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유래 1.당본리(堂本里)
우리고장 마을의 유래를 몇 번에 나누어 한번 알아보고자 합니다.
맨 처음으로 안의면 당본리입니다.
안의의 읍사동 중 당본리는 옛날 안의현 현내의 지역으로 성황당의 밑에 있다고 해서 당본(堂本, 堂底, 竹堂)이라 하였다. 죽당(竹堂)과 마암(馬岩)마을을 합친 동리로 죽당마을은 무이산 정상에서 동북쪽으로 뻗어 내리는 능선이 고개를 이루고 이고개가 아리랑고개라고 하는데 그 옆에 대밭산(진수산) 아래에 마을이 형성 되었다 하여 대죽자를 써서 죽당(竹堂)이라고 했다.
마암마을은 갈마실과 빙고동, 새서원을 아울은 이름인데 갈마실은 약 5백년 전 진주 집현에서 밀양박씨(三五亭派)가 제일 처음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마을 입구의 말머리에 해당하는 곳에 갈마봉이 있다. 멀리서 보면 말의 형상을 띠며 그 모습이 목말라(渴馬)하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바로 앞에 작은 연못을 파서 갈증을 해소시키니 후손들이 남다르게 총명하여 선비와 말과 관계가 있는듯하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이 마을을 갈마실이라고 한다. 내가 이곳에서 태어 났다. 우리 집이 연못 바로 뒤에 있어서 내가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이집에서 살았었다, 세월이 무상하여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아버님은 대구 큰형댁으로 가시고 빈집으로 10여년을 버티다가 이제는 허물어지고, 집터는 밭이 되어 옥수수와 쪽파를 옆에 사시는 고종 형님이 심고 계시다. 갈마실 가는 길이 초등학교를 지나 안폭들을 가로 질러가는 논길을 따라 추운 겨울 눈바람을 맞으며 걸어서 다녔는데 지금은 아스팔트 2차선 국도를 능가하는 도로가 되었다. 우리집터도 도로 확장으로 삼분지1이나 들어가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동네에 비하면 도로가 너무 넓다. 우리나라 국고를 과잉 투자를 했다는 생각이다.
경작 면적을 넓이기 위해 연못이 메워져 논으로 되었다. 안의에서는 오직 유일한 국회의원(2선)과 총무처 차관, 청와대 대변인, 수협중앙회회장을 역임 하신 박상길씨가 태어난 곳이며, 39사단장을 지낸 박웅 소장도 이 마을 출신이며, 대한무역진흥공사 상무를 지낸 박상봉씨, 내 사촌 동생 노정관이도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진주국제대학 교수 또한 이 마을 출신이다. 하여 자타가 인정하는 안의에서는 최고의 명당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또한 대전고속도로 개통에 따른 우회도로 건설로 인해 갈마실 동네 앞 도로가 확장 포장되면서 동네 앞 전망을 막아 버렸고, 서편 과수원이 개발(?)을 위해 거대한 콘크리트 옹벽으로 동네의 미관을 망쳐 버려서 너무나 안타깝다. 내가 고향 동네로 귀향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동네이름을 지어준 내력을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마을의 형태를 바꾸어서 동네 이름도 바꾸어야 되지 않을까(?) 한다.
그 외에 호랑이굴이 있는 범어골, 그리고 빼쟁이골, 사당골, 서당골과 선사 골목이 있다.
우리 동네 친구들을 보면, 박동희는 지금 갈마실에 살고 있고, 박상홍, 박동범, 박재환, 故박동덕, 등이 같이 갈마실에서 자랐다.
옛날에 얼음 창고가 있었다는 빙고동, 이곳이 유우진(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음)친구의 동네이다. 우진이 큰 오빠 유종연(안중 6회)형님은 한전 본사홍보실에 나와 같은 시기에 근무하셨다. 그리고 새서원이 있다. 새서원에는 나의 큰집이 있다.
사촌형 노저용(안중16회)은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지금은 영남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고 그 형수도 의학박사로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우리친구로는 김경환, 故김용운이가 새서원 출신이다.
안의 초등학교 교정에는 연암 박지원의 사적비가 있다. 이 비석은 1792년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여 5년간 선정을 베풀고 학자로서 저술가로서 행정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긴 가운데 특히 충․효․예와 위민후생을 위해 우리나라 최초로 안의현에서 물래방아를 만들었고, 벽돌을 구워서 집을 지어 선각자로서의 선행 자취를 더듬어 진단학회, 국어국문학회, 한국사연구회, 고전문학연구회, 한문학연구회, 다산연구회 및 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1986년 5월에 안의현의 옛 동헌 마당에 사적비를 세워 재임기간의 빛나는 업적을 기리고 있다.
안의초등학교 뒤 산기슭에는 황석산성 순국사적비와 신암사가 있다. 신암 노응규 의병대장과 같이 왜병에 항거하다가 장열하게 순국하신 선열들을 모신 곳이다.
그리고, 서편에 신암 노응규의병대장 생가가 지난해에 준공되었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 4동이 17억원 들었다고 한다. 한데 이렇게 잘 지어 놓고 소불알만한 잠울통을 메달아 놓아 내부에 들어 갈 수가 없다.
뭐 할려고 지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만큼 돈을 많이 드렸으면 활용을 해야 되는 것 아닌가 한다.
내 생각 같아서는 신암 이름을 붙여서 여러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을 지었으면 활용도가 지금 보다는 높지 않을까 한다. 하긴 이렇게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는 것이 이것뿐 이겠는가?
자기 돈이라면 이렇게 하겠는가?
안의에 살고 있는 가장 가까운 일가로서 부끄럽기 한이 없다.
이글의 원전은 함양문화원에서 발행한(1997년 3월)함양의 뿌리(1)를 참고 했습니다.
첫댓글 고향의 내력을 올려주어 모르고 있었든걸 알게 되었는데...
고향 떠나 지내오면서 뭔가 또다른 느낌이 드는건
그래도 태어나 자란곳이기 때문 일게요.
지기님!
항상 열심히 카페를 이끌어 오신다고 노고가 많습니다.
댓글을 다 달아 준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정말 고맙습니다.
오헌이가 똑똑한데는 이유가 있었구먼 갈마봉의 정기를 받아서이고 목말라하는 말을 위해 저수지로 만들어 놓은 곳에
살았다니,,조금만 오헌이가 열심히 했으면 받아온 정기로 출세를 했을낀데,,사촌들이 출세를 했네
정기는 받았지만 노력의 부족으로 이모양이 되었다오.
진작 이런 애기를 어릴 때에 들었다면, 지금보다 좀 달라 졌을까?
아뭏든 좋은 동네를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안타깝다오
(노)씨 집안에 자손들이
(유)명한 인물이 많은
(연)유를 알겠구료!!!!!
괜히 집안 애길 해 미안 하네
나는 보잘 것이 없어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