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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5. 묵상글 ( 사순 제3주간 화요일. - 두렵지만 우리가 청해야 할 것.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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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5. 사순 제3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두렵지만 우리가 청해야 할 것
오늘 독서는 불가마 속에 곧 죽게 될 절체절명의 상태에서
세 청년을 대표하여 아자르야가 바치는 절절한 기도입니다.
인간적으로만 보면 너무도 불행한 처지이기에
매우 두렵지만 그래서 막상 제가 이런 처지가 된다면
제가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런 처지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선 아무것도 없는 상태 곧 가난한 처지에 처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즈카르야는 이렇게 이스라엘의 가난을 얘기합니다.
“지금 저희에게는 제후도 예언자도 지도자도 없고
번제물도 희생 제물도 예물도 분향도 없으며
당신께 제물을 바쳐 자비를 얻을 곳도 없습니다.”
즈카르야는 물질적 가난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물질적으로도 가난했겠지만
우리의 박해 시대처럼 교회가 완전하게 파괴되어
성직자와 교계 제도도 없고 성전도 없어서
제물도 없고 제사도 드릴 수 없게 된 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난이 이스라엘을 겸손케 했습니다.
그래서 이에 관해 즈카르야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주소서.”
그렇습니다.
가난이 겸손케 하고,
겸손이 진정 하느님 앞에 서게 합니다.
그리고 겸손이 어제 수많은 예물과 군대를 거느리고 나타난
나아만과 달리 그런 것 없는 자신 그러나 마음만은 진실한 자신을 봉헌케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 영적인 갈망이 최고조인 상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얼굴을 찾으렵니다.”
제가 부러운 것이 이것이고,
이 때문에 두렵지만 이런 상태가 되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사실 저는 너무 부자이고 여러분도 그럴 것입니다.
과거에 비하면 물질적으로도 무척 아니 너무 부유하고
신앙 환경은 더더욱 부유해졌고 어찌 보면 넘쳐납니다.
사제도 많고,
성당도 많고,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나 피정 프로그램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신앙심은 굳건하지 않고 갈망은 없습니다.
이제는 뭔 배인지 모르기만 배가 불러서 미사가 있어도 가지 않고,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도 가지 않으며 골라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뭐가 많아도 마음이 없고 갈망이 없는 것이 문제인데
실은 너무 뭐가 많아서 마음도 없고 갈망도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싫고 그런 상황이 닥칠까 두렵지만
가난한 처지와 겸손한 마음을 주십사고 기도하는 오늘 저이고,
주님의 가르침대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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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5.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자매님께서 젊었을 때, 남동생이 사고로 하늘 나라에 가버려서 어린 조카들을 맡아 키웠다고 합니다. 남의 자식을 함부로 대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또 너무나도 사랑하는 남동생이기에 조카에게 자기 자식들보다도 더 먼저 챙겨주는 등 신경을 써서 키웠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녀들이 “우리가 의붓자식이야?”라며 어릴 적에 불만을 많이 표시했었다고 합니다.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남동생의 아들을 잘 키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조카가 성인이 되어 의사가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친척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오랜만에 만난 고모인 자기에게 인사는커녕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 자녀보다 더 신경 써서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본인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나 봅니다.
아무튼 이 자매님은 너무나 섭섭했습니다. 그래서 친한 친구에게 이 서운한 마음을 이야기했더니, 친구가 “만약 다시 남동생 죽었을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조카를 받을 것 같아?”라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이 자매님은 한참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조카가 커서 나를 섭섭하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맡을 거야.”
이 모습이 가치 있는 삶입니다.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 그냥 ‘사람’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진짜로 가치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하시지요. 가치 있는 삶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한 없이 용서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한계를 두지 않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묵상해야 합니다.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사랑을 주시는 모습을 우리는 복음에서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에, 구원의 길에서 제외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큰 빚을 탕감받고도 동료의 작은 빚을 참지 못하는 못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한 모습으로, 절대 가치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가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모습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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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위대한 행위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위대한 사랑으로 하는 작은 행동이 있을 뿐입니다(성 마더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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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5.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마태 18,33)
‘사순시기’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그 한편에는 “회개”가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제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마태 18,22)고 말씀하시고, ‘많은 빚을 탕감 받고도 작은 빚을 탕감하지 않은 악한 종’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편에는 ‘조금만 참아달라는’ 종의 간청에 대해, 단지 참아 주는 것을 넘어서 청하지도 않은 빚을 그냥 아무런 조건 없이, ‘먼저’ 탕감해주는 ‘자비로운 왕’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동료의 간청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버리는” ‘무자비한 종’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 빚진 자라는 사실입니다. 죄에 있어 빚진 자이고, 사랑에 있어 채무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깊이 명심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이미 그 빚을 탕감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곧 용서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용서”의 특성을 세 가지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됩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라.”(마태 18,22)
몇 번 용서해보고 그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미처 받아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렇게 죽기까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둘째>, “용서하되 ‘먼저’ 용서하라”는 말씀은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마태 18,33)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잘못을 고백하기도 전에, 아니 잘못했노라고 인정하기도 전에, 아니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당신께서는 ‘먼저’ 우리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구원을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는 그 자비를 이미 입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해야 할 궁극적인 이유는 ‘먼저’ 우리가 용서를 통해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용서를 통해 타인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셋째>, “용서하되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은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됩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원망도 원한도 없는, 분노도 미움도 보복도 없는, 오직 사랑만으로 하는 용서 말입니다.
결국, “용서”란 오늘 <복음>에서, 왕이 빚진 종을 “가엾이 여겨 빚을 탕감해주고 놓아 보내는 것”(마태 18,26)으로 드러납니다. 이는 “용서”란 곧 “자비”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용서에 힘입어 구원을 받았기에, 이제 우리 역시 이웃과 형제들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곧 이 은혜로운 사순시기에, 우리가 할 일은 바로 이 용서와 자비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되새겨 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마태 18,3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이제는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겠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셨으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고,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합니다.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고,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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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5.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용서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는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걸맞은 노력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어느 한순간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아무의 도움도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넘어지는 이유를 보면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야고4,1-2).하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도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이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독이라고 가르칩니다. 욕심 때문에 남과는 물론 심지어 형제와도 등지게 되기도 합니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서로를 힘들게 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담을 높이 쌓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담을 허물어야 합니다.
담을 허문다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하는 것은 말 같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듯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과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성찰해 볼 때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을 살아온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바른길을 가려 노력하겠지만, 인간의 연약함으로 넘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왔고, 앞으로도 분명 용서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내가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용서 덕분에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당신을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60). 하고 애원하였던 스테파노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만약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담고 있게 되면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고립되게 되고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건강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용서는 결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선행도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만큼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설령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이라도! 어느 날, 내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3,9). 주님 안에서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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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5.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댈러스에 와서 처음 만난 교우는 이발소 형제님입니다. 전임 신부님도 그 형제님 이발소를 이용했다고 합니다. 저도 첫인상이 중요할 것 같아서 이발소를 찾았습니다. 이발소 형제님은 제가 오기 전에 부제님도 왔었다고 합니다. 부제님도 첫인상이 중요할 것 같아서 왔다고 합니다. 뉴욕에서는 미장원을 이용했는데, 이발소에 오니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노련한 이발소 사장님이 젊은 제자를 두었습니다. 드디어 제자가 처음으로 손님을 받았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손님의 머리를 깎았는데 조금 길게 깎았습니다. 손님이 ‘이거 너무 길게 깍은 것 아닙니까?’ 제자가 안절부절 하고 있을 때 사장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머리가 조금 기니까 예술가처럼 보입니다.” 손님은 만족해하면서 돌아갔습니다. 다음 손님이 왔을 때는 머리를 조금 짧게 깎았습니다. 손님이 ‘이거 너무 짧게 깍은 것 아닙니까?’ 제자가 안절부절 하고 있을 때 사장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머리가 짧으면 강인해 보인답니다.” 손님은 만족해하면서 돌아갔습니다. 다음 손님이 왔을 때는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손님이 ‘이거 너무 오래 걸린 것 아닙니까?’ 제자가 안절부절 하고 있을 때 사장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중한 것을 위해서는 시간을 아끼지 않는답니다.” 손님은 만족해하면서 돌아갔습니다. 다음 손님이 왔을 때 시간이 너무 짧게 걸렸습니다. 손님이 ‘이거 너무 대충한 것 아닙니까?’ 제자가 안절부절 하고 있을 때 사장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간은 금이랍니다.” 손님은 만족해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첫 미사를 마치고 사목위원, 구역장님들과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떤 분은 4월에 성지순례를 가는데 같이 가주면 좋겠다고 합니다. 본당의 일정과 보좌신부님의 일정을 보고 알려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9월에 성령대회를 하는데 참석해 주면 좋겠다고 합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5월에 꾸르실료 교육이 있는데 제가 지도신부라고 합니다. 뉴욕에서 아직 오기 전인데 중남부 사제 모임에서 제가 지도신부가 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뉴욕에서도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했기에 도움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구역 모임이 있는데 참석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시간이 되면 언제든지 함께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함께 하는 날들 중에 맑은 날도 있을 것입니다. 흐린 날도 있을 것입니다. 바람이 부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비가 오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다 눈이 오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게 꼭 필요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불행은 불평과 불만의 문으로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행복은 이해와 용서의 문으로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노련한 이발소 사장님처럼 불평과 불만의 문은 꼭 잠가놓고 이해와 용서의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면 하는 일 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하는 일 마다 잘 되리라 믿습니다.
용서는 내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워야 한다고 하십니다. 宗敎란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한자입니다. Religion은 엉킨 실타래를 푸는 의미가 있는 영어라고 합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으로 세상사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이 종교라면 그리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그리하여 참된 구원의 문에 도달 하려면 꼭 是非를 가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법과 규정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도 용서와 사랑으로 해결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갈등과 아픔이 있다면 그것 까지도 놓아버리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따라서 용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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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5.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너희가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이라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 물어보고 싶습니다.
용서가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용서가 마음먹은 대로 된 적이 있습니까? 만약에 용서가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면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은 더 밝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용서하려 부단히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또 용서하려다 실패하는 체험도 하지 않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용서가 그리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았습니다. 물론 내가 잘못한 것일 수도 있고 남이 잘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내 마음에 상처가 남았습니다. 그 후로 그 사람의 음성만 들어도 예전에 상처받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모습만 보아도 화가 나고, 가까이 있자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상처를 안고 우리는 기도합니다. ‘용서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용서될까요? 하느님이 그런 용서를 바라실까요? 나는 아프고, 내 가슴에서는 피가 나는데 말입니다.
내 마음에 상처가 아물어야 용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순간은 마음의 상처가 없어지는 그 순간입니다. 무작정 용서하려고 하는 것은 상처를 입은 팔다리로 운동 시합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상처를 예수님께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아픕니다. 제 마음이 이런 상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예수님이라면 저의 예수님도 되시는데 저의 상처를 낫게 해 주십시오.’라고 내 상처를 가지고 예수님께 다가가십시오.
상처를 감추고, 아픔을 참고, 용서의 은총만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병자가 의사에게 자신의 상처 부위를 드러내듯이 그렇게 예수님께도 드러내십시오.
그때 은총이 따를 것입니다. 그때 내 마음에 평안함이 깃들고, 그때 어쩌면 ‘보아도 화내지 않고, 들어도 생각나지 않을 수 있겠다.’라는 용기가 샘솟을 것입니다. 그렇게 용서는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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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이라는 말은….
반성은 무엇일까요?
누구나 실수하고 잘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뉘우칩니다.
우리는 이것을 ‘반성’이라 말합니다.
그렇다면 반성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반성이고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반성은 이것입니다.
‘뉘우침으로 바뀐 행동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즉 반성은 찰나인 것이 아닙니다.
반성은 일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반성은 그 시간이 증언합니다. 뉘우침을 말입니다.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는 삶을
우리는 오늘도 초대받습니다.
반성이라 말할 수도, 회개라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 길에서 우리의 변화가 계속 유지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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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5.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 자신을 알라”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이다-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시편17,8)
“너 자신을 알라”, 자기를 아는 자기인식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날마다 묻는 자가 수도자라 했습니다. “나는 왜 여기 와 있는가?”, “나는 이렇게 살아도 되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양상은 다소 달라도 날마다 물어야 할 절박한 물음입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생각이 있는, 의식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날마다 물어야 할 물음입니다.
가장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것이요, 가장 어려운 것이 자기를 아는 일입니다. 남을 판단하지 않고 자기를 아는 이들이 참으로 지혜롭고 겸손한 이들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하고 교만한 사람이 남을 판단하지,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은 결코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제 좋아하는 말마디 셋이 배움, 섬김, 여정입니다. 배움의 여정, 섬김의 여정중에 날로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이 제 소박한 소원입니다. 오늘 다산 어른의 하루에 나오는 말마디들 역시 현자의 마음이자 하느님의 생각을 반영합니다.
“사람의 가치는 무한하기에 지위로 구분할 수 없다. 굳이 순서를 매기자면 가장 약한 사람이 먼저이다.”-다산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군주가 가장 가볍다.”-맹자
60년 이상 한결같이 생명운동에 전념해온 큰 어른 정성헌 선생의 귀띰 40가지 중 열만 인용합니다. 자기를 드려다볼 수 있는 거울같은 잠언입니다.
1.보고 싶은 사람이 되라.
2.남이 있어야 내가 있다.
3.다른 사람을 자기처럼 아껴라.
4.따뜻한 사람이 되라.
5.크고 깊은 사람이 되라.
6.마음의 스승을 모셔라.
7.욕심을 버려야 평화로워진다.
8.“오죽하면 그러겠냐”는 측은지심을 지녀라.
9.그윽하고 큰 꿈을 꾸고 말하자.
10.스스로, 함께, 꾸준히.
40가지중 10가지만 선정했는데 나머지 30가지 잠언도 금과옥조의 말씀이요 그대로 하느님의 생각도 이와 같으리라는 느낌이 듭니다. 정말 무지가 큰 병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 제가 참 많이 배우고 인용한 동방영성에서 특히 강조하는 무지입니다. 어제도 무지에서 파생되는 온갖 불행과 비극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오늘날 세계나 국내의 혼란도 인간 무지의 결과임을 봅니다. 전쟁이나 약육강식의 ‘문명의 야만’이란 역설도 무지의 악에서 기인합니다. 참으로 치유받아야 할 불치의 병이 무지같습니다. 무지한 인간, 부정적 사람의 정의라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이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아무리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무지한 인간이 물음이라면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느님이 답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이요,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래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아가는 평생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사람이 되는 공부요,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공부입니다. 이 공부에는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데 여전히 미완의 존재로서 인생 학교 마치는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바로 무지의 절정을 보여주는 오늘 복음의 만탈렌트 빚을 탕감받았다 취소되는 무자비한 종입니다. 만탈렌트 빚을 탕감받은 사실을 까맣게 잊고, 백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한 무자비한 처사가 공분을 일으킵니다. 그대로 무지하고 인색한 인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만탈렌트 한량없는 사랑의 빚을 지고 탕감받고 살아가는, 끊임없는 용서를 받고 살아가는 우리임을 생각한다면 하느님께는 끝없는 찬미와 감사요, 이웃에게는 참으로 자비로워야 할 것입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무한히 자비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숨쉬듯이 밥먹듯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한량없는 용서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끊임없이 사랑받고 있기에 사랑해야 하며, 끊임없이 용서받고 있기에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의 의무, 용서의 의무입니다. 오늘 복음의 무자비하고 인색한 종에 대한 주인의 질책은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에 대한 질책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러할 것이다.”
내가 살기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가 안되더라도 용서의 지향을 던져 놓고 보는 것입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용서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 이 또한 무지의 소치입니다. 결국은 무지가 문제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공부, 끊임없는 회개와 끊임없는 용서뿐입니다. 기도와 공부, 회개와 용서를 통한 겸손의 하느님 은총만이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입니다.
바로 그 기도의 모범, 회개의 모범, 겸손의 모범이 제1독서 바빌론 유배중 불타는 화덕 속에서 기도하는 다니엘의 세 동료중 아자르야의 기도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불후의 기도가 다니엘서 3장의 아자르야와 세 동료의 하느님 찬미기도입니다. 이런 기도 역시 배워서 훈련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구구절절 심금을 울리는 진실하고 아름다운 회개와 겸손의 기도가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의 자기인식의 절정에 도달한 경지를 보여줍니다. 무지의 병을 온전히 치유하는 기도입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이 아깝지만 마지막 부분이 특히 아름답고 감동적이라 그대로 인용합니다.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얼굴을 찾으렵니다. 저희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주소서. 당신의 호의에 따라,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희를 대해 주소서. 당신의 놀라운 업적에 따라 저희를 구하시어, 주님,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하느님께 흠숭과 공경을 다하는 하느님 중심의 참 아름답고 깊은 감동적인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의 절정에 도달한 경지입니다. 다니엘서 3장 26-44절까지 아자르야의 노래기도와 이어지는 다니엘의 동료 세 젊은이들의 3장 52-90절까지 하느님 찬송, 찬양기도 역시 참으로 놀랍고 아름답습니다.
불가마 속에서 이들이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음은 기도의 힘, 하느님의 힘이었습니다. 연옥같은, 지옥같은 세상 불가마속에서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하느님 찬미와 감사, 찬양기도뿐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찬미와 감사의 미사은총이 무지의 병을 치유하여 우리 모두 참된 겸손의 자기인식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나는 누구인가?' 단적으로 우리 믿는 이들의 공통적 신원을 말하면 나는 '주님의 평생 전사', '주님의 평생 학인', '주님의 평생 형제'입니다. 이를 노래한 제 좌우명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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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5.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님의 뜻>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님 계셔
나 있듯이
나 있어
그대 있음이
나 있게 하신
님의 뜻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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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5. 사순 제3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아담부터 그리스도 시대까지 일흔일곱 세대
그러면 ‘일흔일곱 번’‘’은 무슨 뜻입니까? 벗님들이여, 이 위대한 신비를, 이 놀라운 선물을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거룩한 복음사가 루카는 주님께서 세례받으신 이야기 다음에 그분의 족보를 기록해, 그리스도께서 어떤 혈통에서 어떤 순서를 거쳐 태어나셨는지 알려 줍니다. 마태오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요셉에 이르기까지 순서대로 족보를 기록했습니다(마태 1,1-17 참조). 그런데 루카는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며 인물을 꼽고 있습니다. 왜 한 사람은 시간 순서대로 기록하고, 한 사람은 거슬러 올라가며 기록했을까요?
마태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기까지의 세대를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까지 세대 순으로 족보를 기록했습니다. 루카는 그리스도께서 세례받으신 때로부터 족보를 역으로 따져 올라갑니다. 세례가 승천의 시작이기에 순서를 위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루카가 꼽은 세대가 일흔일곱 세대인 것(루카 3,23-38 참조)을 잘 보십시오! 그가 누구에서부터 시작했습니까? 잘 보십시오! 그는 그리스도에서 시작해서 첫 죄인이요 죄의 굴레 안으로 우리를 낳은 아담에게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루카는 아담에 이르기까지 세대를 세었고, 그것은 일흔일곱 세대였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아담까지, 아담에서부터 그리스도까지가 그렇습니다. 일흔일곱 세대입니다! 그러니 한 세대도 빠지지 않았다면 용서되어서 안 될 죄는 없습니다. 그래서 루카는 일흔일곱 세대를 꼽았던 것이고, 그것은 주님께서 그 수만큼 죄를 용서해 주라고 하신 수입니다. 그래서 루카는 모든 죄가 용서되는 세례 때부터 세대를 꼽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4 존재는 거룩하다
순교자들은 생명을 잃고 존재룹 얻었습니다. “하느님은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영성의 대가는 말합니다. 모든 것은 존재를 지니는 만큼 하느님을 닮습니다. 영성의 대가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과 다르지 않은 것은 모두 존재다. 그만큼 존재는 순수하고 고귀하다." 하느님은 존재만을 아십니다. 존재는 하느님의 활동 무대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존재만을 사랑하시고, 당신의 존재만을 생각하십니다. 나는 만물이 존재의 형식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영성의 대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특정한 피조물들은 하느님 가까이 있고, 자신들 속에 신적인 빛을 충만히 가지고 있어서, 다른 피조물에게 존재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이외에 누구도 존재를 줄 수 없을 만큼 존재는 고귀하고 순수하며 하느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존재야말로 하느님의 가장 독특한 현존입니다. 영성의 대가는 한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에게 생명을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를 바탕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존재야말로 으뜸가는 이름입니다. 결함이 있는 것은 모두 존재로부터 추락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는 존재의 형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존재가 되는 만큼, 우리의 삶은 하느님 안에 있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존재로 애워싸이는 만큼, 우리의 삶은 하느님과 연결됩니다. 우리의 삶이 하찮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삶을 존재로서 굳게 붙잡는다면, 그것은 이제까지 삶에 도달했던 그 어떤 것보다 더 고귀해질 것입니다. 영혼이 하찮은 미물에게도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그 영혼은 그것으로부터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하찮은 미물도 하느님 안에 있고, 한 송이의 꽃도 하느님 안에서 존재를 얻습니다. 이것을 알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 하찮은 미물이 온 세계보다 고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찮은 미물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아는 것이야말로 천사를 아는 것보다 더 나은 일입니다.(131)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모든 피조물의 왕이요 하늘과 땅의 왕이신 예수님, 세상을 구속하여 하나의 커다란 가정으로 만들고자 하시니 감사드리나이다. 당신 나라에 죄인과 아픈 이를 멸시받고 거부당하는 사람들의 자리를 마련해 두셨으니 찬미받으소서.
예수님, 당신은 그 누구도, 심지어 당신을 거부히는 사람들조차 거절하지 않으시니 감사드리나이다. 모든 이가 당신을 흠숭하며 만나뵙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그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어 구원하심으로써 그들이 장차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침묵 가운데 당신 가족과 친구들, 조국과 온 세계, 특히 신앙의 위기를 겪고있는 사람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한다.)
축복기도
예수님, 당신을 흠숭하며 아픈 사람과 장애인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믿나이다. 고귀하고 거룩하며 전능하신 주님, 한 말씀만 하소서. 모든 악을 몰아내시어 저희를 구하소서. 불안해 하는 이들을 진정시켜 주소서. 미움을 품고 살아기는 이들의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소서.
오늘날 불의가 판을 치는 곳에 당신의 정의를 다시 세워주소서.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바꾸어 용서하게 하시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에는 생명을 되돌려 주소서. 죄악에 물들어 있는 이들을 해방하소서. 성령 안에서 저희와 모든 민족에게 소중한 축복을 내려주소서. 당신은 세세에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241)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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