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경숙 작가의 첫 소설집
『오이 꼭다리 쓴맛, 호박잎 된장국』은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와 상처의 치유로 밥이 등장한다.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린 소설 6편은 장소와 소재를 달리하여 소통에 주목하며, 죽음에 대한 사유를 한 차원 높이 끌어 올리고 있다. 작가는 밥, 이별, 죽음, 동성애 등의 무거운 주제를 유려한 언어의 조탁으로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표제작 「오이 꼭다리 쓴맛, 호박잎 된장국」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팬데믹에 빠질 때, 주인공은 가까운 지인의 죽음과 알 수 없는 몸의 통증으로 심하게 앓는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대상이 없는 소통 부재로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에 갇힌 주인공은 우리의 자화상이다.
밥이 몸을 위한 인간 생존의 필수 조건이라면, 소통은 인간관계의 기본 조건이다. 작가는 죽음에 대해 깊이 사유하며, 몸과 마음을 위한 소통의 전제조건으로 밥을 제시한다. 빨간 눈표를 따라 심은 모가 자라 밥이 되어 식탁에 오르듯, 소설은 가을 들녘의 풍성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책 속으로
나는 다만 내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 일은 몸의 통증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내 몸의 통증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그날 이후 일어난 일만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몸, 특히 내 위장은 나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 눈치 챌 정도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왔다. 날숨과 들숨을 크게 내쉴 때면 ‘꾸르르’ 소리를 내고, 빼빼한 몸매에 볼록하니 나온 배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가스를 만들어 밖으로 배출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녀가 떠나고 난 그날부터 기습적으로 나타난 통증은 이전의 그 익숙한 통증과는 달랐다. 추웠다. 아직 여름 기운이 남아있는 선선한 초가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추위로 통증은 시작됐다. 추워서 한겨울 패딩을 입고 보일러를 켜고 돌침대의 온도를 올리고 머리카락이 한 올도 빠져나오지 않게 들어간 이불 속에서 웅크린 채 벌벌 떨 만큼 추웠다.
일요일 밤,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에서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렸다. 자정 무렵의 텅 빈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낮에 내과를 찾지 않고 미련하게 버티다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게 된 일을 후회했다. 아파트의 지하주차장을 나와서 다섯 번의 신호등을 지나는 동안 어둠은 도로 양쪽의 가로등 불빛과 대치상태였다. 어둠과 밝음이 서로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대치한 팽팽한 긴장감에 온몸이 더 떨렸다. 텔레비전 뉴스로 볼 때, 흰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우주인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응급실의 그들은 마치 비밀작전이라도 수행하고 있는 듯 엄숙하고 조용하고 날렵하게 움직였다. 남편과 내가 입구에서 손 소독을 하고 두리번거리자 흰 방호복을 입은 사람 중에 한 명이 다가와 체온을 쟀다. 체온을 재는 그의 의심스런 눈빛을 향해 말했다. 열은 없어요, 너무 추워서 왔어요, 마스크 쓴 그의 눈을 보며 의심을 짐작해 말했다.
정상체온이 지구 곳곳의 출입문을 통과하는 필수 조건인 때인 만큼 흰 방호복을 입은 사람이 체온을 재는 동안 자칫하면 음압병실에 갈 수도 있다는 긴박감으로 가슴 두근거림 증상이 심해졌다. 흰 방호복을 입은 남자는 37도를 조금 웃도는 체온을 확인하고서야 응급실 입구에서 다음 칸으로 가는 문으로 안내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타난 좁은 통로 벽에 바짝 붙은 길쭉한 작은 테이블에는 간단한 신상정보를 쓰는 출입명부가 놓여있었다. A4 용지 몇 장이 접혀서 뒤로 젖혀진 서류철의 빈칸에 이름과 주소, 연락처와 체온을 적은 뒤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통로보다 조금 더 큰 공간은 흰 방호복과 흰 의사가운을 입은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산스러웠다.
흰 가운을 입은, 흰 방호복이 아니라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와 응급실을 찾은 이유를 물었다. “옷을 여러 겹 껴입어도 추워요.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답답하고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 울릴 정도로 크게 들리고요.” 말을 하는 그 순간에도 빠트린 내용이 없는지, 내 ...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출판사서평
긴꼬리딱새의 울음과 휘파람새의 울음, 풀벌레의 울음이 공명共鳴하며 사랑을 부르는 소리음이라면, 자주괭이밥의 분홍꽃, 파란 봄까치꽃, 서양민들레의 노란꽃, 하얀 시계꽃, 찻잔에서 노란 속을 드러내며 피어나는 하얀 꽃, 흰나비 떼 같은 찔레꽃, 그리고 모든 색을 품은 검은색 가화假花는 색으로 드러나는 화해의 상징이자 사랑이다. 옥경숙 작가는 소통과 화해를 위해 이 먼 길을 애써 달려온 것이다.
_이원화 소설가, 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