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五章 大丈夫行
꽝!
굉음이 터지며 누군가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어떤 개자식이……?”
욕을 한 사람은 바로 혈의노인이었다.
그는 낭패한 얼굴로 정면을 쏘아보고 있었는데, 앞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단아한 인상의 흑의인이 검을 든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흑의인의 방해로 혈의노인은 염천열 등을 해치기는커녕 오히려 손해를 보고 만 것이다.
“회주님!”
창궁오영의 입에서 환호성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을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서 구해 준 흑의인은 바로 철단소였다.
하나, 환호를 하던 창궁오영은 곧 긴장한 얼굴로 철단소를 쳐다보았다.
몸의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 있는 것으로 봐서 그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염천열은 철단소의 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나 있는 것을 보자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적들은 이미 누군가가 정검대(正劒隊)를 구하러 오리라는 것을 알고 함정을 파놓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천산삼로는 차치하고라도 그가 천하제일의 검객으로 알고 있던 철단소마저 저런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 모든 사실을 증명했다.
철단소가 염천열과 정검대원들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미안하다! 내가 늦어서 너희들을 고생시키는구나!”
“아니! 이놈의 자식이 노부의 일을 방해하고는 딴전을 피워?”
혈의노인이 입에 게거품을 물었지만, 철단소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염 수좌는 어서 모든 인원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라. 목적지는 같다…… 내가 약간의 조치를 해놓았으니 아마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철단소가 전혀 자신을 아랑곳 않고 말을 잇자 혈의노인은 이성(理性)을 잃을 지경이었다.
머리털 나고 여태껏 이런 무시를 당해 본 적이 없던 그로서는 철단소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으…… 이 개 같은 자식이!”
혈의노인이 막 발작하려고 하자 청의노인이 그를 제지하며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누구도 이곳을 살아 나갈 수 없다!”
그제야 비로소 철단소가 뒤를 돌아보았다.
“당신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능력이 있냐고……? 흐…… 하하하!”
한참 동안 미친 듯이 웃어대던 청의노인이 어느 순간 웃음을 뚝 그쳤다.
철단소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두 눈에서 마치 번갯불 같은 광망(光芒)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능력이 있냐고……? 애송이, 천하에 삼마(三魔)에게 능력이 없다면 누구에게 능력이 있단 말이냐?”
‘진정 삼마로구나……!’
철단소는 삼마라는 말을 듣자 마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으나,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한편으로는 삼마를 주시하며 또 한편으로는 염천열에게 빨리 이곳을 떠나도록 눈짓했다.
“당신들이 진정 삼마라면 어찌 어린 후배들에게 이다지도 독한 술수를 부리는 것이오?”
“애송이! 네가 어떤 소리를 한다 해도 너희들은 모두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
그의 의도를 눈치챈 청의노인이 싸늘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지만, 철단소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좋소. 그렇다면 내 한 가지만 물어 보겠소…… 당신들 셋만으로 과연 우리 모두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이번에는 혈의노인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네까짓 놈들 쯤 처리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삼마라는 이름으로 불렸겠느냐?”
그가 자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직 강호(江湖)에 대한 견문이 풍부하지 못한 창궁오영이나 정검대원들은 잘 모르겠지만, 삼마라 하면 사십 년 전만 하더라도 천하제일마(天下第一魔)를 다투던 불세출의 마인(魔人)들이었다.
심성(心性)이 잔인하고 성격이 괴팍해 같은 마도의 인물들이라 해도 비위에 맞지 않으면 처참하게 살해하는 등 잔혹한 면이 많아 누구에게도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지닌 무공만큼은 가공 그 자체였던 마왕(魔王)이 바로 그들이었다.
혈의노인이 혈마(血魔) 고통강(顧通强), 청의노인이 빙마(氷魔) 궁초심(宮初心), 그리고 갈의노인이 목마(木魔) 민경익(閔敬益)이었다.
“당신들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소?”
느닷없이 떨어진 철단소의 질문에 삼마는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네가 누구든지 상관없다. 어차피 마찬가지일 테니까.”
빙마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철단소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상관있소.”
빙마가 의아한 표정으로 철단소를 훑어보았다.
‘이 녀석이 도대체 누구기에……?’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철단소의 태도를 보면 분명히 자신들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뻣뻣하게 나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철단소의 모습을 자세히 뜯어보던 빙마의 뇌리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렇군! 이제 보니 네가 바로 대정회(大正會)의 회주(會主)인 철단소(鐵旦昭)로구나.”
“바로 맞추었소.”
철단소는 태연히 대답했지만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대정회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당금(當今) 강호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회를 만들었고, 아직은 개파대전(開派大典)도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구성 인원이나 회주가 누구인지는 더 더욱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삼마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그렇지 않아도 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 발로 기어오다니…… 후후후!”
철단소는 빙마가 회심의 미소를 짓건 말건, 자신의 할 말만 했다.
“당신들은 분명히 도망치려는 내 수하들을 하나하나 따라다니며 살해할 생각을 했을 것이오. 물론 나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오.”
“네가 대정회주인 것을 안 이상, 결코 방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빙마를 바라보는 철단소의 얼굴이 점차 싸늘해졌다.
“당신들은 내가 왜 불리함을 무릅쓰고서라도 이렇게 정체를 밝히는지 아시오?”
“……!”
빙마의 얼굴이 비로소 신중해졌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는 말도 있듯이, 철단소 같은 고수라면 삼마가 그의 정체를 모르고 있을 경우 기습을 감행하거나 지략을 써 충분히 그들을 살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런 사실을 발설한다는 것은 분명히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당신들과 한 가지 흥정을 하기 위해서요.”
“흥정……?”
“그렇소. 내 무공은 당신들 세 명이 다 덤벼도 충분히 감당할 만큼 강하오. 당신들은 믿지 않겠지만, 내 말은 추호도 틀림이 없소. 만약 당신들이 내 말을 믿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저들을 살해하려 든다면 몇 명은 죽일 수 있겠지만, 대신…… 당신들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내가 이런 말을 해주는 이유는 물론 당신들을 위해서가 아니오. 내 수하들이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무사히 이곳을 벗어나는 걸 바라기 때문이오.”
“흐음……!”
빙마는 번쩍이는 눈으로 철단소를 노려보았다.
그는 비록 희대의 마인이었지만, 사람 보는 눈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철단소의 말은 절대 틀리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자신을 포함한 삼마 모두 오늘 커다란 낭패를 당할 수도 있었다.
철단소는 빙마의 얼굴이 흔들리는 것을 보자 재빨리 염천열에게 지시를 내렸다.
“염 수좌! 지금부터 싸움이 시작되면 나는 너희들을 돌볼 수 없게 된다. 아니, 어쩌면 신경이 분산되어 커다란 낭패를 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 걱정일랑 말고 동료들과 함께 어서 여기를 벗어나라!”
“회주님……!”
염천열이 떨리는 눈으로 철단소를 바라보았다.
나이 이십이 되기 전에 이미 천하제일기재(天下第一奇才)라는 영광된 칭호를 받은 사람. 생각만 있었다면 평생을 부귀영화와 호의호식 속에서 지낼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을 뿌리치고 오로지 정의를 위해 살아 온 사람. 그는 지금도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수하들의 목숨을 구하려 한다.
‘나는 이분에게 조금의 도움도 주질 못한다.……!’
자신의 무기력함을 원망하며 염천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철단소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자신들은 어차피 삼마 같은 고수들에게는 한 주먹 거리도 되지 않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곳을 벗어나 원군을 요청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것만이 철단소를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부디 옥체 보중하십시오!”
염천열은 잠시 뜨거운 눈으로 철단소를 응시하더니 동료들을 이끌고 이내 그곳을 떠났다.
혈마가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빙마의 한마디에 맥없이 물러서고 말았다.
철단소는 쓸쓸한 눈으로 염천열 등이 떠나가는 모습을 응시했다.
‘잘 가거라. 어쩌면 다시는 너희들을 못 볼지도 모르겠구나……!’
그는 이미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상대방은 수십 년 전에 사해(四海)를 떨어 울리던 고수들이었다.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일방(一方)의 패주(覇主)로 군림(君臨)하던 절세(絶世)의 마왕(魔王)이 바로 그들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삼마와 비슷한 고수가 하나만 더 나타난다 해도 철단소는 견디기 힘들 것이다.
“자! 그럼, 시작하지요.”
철단소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천천히 검을 들어올렸다.
오늘 이 싸움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쳐 갔지만, 그로서는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군악을 만나야 한다……!’
검의 손잡이를 부서져라 움켜쥐자 가슴 한구석으로부터 불끈 호기가 솟아올랐다.
철단소는 차분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서서히 삼마에게 다가갔다.
* * *
“누가 상대한다고……?”
음울하기 그지없는 음성이 허공에 가득 메아리쳤다.
언제나 듣는 음성이지만, 들을 때마다 은근히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렇지만 노치은(盧治隱)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다거나, 하다못해 인상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단지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소면최심(笑面催心)이라는 별호처럼 그가 웃음이 많아서도 아니고, 앞에 있는 사람이 특별히 웃기게 생겨서도 아니다.
그것은 그의 목숨이 둘이 아니라, 오직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은 극악(極惡)하기 짝이 없는 마인(魔人)들만 우글거리는 이곳에서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잔혹(殘酷)한 성정(性情)을 갖고 있었다.
단 한 번이라도 그의 비위에 어긋난 행동을 한 자치고 성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노치은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노치은은 최대한 공경스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예! 지금 그곳에는 삼마 어르신들께서 계십니다.”
“흠, 삼마라……”
노인은 조용히 자신이 내뱉은 말을 음미하더니 곰방대에 연초(煙草)를 넣고 불을 붙였다.
“후우!”
작은 창문 사이로 흘러드는 햇빛을 받아 노인이 내뿜은 연초 연기가 푸르스름하게 보였다.
노인은 몽롱한 눈으로 사방으로 퍼져 가는 연기를 응시하며 다시 물었다.
“그 근처에 누가 있나?”
노치은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신속하게 대답했다.
“예! 흑마단(黑魔團)의 고수들은 이미 그에게 전멸한 듯하고 봉호법과 십팔마인(十八魔人)이 주위에 있습니다.”
노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들을 모두 투입하게.”
“예……?”
노치은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불신 어린 표정을 보며 노인이 그답지 않게 차근히 설명해 주었다.
“삼마가 상대한다는 그자는…… 내가 보기엔 거의 궁주(宮主)님에 필적할 만한 고수다. 비록 삼마의 무공이 막강하다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에게 당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
노치은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반인반마(半人半魔)의 경지를 넘어선 것으로 알려진 궁주님과 필적할 정도면 어느 정도의 고수란 말인가?
“예! 아, 알겠습니다.”
놀란 토끼 같은 얼굴로 허겁지겁 인사를 한 후 사라지는 노치은의 등 뒤로 노인이 내뿜은 연초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연기는 이내 허공으로 흩어졌고…… 노치은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마 조금이라도 이 사실을 빨리 알리기 위해 조급한 얼굴로 동동거리고 있을 것이다.
노인은 곰방대를 한 번 더 빨았다.
푸르른 연초 연기가 허공에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누가 살아남든 상관없다! 어차피……’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보며 노인은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몽롱하지 않았다.
* * *
궁초심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은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벌써 백여 초가 넘어가고 있었다.
처음 오십여 초가 지났을 때만 해도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다.
역시 상대가 큰소리친 것은 이유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 정도였다.
그러나 다시 오십 초가 지난 지금.
빙마(氷魔) 궁초심(宮初心)은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절실히 깨달아야만 했다.
그는 자신들이 쉽사리 상대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그야말로 절강(絶强)의 고수인 것이다.
“헉……!”
자신의 안목을 탓하며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던 빙마(氷魔)는 하마터면 날아오는 칼날에 목을 잘릴 뻔했다.
다행히 적시에 손을 쓴 혈마의 도움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잘려서 허공을 날으는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머리였을 것이다.
“이노`― 옴!”
분기를 참지 못한 빙마가 철단소를 향해 두 손을 기이하게 휘둘렀다.
휘류류르릉……
일순, 그의 손이 백옥(白玉)처럼 새하얗게 변하더니 천지를 얼릴 듯 차가운 한기(寒氣)가 휘몰아쳐 나왔다.
쩌저적!
한기가 어찌나 강하던지 주위에 있던 초목들이 견디지 못하고 얼어 터졌다.
이것이 바로 그의 최대 절학(絶學)인 삼음신수(三陰神手)였다.
그는 여태껏 수많은 싸움을 해왔지만 삼음신수를 펼친 적은 채 다섯 번도 되지 않았다.
그것을 펼칠 만큼 특별히 강한 상대도 없었거니와 생사간두의 위기가 아니면 결코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빙마는 철단소가 목숨을 걸어야 상대할 수 있는 고수라는 것을 깨닫고 전심전력으로 자신의 최대 절기를 펼친 것이다.
철단소는 생전 접해 보지 못한 가공할 한기가 엄습하자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쏴아아……
귀청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오며 가공할 검기가 빙마의 전신을 덮쳐 갔다.
흡천십이검의 음력쇄심(陰力鎖心)이 펼쳐진 것이다.
그가 펼치는 흡천십이검은 철군악이 펼쳤던 것보다 훨씬 더 위력적으로 보였다.
철단소는 원래 흡천십이검(吸天十二劒)이라는 검법(劒法)을 사부에게서 전수받은 후 다시 사제인 철군악
에게 가르쳐 주었다.
둘이 흡천십이검을 익힌 것은 사실이지만, 철단소가 지닌 검의 경지가 철군악에 비해 훨씬 깊었기 때문에 검법의 위력에서도 차이가 나는 것이다.
꽝!
검기(劒氣)와 장력(掌力)이 마주치자 굉음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빙마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 정도라니……!’
빙마는 놀랄 사이도 없이 재차 검이 다가오자 입술을 질끈 깨물며 일장을 떨쳐 냈다.
휘이잉!
칼날처럼 예리한 장력이 가공할 한기를 동반한 채 철단소의 전신을 엄습했다.
삼음신수 중의 절초인 취수빙정(聚水氷精)이었다.
“여기도 있다!”
동시에 좌우에서 혈마(血魔)와 목마(木魔)가 눈을 부라리며 장력을 떨쳐 냈다.
철단소는 사방에서 가공할 경력(勁力)이 엄습하자 재빨리 검을 회수한 후 종횡으로 그어댔다.
우우웅……
청량한 검명이 터져 나오며 철단소 주위에 희뿌연 막이 형성되었다.
흡천십이검 중에서도 최고의 수비초식인 검막밀밀(劒幕密密)이 펼쳐진 것이다.
삼마는 자신들이 내뻗은 가공할 장력이 무언가 벽에 부딪히는 것을 느꼈다.
콰앙!
폭음이 터지고 온몸에 검상을 입은 삼마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얼굴에는 놀란 표정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철단소의 무공이 상상을 훨씬 초월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입은 피륙(皮肉)의 상처는 별게 아니었지만, 심적인 타격은 훨씬 클 수밖에 없었다.
철단소는 비록 뒤로 물러나지는 않았지만, 가슴과 옆구리에 장력을 얻어맞아 가볍지 않은 내상(內傷)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눈을 빛내며 혈마에게 바싹 다가갔다.
파사삭!
빙마의 장력에 스친 가슴 부위의 옷자락이 얼음처럼 부스러져 나갔지만, 철단소는 전혀 개의치 않고
검을 휘둘렀다.
슈아악!
혈마는 철단소의 검이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다가오자 얼굴을 굳히며 양손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쓰스스……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 소름 끼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시뻘겋게 변한 혈마의 손바닥이 철단소의 전신을 노리고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이것이 바로 그의 최대 절학인 지옥혈인(地獄血印)이었다.
일단 장력에 격중되기만 하면 가슴에 시뻘건 손도장[掌印]이 생기며, 비록 스치기만 해도 전신의 경맥이 부풀어 올라 칠 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는 끔찍한 마공(魔功).
세간에 알려지기로 지옥혈인은 전설 속의 단체인 마교(魔敎)에서 흘러나왔다고 한다.
‘역시 이자가 삼로(三老)를 살해했군……!’
철단소는 눈을 번뜩이며 검을 기이하게 흔들었다.
꼭 검으로 허공을 휘젓는 듯한 동작이었지만, 이것이 바로 흡천십이검 중 가장 위력이 강한 검파멸절(劒波滅絶)이었다.
쓰스승……
마치 호수에 파문이 일듯, 아홉 겹의 검기가 물결처럼 혈마에게 밀려들었다.
“이놈……!”
혈마가 노호(怒號)를 터뜨리며 쌍장을 휘둘렀고, 가까이 있던 목마 또한 괴이하기 짝이 없는 삼지(三指)를 튕겨 냈다.
쓰와와……
슈슈슝!
순간, 허공에서 무려 아홉 번의 충돌이 일어났다.
콰콰콰쾅!
천번지복(天飜地覆)의 굉음이 터져 나오며 왼손이 잘린 혈마가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고 있었고, 목마는 불신의 표정으로 손가락을 감싸 쥔 채 넋을 놓고 있었다.
금석(金石)을 두부 으깨듯이 부수던 그의 손가락이 두 개나 잘린 것이다.
‘목령지(木靈指)가 안 통하다니……!’
목마는 경악성을 삼키며 얼른 철단소를 살펴보았다.
비록 목마와 혈마에게 타격을 입혔지만, 철단소 또한 무사하지는 못했다.
목마가 펼친 지법이 옆구리를 훑고 지나가 살이 한 주먹이나 떨어져 나갔고, 정면으로 지옥혈인을 상대하느라 심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러나 철단소는 이를 악물며 혈마에게 다가갔다.
동시에 목마도 철단소의 옆구리에 장력을 내갈겼다.
슈앙!
철단소는 공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옆구리를 보호하며 검을 휘둘렀다.
“헉……!”
질풍노도(疾風怒濤)와도 같은 철단소의 기세에 혈마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그는 철단소가 왜 이렇게 자신에게 집착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번쩍!
허공에서 시퍼런 번개가 피어남과 동시에 날카로운 검기가 혈마의 전신을 난도질해 왔다.
쾌검의 정수인 칩광구뢰(光九雷)가 펼쳐진 것이다.
“으헉……!”
혼비백산한 혈마가 가까스로 아홉 가닥의 검기를 피해 냈지만, 철단소의 검은 어느새 그의 이마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헉……!”
혈마의 안색이 샛노래졌다.
느릿느릿하게 다가오는 간단한 일검(一劒)을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으아악!”
폐부를 도려내는 듯한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며 혈마의 목은 몸뚱어리에서 분리되어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떼구루루……
수급이 구르는 소리가 너무도 커다랗게 들렸다.
수십 년간 강호를 독패(獨覇)해 온 삼마가 이마(二魔)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목마의 쭈글쭈글한 손이 철단소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꽝!
굉음이 터지고 철단소가 울컥 피를 토하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연이은 충격으로 인해 옆구리는 이미 너덜너덜하게 변해 있었다.
“으……!”
철단소는 혈마의 죽음을 확인하자 목마에게 일검을 펼치는 척하며 재빨리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부상도 부상이거니와 그는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때였다.
꽝!
벼락 터지는 듯한 폭음이 터짐과 동시에 철단소가 피를 뿌리며 나뒹굴었다.
“우욱……!”
어느새 다가온 빙마가 그의 등에 가공할 일장을 뿌린 것이다.
이번의 일장에 철단소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심한 충격을 받았다.
타격이 얼마나 심한지 등짝이 마치 걸레처럼 너덜거렸다.
“으음……!”
간신히 몸을 일으킨 철단소는 미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검을 휘둘러야만 했다.
빙마가 눈을 빛내며 일장을 쪼개 왔기 때문이다.
꽝!
굉음이 터지며 철단소는 다시 한 모금의 피를 토해 냈다.
“으웩……!”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보아 심한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그러나 철단소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음침한 얼굴로 다가온 빙마가 재차 양손을 휘둘렀다.
휘우응……
태양조차 얼릴 듯한 가공할 한기가 사방을 가득 뒤덮었다.
한기가 어찌나 지독한지 허공에 떠 있던 수분이 얼음이 되어 떨어졌다.
삼음신수 중의 절초(絶招)인 빙하도래(氷河到來)가 펼쳐진 것이 동시에 목마의 손가락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피핑핑피잉!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빨랫줄 같은 지력(指力)이 철단소의 온몸을 노리며 쏘아져 나왔다.
마치 칼로 대나무를 쪼개는 듯 극렬한 기세였다.
목마의 삼대절기(三大絶技) 중 하나인 목령지(木靈指)가 극성(極成)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야얍……!”
철단소는 있는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쿠와와와……
기경스럽게도 검을 따라 와선형의 돌개바람이 형성되더니 빙마와 목마가 펼친 가공스런 공격을 무위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흡공와류(吸空渦流)의 절세검예였다.
너무나도 엄청난 광경에 빙마와 목마는 넋이 나간 듯 입을 딱 벌렸다.
그 순간, 재빨리 빙마에게 다가간 철단소는 검을 슬쩍 내리그었다.
파앗!
아무런 위력도 없어 보이는 검이 그의 전신을 짓쳐 들었다.
속도가 빠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변화가 무궁한 것도 아니었지만, 빙마는 이상하게도 피할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흡천십이검의 최절초인 도전인혼(道轉引魂)이었다.
‘헉!’
빙마는 젖 먹던 힘을 짜내 땅바닥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일류고수에게는 치욕이라 할 수 있는 뇌려타곤의 신법으로 땅바닥을 서너 번 구르고서야 겨우 치명상을 면할 수 있었지만, 등에 일검을 얻어맞는 것은 피할 도리가 없었다.
후두둑!
그의 등이 사선으로 길게 잘려지며 폭포 같은 피가 바닥으로 쏟아져 나왔다.
하나, 빙마는 등에서 피가 쏟아지건 말건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기에 바빴다.
조금 전 혈마가 어떻게 당했는가를 잘 봤던 그로서는 조금도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무려 십장이나 뒤로 물러난 후에야 비로소 고개를 돌리던 빙마의 얼굴이 치욕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반대쪽으로 까마득이 사라지는 철단소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희대의 마인이라던 그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쳐 내지 못하고 등을 보이는 추태를 보이고 말았다.
더군다나 상대는 그보다 나이가 배나 적은 인물이 아니던가?
“이놈!”
철단소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빙마는 어금니를 뿌드득 갈았다.
살아생전 이런 수모를 안겨 준 애송이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빙마는 지혈(止血)할 생각도 않고 철단소가 사라진 쪽을 노려보았다.
목마 또한 빙마 못지않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엇으로도 파괴되지 않는다는 고목신공(枯木神功)을 뚫고 그의 손가락을 두 개나 자른 고수가 있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빙마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공포를 느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만약 자신이 빙마와 같은 처지에 놓였다면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만큼 철단소의 검은 빠르고 가공했다.
허공을 맴돌던 이마(二魔)의 눈동자가 어느 순간 한곳에서 딱 마주쳤다.
오고 가는 눈길만 보아도 서로의 생각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놈은 중상을 입었다!’
그들은 서로의 심정을 알게 되자 이를 악물고 몸을 움직였다. 철단소를 쫓아가려는 것이다.
그가 절세(絶世)의 고수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심한 부상을 당했고 진력(眞力)도 많이 고갈됐을 것이다.
또한 그가 두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희생이 많은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들은 한번 놓친 고기는 다시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신중한 기색으로 주위를 살펴보며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철단소의 핏자국을 따라 이내 그들의 모습도 사라졌다.
* * *
꽈당!
방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렸다.
호피의(虎皮椅)에 몸을 묻고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독서를 즐기던 동천립(董天立)은 탁자 앞에서 씩씩거리고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하자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리 시끄럽나?”
동천립 앞에 화난 얼굴로 서 있는 인물은 남의(藍衣)를 입은 중년인이었다.
집채만 한 체구에 부리부리한 호목(虎目), 우뚝 솟은 코가 썩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남의인은 뭐에 그리 화가 났는지 가뜩이나 붉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동천립은 언제나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래서 더욱 친근해 보이던 그가 잔뜩 화난 얼굴로 들어오자 뭉게구름처럼 의구심이 생겼지만 여전히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드는 시늉만 했다.
“왜 그러지?”
탁자 앞에서 두 눈을 부라리며 서 있는 남의인은 어릴 때부터 아주 친하게 지내던 죽마고우였다.
아주 털털한 성격의 소유자라 웬만해서는 화를 잘 내지 않았기 때문에 동천립으로서는 더욱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단소가 대홍산에 갔다는 게 사실인가?”
동천립은 그제야 그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알 수 있었다.
동천립은 책을 덮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꽝!
이번에는 방문이 아닌 탁자가 부서질 듯 흔들렸다.
남의인이 분기를 참지 못하고 커다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친 것이다.
“왜…… 왜 내게 말하지 않았나?”
동천립은 의자에서 일어나 잠시 탁자를 어루만지더니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어쩔 수 없었네!”
무심한 듯한 동천립의 말에 남의인이 따지듯 물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
동천립이 침묵을 지키자 남의인은 더욱더 언성을 높였다.
그의 두 눈은 용암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게 말이 되는가? 거기서 훈련하던 정검대(正劒隊)는 고사하고 단소가 누군가? 바로 지금 우리가 목숨을 걸고 벌이는 이 일의 주동자며, 자네와 나의 하나뿐인 친구가 아닌가? 그런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여기며 사지(死地)를 헤매는데, 그 친구라는 작자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책이나 읽다니,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린가?”
처음에는 약간 크다 싶을 정도의 목소리였는데, 나중에는 고막이 터질 정도로 크게 들렸다.
동천립은 단지 목소리만 듣고도 그가 얼마나 흥분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말없이 남의인을 쳐다보았다.
남의인 또한 지지 않고 동천립을 쏘아보았다.
두 쌍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격렬한 불꽃을 피워 내며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긴장된 분위기가 장내를 감쌌다.
그러나 살벌할 것 같던 두 사람의 눈싸움은 너무도 싱겁게 끝나 버렸다.
남의인이 아까보다 훨씬 누그러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던 것이다.
“자네…… 뭔가 조치를 해놓았군?”
남의인은 동천립의 눈을 보고 나서야 그가 결코 친구를 죽게 내버려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천립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삼십육천강(三十六天) 중 열여덟을 보냈네. 그들은 원래 일 년은 더 폐관(閉關)했어야 하는데…… 일이 너무 급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예정을 당겨 강호로 나오게 된 것이네.”
그 말을 들은 남의인이 얼굴 가득 환한 표정을 짓자 동천립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좋아하지 말게…… 덕분에 우리 계획이 몇 년은 더 늦춰질 걸세.”
동천립은 잔뜩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지만, 남의인의 얼굴에 생긴 웃음은 없어질 줄 몰랐다.
“하하하, 그까짓 게 대순가? 친구를 살릴 수 있다는데, 까짓 거 몇 년 더 고생하면 되지!”
그는 친구를 살릴 수만 있다면 설사 불구덩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사람이다.
지난 삼십여 년 간을 같이 지내 온 동천립이 물론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자신에게 심하게 화를 내고, 또 오해를 해도 얼마든지 참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비록 죽는소리를 했지만 동천립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친구는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동천립 또한 남의인처럼 친구를 위해 무엇이든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래…… 친구만큼 중요한 건 없지!’
* * *
감응곡(甘鷹曲)은 매우 기분이 유쾌했다.
대홍산의 한 자락인 금수봉(禽獸峰)에 만년자령초(萬年紫靈草)가 있다는 뜬소문을 듣고 달려온 지 어언 이 년.
그 동안 만년자령초는커녕 흔하디흔한 황정(黃精) 한 뿌리 구하지 못해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감응곡은 그 동안 몸 고생, 마음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이놈의 금수봉을 모조리 불살라 버려도 시원치 않았지만…… 이제는 모두 잊기로 했다.
“허허…… 그놈!”
감응곡은 뿌듯한 얼굴로 탁자 위에 얌전히 놓여져 있는 풀뿌리를 바라보았다.
정말 괴상하게 생긴 풀이다.
한 자 정도 되는 몸통은 온통 검붉은 색을 띠고 있었고, 특이하게도 뿌리 쪽에는 아홉 개의 잎이 나 있었는데, 그것은 담담한 금색(金色)을 띠고 있었다.
꼭 하수오(何首烏)와 삼(蔘)을 결합시켜 놓은 듯이 생긴 이 기괴한 풀뿌리가 바로 감응곡이 그리도 애타게 찾아 헤매던 만년자령초였다.
인세(人世)에 한 번 볼까말까 한 희귀한 영초(靈草).
하늘의 뜻이 아니면 결코 인간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천고(千古)의 성약(聖藥)을 감상하던 감응곡의 두 눈이 돌연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결코 보물에 대한 탐욕도, 억만 금에 대한 속된 희망도 아니었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자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숭고한 집념이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감응곡은 상기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내일부터 연단(煉丹)에 들어가는 것이다.
서른일곱 가지의 약재(藥材), 세 가지의 영약(靈藥), 그리고 일곱 가지의 독물(毒物)까지.
모든 준비는 완벽하게 끝났다.
이제 백 일간의 연단이 끝나면 그는 평생의 숙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기다려라…… 당문제(唐)!’
꿈꾸는 듯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감응곡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때였다.
“아악!”
한참 동안 상념에 빠져 있던 감응곡은 난데없는 비명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
모옥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던 감응곡의 안색이 석상처럼 경직되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손녀딸이 낯선 괴한의 손에 입이 막힌 채 붙들려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워, 원하는 게 뭐요……?”
감응곡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괴인이 잡고 있던 손녀딸을 놓아 주었다.
“죄송합니다. 놀라게 해드리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단지…… 시끄러워지면 좋지 않기 때문에……”
괴인은 어딘가 모르게 몸짓이 부자연스러워 보였고 목소리 또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수십 년간 의술에 매달려 온 감응곡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어디가 불편하오?”
감응곡의 물음에 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조금 상처를 입었습니다.”
감응곡은 고개를 들어 괴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희미한 달빛 아래 단정한 이목구비와 맑은 눈빛이 보였다.
상처를 입고 누구에겐가 쫓기는 것 같았지만, 아무 일도 없는 듯 차분한 몸가짐이 결코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몸에 밴 정중한 태도를 보아하니 절대 악인(惡人)은 아닌 것 같았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군!’
감응곡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잠시 들어오구려. 얘야, 너도 어서 들어오거라!”
“감사합니다.”
괴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감응곡이 손녀딸의 손을 잡고 먼저 모옥 안으로 들어와 실내를 정리했다.
괴인은 한 번 더 감사의 말을 꺼낸 후 안으로 들어왔다.
감응곡은 비로소 그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耳目口鼻)에 어딘지 모르게 장중한 태도가 행동 하나하나에서 배어났으며, 나이는 서른이 조금 넘어 보였다.
괴인은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얼른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무림인인데 지금 적들에게 상처를 입고 쫓기는 중입니다…… 치료가 끝나는 대로 떠날 터이니, 잠시 이곳에 머무르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예의바르군.’
감응곡은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에게 쫓기는 위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깍듯이 예의를 지킬 줄 아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내 의술을 조금 아는데 잠시 진맥(診脈)을 해도 되겠소?”
“괜찮습니다.”
“사양하지 마시오.”
감응곡은 괴인이 미안해서 그러는 줄 알고 얼른 손목을 잡았다.
잠시 눈을 감고 진맥을 하던 감응곡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럴 수가……!”
감응곡은 이미 수십 년간을 의업(醫業)에만 전념해 온 사람이다.
인적도 없는 궁벽한 오지(奧地)에서 달랑 손녀딸 하고만 살고 있지만, 지닌 의술만큼은 전설의 화타
가 환생한다 해도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렇지만…… 감응곡은 여태껏 이런 상처를 입고도 멀쩡히 돌아다니는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오장육부가 심하게 망가졌고, 맥박도 거의 뛰지 않는다!’
괴인은 감응곡이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것을 느꼈는지 계면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니, 이런 몸으로 그 동안 어떻게 움직였단 말이오?”
“아직은 견딜 만합니다.”
감응곡은 염려스런 표정을 지었다.
상대에게 호감이 가는 탓도 있었지만, 수십 년간 의술에 정진했던 터라 몸이 아픈 사람만 보면 자신도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내가 뭐 도와 줄 일이라도……?”
“죄송하지만…… 잠시 혼자 있었으면 합니다. 뜨거운 물도 조금 필요하고요.”
감응곡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얘야! 우리는 잠시 옆 방에 가 있자.”
감응곡과 그의 손녀딸이 자리를 비켜 주자 괴인은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공(運功)을 하려는 것이다.
이윽고 실내는 정적에 휩싸인 채 괴인이 내뱉는 고른 호흡 소리만이 들려왔다.
“으음……!”
운공을 마친 철단소는 돌연 깊은 한숨을 뱉어 냈다.
내상(內傷)이 생각보다 훨씬 심했다.
쉴 틈도 없이 강적(强敵)들과 연이어 혈전(血戰)을 벌이느라 진기(眞氣)가 거의 고갈(枯渴)된 데다, 너무 무리하게 공력을 사용한 게 주된 이유였다.
특히, 마지막에 빙마에게 장력을 얻어맞은 후로 몸에 음한지기(陰寒之氣)가 침입해 전신이 마치 빙굴(氷窟)에 빠진 듯 떨려왔다.
이런 상태로 더 이상 무리하면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몰랐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군악을 만나야 한다.’
철단소는 억지로 입을 악 다물었다.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설사 사지(四肢)가 잘려 나간다 하더라도 꼭 사제(師弟)를 만나야 할 사정이 있었다.
지난 이십여 년 간을, 아니, 그의 모든 생(生)을 걸고 이루려는 일을 위해서 기필코 사제를 만나야 했다.
“……?”
한참 동안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철단소는 문득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흠칫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감응곡의 손녀딸이 물을 떠 놓고 수줍은 듯 앉아 있었다.
생각에 빠져 있느라 그녀가 들어와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것이다. 실례였다.
“이런……!”
미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철단소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눈동자에 초점이 없다!’
그렇다.
그녀는 맹인(盲人)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어딘가 이상한 느낌은 들었지만, 경황중이라 제대로 살펴볼 겨를이 없었던 철단소는 지금에서야 그녀가 앞을 못 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쩌다 저런 아가씨가……’
철단소는 깊이 탄식을 했다.
이제 스물이나 되었을까?
소녀라고 불리기에는 너무도 성숙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그녀는 이런 산속에서는 보기 힘든 미녀였다.
초생달 같은 눈썹에 오똑한 코, 그리고 학을 닮은 우아한 목선과 고즈넉한 자태가 실로 보기 드물 정도의 미색(美色)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는 앞을 보지 못했다.
“미안합니다. 생각을 좀 깊이 하느라고……”
그녀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아니에요. 기척을 내지 않은 제게 잘못이 있어요.”
참 예쁜 목소리였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물통을 내밀었다.
물통을 받은 철단소는 얼른 웃옷을 벗기 시작했다.
옆구리의 상처가 피에 엉겨 붙어 옷을 벗기가 영 거북했다.
낑낑거리며 한참 만에 옷을 벗은 철단소는 뜨거운 물로 옆구리를 씻으려 했다.
“윽!”
철단소는 비명을 토해 내며 물수건을 떨어뜨렸다.
그냥 있을 때는 몰랐는데 몸을 움직이자 상처가 당겨 도저히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목마의 목령지(木靈指)에 맞은 옆구리가 이상하게도 뻣뻣해지고 있었다.
철단소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목령지는 말 그대로 사람의 몸을 나무처럼 굳어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무공이 약한 사람은 단지 목령지에 스치기만 해도 전신이 뻣뻣하게 굳어 가는 고통 속에서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
철단소는 무공이 고강하기 때문에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계속 무리를 한다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철단소는 이를 악물며 물수건을 들었다.
만약 상처를 이대로 놔둔다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게 뻔했다. 어떻게 하든지 응급조치는 취해야 했다.
힘겹게 움직이던 철단소의 팔을 부드럽게 잡는 하나의 손이 있었다. 그녀였다.
그녀는 수줍은 얼굴로 철단소의 손에 들려 있는 물수건을 빼앗아 들었다.
“제가 씻겨 드릴게요. 앞은 보이지 않지만…… 잘할 수 있어요.”
철단소는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순수한 마음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신세 지겠습니다.”
이윽고 철단소가 몸을 맡기자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철단소의 옆구리를 씻기 시작했다.
상처가 매우 아팠지만, 철단소는 오랜만에 마음이 평화로워짐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을 떠올렸다.
부상당한 정인(情人)을 치료해 주는 연인(戀人)의 사랑스런 손길이 이러할까?
문득 잊고 지내던 과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도 예전에 이런 시절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밀어(蜜語)를 속삭이며 즐겁게 웃던 때가 있었다.
‘너무도 오래 전 이야기군!’
철단소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돌아올 수 없었다.
그것이 십 년 전 일이든, 혹은 어제의 일이든 마찬가지다.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면 차라리 깨끗이 잊는 것이 그를 위해서나 그녀를 위해서도 좋았다.
마치 과거를 털어 버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던 철단소가 문득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미처 이름도 물어 보지 못했군요.”
그녀는 수줍은 듯 잠시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제 이름은 감희연(甘嬉蓮)이에요.”
“아, 감 낭자셨군요. 저는 철단소라 합니다.”
“아! 예……”
감희연의 목소리는 철단소 같은 고수에게도 들릴까말까 할 정도로 작았다.
수줍음을 매우 잘 타는 것 같았다.
외인과 대화할 기회가 별로 없던 탓도 있겠지만, 오랜만에 나타난 말상대가 이성(異性)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감희연은 상처를 깨끗이 씻어 낸 후 품속에서 자그마한 약병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는 익숙한 손길로 병뚜껑을 열고 노란 분말을 철단소의 옆구리에 뿌렸다.
치이익!
노란색 분말이 살갗에 닿자 신기하게도 상처가 눈에 띌 정도로 금세 아물어들었다.
철단소는 상처가 무척 아팠지만, 얼굴을 조금 찡그렸을 뿐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감희연은 상처를 치료하며 신이 났는지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타인에 대한 수줍음보다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컸기에 한번 말을 꺼내자 봇물이 터진 듯 그칠 줄 몰랐다.
사실, 그녀는 오랜 동안 산속에서 생활하면서 사람이 너무나 그리웠다.
남들처럼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다정한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부(祖父)인 감응곡이 그녀를 애지중지한다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녀는 재미있는 얘기도 들려 주고 서로 고민도 얘기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철단소가 나타났으니 그녀가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철단소는 그녀의 향수를 달래 줄 좋은 말상대였다.
“상처가 매우 아플 텐데 잘 참으시네요. 음…… 지금 옆구리에 뿌린 약은 금창약(金瘡藥)의 일종인데, 웬만한 부상은 한 번만 뿌려도 상처가 아물 정도로 효과가 뛰어나죠…… 할아버지가 직접 만드신 거예요.”
철단소는 감희연의 조잘조잘 떠드는 모습이 아주 귀엽다고 생각했다.
“아까 그분이 조부신가 보군요?”
“예! 할아버지는 겉으로는 꽤 무뚝뚝해 보여도 제게는 아주 잘 대해 주세요.”
“좋으신 분 같더군요. 한데 부모님은 어디 계십니까?”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철단소의 물음에 감희연의 손이 가늘게 떨려 왔다.
일반인이라면 느낄 수 없었겠지만, 오감(五感)이 고도로 발달한 철단소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이런……!’
그는 직감적으로 물어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물었음을 알 수 있었다.
철단소는 비교적 성격이 세심한 편이어서 평소의 그라면 그녀가 늙은 조부와 단둘이 사는 것을 본 순간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겠지만, 부상을 입고 적에게 쫓기는 긴박한 상황에서 미처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철단소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감희연이 의외로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보기보다는 꽤 이성적(理性的)인 아가씨였다.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손길은 부지런히 상처를 싸매고 있었다.
“부모님은 제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는 부모님이 병으로 돌아가셨다지만, 저는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감희연은 잠시 보이지 않는 눈을 들어 뭔가를 보려 했다.
철단소는 그녀가 보려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행복했던 과거의 추억이었다.
그녀는 꿈꾸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미 철단소의 상처는 깨끗이 싸매져 있었다.
“……아마 제가 네 살 때였을 거예요. 그 전까지는 부모님과 할아버지 사이가 아주 좋으셨는데, 웬일인지 그날은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 꽤 심하게 말다툼을 하시는 것 같았어요……
원래 저희 집안은 유명한 의가(醫家)였었대요. 증조부께서는 당대의 신의(神醫)로 이름이 유명한 분이셨고, 비록 할아버지는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증조부님보다 의술이 더욱 뛰어나셨대요…… 그 당시 할아버지께선 무슨 약을 만들고 계셨었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
말다툼을 하신 거죠. 약을 만드는 데 성공한 할아버지께서 그것을 시험하기 위해 저희들에게 복용시키려 하셨고 아버지는 차마 그럴 수 없다며 반대를 하신 거죠…… 하지만 결국은 할아버지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는……”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참으려고 애를 썼지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철단소는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말없이 감희연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영롱하게 보였다.
아무리 고귀한 보석(寶石)이라도 그녀의 눈물만큼 아름답지는 못할 것이다.
철단소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갸녀린 몸을 보듬어 안았다.
비록 오늘 처음 본 사이지만, 철단소는 그녀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감싸 주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아픔과 외로움까지도 같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쳐 갔다.
아무런 말도 필요 없었다.
억겁(億劫)의 세월 같기도 한 짧은 시간이 지나가자, 감희연은 철단소의 품속에서 살며시 몸을 빼냈다.
눈물은 이미 멎어 있었고, 제법 차분한 신색이었다.
감희연은 눈물을 흘리자 어느 정도 슬픔을 가라앉힐 수 있었는지 비교적 차분한 신색이었다.
감희연이 상기된 표정으로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철단소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쓸데없는 말을 꺼낸 내 잘못이오.”
감희연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는 제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는 줄 알아요.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을 못 하는 줄 아시죠…… 제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걸 할아버지께서 아신다면 무척 괴로워하실 거예요. 그래서 할아버지께는 모른 척하고 있죠.”
철단소는 감동했다.
그녀의 예쁜 마음에 감동했고, 또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효심에 감동했다.
“할아버지가 원망스럽지는 않소?”
“아니에요…… 알고 보면 할아버지도 불쌍하신 분이에요. 당신으로 인해 하나뿐인 자식과 며느리가 죽고 손녀는 봉사가 되었으니 그 슬픔이 얼마나 크셨겠어요? 할아버지께선 이루고자 하시는 목표만 없었더라면 벌써 세상을 하직하셨을 거예요…… 이미 대가를 치르신 거죠.”
철단소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행하지만 아름다운 한 여인의 인생이 그에게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감희연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고요한 침묵이 실내를 감쌌다.
그러기를 얼마일까?
어색한 침묵이 무거운 듯 감희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식사 안 하셨죠?”
그녀의 말을 듣자 철단소는 몹시 허기가 짐을 느꼈다.
“음……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배가 고파지는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식은 음식이라도 좀 주십시오.”
감희연이 밝은 안색으로 대꾸했다.
“식은 음식은 없구요, 먹다 남은 거는 있어요.”
그녀의 장난기 어린 대꾸에 철단소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었다.
“하하! 그거라도 좋으니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후훗! 잠시만 기다리세요.”
감희연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철단소는 그녀의 얼굴에 행복한 표정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자 이상하게도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팔랑거리며 방문을 나서는 감희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철단소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귀여운 아가씨군!’
철단소는 미소를 지은 채 다시 운공을 시작했다.
악화된 내상을 조금이라도 더 치료하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적들은 설마하니 그가 아직도 대홍산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알아챘을 때, 그는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은 철단소는 이내 무아(無我)의 경지에 빠져들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