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六 章 팔괘유신장(八卦遊身掌)
오후가 되자 백조 깃털과 같은 큰 눈이 하늘 가득 내렸다. 청청은 원승지와 함께 성밖 서쪽 교외에 나가서 술을 마시며 눈을 감상하기로 하였다. 두 사람은 둘 만의 시간을 보낸 것이 이미 오래되었다. 더구나 이때 한나절 한가한 틈을 타서 나왔으니 매우 기분이 좋았다. 이 부근 일대는 모두 갈대밭이었다. 청청은 찬합에 안주를 가득 담아가지고 나왔다.
두 사람은 술을 마시며 환담을 하였다.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평상시에도 매우 황량하던 이곳이 눈이 내리자 더욱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원승지가 청청이 단철생에게 무슨 물건을 되돌려 주었는가를 물었다. 청청은 웃으며 그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
원승지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아니, 나는 조금 전 청청이 순해졌다고 칭찬을 했었는데 그렇게도 개구쟁이 같다니!』
청청이 오히려 되물었다.
『아니, 언제 저를 칭찬했단 말이에요?』
원승지가 정색을 한 채 대답했다.
『그야 내 마음 속으로 칭찬했으니 청청이 알 턱이 없었겠지.』
청청은 매우 기뻐하며 활짝 웃었다.
『누가 나타내지 않고 속으로만 그러라던가요?』
『어쨌든 그가 무슨 일을 부탁하려 했는지 궁금하군!』
『그런 사람은요…… 흥! 그가 무엇을 부탁하든지 들어주지 마세요.』
두 사람은 잠시 술을 마시며 구주의 석량에서 밤중에 꽃을 보며 술을 마시던 일을 생각해 내었다. 청청이 고향과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서 슬픔에 잠긴 채 울려고 하자 원승지는 재빨리 우스갯소리를 하여 기분을 바꿔 버렸다.
한나절을 앉았더니 날이 저물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릇을 거두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들이 정자 한 곳을 지나는데 어떤 거지가 풀로 만든 자리에 누워 바지 하나만 걸친 채 웅크리고 있었다. 청청이 혀를 찼다.
『저런! 불쌍하군요!』
그러면서 그는 은전을 그의 자리에 놓아 주었다.
『어서 가서 옷을 사 입으세요. 얼어 죽지 말고요…….』
그러면서 정자를 나서는데 그 거지가 투덜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돈을 주면 내게 무슨 소용이람! 더 추운 날씨라도 죽을 나는 아닌데! 술이 있으면 좀 마시게 하면 안 되나? 친구 같지도 않게시리…….』
청청이 이 말에 크게 성이 나서 그에게 욕을 하려고 했다. 원승지는 그 거지가 벌거벗고 있었지만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조금도 떨지 않고 더구나 추위를 타지 않는 것을 이상해 했다. 그래서 그의 말을 듣고는 급히 청청의 손목을 붙잡고 고개를 돌렸다.
『술은 아직 남아 있지만 안주가 먹다 남은 것이라 예의가 아닐 것 같아 못 드리겠소.』
그 거지는 부스스 몸을 일으키더니 손을 쓱 내밀며 말했다.
『거지이니 남은 음식과 찬술을 마시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소?』
원승지는 그릇에서 남은 술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받아들더니 목의 힘줄이 튀어나오도록 꾸륵꾸륵 마셔 댔다.
그는 40여세가 된 듯했는데 얼굴 가득 수염이 나고 양쪽 어깨는 거뭇거뭇한 상처의 흔적이 뚜렷했다. 그는 병을 다 비운 뒤 고개를 쳐들었다.
『좋은 술이로군! 이것은 20년된 '여아홍진소(女兒紅陣紹)' 로군!』
청청이 웃으며 대답했다.
『물건을 알아보시는군요. 입을 대자마자 척 맞추시다니!』
그 거지는 미흡하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술이 너무 적어서 안타깝군! 충분히 마시지를 못했으니…….』
원승지가 제의를 했다.
『내일 우리가 다시 술을 가지고 올 테니 그때 당신과 함께 취하도록 마시면 어떻겠소?』
그러자 그는 활짝 웃었다.
『좋소! 상공께서는 매우 시원하시오. 독서인이 그런 흉금을 가진 것은 참 드문 일이오.』
원승지는 그의 말을 듣고 그가 보통의 거지가 아님을 알고 몸을 돌려 정자를 나왔다.
잠시 후 청청은 호기심에서 고개를 돌려 다시 그를 보았다. 그런데 그 거지는 몸을 굽힌 채 뚫어져라 왼쪽 편의 무엇인가를 열심히 응시하고 있었다. 청청은 원승지의 손을 이끌었다.
『저 사람이 대체 무엇을 저리 보고 있는 걸까요?』
원승지도 돌아보았다.
『글쎄, 무슨 벌레 같은데?』
그 거지는 들여다보던 것에 손을 펼쳐 집으려는 동작을 취했다. 두 사람이 얼른 가까이 가서 보니 그 거지는 계속 손을 휘두르는데 얼굴은 매우 엄중한 빛을 띠고 있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그의 눈빛을 따라 눈이 쌓은 지면을 살펴보았다.
『아니……!』
그것은 작은 뱀이었다. 크기는 겨우 반자밖에 안되었으나 온몸이 황금빛으로 눈 속에서도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금빛 나는 작은 뱀은 눈 속에서 천천히 기어 나왔다. 거지는 몸을 일으켜 그 뒤를 바짝 따라갔다. 뱀은 십여 장을 나가더니 직경이 한 장쯤 되는 둥근 땅쪽 가까이에 도달하였다. 사방은 모두 흰 눈이 쌓여 있었으나 그 동그란 바닥 속에는 눈이 없었다. 눈발이 휘날리다가 그 맨 땅 밑에는 화로 하나를 묻어 둔 것만 같았다.
뱀은 그 둥근 바닥의 근처에 가더니 더 이상 들어가지 않고 고리의 바깥을 몇 바퀴나 맴돌았다. 거지는 원승지와 청청을 향하여 손짓으로 가까지 오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두 사람은 거지가 뱀을 잡으려 한다고 생각하고 뭐 그리 큰일일까 하였으나 그가 간섭하는 것을 원치 않는가 보다 생각하고 조용히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 작은 뱀은 동그라미 속의 큰 구멍을 향하여 계속 쉬익거렸다. 얼마가 지난 뒤 쑥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뱀이 갑자기 휘딱 뒤집어졌다. 구멍 속에서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빠져 나왔던 것이다. 청청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거지는 화난 눈으로 쳐다보았다. 만약 마음이 지금 이처럼 긴장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는 벌써 큰 소리로 청청을 향해 욕을 퍼부을 것만 같았다.
그 뱀은 사람의 주먹보다도 더 컸다. 원승지는 예전에 목상도인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그것은 무릇 뱀의 대가리가 세모꼴로 된 것은 반드시 무서운 독이 있다는 것이었다.
보통 큰 뱀은 독이 없는 법인데 이 뱀은 이렇게 몸집이 크면서도 독이 있다면 정말 드물게 볼 수 있는 뱀이었다. 뱀 같은 동물은 겨울에는 반드시 땅 속에 숨어서 겨울잠을 자기 때문에 바깥에 나오는 일이란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저 큰 독사는 작은 뱀에 의해 불려 나온 것 같았다. 붉은 혓바닥은 반자나 되게 길었는데 쉴 새 없이 낼름낼림거리는 모양이 정말로 무서웠다.
그때였다. 작은 뱀은 동그라미를 맴돌며 대단히 빠른 속도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큰 뱀의 몸통은 작은 뱀에 비하면 5, 60배나 컸지만 어찌된 일인지 작은 뱀을 보고는 뭔가 꺼리는 듯이 몸을 둥글게 꼬며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 작은 뱀을 노려볼 뿐 아예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작은 뱀은 맴돌면 맴돌수록 조급해 보이고 이에 따라 큰 뱀의 대가리도 그만큼 빨리 돌아갔다.
청청은 어떤 흥미를 느끼며 그것들을 주시하여 보았다. 그 거지는 손발을 춤추듯 놀리더니 무척 빠르게 낡은 포대에서 노란 빛의 무엇인가를 꺼낸 뒤 입안에 넣고 마구 깨물었다. 그리고 가느다랗게 만들어 동그라미 밖에 노란 금을 그었다. 그 약물은 냄새가 시고 매워서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지만 코를 찌르는 것이었다.
작은 뱀은 갑자기 뛰어 오르더니 큰 뱀을 향해 덮쳐들었다. 그러자 큰 뱀도 입에서 붉은 연기를 뿜어내었다. 작은 뱀은 공중에서 몇 번 움칠거리더니 땅에 떨어져 감히 붉은 연기에 접근을 못하고 다시 슬슬 피해 가 버렸다.
원승지는 번뜩 '금사비급' 중의 한가지 권법이 생각났다. 그 권법은 '팔괘유신장(八卦遊身掌)' 과 비슷했으나 변화는 더욱 무쌍하였다.
큰 뱀과 작은 뱀이 서로 공격하는 것을 보자 그 권법이 사투(蛇鬪)와 매우 흡사하다고 여겨졌다. 그 사투는 금사랑군이 만들어 낸 것인데 어쩌면 이런 사투를 보고 배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거지는 여전히 계속 약물을 씹으면서 꺼내 노란 실 동그라미 밖에 두 개의 동그라미를 또 그렸다. 동그라미 주변의 사이에 몇 척이나 되게 금을 긋고 난 그는 웃음을 띤 채 두 마리 뱀을 지켜보았다.
작은 뱀은 계속 큰 뱀에게 달려들다가 큰 뱀이 품은 붉은 연기 때문에 다시 물러서곤 하였다.
원승지는 생각하였다.
(작은 뱀이 몇 번 공격했지만 그 공격법이 매번 같지를 않구나! 저 큰 뱀이 내뿜는 붉은 연기도 갈수록 적어지는 것을 보니 더 싸운다면 분명 큰 뱀이 지고 말겠는 걸……)
큰 뱀은 갑자기 입을 벌려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더니 이제는 작은 뱀을 공격하며 물으려 하였다. 작은 뱀은 이리저리 피하며 줄곧 간발의 차이만큼 거리를 유지했다. 어떤 때는 큰 뱀의 주둥이 바로 앞을 가로질러 갔으나 큰 뱀은 시종 물지를 못하였다.
이러기를 몇 번 큰 뱀은 상대의 공격법을 알았다는 듯이 입을 벌려 왼쪽으로 쉬익 하며 물다가 작은 뱀이 뛰어오를 때 갑자기 몸을 길게 늘여 화살처럼 왈칵 덤비면서 작은 뱀의 꼬리를 물으려 하였다. 작은 뱀은 공중에서 한번 뒤틀더니 다시 몸을 굽혀 공격을 했다. 그 공격에 큰 뱀의 왼쪽 눈이 멀어버렸다.
원승지는 이런 광경이 평생 동안 드물게 보는 일인데다가 하도 절묘해서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좋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큰 뱀은 상처를 입자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얼른 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올 때도 빨랐지만 들어갈 때는 더욱 빨라서 순식간에 한 장이 넘는 몸뚱이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작은 뱀은 구멍을 향하여 다시 쉭쉭 기운을 보냈다.
청청은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야!』
그녀는 원승지의 손을 잡았다. 원승지가 놀라서 보니 그녀는 뱀들의 싸움하는 것을 구경하느라 너무 가까이 접근한 탓에 그만 큰 뱀이 뿜어낸 독을 마셔서 중독이 된 것이었다.
원승지는 호계남이 주었던 붉은 눈알의 빙섬이 생각났다. 독을 없애는 영물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침 품에 가지고 있었기에 급히 꺼내어 그녀의 입에 대었다. 청청은 빙섬의 기운이 몇 번 마시더니 이내 기운이 맑아지며 머리 어지러운 것이 싹 멈추었다.
그 거지는 해독을 시키는 빙섬을 보더니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응시하였다. 그의 눈엔 탐이 나는 빛이 서려 있었다. 원승지는 빙섬을 다시 품안에 넣고 청청을 이끌고는 몇 걸음 물러나면서 생각하였다.
(저 뱀을 잡는 거지가 그래도 보는 눈이 있군. 이것이 귀중한 물건인 것을 알아차리는 것을 보니…… 네가 매일 독물을 다루자면 이런 빙섬이야말로 몸을 보호하는 데는 최고의 보물일 테지!)
구멍에서 점점 붉은 연기를 내뿜고 있던 큰 뱀은 작은 뱀의 기운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든지 밖으로 나와 싸우기 시작했다.
큰 뱀은 붉은 연기가 더욱 짙어지더니 다시 신음소리를 냈다. 눈 한쪽이 이미 상했는데 얼마 안가서 오른쪽 눈도 마저 상해지기 시작했다.
큰 뱀은 구멍을 향해 맹돌진을 했다. 그러나 작은 뱀이 이미 그 구멍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두 뱀은 마주 노려보다가 큰 뱀이 문득 작은 뱀을 삼켜 버렸다.
원승지와 청청은 이 같은 결과에 대해 깜짝 놀랐다. 작은 뱀이 이미 이겼는데 어떻게 순식간에 큰 뱀에게 먹혀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큰 뱀은 몹시 괴로운 듯이 금방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더니 작은 뱀이 큰 뱀의 배를 문 모양인지 작은 뱀이 곧이어 뱃속에서 빠져 나왔다.
청청은 탄식하였다.
『아, 저 작은 뱀이야말로 참으로 교활하구나!』
큰 뱀은 얼마가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작은 뱀은 몸을 꼿꼿이 세우고 꼬리만 땅에 댄 채 득의만만해 하면서 큰 뱀의 시체 주위를 한 바퀴 돌고는 드디어 바깥쪽으로 몸을 돌렸다.
지켜보고 있던 거지의 표정은 몹시 엄숙하였다.
작은 뱀은 황색 원 옆을 돌더니 갑자기 안으로 뛰어 들었다.
청청이 원승지에게 물었다.
『저 황색이 무슨 물건이지요?』
원승지가 대답했다.
『웅황과 소황류로서 뱀을 억제시키는 약물일거야.』
청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작은 뱀은 참 재미있어요. 저 거지가 뱀을 쫓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아버지의 별명이 떠올렸다. 그리고 아까 거지의 태도가 무례하다는 것을 봤으므로 그 거지가 작은 뱀의 눈을 하나만 없애주었으면 하고 속으로 바랬다.
작은 뱀은 갑자기 몸을 위로 향하면서 꼬리를 사용해 위로 뛰어 오르더니 공중으로부터 황색 선을 넘어 두 번째의 동그라미 안으로 떨어졌다.
거지의 얼굴은 더욱 긴장되었다. 작은 뱀은 더욱 급히 맴돌다가 다시 총알처럼 날아서 드디어 첫 번째 동그라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지는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약물을 한 움큼 꺼내어 씹더니 자기 손과 어깨 위에다 발랐다. 작은 뱀이 동그라미 안에서 맴돌자 거지는 따라서 원을 돌며 질주하였다.
청청은 피식 소리를 내고 웃었다.
얼마 안돼서 거지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그 땀방울은 눈 위에 뚝뚝 떨어졌다.
청청은 웃음을 거두고 속으로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작은 뱀한테 땀까지 흘리며 정력을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
원승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 거지의 무공은 참 기가 막히다. 그의 무공을 사천광과 정청죽에 비교한다면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겠다.』
청청이 대답했다.
『제가 보기에는 별 볼일 없을 것 같은데요?』
원승지가 다시 덧붙였다.
『저 사람은 가슴을 움직이지 않고 있어. 숨을 쉬지 않고도 저렇게 오래 견디는 것을 자세히 봐.』
청청이 왜 물었다.
『왜 숨을 안 쉬지요? 아, 뱀의 독기를 안 들여 마시려고 그러는군요.』
사람과 뱀은 더욱 빨리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때 갑자기 뱀이 뛰어올라 동그라미 밖으로 나왔다. 거지가 입에서 기(氣)를 한입에 뿜어내었다. 뱀이 픽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맴돌기 시작했다.
이러기를 세 차례 뱀은 거지의 입김에 몸뚱이가 되돌려졌다.
그 작은 뱀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어느 때는 왼쪽, 어느 때는 오른쪽으로 빠져 나가려 하였지만 거지 또한 뱀을 계속 끌어 들였다.
원승지와 청청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청청은 박수까지 치며 끝내 소리까지 지르곤 하였다.
거지는 작은 뱀이 황색 원을 뛰어 나가는 것을 보자 이제는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작은 뱀은 도망을 가지 않고 머리를 쳐들고서는 도리어 거지를 향해 공격을 해 왔다. 거지는 갑작스런 그 공격에 당황하여 수비도 공격도 못한 채 어리둥절해 했다.
그때 원승지가 수중에 있던 3개의 동전을 뱀에게 던져서 거지를 구해 주었다. 작은 뱀이 여러 차례 거지를 공격했으나 거지는 그것을 모두 피했다. 거지는 다급해진 나머지 무슨 묘안을 생각해 냈는지 작은 뱀이 뛰어 오를 때 왼쪽 손의 검지를 내미는 것이었다. 그러자 작은 뱀이 잽싸게 한입에 검지를 물어 버렸다. 그러나 거지는 오른손의 두 손가락을 이용해서 뱀의 머리를 잡고 힘을 주자 뱀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때를 이용해 그는 가방에서 쇠토막을 하나 꺼내더니 작은 뱀을 그 속에 집어넣고는 나뭇가지로 꼭꼭 막았다. 그리고 쇠토막을 땅바닥에 던지며 원승지를 향해 외쳤다.
『빨리 빙섬을 가지고 와서 날 구해주시오.』
청청은 그 뱀이 잡혔고 또한 그 거지의 말이 무례했으므로 화가 나서 대답했다.
『안 줄 거요.』
원승지는 그의 무공이 뛰어난 것을 보아왔거니와 안타깝게도 그의 손바닥이 이미 까맣게 변하면서 거의 배가 되게 부어오르는 것을 보고는 얼른 빙섬을 꺼내어 그에게 넘겨주었다.
거지는 매우 기뻐하며 빙섬을 왼손 검지에 대었다. 빙섬을 댄 지 조금 지나자 곧 상처에서 검은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눈 위에 떨어지는 피는 마치 먹물과도 같았다.
손바닥의 검은 기운이 차츰 가시고 부은 것도 점점 가라앉자 얼마 안가서 피도 붉어지기 시작했다.
거지는 하하 웃으며 바지를 찢어 상처를 싸매고는 빙섬을 보따리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그 빙섬을 돌려주어야지요.』
청청이 외치자 그 거지는 눈썹을 찡그리며 무서운 얼굴로 돌아보았다.
『무슨 빙섬?』
청청은 그 거지의 등을 가리키며 주춤 물러섰다.
『아! 저기에 뱀이 또 있어요!』
거지는 겁을 먹고 고개를 돌려 자기 뒤를 보았다. 그때 청청이 쇠토막을 들어 거지의 등을 치면서 소리쳤다.
『내가 뱀통을 풀었어.』
거지는 그 뱀통이 풀렸으면 그 작은 뱀이 분명히 뛰쳐나와 자기의 등을 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몹시 심하게 물린 것처럼 옷을 벗어제끼고 빙섬을 갖다 대었다.
그는 하하 웃으면서 빙섬을 원승지에게 돌려주었다.
『난 그저 농담을 해 본 것뿐인데 이 아가씨가 참 총명하군요.』
청청은 원승지로부터 빙섬을 건네받고서야 쇠토막을 내려놓았다.
원승지는 그 거지와 결의를 맺을까 생각했었지만, 목숨을 구해 주어도 고맙다는 감사의 표시는커녕 보배를 뺏어가려고 하는 인품이 나쁜 사람인 것을 알아차리고는 마음을 돌렸다.
『훗날 또 만날 수 있겠지요.』
원승지는 청청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
그러자 거지는 흉악한 얼굴을 하고는 소리쳤다.
『잠깐만 멈추지!』
청청이 화가 나서 물었다.
『뭘 하자는 거요?』
거지가 싸늘한 표정으로 빈정거렸다.
『빙섬을 여기 놔두고 가시지. 당신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대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한 청청이 욕을 내 뱉으려 하자 원승지가 그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거지는 눈을 굴리며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더니 곧 달려들 기세를 취했다.
(이 악한을 한 번 골탕을 먹여야 갰군.)
이렇게 생각한 원승지도 은연중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 거지가 막 달려들려고 할 때였다. 멀리서 무기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몇 사람이 쫓기며 눈 위로 달려오고 있었다.
앞쪽에 쫓기는 사람은 두 명의 붉은 옷을 입은 동자였다. 그의 어깨 위에는 커다란 자루를 메고 있었다. 그들은 쫓기면서 싸우고 있었는데 뒤에 쫓아오는 사람은 4, 5명의 관병들이었다. 그 중 한사람은 분명히 원승지와 청청이 알고 있는 애꾸눈 단철생이었다.
그는 손에 쇠몽둥이를 들고 때리며 상대방을 막고 있었다. 그것은 관가에서 흔히 사용하는 무기였다. 무공이 뛰어난 사람의 손에서는 극히 위력이 있는 것이었다.
그 쫓기는 두 동자는 싸움을 계속하면서 곧장 거지에게 달려와 소리쳤다.
『제(齊) 숙부! 제 숙부님!』
그러면서 어깨 위의 자루를 내동댕이쳤다. 그러자 거지가 두 손으로 자루들을 받아서 땅바닥에 잘 놓았다.
두 동자가 자루를 내려놓은 뒤 민첩한 동작으로 단철생과 싸우는 것을 본 거지는 실력이 막상막하인데다 관병들의 무공이 그저 그렇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그들을 놔둔 채 빙섬이 탐났던지 몸을 돌려 원승지의 어깨를 잡아채려 했다.
원승지는 무공을 나타내 보이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대로 달려가 단철생 뒤에 숨어 버렸다.
단철생은 원승지와 청청이 그 거지와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랬다. 그러나 거지와 원승지가 적대 관계임을 눈치 채고는 정신이 바짝 들어선지 왼손으로 쇠몽둥이를 잡고 계속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자 '아!'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명의 동자가 견정혈(肩貞穴)에 몽둥이를 맞았다. 다른 한 동자가 놀라는 틈을 이용하여 단철생의 한쪽 발이 다른 동자를 내리 찼다.
그 거지는 의연히 선 채로 포악스럽게 내뱉었다.
『누군가 했더니 알고 보니 단노야이셨구료!』
단철생이 그 말을 받았다.
『당신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오?』
거지가 대답했다.
『난 한낱 더러운 거지일 뿐이오. 어디 이름 같은 것이 있겠소이까?』
그러면서 몸을 굽혀 붉은 옷의 동자가 찔린 혈도를 살폈다. 그때 두 명의 관병이 달려들어 땅바닥에 있는 자루를 집었다.
순간 그 거지가 휘익 소리를 냈다. 그러자 두 명의 동자는 각각 한 자루씩 뺏어 들고는 순식간에 관병을 때려 눕혔다. 그리고선 도망가 버렸다.
단철생이 쇠몽둥이를 들고 뛰어 쫓아가며 말했다.
『간덩이도 큰 놈들! 거기 내려놓지 못할까!』
두 명의 동자들은 들은 채도 않고 도망을 쳤다. 단철생이 쇠를 들어 그들 동자의 등을 향해 꽂으려고 하자 갑자기 바람소리와 함께 거지가 달려들어 쇠몽둥이를 빼앗아 버렸다. 단철생은 외눈이긴 하지만 무공이 뛰어난 지라, 그 거지의 팔을 꺾으며 등을 공격했다. 그러자 그 거지도 그만 두 동자를 따라가 버렸다……
단철생은 거지의 무공을 자세히 시험해 보고 싶었지만 그가 떠나 버리자 그저 손목을 털고 말았다. 그리고는 원승지를 향하여 몸을 굽혔다.
『소인을 죽여주십시오. 어서 소인을 죽여주십시오.』
그의 말에 원승지는 어안이 벙벙해 졌다.
『단노야, 그러지 마십시오. 그런데 대체 그 거지는 어느 파입니까?』
단철생이 대답했다.
『저 안으로 좀 드시지요. 소인이 천천히 아뢰겠습니다.』
세 사람이 전각으로 들어가 앉아 단철생은 이 일의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했다.
지난달에 호부의 큰 창고에서 세 차례나 도적을 맞았는데 모두 합쳐 수천 냥의 은을 잃었다고 한다.
황제의 수하들이 이 일을 색출해 내느라고 아홉 성이 발칵 뒤집혔다. 2, 3일이 지나자 황제도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호부부상서(戶部傅尙書)와 오성병마(五城兵馬) 지휘사를 즉각 갈아치우고 어명을 내렸다는 것이다.
- 한 달 만에 범인을 못 잡으면 호부와 병마 지휘사의 대소직을 불문하고 모두 삭탈관직(削奪官職)하고 엄한 징계를 내릴 것이니라.
북경의 관원들과 식솔들은 모두 날마다 감시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조사는 갈수록 심해졌지만 연이어 도적이 들었다. 관원들은 뾰족한 방법이 없자 단철생을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하길 이미 정년퇴직한 관원이지만 제발 이 일을 맡아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철생은 이 일을 맡게 되었는데 창고의 안팎을 조사해보니 도적들의 수법이 보통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냈다고 한다. 듣자하니 최근에 성안에 있는 무사 중에서 원승지 일행이 우수하다는 평이 나 있었던 것이다.
청청은 여기까지 듣고 피 하면서 웃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우리를 의심하고 있었군요?』
단철생이 거듭 머리를 숙였다.
『소인의 죄를 용서하시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짐작했었는데 다시 알아보니 원상공은 남경에서 의로운 일을 행하고 산동에서 사(沙), 정(程) 맹주와 강호 일곱 성의 맹주들이 정말로 위대한 대영웅으로 모시는 걸 알았습니다.』
청청은 단철생이 이처럼 원승지를 찬양하는 소리를 듣고 자기도 모르게 기뻐서 얼굴색이 환해졌다.
단철생은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소인은 원상공처럼 높으신 영웅이 어찌 도적질을 하겠는가? 이건 분명히 그의 부하가 한 짓일 게다. 원상공 같은 영웅이 경성에 왔는데도 우리가 마중 나오지 않으니 화가 나서 경고를 주려고 한 일일 것이라고 속단했었습니다. 도대체 그 누가 소인의 눈을 멀게 하여 대영웅을 못 알아보게 했는지…….』
청청은 흰 자위가 유난히 많은 그의 외눈을 보고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단철생이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혔다.
『날마다 가서 사죄하고 문안을 여쭙겠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누가 당신의 마음을 안단 말이에요?』
청청의 말에 단철생이 꼬리를 달았다.
『하지만 이 일은 어떻게 하지요? 우리 모두는 원상공께서 화를 푸시고 은을 되돌려 주시어 성안의 수백 명 관원과 그 가족들을 살려 줄 것을 간청합니다.』
원승지가 말이 없자 단철생은 다시 이었다.
『이 일로 인해 모두가 근심에 빠져 있습니다. 소인은 사실 오늘도 창고 속에 숨어 원상공이 파견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온 사람은 그 두 명의 붉은 옷의 동자였지요. 그들을 쫓아 여기까지 왔다가 그 거지를 만났으니 이제는 어찌해야 좋을지 방법을 일러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계속 코가 땅에 닿게 머리를 숙였다……
원승지는 급히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 거지와 붉은 옷의 동자는 비록 좋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관부와는 적이지 않는가? 내가 왜 관원들을 도와야 하는가? 조정의 은을 훔치는 것도 결국 틈왕의 일을 돕는 일 일터인데……)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그는 그 거지를 보게 된 일과, 그 거지가 뱀을 잡는 것 그리고 빙섬을 훔치려 했던 일들을 낱낱이 설명해 주었다.
단철생은 계속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원승지가 웃으며 거절하였다.
『도둑을 잡는 것은 어르신들이 하실 일입니다. 저는 아직 어려서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단철생은 그의 어조가 엄숙해지자 다시 더 청하지 못하고 일어섰다.
돌아오는 도중 청청은 그 무례한 거지를 비난하면서 꼭 언젠가 한 번 혼을 내 주어야 한다고 원승지에게 졸랐다. 그러던 중 원승지와 청청은 여러 명의 금의위 병사들이 한 무리의 범인들을 잡아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무리들은 모두 백발의 노인이거나 어린애를 안고 있는 노약한 부인네들이었다.
병사들은 이리나 호랑이처럼 무섭게 굴고 쌍스런 욕도 마구 퍼부어댔다.
그 중의 한 젊은 부인이 말했다.
『사람은 좀 좋게 다루시도록 하세요. 우리도 모두 관가의 밥을 먹고 있는 사람이오.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 성안에 도적들이 있다고 이렇게 비참하게 죄를 뒤집어씌우다니 너무하지 않아요?』
한 병사가 그녀의 뺨을 만지며 낄낄 거렸다.
『그 도적들이 아니면 우리가 무슨 인연으로 당신들과 이렇게 만났겠나!』
원승지와 청청은 몹시 화가 났다. 범인이 바로 성안의 포졸들의 가족임을 알았다. 관원과 포졸들은 양민을 학대하고 더구나 힘없는 노약자들에게 대한 횡포는 매우 심하였다.
조금 더 가자니 한 무리의 포졸들이 십여 명을 쇠사슬로 묶어 끌고 갔다.
『도적을 잡았다! 날 도적을 잡았다!』
이렇게 외치자 많은 백성들이 나와 쳐다보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원승지와 청청도 가까이 가서 보니 도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었다. 생각해보니 이 모두가 포졸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아무렇게나 잡아들이는 중인 것 같았다.
처소에 돌아오니 홍승해가 밖에서 고개를 빼고 이리저리 그들을 찾고 있었다.
『돌아오셨군요! 이젠 됐어요.』
원승지가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홍승해가 대답했다.
『정청죽 방주께서 상처를 입었습니다. 상공이 돌아와서 그를 구해주길 기다리고 있었지요.』
정청죽의 무공을 당할 자가 없는데 어떻게 상처를 입을 수 있었을까 하고 놀랐다. 홍승해를 따라서 급히 정청죽의 방으로 들어가니, 침대에 누워있는 그의 얼굴은 거무스레한 것이 한겹 덮어씌운 것처럼 흑갈색이 되어 있었다.
사천광, 호계남, 나철한 등이 침대 옆에 앉아서 모두들 우거지 얼굴들을 하고 침울해 있다가 원승지를 보자 일련의 화색이 돌았다.
정청죽의 두 눈은 이미 꼭 감기고 호흡이 거의 끊어진 듯 희미함을 보고 원승지가 다급히 물었다.
『정청죽 사형이 어디서 다쳤는가?』
사천광은 정청죽을 부축해 그의 상의를 벗겼다.
원승지는 정청죽의 오른팔 어깨 부위가 먹물처럼 까맣게 변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검은 기운은 위로는 조금씩 조금씩 얼굴 쪽으로 번져 머리 부분으로 옮겨가는 중이었고 아래로는 허리부분까지 퍼져 있었다.
어깨 죽지 부분 중 제일 까만 다섯 군데가 있었는데 상처가 깊이 살 속까지 파고 들어간 흔적이 역력했다.
원승지가 물었다.
『어떤 독물로 상처를 입었더냐?』
사천광이 대답했다.
『정 방주를 겨우 부축해 왔는데 이미 말을 못했습니다. 그러니 무슨 독에 중독되었는지 저희도 모를 일이지요.』
『다행히 여기 빙섬이 있다.』
원승지는 빙섬을 꺼내어 그것의 입을 상처에 대고 그것의 등을 눌러 내공을 집어넣어 독기를 빨아들이게 했다. 그랬더니 백옥 같던 빙섬이 점점 회색으로 변하고 이어서 점차 검은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호계남이 입을 열었다.
『빙섬을 끓는 술에 담그면 독즙을 뿜어내게 할 수 있습니다.』
청청이 급히 큰 항아리에 술을 끓여왔다. 빙섬을 그 속에 담그니 과연 빙섬의 입에서 까만 물이 줄줄 흘러나와 온 항아리의 술을 먹물처럼 만들고 빙섬은 다시 순백색으로 되었다.
이처럼 독을 빨아내기를 네 번이나 거듭하니 정청죽의 몸은 검은 기운이 차츰 가시기 시작했다……
하룻밤을 지새우고 나서 원승지가 정청죽을 보러가니 그는 이미 일어나 앉아 있다가 감사의 뜻을 표했다.
원승지가 손을 흔들며 그에게 말을 못하게 하고 북경성 안에 있는 명의를 불러다가 해독하는 약을 달여 먹였다. 사흘째 되던 날 정청죽은 말을 할 수 있게 기운을 차렸다. 그리고 그는 중독이 된 연유를 소상히 말해 주었다.
『그날 저녁 내가 금궁문 앞을 지날 때였고. 갑자기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마치 어떤 자들이 싸우는 듯했어요. 그래서 가까이 가서 보니, 땅바닥에 두부 죽을 파는 아이인데 실수로 그만 지나가던 장정과 부딪쳐서 장정의 옷을 망쳐 놓았다더군요. 그 애가 너무 가련해서 내가 나가 그만 하라고 했더니 그 장정은 다 소용없다면서 꼭 배상을 받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물어보니 은 두 냥이라고 하기에 주머니에서 은 두 냥을 꺼내 줘 버리려고 했지요. 누가 알기나 했겠어요? 그게 그 나쁜 놈들의 함정이란 것을요. 내가 오른손을 막 주머니에 넣으려고 하자 두 사람이 갑자기 달려들어 내 손목을 한쪽씩 잡아채더니…….』
청청은 여기까지 듣고 '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정청죽이 이어 말했다.
『난 즉각 상태가 불리함을 느끼고 두 팔을 뿌리치며 이유를 물으려고 했지만 벌써 오른쪽 어깨가 뼈를 깎는 듯이 아팠어요. 그렇다고 먼저 방어할 수도 없었고 해서 당장 칼을 빼들고 그 장정의 손을 되돌려 잡아 몸을 치켜든 다음 어린애의 머리에 꼬나 박고선 재빨리 앞으로 도망갔지요.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니 등 뒤에 검은 옷을 입은 거지가 날 덮치려 하고 있었어요. 그 거지는 생긴 것이 흉측하고 무서웠어요. 온 얼굴이 울퉁불퉁한 상처투성인데 두 눈을 까뒤집고 냉소를 짓고 있었어요. 그러더니 10개의 날카로운 씨앗을 내게 마구 던졌어요.』
정청죽이 여기까지 얘기하고 아직도 마음이 불안한지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청청은 비명을 질렀다.
사천광과 호계남 등도 모두 음 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다시 정청죽이 뒤를 이었다.
『나는 한편 분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뒤로 물러선 다음 반격을 하려 했어요. 그런데 오른팔을 움직일 수가 없는데다 온몸이 말을 듣질 않았어요. 그 거지 노인은 괴상한 웃음을 웃으며 앞으로 다가왔어요. 난 급한 김에 왼손으로 두부 죽 한 통을 들어 그 거지 얼굴에 던져 버렸지요. 그 거지는 두 손으로 얼굴을 닦아 내리더군요. 그 틈을 타서 청죽 두 가지를 뽑아 거지의 가슴에 던져 맞추었지만 그때는 이미 내 몸을 가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집쪽으로 미친 듯이 도망쳐 왔는데 그 뒤는 더 이상 생각이 안나요.』
사천광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거지와 너는 만난 적이 있었는지?』
정청죽은 고개를 저었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어. 우리 청죽이 강남 강북의 거지들을 도울 때도 방해한 적은 없었어요.』
청청이 대답했다.
『그렇다고 그 거지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하기도 어렵잖아요?』
정청죽이 대답했다.
『잘못 보진 않았어요. 그 거지가 나를 때려눕힐 때 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어요. 그가 내 얼굴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더니 한 번 더 독을 뿌렸어요.』
호계남이 투덜거렸다.
『그 거지가 가진 씨앗 위에 무슨 독약을 묻혔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독할 수가 있을까?』
사천광이 말했다.
『거지가 가진 씨앗은 분명히 철로 입혔을 거야. 안 그러고서야 이렇게 독한 독약을 만지고 자기가 어떻게 견디었을라고.』
일행은 의견이 분분했지만 거지가 어떤 사람인지는 끝내 알 수가 없었다.
정청죽은 분을 이기지 못해 계속 중얼중얼 욕을 해대고 있었다.
사천광이 그를 달래었다.
『정방주는 안심하고 휴식을 좀 취하고 있어요. 우리가 가서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고 알게 되면 꼭 복수를 해 줄게요.』
사천광과 호계남, 나철한, 홍승해 등은 북경성을 돌아다니며 연 3일 동안 사방으로 알아보았으나 어디서든 아무런 소식 하나 알아내지 못하였다.
그날 아침 단철생이 와서 사천광을 찾았다.
단철생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호부의 은 삼천 냥이 없어졌다고 했다. 사천광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무엇을 생각하더니 아마도 이것 역시 그 거지의 짓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단철생은 집히는 데가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아침 단철생이 다시 헐레벌떡 뛰어와서 사천광에게 말했다.
『사 숙부님, 그 거지노인의 소식을 한 가닥 알아냈어요. 원상공과 같이 상의해 보도록 하세요.』
사천광이 들어가서 뜻을 전하자 청청이 대답했다.
『흥! 그가 우리를 팔아먹는 건지 협조하는 건지 어떻게 알아요?』
그러자 원승지가 입을 열었다.
『동생이 말하기를 그 거지가 정(程) 숙부의 청죽을 맞고 쓰러졌대요. 거지는 지골피(地骨皮), 천오안(川烏顔), 사자(蛇子) 등을 대량 써야 독이 풀린다는 것을 알고 몰래 사람을 시켜 성안의 약방마다 돌아다니며 그런 약들을 사 모은다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거지의 상처가 깊어서 약재가 바닥나도록 낫지를 않는데요. 마침 운이 좋아서 어떤 한 약방에 좀 남아 있던 약재를 더 사갔다고 하던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어요.』
정청죽이 물었다.
『이상하다니요?』
『거지가 몸을 피하고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성대군의 별장이래요. 성대군은 황제의 숙부지요. 그렇게 귀한 분이 어떻게 그런 강호 인물과 교제를 하고 있지요? 그래서 동생도 확실히 알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일행은 모두 놀랐다.
원승지가 입을 열었다.
『우리하고 같이 그 별장으로 가자. 거기 가서 다시 얘기해 보도록 하자.』
정청죽은 몸이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기에 원승지의 권고에 따라 집에 남기로 했다. 적들이 이 기회를 틈타 복수 할지도 모를 일이므로 홍승해가 남아 그를 지키도록 했다.
성을 나와 7, 8리 정도를 가니 멀찌감치 검은 색의 담장이 하나 보였다.
단철생이 그곳을 가리켰다.
『저곳이에요.』
원승지는 문득 의심이 치솟아 속으로 생각했다.
(저곳은 분명히 홍의동자가 들어간 곳이다. 그렇다면 단철생이 대도적들의 소굴을 찾아내어 고의로 우리를 끌고 온 것이 틀림없다. 만일 대군의 별장이라면 어찌 이리도 허술할 수가 있겠는가?)
요 며칠 하도 괴상한 일만 생긴 까닭에 그는 우선 단단히 조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때 사천광도 원승지가 예전에 대문이 없는 큰 저택 얘기를 한 것이 생각나 단철생에게 물었다.
『저 저택은 문이 없는데 어떻게 들어가지?』
단철생이 대답하였다.
『분명히 비밀문이 있을 거요. 대군의 집이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감히 묻질 못해요.』
원승지는 뭔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도 내색하지 않고 단철생이 어떻게 나오든 간에 그저 변화무쌍하게 흘러가는 하늘의 흰구름만 바라보았다.
그때 갑자기 닭울음소리가 들리고 두 마리의 수탉이 담을 넘어 날아왔다. 그러자 청색 옷을 입은 동자 두 명이 담을 넘어 닭을 붙잡는데 그 동작이 민첩하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들은 닭을 잡고 원승지를 몇 번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청청이 한마디 했다.
『저렇게 큰 닭은 아직 본 일이 없어요. 적어도 여덟, 아홉 근은 넘겠는데요?』
호계남이 대답했다.
『수탉이 저렇게 크면 저런 높은 담을 넘을 수가 없어요. 분명 어떤 사람이 담 안에서 던졌을 것이오. 그 두 동자는 닭을 잡는 척하면서 사실은 우리들의 동태를 살핀 것이 분명해요.』
사천광도 한마디 했다.
『흠…… 그 두 동자의 무공도 보통 수준이 아닌 걸 보면 저 집은 분명히 무슨 계략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지직 소리가 나더니 벽이 갈라지며 문이 생기고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 사람은 하늘색의 금빛이 번쩍번쩍 하는 옷을 입고 그 위에 가지각색의 비단을 수많은 작은 못으로 박아 입고 있었다. 그 모양이 마치 무대 위의 광대 같았다.
점점 가까이 걸어오는데 자세히 보니 원승지와 청청, 그리고 단철생은 모두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바로 일전에 눈 위에서 뱀을 잡던 그 거지였기 때문이었다.
그 거지는 눈을 한 번 괴상하게 굴리더니 원승지를 향해 일갈했다.
『일전에 상공의 좋은 술대접을 받고 아직 은혜를 갚지 못했는데 오늘 이렇게 왕림하여 주셨으니 안으로 들어갑시다. 내게 기회를 한 번 주심이 어떻겠소?』
원승지는 흔쾌히 대답했다.
『좋지요. 다만 황송할 뿐입니다.』
그 거지는 대답도 않고 왼손을 내밀어 손님을 안으로 데리고 갔다.
원승지가 먼저 들어가 보니 담벼락은 아주 두꺼운 청색 돌로 되어 있고 철문도 무척 두꺼운데 바깥쪽의 담벽과 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철문과 담벽 사이는 매우 정교해서 마치 문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일행이 담을 걸어 들어가니 철문은 뒤쪽에서 소리도 없이 잠겨지고 다시 붉은 담을 걸어 들어서니 응접실이 나타났다.
그는 사람을 시켜 술과 음식을 가져오게 했다. 일행은 풍성한 음식을 보고 놀랐다. 더욱이 매 접시마다 음식이 모두 새빨갛고 새파란 것 뿐이었다…… 생긴 모양도 이상하지만 색깔이 너무 선명한 것이 모두 사충류(蛇蟲類)인 것 같아 누구도 감히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그 사람은 하하 웃었다.
『드시죠, 자……!』
그러면서 손을 뻗어 음식 하나를 집어 들었는데 머리가 빨갛고 몸통이 까만 것이 놀랍게도 그것은 지네가 분명했다.
일행은 모두 겁을 먹고 쳐다만 보았다. 그 거지는 입을 크게 벌리고는 큰 지네 한 마리를 맛있다는 듯이 쩝쩝거리며 씹어 삼켰다.
청청은 속이 머쓱해 토할 것만 같아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그것을 보지 않았다.
그 거지는 상대방을 놀라게 한 것이 도리어 득의만만해 하며 단철생을 보고 한마디 했다.
『너는 우리 파의 응과 자손인데 창고의 은이 보고 싶어 온 모양이지? 흥, 너는 내가 누구인 줄 알기나 하느냐?』
단철생이 대답했다.
『소인의 불찰을 용서하시고 존함을 좀 알려 주십시오.』
그 사람은 껄껄 웃더니 술을 벌컥벌컥 들이킨 다음 또 무슨 벌레 한 마리를 집어 씹으면서 말했다.
『성은 제(齊)이고 이름은 운오(雲傲)인데, 이름이 없을 때 죽은 걸로 되어 친형도 모르고 있구나.』
단철생은 화들짝 놀라서 몸을 벌떡 세웠다.
『아! 그렇다면 영웅께서는 그 금의독개(錦衣毒凱)시군요. 저도 많이 들었습니다.』
원승지는 금의독개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지만 단철생이 놀라 떠는 것을 보니 분명히 거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다.
일전에 뱀을 잡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거대한 인물인 줄은 미처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단철생이 무한히 존경하는 어투로 다시 말했다.
『귀파가 두 황운에서 도를 행한다고 있다함은 익히 알고 있으나 인연이 안 닿아 뵙지를 못했었습니다.』
제운오가 말했다.
『맞다. 우리가 경성에 온지가 불과 몇 개월밖에 되질 않았으니까.』
단철생이 대답했다.
『저는 이미 오랫동안 공문(公門)의 밥을 먹지 못한 탓에 이렇게 제(齊)영웅이 경성에 오셨는데도 우리 형제들이 몰라 뵙고 예의를 못 갖추었습니다. 이 점 백배 사죄드립니다.』
그러면서 계속 허리를 굽혔다.
제운오는 음식만 먹을 뿐 더 이상 대답하지 않은 것을 보고 원승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공문이 백성들을 괴롭힐 때 늑대나 호랑이와 같다더니, 오늘 그 두목을 만나보니 과연 백성들을 괴롭히게 생겼군. 어디 한 번 일이 어떻게 결말을 맺는지 두고 봐야지.』
단철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형제들이 어리석고 불찰이 많은지라 제영웅에게 아직도 인사를 못 드리는 죄를 범했습니다. 분부만 내려 주신다면 저희가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제운오가 대답했다.
『오늘까지 우리가 모은 은은 모두가 4만 5천 냥에 불과하다. 사실 너무나도 적은 돈이야. 계획으론 10만 냥 정도를 가져가야겠는데…… 가져 올 수 있겠지?』
단철생이 대답했다.
『호부부상서와 오성병마 지휘자가 알게 한 후에 꼭 성대군에게 사죄를 하겠습니다. 저희는 그저 기분에 맞춰야겠지요.』
그러자 제운오가 눈을 괴상하게 한 번 굴렸다. 그리고는 살벌하게 외쳤다.
『은이 성대군의 별장에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네가 살아나갈 수 있다고 여기지 않겠지?』
이 말이 끝나자 모두들 놀라 얼굴색이 노랗게 변했다.
순식간에 응접실 바깥쪽에서 찢어지는 듯한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참으로 모발을 곤두서게 할 정도로 괴상하고 기분 나쁜 소리였다.
청청은 원승지의 손을 붙들고 놀라서 말했다.
『교주(敎主)께서 오신다. 모두 가서 그 모습을 보리라!』
단철생이 놀라 말했다.
『귀 교주께서 북경에 오셨다고요?』
제운오는 냉소를 띄운 채 대답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단철생이 한마디 했다.
『사태가 위험합니다. 우리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갑시다. 만일 오독교주가 정말로 왔다면 우리는 모두 죽는 것은 물론이오, 뼈 한조각도 남길 수가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