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 강우현부부, 김수일부부, 김종욱부부, 김홍곤부부, 노익용부인, 박도근부부, 박윤호부부, 최성범, 최윤부인, 황보윤부부, 황창윤부부, 황철부부 (21명)
---- 아래 기행문은 청관회 몽골 여행에 동행한 호원숙 여사(황창윤 부인)의 몽골 기행문입니다.
몽골기행문(1)
몽골여행을 다녀왔다. 작년에 백두산에 같이 갔던 남편의 등산 모임에서 기획된 것이라 일찍부터 신청을 해 놓았었다. 그런데 여행 날짜가 다가오니 설레임보다는 걱정이 슬슬 되기 시작했다. 몽골의 산(발음도 어려운 체체궁산)을 8시간의 등산해야 하는 것, 2200미터가 넘는 산이라는 것, 출발 지점이 1000미터가 넘는 곳이라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니까 여행사에서 보내 준 안내 파일을 읽어보기가 싫을 정도였다.
부실한 몸은 여기저기서 신호를 보내는데 무조건 남편 따라나서는 먼 길이 가능할까. 그런 불안감에 떠나기 몇 일 전에는 허리가 삐끗하더니 떠나기 전날에는 난데없이 치통이 온다. 짐을 싸다가 치과치료를 받고 나니 의사는 좀 쉬셔야 되는데요 한다. 허리가 삐끗한 날도 남편은 내가 너무 컴퓨터에 앉아 오랜 시간 보내는 나쁜 습관 탓이라고 당신이야말로 몽골 같은데 가서 저 기계를 잠시라도 좀 잊어야 된다는 눈길을 보낸다. 나도 안다. 가까운 산에 산책을 하고 자주 걸으려고 노력은 하지만 내 생활이 균형 잡혀 있지 않다는 걸 안다. 밤에도 벌떡 일어나 컴에 켜거나 책을 잠자리 곁에 산처럼 쌓아 놓고 눈을 혹사하거나 밖에 나가면 에어컨이 빵빵한 자동차에 앉아야 마음이 안정되는 성미. 핸드폰을 무슨 보조 장기처럼 끼고 사는 생활.
그런데 닷새 동안 문명이 뒤진 몽골에 갔다 온다고 해서 뭘 그렇게 느끼고 내 생활에 무슨 그렇게 큰 변화가 오겠는가?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회의적이면서도 혹시 나에게 어떤 깨달음이나 변화가 올 것을 기대한다. 그래서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먹으며 이왕 가기로 한 여행의 의미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린다. 분명 무슨 깨달음이 올 것이라는 믿음.
어릴 적 내 방 벽에는 세계지도가 걸려 있었는데 그때 우리 형제들은 그 지도를 보며 놀았다. 기껏 색깔 찾기나 나라 찾기였지만 심심함을 덜어주는 놀이이기도 했고 공부이기도 했다. 그때 중국은 노란색으로 중국과 소련 사이에 있는 몽고는 탁한 황토색으로 소련은 회색이었던 것 같다. 어릴 적에도 바다가 없는 몽고를 볼 때마다 얼마나 답답할까 생각할 뿐 아무런 지식도 정보도 없었다. 그 탁한 황토색으로 뭉개진 나라에 대한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기는 극히 최근이다. 그때로부터 50년 가까이 지났지만 한 가지 색으로 뭉개진 땅 고비사막이 있는 땅에 가보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었다. 무지몽매하고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는 민족이라는 이름을 붙인 몽고(蒙古)는 중국 사람들의 명명이고 몽골이라는 민족의 의미는 “세상의 중심”이라고 한다.
어릴 적 그 답답했던 사면이 육지로 가로막히고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땅이라는 이미지는 최근 들어와서 노마드의 땅이라는 신선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우리에게는 유목민의 피가 흐른다는 이미지. 우리 문화는 유목문화와 농경문화가 중첩되어 있다는 학설 그래서 우리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는 생각들이 나에게는 참 매력적이었는데..
언니는 유목민의 피가 흐르잖아 동생들이 가끔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형제 중에서 내가 운전을 좋아하고 모르는 길도 두려움 없이 찾아가는 위치 감각이 있어서 막연히 붙인 말이다. 몽골에 여행을 간다니까 동생들은 언니가 아주 고향에 찾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은 얼마나 큰 환상이었던가. 직접 부딪쳐 보지 않고는 모른다. 먼저 가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나 쓴 것은 모두 그 사람의 관점일 뿐, 나는 체험하면서 놀라고 놀라면서 또 느낀다.
인천공항에서 MIAT 몽골항공을 타고 떠난다. 인천공항은 지금도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데 또 최근에 또 새 청사가 들어서 그쪽 게이트로 떠난다. 신 청사까지는 모노레일을 타고 가게 되어 있는데 그것도 최첨단에다가 따로 면세점이 있다. 이 좋은 나라를 두고 어디로 떠나는 건지? 한탄의 혼자말이 나온다.
그리 크지 않은 몽골비행기는 서울과 울란바타르를 연결한다. 비행사에서 나온 기내잡지를 본다. 비슷한 내용을 한쪽은 영어로 한쪽은 러시아 말로 되어 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러시아의 영향력이 그렇게 큰 줄 몰랐다. 모든 공식 문자가 러시아 문자로 되어 있다. 오래 러시아의 영향력(1921년부터)을 받아온 그리고 사회주의(세계에서 두 번째 사회주의 국가였던 것도 처음 알았다)의 지배를 받아온 결과이리라. 얼마 전 박물관 인형전에 왔던 몽골사람은 분명 몽골 고유의 문자로 방명록에 이름을 적어 놓았는데...
나는 영어로 된 몽골사람 시인(1906년에 태어나 1937년에 죽은 몽골 현대시의 창시자라고한다)의 시를 읽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의 자연을 찬양한 글이다.
3시간 남짓 걸려 울란바타르에 다다르는데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푸른 초원이 아니라 누런 사막이다. 아주 간간이 보이는 푸른 빛도 물기가 없이 건조하게 말라붙은 빛깔이다. 비행기에서 짐을 내려 트럭에 싣는 인부의 모습. 우리나라 고속버스 휴게소만한 공항이지만 건조하고 따가운 햇빛이 내려쬔다.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간 유럽이나 미국보다 더 아득히 멀리 온 느낌이 든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현지 가이드를 만나고 버스로 간 곳은 전승기념탑인데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다. 러시아 풍으로 만들어진 자이승 2차대전 전승기념탑이다. 여행 시작부터 그곳을 방문하는 것은 좀 뭣하긴 하지만 따가운 햇볕을 쬐며 시멘트 층계를 오른다. 무속 신앙의 잔재가 돌무더기에 천을 휘감은 것은 바람에 흔들린다. 무슨 혼을 부르는 것일까. 계단 중간에는 무슨 뜻인지 눈을 가린 독수리가 묶여 있다. 매서운 발톱을 보여주기 위함인가.
그러나 그 전승기념탑 가까이 이태준 열사의 기념공원이 있다. 이태준이 누구일까. 연세의대 1회 졸업생인 의사 이태준은 1883년 경남 함안 출생이고 안창호선생의 청년학우회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하였고 몽골 마지막 황제의 주치의였는데 38세의 나이에 일본군에 의해 피살당한다. 몽골에 근대식병원을 지었으며 훈장을 받았다. 그런 비문을 읽으며 마치 이곳에 오기 위해 몽골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몽골식 게르에 꾸며진 기념관에는 연세대학시절 찍은 사진과 성적표 사본이 마음을 저리게 한다. 결혼은 했지만 후손을 없었다는 이태준의 사진을 보니 윤동주 시인이 떠오른다. 공원에 핀 선명한 꽃 한 송이를 카메라에 담는다.
몽골기행(2)
이태준 기념비 앞에서 일행 모두는 묵념을 올린다.
광막한 땅 몽골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하다가 젊은 나이에 죽은 열사에 대한 예의다.
민속공연을 보러 공연극장으로 향한다. 몽골에 온 여행객들은 으레 들르는 곳인데 극장 앞에는 연희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고 그리 크지 않은 계단식 스텐드의 극장에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인다. 극장의 실내는 중국풍이다. 간단한 영어 멘트로 진행하는데 우리 나라 시조와 같은 가락으로 읊는 느리고 구슬픈 노래, 판소리와 같은 느낌의 노래, 러시아 풍의 경쾌하면서도 절도 있는 춤, 탈춤(우리나라 봉산탈춤 비슷하다),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닮은 고악기, 가야금 비슷한 악기, 악기도 다양하고 노래와 춤의 형식도 여러 가지인데 프로그램이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짜여 있다. 무용과 전통의상도 무용수들의 표정도 무척 사랑의 기쁨과 삶의 환희를 드러낸다. 그리고 유목민들이 멀리 있는 가축들을 부르는 소리도 정말 놀라웠다. 마치 라디오 주파수를 잘못 돌렸을 때 들리는 음처럼 사람의 음성으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고음과 발음을 구사했는데 우리 식으로 한다면 기능보유자 같았다. 또 2살 때부터 무용수로 키워진다는 소녀들의 허리가 꺾어지는 기예는 안쓰럽기도 했지만 서커스나 기계체조선수 훈련과 다를 바 없었다.
모두들 몽골의 문화를 전하는데 열심이고 진지하고 팀웍도 좋아보였다. 네팔 여행에서 보았던 민속공연을 연상시켰지만 분위기가 또 달랐다.
공연을 보고 몽골에서의 첫 저녁식사를 한다. 중국음식인데 특이한 것은 양갈비를 구워 놓은 것. 마늘이나 소스를 발라먹으면 아주 연하고 맛이 좋았는데 육식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별미였지만 양고기라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토마토를 그냥 썰어 넣은 계란스프는 시원했다. 야채가 풍성하지 않아서인지 어쩐지 답답한 느낌의 음식이었다.
울란바타르 시내의 호텔(꽤 괜찮은)에서 몽골에서의 첫 여장을 푼다. 마침 몽골 유도선수가 금메달을 따게 되어 시내는 술렁인다. 폭죽이 터지고 지나가는 차들이 경적을 울린다. 너무나 우리나라 사람 얼굴 같은 몽골 선수를 보니 친밀감이 생긴다.
다음 날 아침 호텔에서 아침(소세지 종류와 감자를 다져서 튀긴 것은 맛은 좋았다)을 먹고 체체궁산으로 향한다. 과연 산행을 잘 할 수 있을까.
밖을 나서자마자 아침부터 뜨거운 햇빛이 사막과도 같은 땅에 내리쬔다. 도대체 어디에 산이 있는 걸까. 40분 넘게 광야를 달리고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사람들의 일상을 만난다. 양가죽을 벗겨 양손에 들고 가는 사람, 몽골 전통 옷을 일상복처럼 입은 사람을 만난다. 그들에게 친밀감을 갖기에는 시간적으로 너무 오래된 사람들 같다. 우리가 너무 총알처럼 앞서 갔거나.
너무 멀어 높아 보이지도 않는 산(2265미터)이 누워 있듯이 있는데 출발지점에서 점심도시락과 오이와 바나나 사과 같은 것을 나누어 준다. 가이드가 몽골인 와이프와 밤을 새워 20여인분을 준비했다고 한다. 한국어를 배우러 온 몽골여자를 만나 결혼해 아이 낳고 울란바타르에서 사는 문예창작을 전공했다는 젊은 남자 가이드는 성의를 다한다.
나의 작은 배낭도 터질 듯 무겁다. 물은 적어도 세 통은 있어야 된다고 하니..
낮은 구릉 같아 보이는 산을 오른다. 그러나 출발 지점부터 1000미터가 넘기 때문일까.
나는 숨이 차오른다. 침엽수림 사이에 핀 야생화들을 보고 반가워 사진을 찍으려니 뒤쳐질 것 같아 그냥 지나친다. 용담, 하얀 들국화, 백두산과 바이칼에서 보았던 꽃들이 너무도 선명하게 깔려 있다. 그 꽃들과 건조한 태양빛이 아니라면 우리나라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산의 모습이다. 숲이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있다. 사람들은 뒷산에 올라가듯이 쉽게 올라가는데 나는 초입에서부터 배낭도 벗어주고 맨몸으로 스틱만 집고 올라간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8시간을 걸을 수 있을까. 등산에서 뒤쳐지는 사람이 다 그렇듯 기껏 쉬는 장소에서 주저 앉으면 먼저 와서 쉬던 사람들은 벌떡 일어나 행진을 계속한다. 그래서 더욱 뒤쳐짐이 가속화된다.
라마교의 탑 같은 구조물을 돌며 무사안녕을 기원한다. 꽃들의 이름을 부르고 노래하기에는 내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남들은 백두대간이다 지리산이다 훨훨 다니던 등산회 사람들을 따라 나선 내가 무모했던 거다. 남편도 자꾸 시야에서 사라진다. 현지인 전문등산 가이드는 노인(손자가 다섯명이나 된다고)인데도 몸이 날렵하고 가벼워 휘휘 날듯이 앞서가고.
정상이 보이는 언덕부터는 초원이 펼쳐지고 늪이 있다. 늪에 질척이는 고인 물이라도 반갑다. 남편은 고도가 높은 산 위에 평원이 펼쳐지고 늪이 형성된 것이 생태계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호기심있게 들여다 본다. 계곡도 시냇물도 없는 산에는 건조한 햇빛만 내리쬐는데...
무얼 하러 여기까지 왔는지. 정상에는 바위들이 풍상에 시루떡처럼 쌓여 있는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 모두들 8월 15일이라고 기념사진을 찍고 대한 독립만세를 외친다. 광복절을 몽골의 체체궁산에서 보내게 되다니.. 바위 사이마다 피어 있는 하얀 들국화는 어찌나 순수하고 땅에서는 향기가 난다. 허브 같기도 하고 쑥내음 같기도 한 향기가 흙에서 올라온다. 향기의 치유력을 느낀다. 숨이 차오르고 힘이 들지만 묘한 정기를 느낀다.
못 움직일 것 같다가도 생오이 한 입 배어 물으면 생기가 돌고.
혼자서 중얼거린다. 나한테서 유목민의 피가 흐른다고? 웃기지 마라 너에게는 철저히 도시인의 나약한 피가 흐를 뿐이다.
정상에서 도시락을 풀어 모두들 소풍 온 듯이 점심을 먹는다. 돼지고기 두루치기에다가 오징어채무침 마늘쫑무침 같은 우리네 음식이다. 나는 온 몸이 기진하니까 음식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차라리 소주 한잔이 낫다. 일행은 앞으로 남은 길이 멀다며 훌떡 일어나고... 이제부터는 너들강 돌밭이 전개된다. 끊임없이 펼쳐지는 돌밭들.. 게다가 딛는 돌 중에는 움직이는 돌이 복병처럼 숨어 있다. 신경이 곤두서고 나중에는 돌이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자연이 공포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부실한 발목과 무릎, 앞서가는 사람들 가끔 남편과 친구가 걱정스레 기다려 주지만.. 드디어 울음이 터진다. 인생길도 이 돌밭처럼 지루하고 재미없고 힘들게만 이어진다면. 문득 그럴지도 몰라. 스스로에게 묻는다. 네 인생에 무얼 그리 힘들게 살아보았니?
몽골기행(3)
가이드는 내리막길이 힘들다고 했다. 그리고 길이 없어 등산 가이드를 꼭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 타국의 산 속, 길 없는 길을 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돌밭에 길이 있을 수 없다. 눈물이라도 찔끔찔끔 흘리니까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어떻게 되겠지 뭐 하는 배짱이 생긴다. 앞서가는 일행들이(특히 여자들)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돌밭 사이에 난 꽃들과 마가목의 붉은 열매, 산매화의 하얀 순결함이 놀라운 기적 같다. 내려간다기보다 옆으로 옆으로 가는 느낌으로 간다. 세 시간쯤 왔을까. 이제부터는 고사목들이 가로질러 쓰러져 있는데 마치 장애물경기를 하듯 그 나무 위를 넘어 가는데 쉽지 않다.
침엽수 사이로 가로질러 쓰러진 나무들은 언제 죽어 쓰러진 건지 건조해 바싹 말라 있다. 그래서 툭툭 끊어지기도 해서 위험하다. 정말로 지겨워졌을 때도 2시간은 더 가야 한다고 한다. 다행히도 이제는 등산로가 보인다. 길 없는 길을 따라왔던 것에 비하면 훨씬 낫다. 드디어 침엽수림이 지나고 자작나무 숲이 나타난다. 그 흰빛은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빛남이 있다. 러시아에서 보았던 그 자작나무 숲의 놀라움을 2년 만에 다시 보게 된다. 자작나무에서 자란다는 몽골 차가버섯은 신효한 약이라고 한다. 놀라운 치유력이 있다는데.
내려가면 천문대에 다다른다고 한다. 나는 목적지에 다다랐다는 것이 너무 감동스럽고 감사했다. 오늘은 광복절이고 성모승천대축일이 아닌가. 죽은 나무 가지에 찔려 다리가 긁히고 멍든 것 말고는 무사히 왔다. 천문대와 그 직원들의 집이 사랑스럽다. 러시아풍의 빛깔을 하고 있다. 내려와서 용담꽃을 찍을 수 있었다. 작은 술잔과 같은 용담꽃 오르막길에서도 지천이었지만 사진을 찍을 수 없었지.
입안에서 맴돌던 민영 시인의 용담꽃을 찾아본다.
용담꽃
이 용담꽃
작은 술잔에
이슬 한모금
받아마시곤
떠나야하리
길은 외가닥
불빛 멀어도
떠나야하리
쪽빛 늪 위에
구름 비끼면
단체사진을 찍고 아주 가볍게 할아버지 몽골 가이드와도 작별인사를 한다. 나이가 많지만 전문적인 일을 하는 사람 특유의 당당함이 신선하다. 나무 지팡이 하나로 길 없는 길을 잘 인도했으니 고맙기도 하다. 우리가 왔던 산을 바라보니 아득하게 멀리 보인다.
아무리 헤매고 힘들었어도 완주를 했으니 스스로 대단하다.
묘하게도 다 내려오니 피곤하지 않다. 이상도 하지 숨이 끊어질 듯하던 때는 언제고.
테를지 국립공원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서 국경을 너머 중국으로 향하는 열차를 만난다. 단선이라고 한다. 길가에 박아 놓은 타이어바퀴는 겨울 자동차가 고장 났을 때 타이어를 태우면 그 다음날 아침까지 추위를 견딜 수 있다고 비상시 연료용으로 박아 놓았다고 한다. 상상이 되지 않지만 우리처럼 AS차량을 쉽게 부를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사막에서 살아남는 법이다. 위기에 처한 누군가를 위해서 준비해 놓는 것이 같이 살아남는 법이리라. 그 의미를 알고부터는 박아 놓은 타이어바퀴를 볼 때마다 아름답고도 처절하다.
각시석남꽃이라는 뜻의 테를지, 작은 야생화 이름의 국립공원은 입구는 작고 초라하지만 그 안에서 달려도 달려도 끝이 나오지 않는 거대한 자연이다. 저녁 햇빛에 빛나는 강과 초원 그리고 기암절벽이 어울어지고 그리고 게르들이 있는 마을이 어울어진 자연 그 자체다. 여행객들이 즐길 수 있는 여러 시설이 되어 있는 국제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가 묵을 게르는 지루할 정도로 한참을 들어간 곳에 자리잡았는데 공동샤워실과 식당이 있는 집이 있고 숙소로 쓸 게르가 비스듬한 언덕에 십여개가 있었다.
저녁으로는 허르헉이라는 전통 양고기 요리인데 요리라기보다는 양고기 수육과 같았다. 불에 달군 돌과 함께 구운다고 하는데 맛이 좋았고 소주와 잘 어울렸다. 마침 백중날이라 달이 밝아 축제와 같았다. 달이 너무 밝아 별빛은 약했지만.... 어느 나라에나 뜨는 달이 있어
먼 곳에 온 것 같지 않다. 서울 근교의 캠핑을 온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달을 쳐다보고 있으면...
처음 자 보는 게르 안에는 네 개의 침대가 있었고 무쇠난로와 장작이 있었다. 가운데가 뚫려 하늘이 보였다. 발전기를 돌린다고 전등도 있고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도 있어서 다행히도 디카를 충전할 수 있었다.
몽골기행(4)
먼저 다녀온 사람들이 게르에 자면 밤에는 무척 춥다고 두꺼운 옷을 필요하다고 했지만 밤에도 그리 춥지는 않았다. 그래도 두꺼운 옷을 침대 곁에 놓고 자는데 자기 전에 장작에 불을 붙여준다. 새벽에는 불기가 다 사그라져 추위를 느꼈지만 아주 산뜻하게 일어난다. 어제 했던 고생이 아득해진다. 체체궁산에 올랐던 기억이 벌써 아득하다. 총명하고 현명하다는 의미의 체체궁산, 무릎에 죽은 나무 가지에 긁힌 상처말고는 멀쩡하다. 편안한 잠 때문인지 먼 곳에 온 것 같지가 않다.
게르 밖에는 야생화가 가득 핀 언덕이 아침해를 받아 반짝인다. 귀여운 공 모양의 보라색꽃의 이름은 무엇일까.. 흰 죽과 함께 아침을 먹는다. 아침에도 양고기가 나오는데 여자들은 도리질을 치지만 대륙의 기운을 이기려면 아침부터 고기를 먹어야할지도 모른다. 또 짐을 싸서 싣고 떠난다.
뭉근머리트는 몽골말로 은색 말이라는 뜻이라는데 징기스칸의 고향인 헨티아미막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몽골 최고의 명마들이 길러지는 곳이고 징기스칸이 꿈을 키운 곳으로 몽골에서는 성지나 마찬가지다. 그 곳으로 가기 위해 길을 떠난다. 테를지공원의 거북 모양의 큰 바위를 구경하고 나서 테를지를 빠져 나온다. 그리고 동쪽으로 간다. 망간과 석탄광산이 많다는 탄광지를 지난다. 지하자원이 많아 그 광산 가까운 곳에 도시가 발달했는데 어떤 의미에서 울란바타르보다도 발전한 도시다.
그 도시에서 점심을 먹는데 식당에서 음식은 나오지 않고 도시락을 나누어 준다. 도시락을 다 먹어 가는데 음식이 나온다. 고기 튀김 만두다. 모양은 호떡처럼 생겼는데 그 속에 꿀이 들은 게 아니라 고기를 다져 넣은 만두속이 들어 있다. 몽골에서 먹은 음식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맛있었다.
가는 길에 유목민들이 실제로 생활하는 게르를 방문한다. 곁에 강이 흐른다. 땅에서는 쑥 향기가 난다. 몽골의 땅에서는 어디든 깊은 향기가 난다. 여행 전에 원주민들에게 줄 옷을 가져 오라고 해서 우리는 준비해 놓았었다. 오리털 파카와 유행이 지났지만 따뜻한 옷을 준비했었다. 게르 안으로 들어가니 마유를 나누어 준다. 마유를 발효시켜 만든 술이라고 한다. 요구르트 같기도 하고 막걸리 같기도 하다. 그리고 무쇠난로에는 치즈를 만들기 위해 마유가 펄펄 끓고 있다. 게르 밖에는 치즈를 말리고 있고.
유목민의 삶, 말젖을 짜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본다. 그걸 관찰하기에는 너무나 생활 그 자체라서 구경하는 게 미안하다. 어미 말에서 젖을 짜려면 망아지를 곁에 두고 어미 말 몸에 대고 문질러주면 어미 말의 젖이 돌아 나온다. 갑자기 아기를 낳아 젖을 먹여 기를 때 젖이 돌던 생각이 난다. 오래 된 일이지만 그 감각은 너무 생생하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면 젖이 나오지 않았었지. 오직 아이를 내 젖으로 먹여야 된다는 생각만 해야 젖이 돌아 나오던 때가 생각난다. 어미의 본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영악하지만. 유목민의 생활은 영악하다고하기에는 가축들과 일치가 되는 생활이다. 뜨거운 햇빛을 서로 가리려고 말대가리를 서로 붙이며 그늘을 만들어 준다. 양도 마찬가지다. 양털이 햇빛을 가려주는데 머리 부분은 털이 적어 머리를 서로 맞대어서 그늘은 만들어 준다. 어디 하나 그늘이 없는 광야에서의 여름을 견디는 법이리라.
그 강에서 물을 먹으며 몸을 식히는 말들과 그 강물에 빨래를 하여 초원 위에 널어 놓는 여자를 본다.
몽골기행 5
“헬렌강(케롤렌강)과 오논강은 칭기스칸을 길러낸 유서 깊은 강이다.
수량이 풍부하고 크고 작은 지류가 주변으로 펼쳐져 있다. 멀리서 보면 뱀처럼 구부러진 강이 끝없이 초원을 적시고 있으며, 그 위로 백로 떼가 날고 있는 모습은 매우 장관이다.”
여행안내서에 있던 말이다.
그 강은 얼마나 소중한 강인가. 멀리 시베리아에서 빙하 녹은 물이 흘러내려 몽골을 적시며 징기스칸을 키운 강이고 울란바타르라는 큰 도시의 젖줄이기도 하고 가축과 유목민들의 생명수로 마르지 않는다. 그 강은 흘러 흘러 흑룡강으로 연해주로 흘러간다니...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강으로 보면 탄천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건조한 초원에서 구원처럼 흐르는 유장하게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차갑게 흐르는 강물을 보고 있으면 대단하다.
공산당이 쳐들어와 사유재산을 조사하고 몰수하려 했을 때 몽골 원주민들은 멀리서 오는 관리들을 미리 관찰하고 가축들을 멀리 숨겨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유목민들에게는 공산주의를 실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비상한 시력을 갖고 있다. 멀리 초원 끝에서 꼬무작거리는 것의 정체를 본능으로 알아낸다.
광야에 구불구불 사행천이 흐르고 때로는 깊은 단애를 보니까 성스러움까지 느끼게 된다.
강가에 피어 있는 하늘하늘한 두메양귀비꽃은 별처럼 빛난다. 내려가서 강물에 발을 담그고 온 남편은 작은 물고기들이 지천이라고 한다.
뭉근머리트 캠프로 향한다. 여행안내서에 무한차선을 달리는 재미라고 멋지게 표현되었지만 실제로 달려보니 차선도 없는 황량함에 마음 붙일 곳 없는 막막함이 있을 뿐이다. 도로포장도 되지 않은 평평하지 않는 구불구불한 광야를 달린다. 저 푸른 초원이 아니다. 그냥 광막한 대지일 뿐이다.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고 건조한 공기에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숨이 편안하지 않다.
드디어 뭉근머리트 캠프에 다다라 게르를 배정받고 짐을 푼다. 그 전날 테를지 공원의 게르촌와는 달리 드넓은 초원에 띄엄띄엄 있다. 여자 화장실 안에는 들개가 드러누워 꼼짝을 하지 않는다. 바깥보다 시원한 바닥에 몸을 대고 나가지 않는다. 사납지는 않은 것 같지만 어찌 야생동물의 행동을 예상하리오?
여기서는 말을 타게 된다. 몽골에서는 말 타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몽골 전통 씨름을 보여 준다. 체격 제한도 없고 울타리도 없는 맨땅에서 두 사람이 나와 싸운다. 싱겁지만 처절한 싸움. 결국에는 덩치 큰 놈이 이기지만 끝까지 달려든다.
드디어 말 타는 시간,
몽골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하지만 건조한 태양 밑에서 씨름 구경을 몇 판 하고 나니 좀 지쳐 있다. 옷을 챙겨 입고 끈 달린 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고 나온다. 말을 모는 소년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영어도 모른다. 가이드는 오땅오땅 이란 말만 기억하라고 한다. 천천히라는 말, 말을 빨리 달릴 때 쓰라고 한다. 그리고 멈추라는 말도.. 말 안장 위에는 올려주니까 올라 타게 되고. 허리를 곧게 세우라는 것은 들었다. 얼굴이 그을은 12살 정도의 소년의 얼굴엔 바람과 상처가 있다. 나는 무조건 소년을 보고 웃는다. 말에 대한 친밀감을 나타내야한다는 말이 생각나 예쁘다고 말을 쓰다듬는다. 강아지털도 잘 못 만지는 사람이..
드디어 대지를 성큼성큼 걸어나간다. 제법 달리기도 하고 소년은 추 추 추 소리를 내며 속도를 낸다. 옆의 다른 말을 노는 소년과 일행의 말과 네 마리 말이 나란히 달리다가 서로 부딪치다가 떨어지다가 달린다. 나를 이끄는 소년과 옆의 말 소년과 알 수 없는 농담을 하며 다시 떨어지고, 물을 먹다가 침을 뱉다가 약간 성숙한 소년은 담뱃불을 붙여 입에 물기도 한다. 그들의 일상이다. 나에게는 평생 한번 일어날까 마는 특별한 순간이지만. 초원 위는 길이 나 있지도 하지만 길 없는 길로 들어서기도 하고 말의 키 만한 높은 언덕을 오르내리기도 한다. 누런 마른 풀에서는 허브 향 같은 게 올라오기도 하고 솜달이 꽃(에델바이스)은 지천이다. 초원에서는 불쏘시개역할을 한다는 꽃. 마치 솜을 뭉쳐 놓은 것 같은 꽃.
한 시간 정도 달린다. 소년의 눈 속으로 쉬파리가 들어갔다고 눈을 못 뜨고 찡긋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군데군데 말똥과 쉬파리들이 엉켜 있고. 엉덩이의 충격이 가면서 속도가 두려울 때는 오땅오땅 소리치는 것 말고는 광야를 멀리 보며 생각한다. 내가 언제 또 여길 올까.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먼 시간 속에서 나를 불러서였을까.
1시간쯤의 승마체험 시간은 꿈같이 흘러간다. 뜨거운 해가 모자가 젖혀지고 이마 위로 따갑게 내리쬔다. 긴장감과 위험스런 시간도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달리던 시간도 곧 지나가버린다.
말에서 내리고 나니 엉덩이에 끈끈한 물기가 느껴진다. 땀이 흘렀나 했더니 말 안장에 쓸린 상처에서 피가 배어흐른다.
**첫번째 사진 두번째 사진 그리고 말 사진은 제가 찍은 사진이 아니고 일행(최성범님)이 찍은 사진입니다.
몽골기행(6)
어찌 수천년 동안 같은 생활을 해 온 민족의 강인함과 단련을 하루 만에 흉내 내겠는가? 엉덩이 쓸린 상처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말에서 떨어지지 않은 건만도 얼마나 다행인가.
공동 목욕장에서는 물을 퍼다가 씻게 되어 있다. 가마솥에 물을 데워 쓴다는데 워낙 더우니까 그냥 찬물로 대강 씻는다.
날이 천천히 저문다. 9시가 되어도 훤하니까. 건조주의보가 내렸다고 캠프화이어도 못하고 저녁은 또 양고기, 남자들은 술과 곁들여 거나하게 먹는데 여자들은 집에서 가져온 김과 고추장 밑반찬으로 저녁을 먹는다.
게르 안에 장작불을 지펴 준다. 여행안내서를 인쇄한 A4용지는 모두 불쏘시개로 들어가고. (신문지 같은 것은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어느 틈에 잠이 들고 새벽 한기에 잠이 깨어 밖에 나오니 교교하다. 멀리서 들리는 야생동물들의 울음 소리가 대지가 끙끙거리는 소리로 들린다.
보랏빛으로 천천히 밝아오는 새벽을 본다. 언제 여길 또 오겠는가.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게르 밖으로 다시 나가보니 까마귀다. 끝없는 지평선을 배경으로 게르 근처에서 날아다니니까 까마귀가 귀여울 정도다.
이제 이 유목민의 집 게르에서의 잠도 마지막이다. 아직 일정은 남았지만 다음 날은 울란바타르의 호텔에서 자기로 되어 있으니까. 짐을 옮겨 주는 여자아이한테 화장품을 하나 선물로 주고 뭉근머리트 (은빛 말) 캠프를 떠나는데 누구 하나 아는 사람도 없지만 섭섭하다. 다시 오지는 않을 것 같은 장소.
거기서 멀리 떨어지진 않았지만 가이드가 꼭 가보아야 할 산이라고 데려가는 징기스칸 산 닉모트레올 산으로 간다. 아주 작은 동산 같지만 어린 징기스칸이 꿈을 키우고 마음을 다지던 산이라고 한다. 정상까지는 15분쯤 걸리는데 나무 한 그루가 있을 뿐이고 바위가 마치 관악산 칼바위처럼 있을 뿐인데 그 산 위에서 사방에 강이 휘돌아 흐르고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풍수가 좋다고나 할까. 기운이 모인다고나 할까. 노란색 두메양귀비꽃이 피어 있다. 그리고 에델바이스는 지천이다. 솜달이꽃.
로마가 400년 동안 정복한 땅보다 더 넓은 땅을 25년 동안 정복한 징기스칸, 나에게는 적장에게 끌려간 약혼녀가 그 적장의 아이를 배었는데 그 아들을 거두어 키운 가슴이 넓은 사나이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징기스칸 어머니의 사랑은 눈물겨웠지.
9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영웅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영웅이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리라. 글을 몰랐지만 지혜와 리더쉽이 뛰어난 영웅이었기에 한동안이라도 세상의 중심을 만들어준 것이 아니겠는가.
울란바타르까지 다시 되돌아 간다. 비포장 길 없는 광야를 달려 망간산지인 도시를 지나고 포장도로에 접어들었지만 덜컹거리는 열악한 버스와 먼지와 태양은 지치게 한다.
“옛 생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순박한 유목민, 씨를 뿌리지도 땅을 경작하지도 않는다는 유목민, 가축과 천막 외에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유목민” 여행 안내서에 있었던 말이지만 여행하는 동안 농사를 짓는 밭이나 과수원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첫번째와 끝 사진은 최성범님이 찍은 것입니다.
몽골기행 (끝)
울란바타르 시로 돌아와 몽골 국립박물관으로 간다. 박물관을 보게 되어서 나에게는 무척 다행이었다. 원래는 레프팅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강바닥이 너무 말라 계획이 취소된 것이다. 박물관의 수준은 생각보다 놀라웠다. 민족사박물관이라고나 할까. 여러 민족이 섞이고 영향을 주고 받은 역사와 그 유물들이 증거로서 잘 전시되어 있었고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인류사의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 좋았다. 전국 각지에 흩어진 암각화의 일부를 볼 수 있었다. 특히 보관상태가 좋은 복식이 잘 전시되어 있고 공산주의의 시작과 끝의 역사도 잘 기록되어 있었다. 가이드는 설명을 참 잘했고 일행들은 착한 학생들처럼 잘 들었다.
나는 나오면서 영문판 박물관의 도록을 30불을 주고 샀다. 박물관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고 몽골 역사에 대한 존경심이기도 했다.
자연사박물관도 훌륭했다. 자연과학이 발달한 러시아의 영향일까. 특히 공룡뼈는 대단했다. 건조한 사막의 기후로 잘 보존된 공룡뼈를 볼 수 있어 각국의 학생들이 호기심 있게 보고 있었다. 초식공룡이 육식공룡을 물어 뜯는 장면 그대로 화산재에 묻힌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압권이었다.
저녁은 울란바타르 시내의 몽골식 바베큐 음식점이다. 지극히 서구화된 음식점이라서 미국이나 유럽 관광객이 많은 것 같았고 구멍이 뚫린 둥근 철판 위에서 야채와 고기 해물을 혼동하지 않고 구워주는 재주가 볼 만하였다.
아무리 재미있더라도 아무리 힘들더라도 여행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
몽골을 떠나는 날 징기스칸 공항으로 나가는 길에 들른 캐시미어 매장은 GOBI 라는 상표가 붙어 있다.(왼쪽 사진:도시의 난방은 공동으로 공급된다) 고비 사막과 부드러운 캐시미어 스웨터의 이미지는 멋지게 연결된다.
염소의 부드러운 가슴털을 캐시미어라고 한다. 서울의 백화점 못지않게 꾸며진 매장에 들어서니 여자들의 눈이 빛난다. 나도 마찬가지다. 광야의 광막함과 건조함에 심란해진 마음이 자본주의의 꽃 같은 백화점에 와서야 위로가 된다. 가족을 위해 작은 선물을 사는 것(꽤 비쌌지만)이야말로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스스로 깨닫는다.
캄캄한 금지의 땅이었던 나라에 이렇게 자유롭게 와서 산에 오르고 광야를 누볐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몽골을 떠나면서 울란바타르 공항에 걸린 인자한 영웅 징기스칸의 초상을 바라본다.
사진을 정리하고 여행기를 쓰면서 몽골 땅에 대한 그리움이 솟는 걸 느낀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사진 중에서 내 마음에 드는 것 하나 끝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기내지에서 본 몽골 시인의 시구절을 옮겨 써봅니다)
**같이 여행했던 분들 좋은 사진을 보내준 분들 지루한 여행기를 눈여겨 읽어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A thousand springs beneath the eternal sky
In lovely Mongolia, a breadth of years and years
In the gentle season, the people's minds are calm
And livestock serene in the verdancy of grass.
첫댓글 강우현부부, 김수일부부, 김종욱부부, 김홍곤부부, 노익용부인, 박도근부부, 박윤호부부, 최성범, 최윤부인, 황보윤부부, 황창윤부부, 황철부부 (21명)
정확한 정보 감사!! 본문에 반영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