근본적인 자기 경험의 부정할 수 없는 요소이다. 서술형식과 ‘죽음의 욕동’ 사이의 긴장은 주체를 구성하는 자기에로의 철수로서 우리가 ‘자연적인’ 환경으로부터 ‘상징적인’ 환경으로의 통과를 설명하려면 가정되어야 하는 놓쳐버린 연결이 된다. 상징적인 공간 그 자체 내에서 ‘자기에로의 철수’의 소멸점은 라깡의 ‘언표의 주체’에 대조되는 ‘언술행위의 주체’의 모습으로 가장하여 작동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코기토를 ‘생각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순간 그는 당연히 그 둘을 융합시키고 있다. 주체를 데넷이 부른 ‘데카르트적 극장’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이런 융합의 다른 버전이고 언술행위의 주체를 언표의 주체로 환원시키는 일이다. [여기서 데카르트적 극장이란 우리가 현상들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자기 인식의 무대를 말하고, 객관적인 뉴런의 기제와 신체적인 기제 등등이 현상적인 경험의 효과를 ‘불가사의하게’만들어내는 장소를 말한다.]
그러나 코기토를 자기 의식의 순수한 지점으로 보는 칸트의 재해석은 어떤 실제적인 자기 인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종의 논리적 허구로서, 그것만으로 이미 실제적인 실질적 자기 인식의 지점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로버트 피핀은 대상에 대한 우리 의식이 ‘암묵적으로 반사적’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자기 의식은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대상으로부터 자신에게로 시선의 부가적인 반사적 회전이 아니라 ‘직접적인’ 의식 그 자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자발성’이란 칸트의 개념은 주체인 내가 원인들에 의해 직접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정확히 의미한다. 반사성을 통한 ‘자발성’은 유혹에 이처럼 수동적으로 넘어가는 것이 이미 유혹에 대한 그러한 수동적인 위치를 이전에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정확히 의미하고 있다.
칸트는 실질적인 자기의 개념에 대해 제 아무리 잘 주의해서 그의 마음의 내용을 내성적으로 탐구한다 하더라도 그는 항상 어떤 특별하고 명확한 개념과 만나게 되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 그의 자기를 만나는 것은 아니다. 즉 자기 의식이 출현하는 정확한 이유는 주체의 직접적인 ‘자기 인식’이나 ‘자기 숙지’가 없기 때문이다. 칸트의 자기 의식은 직접적인 ‘자기 인식’의 불가능성이라는 틈새를 꽉 채우는 공허한 논리적 가정이다. 헨리히는 ‘사람’이란 정신물리적인 개인으로서 현세의 모든 사물들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는 살아있는 존재이고 평범한 생활 세계의 일부를 차지한다. 그러나 ‘주체’는 이 세상의 그 어떤 특별한 특징과도 일치하지 않는 자기 의식의 요점이라서 차라리 유일자의 공허가 되는데, 그것이 생각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면 생각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모든 내용들이 그것과 관련되어야 한다. 따라서 라깡의 ‘무의식의 주체’는 정동과 욕동의 전 사변적인 저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순수한 논리적 구성으로서 경험적인 내용이 결여되어 있고 우리의 자기 경험에 닿을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칸트에게 자기 의식은 데카르트적 극장의 부재에 의해 방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공허한 논리적 기능으로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데카르트적 극장 같은 것, 즉 주체의 직접적인 현상적 자기 숙지가 없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자기 숙지가 없다면, “생각하고 있는 물(物)”처럼 나의 본체적인 차원에서 나인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빗금친 주체로서의 주체가 있다.
‘나’는 순전히 수행적인 실체이고 ‘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내가 ‘나’라고 말할 때 나는 그 어떤 새로운 내용도 만들어내지 않고서 단지 내 자신을 가리킬 뿐이데, 그 구절을 말로 꺼내놓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이런 자기 지시는 X를 낳게 되는데, 그 X는 그말을 꺼내는 살아 있는 ‘실재적인’ 사람이 아니고 정확히 또한 단순히 자기참조적인 지시라는 순수한 공허가 된다. 따라서 라깡의 주체는 ‘시니피앙의 주체’이지만 의미화 연쇄 속의 시니피앙들 가운데 하나로 축소될 수 있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칸트의 자기 의식은 순수하게 논리적인 기능으로서 내 의식의 모든 내용이 이미 최소한으로 중재되거나 반영되고 있다는 것만을 알려주는 기능이다. 내가 욕망할 때 “내가 단지 그와 같을 뿐이지, X를 욕망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이 내 본성의 일부야.”라고 결코 말할 수가 없는 까닭은 내가 항상 X를 욕망하기를 욕망하기 때문인데, 다시 말해 나는 X에 대한 나의 욕망을 반사적으로 받아들이고, 내가 행동하도록 동기를 만들어 주는 모든 이유들을 내가 이유들로서 ‘가정하거나’ 받아들이는 한에서만 그 이유들이 인과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 라깡에 따르면 ‘암묵적인 반사성’은 ‘또한’ 무의식에서 인식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정확히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무의식적인 것이 된다. 데카르트적 코기토가 무의식의 바로 그 주체가 된다. 라깡한테 ‘무의식의 주체’, 즉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귀속된 주체는 풍부한 리비도의 힘과 환상으로 가득 찬 주체가 아니라 정확히 자기 관련된 텅 빈 지점이 된다. 따라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자기 의식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무의식적이라는 것이다. 데넷은 의식을 설명하는 데에 성공할 수 있지만 그가 설명하지 않은 것, 즉 설명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의식, 즉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 무의식은 전 주관적인 뉴런 기구, 즉 내 마음의 실질적인 매개물도 아니고 주체의 조각난 자기 인식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객관적으로 주관적인’ 무의식적 현상들이 귀속되는 X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시니피앙의 순수한 주체와 ‘객관적으로 주관적인’ 무의식 사이의 이러한 연루 덕분에 우리는 코기토와 무의식 둘 모두를 구할 수 있는데, 그 둘이 서로를 배제하기는커녕 실제로는 서로를 추정해주고 있어서 라깡의 표현으로 데카르트적 코기토는 무의식의 주체가 된다.
인간의 고유한 주체성의 특징을 이루는 것은 그 둘을 분리시키는 틈새이다. 그것은 환상이 그 자체의 가장 기본적인 측면에서 주체에게 접근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주체를 ‘공허하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접근불가능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상적 경험의 주체라는 표준적인 개념을 완전히 전복시키는 한 가지 관계를 얻어내게 된다. 그 관계는 공허하고 비현상적인 주체와 그 주체에게 접근할 수 없는 현상과의 사이에 형성된 ‘불가능한’ 관계로서, 라깡의 환상 공식인 에 의해 나타낼 수 있는 바로 그 관계이다.
칸트로서는 본체적인 영역에의 직접적인 접근이 선험적 자유의 핵심을 이루는 바로 그 ‘자발성’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관심을 무생명의 오토마타로 돌려놓거나 오늘날의 용어로 바꿔 말하면 컴퓨터, 즉 ‘생각하는 기계’ 쪽으로 돌려놓을 것이다.
오인을 동일시하는, 즉 인식론적 장애물을 동일시하는 의식의 오류는 현실에 대한 표준적이고 전근대적이며 ‘우주론적인’ 개념을 존재의 긍정적인 질서로서 비밀리에 (재)도입하는 일이다. 그 결과로 의식의 위상에 대해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실’ 그 자체의 존재론적인 불완전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바로 그 중심에 존재론적 틈새, 갈라진 틈이 있는 한에서만 ‘현실’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