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자녀들을 자녀들과 함께 신앙생활하는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는 아마 주일날 아침이 되면 교회에 나오는 것 때문에 실랑이를 벌일 일들이 간혹 있을 겁니다. 때로는 그게 남편이 될 수도 있고 아내가 될 수도 있고 가족 간에 같이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일들이 있을 텐데 어느 날 아버지와 아들과 어머니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습니다. 아들은 교회 가기 싫다고 하고 어머니는 그 아들을 설득하는 중입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묻습니다.
너 도대체 왜 교회를 가기 싫어?
세 가지의 이유를 대봐 그랬더니 아들이 말합니다.
첫 번째 너무 피곤해요. 두 번째 좀 너무 이렇게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이 눈에 보여요. 세 번째 일요일에만 친절한 척 친한 척 하는 성도들이 보기 싫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이 말을 들은 어머니가 한참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그러면 니가 오늘 교회에 가야 되는 이유 세 가지를 알려주마. 첫 번째 주일은 꼭 지켜야 된단다. 두 번째 교회는 사람을 보고 다니는 게 아니야 하나님을 보고 다녀야지 세 번째 니가 담임 목사니까 가야지
그냥 하나의 이야기거리인데요. 목사님들 중에서도 주일날 교회에 가기 싫을 때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을 것 같죠 물론 재미있게 꾸며낸 이야기이긴 하지만 여기에서 어머니가 교회에 가야 될 이유 중에 두 번째로 했던 이야기가 오늘 주제입니다.
뭐였죠? ‘사람 보고 교회 다니는 거 아니야 하나님 보고 다녀야지’라고 하는. 근데 여러분 여러분들도 이 말을 간혹 어떤 상황에서 쓰거나 듣거나 이럴 때가 있죠 지금 우리가 지금 교회 안에 거짓말이라는 주제로 지금 제가 어떤 이 책 이 책이 교회 안의 거짓말이라는 책이에요. 근데 그 책 내용을 제가 요약하고 또 제가 여러분들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나눌 내용들을 정리해서 나누고 있는 중인데요. 저도 이 말씀들을 이렇게 준비할 때마다 굉장히 도전이 되는 말씀들이 있는데 특별히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저도 그런 말을 많이 썼던 기억이 있어요.
그러니까 특히 이제 성도 간에 뭔가 이렇게 어려움을 당했다거나 좀 이런 갈등의 문제가 있을 때 그때 사람 보고 다니는 거 아니에요? 하나님 보고 다녀야지 막 이런 말을 많이 썼던 기억이 있는데 물론 우리는 다 연약하고 흠결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데요.
근데 성경을 우리가 자세히 보면 조금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들도 좀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사도바울이 한 이야기 중에 제가 설교 때 이 본문을 거의 쓰지 않은 본문이 있어요. 어떤 본문이냐면요. 고린도전서 4장 16절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여러분들에게 권합니다.
여러분들은 나를 본받는 자가 되십시오. 제가 이 설교를 선뜻하지 못하는 이유가 감히 제 연약함을 알기 때문에 감히 저를 본받으십시오라고 하는 말을 제가 감히 꺼낼 수조차 없는 그런 마음에 부담감이 있어서 그래요.
근데 이 구절을 읽으면서 어쩔 때는 사도 바울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이런 정도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을까라고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때로는 사도 바울은 좀 교만한 사람이었나 이런 생각도 해볼 때가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어떤가요? 교회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보고 다니는 곳인가요? 근데 우리가 이 말을요. 주로 언제 쓰는지를 조금 이렇게 살펴보고 생각해 보면 이 말에 어떤 배경이 깔려 있는지를 조금 우리가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흔히 많은 우리의 연약함들이 가끔 도단할 때 그거를 방어하기 위한 용도로 써요. 그리고 내가 앞으로 저지를 어떤 내 연약함 함량 미달의 내 모습을 미리 보험 들듯이 이런 말들을 주로 많이 하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언제든지 실수할 수 있으니까 나보고 신앙생활하면 안 돼 하나님 봐야지 이렇게 우리가 주로 많이 쓰는 거지.
근데 여러분 한번 역으로 질문을 던져보는 겁니다. 다시 이 아까 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해볼게요. 교회는 사람 보고 다니는 게 아니야 하나님 보고 다녀야지
근데 여러분들에게 한번 그러면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이 보이십니까? 하나님 보고 다녀야지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보이냐라고 말을 하면 지금 우리 중에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하나님 보고 다녀야 된다고 하거든요.
그러면 그 의미가 뭐 말씀을 붙들고 다녀야지 이런 의미겠지만 어쩌면 하나님 보고 다녀야지라는 말을 우리가 보통 누구에게 하냐면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한테 한단 말이에요. 시험이 들 만한 사람들 시험이 든 사람에게 우리가 이 말을 하는데 그 사람들이 과연 지금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 되어 있는가라는 생각을 해보면 좀 이 말도 약간 우리가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에게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도 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어 뭐 그렇게 사람 보고 시험 들어 그런 거 시험 들지 말고 그냥 신앙적으로 니 신앙만 열심히 해 이런 개념의 말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번 해본 겁니다.
근데 여러분 물론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에요.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은 영광 중에 임하셨지만 하나님이 직접 자기의 형체를 드러내 보이지 않으십니다. 우리 인간의 인식의 한계로는 도무지 하나님을 직접 볼 수가 없어요. 심지어 하나님을 직접 보면 죽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는 하나님이 두려움의 대상으로 같이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셨죠? 구약에 보면 그리고 구약에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출애굽기 19장 5절 6절에 보면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의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주어라.
모세에게 이제 출애굽하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일러주는 건데 우리가 이 말씀을 너무 잘 알아요. 근데 우리 그런 거 있잖아요. 우리는 제사장이다.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다 이런 말들을 주로 많이 쓰지 않습니까? 근데 그 말의 의미가 뭐냐 제사장 제사장은 어떤 역할입니까?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주는 중간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제사장이에요. 그리고 거룩한 민족이 되라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약에서 택하실 때 하나님의 목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내 보이기를 원하셨던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세계 열망이 하나님께 이끌린 바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그러한 하나님을 닮은 성품이 하나님의 존재를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느끼게 하기를 원하셨어요. 이게 원래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일을 감당하지 못했죠. 제사장으로서의 역할도,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역할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까 예수님이 오신 거잖아요.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제자 빌립이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세요라고 하는 하나님을 보여주세요라고 하는 그런 요청을 했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지냈는데 너는 아직도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니가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말을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내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자기 정체를 정확하게 드러내 보이면서 지금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명확하게 드러내 보이셨던 것이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또 발견할 수 있는 거예요.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고 하는 우리는 마치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세우셔서 목적하셨던 바, 새 이스라엘이 바로 우리라고 하는 말씀을 몇 번 반복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새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도 옛 이스라엘과 동일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내 보이길 원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도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가 직접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또 직접 볼 수 없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직접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그것을 이제 신앙 안에서 걸어가야 돼요. 그러면서 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 거죠.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 같이 여러분들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의 기대가 바로 이겁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그냥 예수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아멘 끝 이게 아니라 내가 아멘하고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백성이 되었으면 태어났으면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택하신 하나님의 기대감, 새 이스라엘로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바라는 기대가 그 안에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 이 일이 가능할까? 데살로니카 교회를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데살로니카 교회는 우리가 지난주에 함께 나눴던 안디옥 교회가 파송한 바나바와 바울이 선교 여행하는 가운데 세운 교회입니다. 45년 주 45년에 안디옥교회가 세워졌는데 이 데살로니카 교회는 이 안디옥교회의 도움을 받아서 49년에 세워졌어요. 그러니까 불과 개척해서 4년 만에 이렇게 교회들을 이제 세워가기 시작한 거죠.
그런데 이렇게 이 데살로니카 교회가 세워지고 난 1년 반쯤 한 50년 정도 주 후 50년 정도 그쯤에 바울이 데살로니카 전서를 기록했다고 지금 신학자들이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데살로니카 전서를 보면 데살로니카 교회가 그 당시의 신앙이 어떤 상태였는지를 우리가 파악할 수 있거든요. 근데 데살로니카전서 1장 6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많은 환란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 신생교회 1년 반밖에 되지 않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이 사도바울의 그림 여러분들은 환란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불과 1년밖에 되지 않은 어린 어린 갓난아이와 같은 교회 공동체가 주님을 본받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7절에 보면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고 사도바울을 본받는 사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성도들에게 모범이 되는 교회가 됐다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이 지형을 잘 모르니까요. 마게도냐 아가야는요. 우리나라로 따지면 남한 정도의 크기입니다. 남한 정도의 크기. 근데 데살로니카라고 하는 것은 자그마한 도시예요. 그 자그마한 도시에 세워진 개척교회 그 교회가 남한 정도의 큰 면적에 있는 성도들에게 영향력을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 시작했더니 그리고 자기들이 배우고 가르침 받은 대로 그 말씀을 본받아 살아가기 시작했더니 그게 자기들의 삶만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큰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영향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본받기가 대물림되기 시작했다는 확장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나만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도 내 옆에 있는 사람도 영향력이 확장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가 굉장히 무서운 속도로 부흥하잖아요. 우리 초대교의 부흥을 보면서 우리도 저런 부흥을 기대하고 소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죠 근데 그 원인 중에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이냐 물론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기본적으로 있었고요. 그 가운데 가장 큰 이유가 뭐냐면 예수님을 본받는 사람들의 그 본받음이 계속 확장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자기도 예수님을 본받은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면서 사람들에게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정도로 담대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죠.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기들이 예수님을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들도 본받으십시오라고 하는 대물림의 증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2장 14절에 보면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유대 사람에게서 고난을 받은 것 같이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동족에게서 똑같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본받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들 앞에 세워진 예루살렘 공동체를 본받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동체적으로 이 교회가 본받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지금 우리가 이 시대 가운데 큰 교회가 영향력을 끼치죠. 근데 이건 세상 논리입니다. 요즘 우리 작은 교회들 목회자들이 모여서 공부하고 같이 기도하고 이렇게 소그룹을 이루어서 지금 준비하는 과정 속에 계속 있다는 말씀을 드리잖아요.
근데 거기에서 우리가 외치는 게 뭔지 아세요? 굉장히 포부가 큽니다. 우리 작은 교회의 샘플이 한번 돼봅시다. 그래서 우리 교회 안에 우리가 지금 다들 연약하고 부족함이 있죠. 교회마다 지금 자초 오돌 중이죠. 하지만 꿈꾸는 거예요. 우리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여기에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가실 때 우리가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 지금 이 데살로니카 교회가 그 큰 지역에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그랬잖아요. 그쵸? 대형 교회가 물론 사회적인 개념으로 따지면 영향력이 크죠. 그 교회가 좀 좋은 일 하면 그 좋은 영향력이 나라적으로도 지역적으로도 펼쳐질 수 있어요.
하지만 또 사고를 치면 그 여파가 우리 모두에게까지 다 미치지 않습니까? 근데 하나님 나라의 개념 안에서는 작든 크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영향력은 서로에게 끼쳐지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요. 지난 2천년 동안 고난과 유혹을 이기며 주님께 충성하면서 이 세상 속에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 우리에게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된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사람을 왜 쳐다봐 왜 사람 보고 시험 들어 하나님만 봐라고 말하는 성경 구절은 한 구절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이니 하나님은 보이지 않잖아 사람을 바라보고 그리고 교회를 다녀 사람 변화되고 있는 사람, 성장하고 있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을 보면서 그러면서 교회를 다니라는 거죠. 건강해지고 있는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맛을 보고 있는 공동체를 보면서 교회를 다니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같이 여러분들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하는 말을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지 우리 우리도 지금 이 사도바울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우리도 좀 우리를 본받는 자가 되십시오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먼저는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더 애써야 합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죠. 여러분들 예수 믿으셨습니까? 아멘 구원받으셨습니까? 아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확신이 드십니까? 아멘 그리고 끝 인 신앙인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교회에서는 아멘인데 밖에 나가면 노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그러면 그 사람 보면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가 있을까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말을 잘해 말로 이길 수가 없어 사랑해 사랑해 말해놓고 뒤로 보면 다 자기들 욕심만 챙겨. 그러면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그들의 장애물이 되는 거예요.
그들이 교회를 나올 수 있는 장애물이 되는 건 아닙니다. 구원은요. 완성형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요. 진행형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은요 예수 믿고 그냥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이 우리의 역할인 것입니다.
교회 활동 열심히 하고 봉사하고 선교하는 것도 중요하죠.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내 성품이 내 인격이, 내 가치관이, 내 내면이, 나의 삶의 모습들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조금씩 조금씩이라도 닮아가면서 예수님이 원하는 일들을 해나가는 여러분 이 일은요 가만히 있는다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갓난 아이가 그냥 엄마 뱃속에서 응애하고 태어났다고 그 아이가 알아서 자랄 수 없듯이 우리가 신앙을 가졌다면 계속 성장하는 과정들을 겪어야 됩니다.
그 성장의 과정이 우리에게 분명히 필요한 것을 기억하고 우리 개인적인 신앙의 성장이 매일매일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까지 이걸 우리 성교 교단에서는 성화라고 하는 개념을 쓰거든요. 성화의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함을 분명히 기억하고 하루하루 한 해 한 해가 더 성장하고 더 예수님을 닮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요. 교회 공동체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을 우리가 사용하죠. 근데 교회의 머리는 그러면 누구예요? 예수 그리스도 이 몸이 이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내 지시를 따르지 않고 그냥 손발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버린다면 이 몸은 그냥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충성할 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강조했던 것 중에 하나가 뭘까요? 서로 사랑하라. 먼저 교회 공동체 안에 서로 사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서로 다르고 또 서로 생각들 삶의 과정들이 다르기 때문에 흥과 또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 속에서도 서로 품는 것을 배운 공동체가 우리입니다. 만약에 그런 품음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없어요. 나 같은 죄인을 예수님이 품어주시고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 아닙니까? 교회 안에서 우리가 그 사랑을 배우고 사랑의 훈련장으로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경험하고 난 것을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가 삶의 터전에서 그것들을 이루어 나갈 때, 그럴 때 교회는 하나님을 드러내 보이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저는 요즘 참 마음이 아플 때가 많아요. 교회 안에서도 사회 법정으로 끌고 가는 문제들이 가끔 생깁니다. 이번에 교단 총회를 할 때도 보니까 법정으로 끌고 가는 문제들이 너무 많아 속상했어요. 그 재판관들이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목사님들이 서로 자기 주장이 맞다고 그걸 재판정으로 끌고 갔을 때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여러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드러내야 할 공동체가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리더 된 사람들은 끊임없이 더 하나님의 뜻을 묻고 또한 우리 공동체를 통해서 어떻게 더 하나님을 드러낼 것인가 지금 이 썩어가고 깨어진 이 세상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낼 것인가 더 우리가 연구하고 같이 모여서 어떻게 해야지 하나님을 더 드러낼 것인가를 우리는 힘쓰고 애써야 하는 공동체가 교회 공동체임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마지막 우리 각자의 단계에서 본인이 되기를 원하는 저는 이 부분이 제게 굉장히 은혜가 되고 앞으로 저도 사도바울처럼 나를 못 박는 자가 되라고 하는 이런 이제 담대한 설교를 할 수 있을 때가 오기를 저는 기대하기를 바랐는데요. 무슨 말이냐면 아까 데살로니카 교회가 1년 반밖에 되지 않았을 때 그 데살로니카 교회의 상태를 설명드렸잖아요.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 교회가 이런 모습을 갖췄을까 근데 여러분 영적 성숙의 단계는요. 아주 단계가 많아요. 그냥 믿냐 안 믿냐 이 과정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요. 믿는 사람도 이 신앙의 단계가 갓난 아이에서부터 어린아이, 청소년 청년, 영적 부모까지 정말 수없이 많은 단계들이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우리는 각자 단계가 달라요. 교회 안에서 신앙적인 단계가 다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갓난 아이도 있고 어른 같은 사람들도 있고 다양한 단계가 있어요. 근데 중요한 건 뭐냐면 자기가 속한 그 단계에서 누구에게든 본을 보일 수 있다는 게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나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인이에요. 근데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인이지만 그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인 안에서도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아가기를 힘쓰고 사모하고 닮아가기를 원하는 그 마음이 누군가에는 본이 될 수 있는 것이 나같이 아직 성경도 잘 모르고 나같이 뭐 기도도 잘 못하고 나 같은 사람이 무슨 본을 보여 어쩌면 내가 뭔가 성자처럼 내가 막 사람들 앞에서 뭔가 드러낼 정도로 뭔가를 이루었을 때 그때 나는 나 같은 사람이 되어라는 말을 할 거라고 저도 그런 마음을 많이 가졌었는데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순기능적인 대물림이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배경이 뭐냐면 각기 신앙의 정도가 다 다른데요. 각기 그 신앙의 정도에 따라서 각자 신앙의 본을 보일 수 있는 모습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일 학교 아이들도 한 영혼으로 모시고 그 아이들에게 여러분 배울 것들을 배우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까부리 사춘기 아이들 안에서도요.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물론 그 아이들도 성장하고 성숙해 가야 되겠지만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성장 성숙을 걔네들이 경험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더 예수님을 닮아가고 더 깊어지는 우리 개인들,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게 참 어려운 건가 막 이런 마음이 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보여줘야 할 본는요. 완벽한 게 아니라는 걸 여러분들이 다시 한 번 기억하길 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보고 싶은 거는요. 완벽함이 아니에요.
솔직히 우리가 무슨 완벽함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진짜 보고 싶은 건요. 진실함입니다. 진실함 고난 가운데 있는데도 정말 그냥 나는 하나님을 믿어. 나는 하나님을 의지해. 이 상황 가운데도 뭔가 뜻이 있을 거야. 그 진실한 마음을 보는 거죠.
그 진실한 태도를 보는 겁니다. 그 진실한 입술의 고백을 보는 겁니다. 비록 넘어지고 쓰러질 수 있어요. 목회자인 저도 넘어지고 쓰러질 수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그거 안 보여주려고 발버둥치면서 가짜로 내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넘어져서 저 좀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게 그게 더 본이 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사도바울도요. 인간적인 연약함이 있었던 사람이었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늘 기도 부탁을 합니다. 늘 기도의 동력 또 사역의 동력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처한 상태에서 내가 보일 수 있는 본이 무엇인지도 한번 찾아보면 이거는 어쩌면 지금 당장부터 할 수 있는 일 같아요.
여러분들 가정에서 여러분들 삶의 터전에서 여러분들 소그룹 안에서 여러분들이 보일 수 있는 본이 뭔지를 한번 찾아가시면서 하늘소망교회는 저 집사님들이 계셔서 저 권사님들이 계셔서 저 장로님이 계셔서 저 목사님이 계셔서 저 교회는 한번 가보고 싶어 이런 말이 나오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도 사도바울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들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십시오라고 하는 말을 할 수 있는 그러한 우리의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