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달밤 / 현인
유호:작사. 박시춘:작곡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져 1948년 발표된 이 노래는 광복(1945년)이후 한국 최초의
히트가요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음반은 1949년 4월에야 본격 팔렸다.
유호 작사, 박시춘(본명 박순동) 작곡으로 4분의 2박자 스페인 리듬인 볼레로 풍으로 나간다.
하지만 이 노래의 원 뿌리는 해방 전에 나왔던 조명암 작사의 [인도의 달밤]이다.
[신라의 달밤] 원래제목인 셈이다.
문제는 조명암이 월북하는 바람에 [인도의 달밤]은 물론 그와 관련된 모든 작품들이
금지곡으로 묶였다.
박시춘은 차선책으로 곡의 제목을 [신라의 달밤]으로 바꾸고 작사가도 유호로 바꿨다.
박 선생이 작사가에게 “이제 광복도 됐으니 우리 것을 되찾자”며 노랫말과 제목을
새로 바꿔 붙인 것이다.
박 씨가 작곡가로 활동했던 럭키레코드에 유호 씨가 한때 문예부장으로 근무해 노래를
쉽게 손볼 수 있었다.
해방의 감격을 찬란했던 신라의 추억에 실은 이 노래는 현인 선생의 독특한 창법으로
주가를 높였다.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현 동경음악학교)에서 정규 성악공부로 기초실력을 다진 데다 특유의
바이브레이션과 스타카트창법으로 폭발적 인기를 모았다.
참신한 멜로디에다 그의 시원한 얼굴생김새도 한몫했다.
작곡, 작사, 노래를 하는 싱어송 라이터 현인 선생이 첫 무대에서 9번의 앙코르를 받은 일화는
가요계에서 유명하다.
배우로도 활동했던 그는 ‘해방 전 남인수, 해방 후 현인’이란 소리를 들을 만큼 한국 가요사에
큰 획을 그었다.
[신라의 달밤]은 한국 가요계 거목인 현인(1919~2002년 4월 13일, 본명 玄東柱) 선생의
데뷔곡이자 대표곡이다.
60여년의 세월을 이어오며 국민가요로 사랑받고 있다.
모임이나 노래자랑 때 단골노래로 등장한다.
요즘엔 젊은 사람들도 리메이크 된 음반덕분에 수십 년 세월을 뛰어넘어 애창하는 노래다.
신라의 달밤 / 현인
유호:작사. 박시춘:작곡
아아~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어린 금오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아아~신라의 밤이여
화랑도의 추억이 새롭구나
푸른강물 흐르건만 종소리는 끝이 없네
화려한 천년사직 간곳을 더듬으며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아아~신라의 밤이여
아름다운 궁녀들 그리웁구나
대궐뒤에 숲속에서 사랑을 맺었던가
님들의 치맛소리 귓속에 들으면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현 인
현인(玄仁, 1919년 ~ 2002년 4월 13일)은 대한민국의 가수로, 본명은 현동주(玄東柱)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했다.
1947년에 [신라의 달밤]을 불러 데뷔한 이후[굳세어라 금순아][비 내리는 고모령] 등을
부르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번안곡 [베사메무초][꿈 속의 사랑]등을 불러
번안곡 열풍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현인의 창법은 해방 전후에 퍼져있던 기존의 가요가 가지고 있던 분위기에서 벗어나 성악을
기반으로 한 특유의 떨림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시원한 느낌을 주면서도 색다른 느낌을 주었는데 이 번안곡 등은 세계적인 추세와 함께
이국적인 분위기를 함께 선사한 것이 인기로 이어졌다.
한국 전쟁 전후(前後)에는[전선야곡] 등의 노래나 피난민의 애환을 그린 [굳세어라 금순아]등도
시대 분위기를 타고 크게 인기를 끌었다.
지병인 당뇨병을 앓다가 2002년 4월 13일에 영면했으며 장례는 한국연예예술인장으로 치러졌고
묘지는 경기도 성남시에 있다.
사후에 [굳세어라 금순아]의 무대였던 부산 영도대교 남단에 현인의 앉아있는 모습의 동상과 함께
노래비가 세워졌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음반을 발표하는 것으로 데뷔한 것은 현인이 처음이었므로 "대한민국 가수
제1호"라는 별명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