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기도]
서문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기도는 우리 인간의 생명이자 인간이 하는 일 중에 가장 고귀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세상 일에 분주하여 하나님의 일 기도를 상실하면 본디 인간으로서 제구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기도란 우리 인간의 원초적인 호흡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흙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 빚으신 후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써 비로소 살아 생동하는 생령의 인간이 되었습니다(창 2:7 참조).
호흡하지 않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는 육신은 살아 있어도 영으로는 죽은 자입니다. 제구실하지 못하는 고장 난 인간, 얼빠진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에게 가장 긴요한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기도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기도할 줄 모르면서도 자신을 기도를 잘하는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어떻게 기도하는지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누구도 알지 못하는 언어로 중언부언할 뿐입니다.
그런데 사도들과 거룩한 교부들과 승리의 삶을 살았던 성인들이 겪은바, 그들이 전해주는 기도 방법을 탐구하고, 현세의 상황에 맞게 조절하고, 그 기도가 거룩한 습관이 될 때까지 인내하며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호흡처럼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젊은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딤전 2:1)라는 구절로 네 종류의 기도를 설명합니다. 존 달림플(John Dalrymple)은 그의 책 「단순한 기도」(Simple Prayer)에서 기도의 종류를 "간구", "감사", "회개", "찬양"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들은 절대 권능자, 또는 절대타자이신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기도와 또 다른 차원의 기도가 있는데, 내주하시는 하나님과 연합하는 기도, 하나님을 친히 아는 기도입니다.[중략]
이 기도에서 우리는 간구할 것이 없으며, 그 주신 것에 감사하는 일도, 잘못한 것에 대한 회심이나 회개하는 일도, 소리 높여 찬양하거나 사랑을 고백하는 일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깊은 교제와 연합하기 위해 물러나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 "가만히 있어" (시 46:10) 침묵하는 기도가 있을 뿐입니다.
기독교 전통에 아버지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현존하는 기도, 내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도 나를 아시는 상태에 이르기 위한 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를 "단순한 기도”라고 부릅니다. 이 기도는 소리내어 말로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단순한 정신으로 바치는 기도라고 해서 묵념기도(mental prayer)라고 합니다. 여기서 mental prayer를 구태여 한국어로 번역해서 "묵념기도"라고 했지만, 본디 그 뜻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한마음, 갈라지지 않는 마음, 분심되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청결한 마음" (purity of heart)이라 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히브리 전통에 "하나님을 본다”는 것과 “하나님을 안다"는 의미는 같습니다.
사물을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의 존재를 마음으로 봅니다. 그런데 영의 존재는 "성한 마음", 즉 "한마음" (single eye)이 될 때 보입니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눅 11:34). 여기서 "성"이라는 성경 헬라어 원문은 álous(single)입니다. 즉 기도자는 두 마음(duplication), 분심(分心)되지 않은 한(single) 마음으로 바칠 때 하나님을 뵙는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뵙는 상태의 기도를 관상적(觀想的) 기도라고 하며, 정교회 수도원 전통에서 이 기도를 실천해 왔습니다. 정교회 전통 보다 더 근원적으로는 4세기 이집트 사막의 수도사들은 “심상 없는 기도" (imageless prayer)를 실천했습니다.
그후 기독교 전통에서 이 기도를 위해 성경말씀으로 짧은 기도문을 만들어 되뇌는 기도를 실천했습니다. 그 대표가 되는 기도가 예수기도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사막의 수도사들은 예수기도를 바쳤다는 기록은 없으나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 70:1)라는시편 말씀을 되뇌었다고 추측합니다.
그후 수도사들이 바쳤던 예수기도는 소경 바디메오가 외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눅 18:38)와 성전에서 죄인 세리가 바친 기도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소이다"(눅 18:13)를 연합한 기도문입니다.
14세기 무명의 저자가 「무지의 구름」(Unknowing Clouds, 엄성옥 역, 은성출판사)에서 말하는 짧고 예리한 화살에 비견하는 한 단어 즉, 주님(kirie),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한마음", "성한 마음"을 유지하지 못하는지요? 그것은 마귀의 공격으로 인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를 정념(passions)이라고 합니다. 사막의 수도사들은 오염되고 갈라진 정신 즉, 생각들(thoughts, logismoi)을 마귀(demons)와 동급으로 보았습니다. 속이는 아비 사탄은 인간의 정신을 세상의 것,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유혹하고 속입니다. 그들은 우리들의 마음을 오직 하나님께로 향하지 못하게 하고, 세상을 향하는 이정표를 바꾸어서 하나님께 이르는 길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4세기의 이집트 사막의 수도사들은 세상과 가정과 인척을 떠나(창 12:1 참조) 귀신의 거처인 사막으로 들어가서 자기 생각들 즉, 마귀와 매일 처절한 싸움을 했습니다. 세상의 어느 적보다 자기 생각과 싸운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인간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자기 생각들과 싸움에서 백전백패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그들은 이 영적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강하고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시 24:8)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주님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 14:14)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 이름으로 바치는 예수기도가 기독교 전통에서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즉 예수기도(Jesus prayer)는 어떤 사람이나 전통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이 제정하신 것입니다.
예수기도는 단순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기도는 동서방 기독교 전통에서 널리 바치는 기도문입니다.
가톨릭 미사문이나 찬트에서 "미제레레 노비스" (miserere nobis)라고 한다거나, 동방정교회와 이집트기독교회의 리뚜르기아(liturgia; 성찬 예전)에서 "키리에 엘레이숀" (Kiric eleison;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은 모두 예수기도에서 나온 기도말입니다. 우리 개신교회 전통에서는, 그 이유는 모르지만, 이 기도문이 그리 자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예수기도의 첫 기도말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는 전능하신 하나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바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눈먼 자로 보게 하고, 벙어리로 말하게 하고, 앉은뱅이 된 자를 걷기도 뛰게도 합니다.
예수기도의 두번째 기도말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는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가 수여자(與)의 오직 자비심에 의탁하는 기도말입니다. 성전의 세리와 같은 심정으로 바치는 영혼의 절규입니다. 인간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영역에 놓여 있습니다. 어느 성인이라고 할지라도 스스로 구원받을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말은 성(誠, single)한 마음이 인간의 노력으로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절대 권능자 하나님게 예수의 이름으로 바치는 기도문입니다. 마음이 성할 때, 마음의 동요가 없어지고 고요한 상태에 놓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시험" 이란 아람어로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바람에 나부끼지 않는 명경지수처럼 고요한 마음에 옹근 하나님의 상을 형성한 상태, 이러한 정적의 상태를 헤시키아(hesychia)라고 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 46:10). 이러한 정적에 이른 자를 헤시카스트(hesichast)라고 하며, 러시아 정교회에서 스타레츠(staretz)라고도 부릅니다. 헤시카스트들은 예수기도를 바침으로써 인간 이성(reason, 8lávola)으로써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가장 고상한 인간 기능인 지성(intellect, vous)으로 하나님을 친지(知)하게 되는 상태에 이릅니다.
기독교 정교회 신비신학에서 하나님을 아는 상태에 이르는 여정을 정화, 조명, 합일이라는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 정화의 단계는 무정념(無情念, apatheia)에 이르기 위한 수덕(修德)의 단계로, 조명의 단계는 하나님의 빛으로 인해 무명에서 벗어나며 지성으로 하나님을 아는 영지. gnosis)의 단계, 그리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벧후 1:4 참조) 신화(神t, deification)의 단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셋 간의 경계가 칼로 자른듯 분명한 것이 아니라 공유지(共有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화에 이른 사람이더라도 정화와 조명을 공유합니다.
이렇게 단순한 기도 즉, 예수기도로써 하나님을 알고, 신화를 이루는 이론을 헤시카즘(hesychasm)이라고 합니다. 동방 전통의 수도사들 모두가 헤시카즘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 헤시카즘에 반대하는 자들이 그들을 이단으로 몰아서 정죄하려는 시도가 거셌습니다.
이즈음에 19세기의 무명의 정교회 신자가 "쉬지 않는 기도"를 가르쳐 줄 스승을 찾아 길을 떠나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논픽션 책이 나왔는데, 바로 「순례자의 길」(The Way of Pilgrim, 엄성옥 역, 은성출판사)입니다. 그는 여정에서 "쉬지 않는 기도를 가르쳐 줄 위대한 스승을 만났고, 쉬지 않는 기도를 위해 "예수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스승의 지도로 “예수기도”를 열심히 실천하며 익히고 습관이 되어가던 중 어느날 아침에 "여느때처럼 기도가 나를 깨웠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제 기도자와 기도의 입장이 전도되었습니다. 기도자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는 기도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롬 8:26 참조). 그때부터 기도가 자동으로 바쳐지면서 "호흡에 맞춰서", 그런 다음 "심장 박동에 맞춰서 저절로 바쳐지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그는 잠잘 때나,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나, 길을 걸을 때나, 식사할 때나 언제든지 "쉬지 않는 기도" (살전 5:17)를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스승이 남겨주신 기도매듭을 가지고 했지만, 어느 날부터는 호흡과 심장의 리듬만으로도 저절로 기도가 쉬지 않고 바쳐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불구자로서 한계인(限界人)이었지만 예수기도로 말미암아 많은 지식인, 사회 지도자들이 그를 존경하고 영적 지도를 부탁할 정도로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 (벧후 1:4) 즉, 신화에 이르렀다는 증언이 아니겠습니까!
이 무명의 순례자의 실제가 그동안 논란에 빠져서 지리한 이론적인 싸움이 종식되었습니다.
13세기에 이르러서 성산) 아토스 수도원의 수도사 그레고리 팔라마스(Palamas Gregory; 1296-1359)의 지혜로운 논증을 세움으로써 헤시카즘에 대한 오해가 종식되었습니다.
이 글에서 헤시카스트들이 직접 체험한 예수기도에 대한 권고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필로칼리아」 (Philokalia, 엄성옥 역, 은성출판사)는 이 기도에 대한 영적 지도서입니다. 특히 제5권은 마음의 기도에 관한 교부들의 글을 집성한 책입니다.
예수기도에 큰 영력이 있지만, 그만큼 위험이 따른다는 것이 공통되는 경고입니다. 예수 기도를 실천하지 않으면서 가르치려는 사람, 자신의 영적 수준 보다 높은 책을 읽고 좀 안다고 거들먹거리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충고합니다.
예수기도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영혼이 걸려 있는 위험하고 처절한 싸움입니다. 예수기도는 하다가 싫으면 말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복음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러시안 정교회 전통에 있었던 이그나티우스 브리안차니노프(Ignatius Briachaninov)가 썼습니다. 이 저자에 대해 은성출판사에서 출판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생활 (The Arena: An Offering To Contemporary Monasticism)에서 소개한 바 있습니다. 저자의 본래 이름은 디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브리안차니노프(Dimitri Alexandrovich Brianchaninov)였습니다. 당시 니콜라스 1세 황제의 총애를 받아 수도원 원장이 되었지만, 수도생활을 동경하여 사임하고 말년에는 고독한 침묵 생활을 하는 중에 세상을 떴습니다. 그의 말년에 "수도사들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부제를 붙인 책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신자라면 누구에게나 우리 세대에도 적용되는 영적 교훈서입니다.
이제 또다시 은성출판사에서 그가 쓴 『예수기도』를 편찬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예수기도」를 수도생활을 하는 동안 실천했던 수도사입니다.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1885-1886년 당시, 예수기도를 모르는 수도사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후배 수도자들에게 예수기도를 바르게 실천하도록 돕기 위해 교본(敎本)인 이 책을 집필했습니다. 그는 교부들의 글을 집성하고, 재해석하고, 여기에 자신의 경험을 더하고, 현실에 맞도록 재편하였습니다. 이것이 고전을 다루는 바른 방법입니다.
작금에 "예수기도"를 프로그램화하여 "숨기도 훈련", "호흡기도 훈련" 등 예수기도의 방편과 육체적 도구에 목적을 두어 프로그램화하거나, 이 기도를 하루에 몇 번, 몇 시간 하면 신통력을 얻는다는 등 그렇게 소개하는 것에 대해 매우 유감을 품고 있던 차에 이 책을 편찬하게 되어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기도에는 연습이 없습니다. 연습이라고 해도 그것은 실제입니다. 기도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며 생명과 직관된 일입니다. 기도에는 방편과 수단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쭉정이에 불과합니다. 초행자에게 그것이 유용할지라도, 때가 되면 과감히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이며 새생명이며 영혼의 구원입니다. 방편에 영혼을 걸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책을 번역하고, 서문을 쓰는 동안 내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 기도는 정교회 전통에서, 일생을 걸고 실천하는 은둔 수도사들이 귀중하게 여기며 온 삶으로 실천하는 기도인데, 불초(不肖)한 자가 이 책의 서언을 쓰고 있다는 게 송구스럽기도 하고 혹시 그들에게 누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수도사는 아니지만 수십 년 동안 이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왔기에 용기를 내어봅니다. 그럼에도 용서하소서!
그리고 한국 기독교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풋노트와 용어해설, 그리고 참고 문헌에 제 글을 더했습니다. 진실된 한마음으로 바치는 예수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뵙는 복이 내려지기를 기원합니다.
2018년 滿月
최대형
출처
예수기도, 이그나티우스 브리안차니노프, 은성, 2018
On the Jusus Prayer_The Classic Guide to the Practice of Unceasing Prayer
as found in The Way of a Pilgrim by Ignatius Brianchanin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