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성화, 고든 스미스, 국제제자훈련원, 2016
[발췌]
서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이 책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신학적으로 생각해보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질문해보라는 초대장이다. 더 구체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완전한 신학을 갖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기독교 영성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세 가지 물음에 대한 분명한 답을 찾아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회심과 기독교 신앙의 시작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다는 것은 어떤 모습, 어떤 느낌인가? 둘째, 그리스도인의 성숙이란 무엇인가? 회심을 유아기에 비유하여 시작 단계라고 한다면, 성숙해지는 것, 믿음 안에서 자란다는 것은 어떤 모습인가?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떠나는 여정의 목표나 목적, 곧 텔로스(telos)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셋째, 우리를 구원 안에서 자랄 수 있게 하는 형성의 수단은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은 어떻게 믿음 안에서 자라고 성숙해지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성경적 관점에서 바라본 종교 경험)에 대한 포괄적인 신학에서는 이 세 가지 물음, 즉 시작과 끝 혹은 목적과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수단을 모두 다룬다.
회심과 기독교 신앙 입문을 다룬 출판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사실 나 역시 이 문제를 다룬 책과 글을 썼다. 영성 형성과 실천에 관한 세 번째 물음 역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두번째 물음에 관해서는 여전히 공백이 존재하는 것 같다. 믿음 안에서 성숙해져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책에서는 이 물음에 초점을 맞춰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진 목적이나 전망에 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이 물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회심을 이해하는 관점과 전도에 접근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회심이 삶의 시작이라면, 당연히 생기는 질문은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삶인가?’이다.
두 번째 물음은 영성 훈련 및 실천과도 연관이 있다. 우리가 바라는 은총에 비추어 실천을 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해가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여정이자 순례라면, 우리는 어떤 목표나 목적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목적을 위해 회심했는가? 어떤 목적을 위해 영성을 훈련하고 실천하는가?
1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신학이 필요한 이유를 제시한다.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하는 2장에서는, 성숙에 관한 기독교적 전망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숙’이라고 주장한다. 3장부터 6장까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네 가지 특징을 설명한다. 각 장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좋은 삶, 인간의 소명 - 창조된 목적이나 정체성을 성취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을 다룬다. 이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또한 이것은 소명이기도 하다. 이 책은 우리가 받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는 법(엡 4:1)에 대한 지침서이다.
이 책은 기독교 공동체(청년층, 중년층, 노년층) 전체를 위한 책이다. 이 책은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살게 될 삶을 일찍부터 확립하라고 촉구한다.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적은 무엇이며, 부지런히 노력해서 이룰 만한 성취는 무엇인가? 어떤 모습의 삶, 일, 인간관계, 예배를 통해서 그들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또한 이 책은 중년기에 이른 사람이 생의 중반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그들의 우선순위와 삶 자체를 조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지침을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시점에 접어든 노년층을 격려하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시기는 가장 보람되고 의미 있는 시간이며 어떤 종류의 유산을 남기기 원하는지 자문하는 시간이다. 각각의 시기는 청지기직과 관계가 있다. 우리에게 맡겨진 청년기와 중년기, 노년기를 잘 활용하는 좋은 청지기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책은 보다 성숙해지고 예수님의 제자들 안에서 영적 변화를 불러일으키라는 소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교회를 위한 책이기도 하다. 성숙하다는 것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그것은 회중의 우선순위와 헌신을 통해 어떻게 표현되는가?
구체적으로 이 책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라는, 더 정확히는 그리스도의 삶에 역동적으로 참여하여 살라는 부르심이자 초청이다. 이 삶은 적어도 네 가지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각각이 하나의 초대로 제시된다.
•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열정적으로 끈질기게 지혜를 추구하라.
• 그리스도의 부르심, 즉 소명적 거룩함에 응답하여 선한 일을 하라.
•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사랑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라.
• 하나님의 기쁨(복된 삶의 깊은 원천)을 알라.
지혜, 선한 일, 사랑, 기쁨, 이 각각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따라서 이것은 선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으며,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삶, 그분의 삶에 참여하는 삶의 의미에 비춰 이 선물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2장이 이 책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장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는 부록 두 가지가 첨부되어 있다. 첫 번째 부록은 목회자들을 향한 초대장이다. 이 모든 논의가 회중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라.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숙’에 대한 전망을 갖고 회중의 삶에 접근한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두 번째는 고등교육 기관, 특히 기독교 대학과 신학교의 지도자와 교수들에게 보내는 초대장이다. 내가 염두에 둔 것은 이런 물음이다. 대학과 신학교가 그리스도 안의 변화에 대한 전망을 중심으로 공동체의 삶과 교과과정을 설계해볼 수 있을까?(12-15)
[중략]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그분 안에서 풍성한 삶을 찾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들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될 것이라는 시편 1편의 놀라운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하신 약속이었다. 이 풍성한 삶은 어떤 모습이며 그 특징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좋은 삶을 위해 창조되었고 어떤 좋은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는가? 좋은 삶을 살고 있음을 말해주는 지표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우리는 어떤 목적을 위해 구원받았는가?
신약성경 전체에서 그리스도인이란 영적 성숙을 향해 자라가는 사람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다는 것은 정확히 어떤 모습이며 어떤 느낌인가? 여러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이런 물음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성화의 공백
첫째, 리처드 러블레이스(Richard Lovelace)의 책 《영성 생활의 역동성》 (Dynamics of Spiritual Life)에 담겨 있는 놀라운 통찰력이 떠오른다.
이 책에서 그는 1970년대 말 복음주의 신학과 영성의 특징을 “성화의 공백”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성격이나 영적 성숙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공백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복음주의의 부흥운동 유산이 부지중에 이러한 역동적인 교회의 교리를 약화시켰다고 논증했다. 그동안 이 주제에 관하여 탁월하고 유익한 글이 발표되었지만, 많은 점에서 복음주의 신학과 회중의 삶에는 여전히 이 공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화나 성결 신학은 흔히 부차적인 주제로 취급되며, 그것이 마땅히 신학과 교회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사용하는 조직신학 교과서에서는 이 주제를 피상적으로 다룰 뿐이다. 내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을 보면 이 점이 두드러진다. 1,200쪽의 두꺼운 이 책은 여러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모습이며 그 특징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열 쪽도 채 안 되는 분량만 할애할 뿐이다.
물론 웨슬리 감리교 전통에 속한 이들은 성화에 더 많은 시간과 공간을 할애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웨슬리주의만의 관심인가? 장 칼뱅(John Calvin)의 후예들은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이 칼뱅의 《기독교 강요》 (Institutes)의 주요 주제임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속한 신학적, 영적 전통의 선배들이 그 중요성을 인식했음에도 우리는 이 주제를 무시해온 것이 아닐까?
현재 학계에서 성화나 성결을 다룰 때조차도 성화가 이루어졌을 때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수단, 곧 어떻게 성화가 이루어지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몇 년전에 출간된 “성화에 관한 다섯 가지 견해”를 다룬 책에서는 성화 자체는 거의 논하지 않고 성화의 과정에만 초점을 맞춰 성화를 이루시는 성령의 사역에 관한 다양한 견해만 제시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핵심 질문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는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세상 떠날 준비가 되었다’라는 식으로 회심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미래의 삶에 ‘확신’을 주는 기도를 하며, 주일에는 영적 성숙을 촉구하지도 않고 영적 성숙의 신학에 기초하지도 않은 설교를 듣는다. 한마디로, 무언가가 참이라고 믿고 간단히 기도하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최선을 다해 살면 구원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교회는 이른바 ‘심리요법적 이신론’(therapeutic deism)에 물들어버렸으며 삼위일체의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세속 종교에 불과하다는 의심을 받기에 이르렀다. 교회의 목적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내세에 ‘천국’을 갈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행복하고 생산적인 삶을 사는 시민으로서 덕을 갖추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복음주의 교회에서 주일 설교 시간에 하는 대부분의 말은 영적 성숙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바나 그룹(Barna Group)에서는 2009년에 실시한 조사를 근거로 놀라운 결론을 내렸다.
올해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에서 개신교 담임목회자 열 명 중 아홉 명은 영적 미성숙이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 목회자 중에서 자기 교회에 이런 미성숙이 나타난다고 보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영적 성숙을 어떻게 정의하고 평가할 수 있는지, 성숙을 이루기 위한 전략은 무엇인지, 성숙을 설명하고 촉진하는 데 가장 유익한 성경구절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기록한 문서를 교인들에게 제공하는 목회자는 거의 없었다. 성숙을 가늠해보려고 한 목회자들의 경우에도 사람들의 영적 이해나 그들 삶에 나타난 변화의 열매를 평가하기보다는 프로그램 참여도에 기초하여 성숙의 깊이를 가늠하려는 경향이 더 많았다.
따라서 교회 다니는 성인들 다수가 자기네 교회에서 ‘건강하며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잘 모르고 있으며, 개인적으로 그런 삶에 관하여 분명한 개념을 정립해가는 경우도 드물다는 이번 연구 결과는 전혀 놀랍지 않다.
(“Barna Studies the Research, Offers a Year-in-Review Perspective,” Barna Group, 2009, www.barna.org/barna-update/Faith-spirituality/325-barna-studies-the-research-offers-a-year-in-review-perspective.)
이 연구는 목회자와 회중이 영적 성숙을 더 명확히 정의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자료가 필요함을, 아니 절실히 필요함을 암시한다.
[중략]
영적 훈련이나 실천은 목적에 이르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지닌다. 목적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면 사실상 의미가 없다. 어떤 영적 실천에 참여하든지, 우리는 이 훈련을 통해 구하고자 하는 ‘은혜’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은혜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면-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하시기 원하는 바를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성화에 관한 명확하고 실질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 즉 텔로스를 명확히 알고 있을 때에만 영적 훈련이 유의미할 수 있다.(19-24쪽)
성령의 사역, 겸손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는 우리 경험의 초점이자 역동성의 중심이시며 오직 한 분만이 존재하신다. 하지만 이분은 거룩한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 성령과 교제를 누리시는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비추어 이 관점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은총이 구현된 실체이자 본질적인 표현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 창조주이신 성부의 사랑은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사랑이며, 우리를 부르고 택하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으로 이끄시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성령에 의해 인류는 성령과의 교제 안으로, 하나님과의 교제 안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기독교 영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택하시는 은총, 성령께서 인류에게 전해주시는 은총에 응답하는 영성이다. '기독론적 초점'에 맞춰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라본다는 것은, 철저히 삼위일체적인 전망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부르심일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는 성령의 임무이자 사역이다. 위대한 개혁자 장 칼뱅은 성령에 관한 글에서 이 점을 강조하며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띠”라고 말한다.
성령이라는 선물이 없다면, 그리스도와 연합하라는 부르심은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들릴 뿐이다. 어떻게 우리가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격이신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할 수 있겠는가? 이는 성령의 은혜로운 사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주의 깊고 정확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성령의 사역을 어떻게 이해하고 응답할지에 관한 문제보다 교회 분열을 초래한 문제는 거의 없었다. 이미 여러 문제로 분열해 있고 분열할 가능성이 있는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이해하는 방식은 그 어떤 문제보다도 논란을 초래할 위험이 크다.
오직 한 분 그리스도 예수, 성령의 은총을 통해 세상과 교회, 개별 그리스도인에게 임재하시는 그리스도만 계시다. 그리고 오직 한 성령, 그리스도의 성령만 계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에 대한 신학은 많은 점에서 성령의 신학이다.
이는 근본적이며 결정적인 질문 두 가지로 이어진다. 첫째,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선물을 자기 것으로 삼거나 받는가? 달리 표현하자면,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둘째, 어떻게 우리는 성령의 은총을 자기 것으로 삼는가? 성령의 은총은 ‘은총의 수단’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알려진다.
이 두 질문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나 구별된다. 성령과 성령이 알려지는 수단은 동일하지 않다. 우리 삶 속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이 ‘수단’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더 살펴보겠지만 이 수단은 대체로 교회의 일이다. 교회가 은총의 수단을 통해 성령의 사역을 최종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아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과 성숙해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안에서 살며 그분께 깊이 의도적으로 의존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서 알고 있다. 나는 1장에서 죄와 믿음의 상호작용을 말하면서 이 점을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성령께 의지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은총의 수단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졌을 때 그것을 의식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성령을 통해 이 은총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은총의 '수단'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교회의 위대한 행위 두 가지를 말할 것이다. 먼저 말씀 선포하고 가르치는 성경에 대해 말할 것이다. 두 번째로 세례와 주의 만찬의 성례건에 대해 말할 것이다. 두 가지 모두 교회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회중, 즉 신앙 공동체의 삶과 증언에 대해 말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와 역동적인 교제를 나누며 살아갈 때, 성령의 은총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스도와 의 연합은 교회와의 유기적인 연합을 뜻한다. 둘은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공유된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공동체의 삶 속으로 들어가며, 교회의 믿음, 살아 계신 주를 믿는 교회의 믿음에 참여하고, 머리가 되신 분의 삶으로부터 (공동체로서) 우리의 삶을 끌어온다.
교회는 성령의 사귐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도록 이끄신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이 유지되게 하는 핵심적이며 결정적인 수단은 말씀 선포와 성만찬 집례를 통해서이다. 이에 관해서는 교회의 본질과 사역을 다룬 부록 A에서 더 자세히 논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처음과 중간, 마지막이심을 언제나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계발 지침서나 자아성취 전략으로 이룰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철저히 의지하는 삶을 설명하기 위해 신약성경에서는 믿음의 길과 겸손의 길에 대해 말한다. 이 둘을 통해 하나님께, 특히 성령께 철저히 의지함으로써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 의지하는 태도가 깊이 뿌리내리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믿음으로 한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따라서 영적 성숙은 많은 점에서 우리 신앙의 완성이나 성숙을 뜻한다. 성숙은 자신이 이루어 가는 계획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 살며 그분께 철저히 의지하는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의 삶은 의존하는 삶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창조주께, 생명을 만드시고 존재 자체가 생명이신 그분께 철저히 의존해야만 살 수 있다. 자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겸손을 넘어설 수 없다.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건을 떠받치는 깊은 강이다.
겸손함 없이는 거룩함도 없다. 몇몇 영적 거장들은 결국 거룩함에 대한 위협은 하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바로 교만, 구체적으로 자율과 자립이라는 교만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립에서 믿음으로, 교만에서 약함으로 돌아선다.
그러므로 겸손은 인간 정체성의 기초이며, 영적 삶의 신학에서 모든 줄기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정체성의 모든 차원이 우리가 겸손하게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 될 것이다. 겸손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을 성취했다는 증거가 아니다. 다만 그런 삶의 한 양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겸손을 추구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며 겸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파생된 결과이다.
이 믿음과 겸손은 특별한 지향점이 있다. 즉.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향한다. 믿음과 겸손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의 결정적인 표지이다.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삶에 대한 성령의 의도이다. 성령의 사역과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굳게 서라는 부르심 사이의 상호작용은 에베소서 3장16절 뒤로 이어지는 두 절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그 안에 굳게 설 때,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알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 존재의 깊은 내면과 핵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것-에베소서의 축도처럼 그리스도의 사랑과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아는 것”-이다.
성령에 대한 철저한 의존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것으로 삼는 태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에베소서 본문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성령과 하나님의 사랑 사이의 긴밀한 상호작용은 로마서 5장 5절에도 분명히 제시된다. 여기서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쏟아부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한다.
그 결과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삶이 아니라 로완 윌리엄스(Rowan Williams)의 말처럼 “탈중심화된(de-centered)” 삶을 산다. 우리는 마치 우주가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가거나 우리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살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이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고 성림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는 사랑이며 우리를 위하고 세상을 위하는 사람임을 안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 거하는 역동적인 자유 안에서 살아간다. 이 사랑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겸손히 하나님께 의존하는 삶을 살게 해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역동적인 깨달음이 그리스도인이 가진 거룩함의 모든 차원을 약동하게 만든다.
전도와 영적 실천, 영성 형성
지금까지 간략히 설명한 내용은 회중의 삶과 중언에 대한 우리의 접근방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경험이라면, 우리가 선포하는 바도 이것이 우리가 전도하는 것도 이 목적을 위해서이고 화중의 삶 역시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데 방향이 맞춰진다.
전도에 관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이러한 전망은 회심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오는 과정에는 물론 교리문답 교육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가르침과 배움도 포함되지만, 회심 경험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 관한 특정한 진리를 알거나 지지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제자가 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분과의 직접적인 만남이 낳은 결과물이다.
따라서 전도의 핵심은 한 사람이 바로 지금 그리스도 예수를 만날 기회를 만들어주는 데 있다. 결국 이 모든 것의 핵심은 예수님이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특정한 진리나 법에 확신하게 하거나 예수님이 무언가를 행하셨다고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고- 믿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인격적으로, 바로 지금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는 데 있다. 따라서 교회는 곧 ‘기독론적 초점’이 존재하는 곳이다. 교회에서 사람들은 예배와 선교를 통해 예수님에게 집중한다. 그것이 그들의 열정이자 초점, 헌신이다. 그들과 더불어 예배와 선교에 동참할 때 당신 역시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진 특징과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의미를 가르치고 배운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하고 이 이야기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마치 회심의 본질이 예수님에 관한 특정한 진술이 참이라고 믿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듯-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직접적인 교통 그리고 사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는 궁극적으로 전도의 초점을 잠재적 개종자에게 맞춰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구도자 친화적인 전도와 구도자를 관심의 초점으로 삼는 예배가 많다. 구도자가 다음 주에도 다시 오게끔 모든 것을 그들 마음에 들도록 계획하고 변경하고 조정한다. 이런 식으로 전도했을 때 교인들이 자신이 관심의 초점이며 초점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의 초점은 그들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해야 하지 않을까? 전도와 예배의 초점은 우리 중 그 누구도 아니다. 예배를 위해 모일 때 우리가 열정적으로 헌신하고 숭배하는 초점은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선교에서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통치를 증언하는 데 헌신한다. 또한 전도의 핵심은 이 모든 것의 초점이 그리스도이심을 배우는 데 있다. 당신이 우리와 더불어 예배와 선교에 동참하는 것을 환영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초점이 당신에게 맞춰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동참할 수 있다. 당신은 이 활동의 초점이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당신이 우리와 함께하는 것을 환영하지만, 어떤 환상도 갖지 말아야 하며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의 핵심이시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영성 형성에 대한 접근방식.
영성 형성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살아가는 능력을 기르고 그런 삶을 지향하며 이를 위해 훈련하는 것이다. 그 핵심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인식, 그분의 사랑에 대한 감사, 그분의 성령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된 은총에 의지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영성 형성의 핵심은 도덕 추구가 아니다. 도덕적 순수성과 지향성은 중요하지만, 그런 것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누가복음 18장에서 부자 청년 관원이 이해했듯이, 결국 중요한 것은 율법을 지키는 삶이 아니라 “와서 나를 따르라”하신 부르심에 전적으로 응답하는 삶이다.
또한 영성 형성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내 앞에 계시며, 그리스도께서 내 뒤에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내 왼쪽에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속에 계시길”이라는 탁월한 켈트 기도문이 포착해낸 역동성 속에서 살아가는 능력을 기르는 데 있다. 이것이 영성 형성의 핵심이자 초점이다. 문제의 핵심은 인격 계발이나 그리스도 닮기가 아니다. 물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만들어지지만, 이는 우리의 개인적 결단-‘나는 그리스도처럼 될 것이다’- 의 결과가 아니다. 이런 결단은 헛된 노력일 뿐이며 좌절감만 안길 뿐이다. 영성 형성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분과 연합하여 살아갈 때 우리 안에 점진적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그분이 만들어진다.
궁극적으로 기독교 영성 형성의 핵심은 교리 교육의 결과로 얻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적 믿음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본보기를 따르는 법을 가르치는 것, 즉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묻도록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핵심은 성부에 의해 양자가 되었고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와 역동적 교제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거룩함을 도덕이나 인격, 덕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의 반대가 죄인 것도 아니다. 죄의 본질은 부도덕이 아니며, 거룩함의 본질은 도덕이 아니다. 따라서 영성 형성의 핵심은 도덕 형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바로 지금 부활하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그분과 더 깊은 연합을 누리는 것이다. 영성 형성과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반드시 기도와 예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 핵심적인 실천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응답이 더 깊어진다.
인격 계발에 관해서도- 머릿속으로나 말로 “어떻게 인격이 형성되는가?”라고 물을 때-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기르는 데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영성 형성이란 믿음이 더 깊어지는 것, 그리스도를 더 깊이 신뢰하고 더 철저히 의존하는 것을 뜻한다.
많은 경우 교회의 가르침과 배움은 도덕적인 사람을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우리는 인격과 도덕을 혼동하고 좋은 아버지, 정숙한 배우자, 너그럽게 베푸는 사람, 정의로운 사람, 친절하고 사랑 넘치는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 설교한다. 이런 경향이 너무나도 위험한 까닭은, 이렇게 함으로써 황금률에 따라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이런 유의 설교는 무익하다. 어쩌면 무익한 것보다 더 나쁠 것이다. 우리의 근원적인 문제는 도덕이나 인격의 결여가 아니다. 근원적인 문제는 믿음의 결여이다. 좋은 설교에서 선포된 말씀은 우리 믿음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게 하며, 그 결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성숙해지고 깊어진다. 본문에 상관없이 모든 설교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더 깊이 신뢰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믿음에 관해 말할 때 이를 순종과 연결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은 신실한 순종을 통해서이다. 믿음은 순종이며, 순종이 없다면 절대로 믿음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처럼 되고 그분을 모방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분께 순종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순종의 길을 걸으며,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권세에 복종함으로 해방되고 능력을 받는다. 그리스도는 구원자이자 주님이시다. 구원자와 주님은 동일한 한 분이시며, 우리가 그분의 자비로운 권세에 자유롭게 순종할 때 그리스도의 구원을 경험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했듯이-이보다 더 분명히 말할 수는 없다-그리스도는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히 5:9).
신실한 순종을 가려낼 수 있는 실질적인 시험은 고통의 길이다. 이는 히브리서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또 다른 주제이다. 고통은 예수님이 그분의 사명을 성취하신 유일한 길이며,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삶과 사명에 참여하는 유일한 길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더 이상 고통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고통이 의미-구속이라는 목적-를 갖게 하기 위해서 고통당하고 죽으셨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공동상속자라고 말한다(롬 8:17). 고통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와 인격 형성, 즉 영성 형성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예수님이 고통을 통해 완전을 배우셨듯이 우리의 '완전'도 부분적으로는 고통을 통해 이루어진다. 히브리서 2장 10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통해 구원을 온전하게 하심으로써 많은 이들을 영광으로 이끄신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고통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히 5:8). 마찬가지로 우리도 고통을 통해 순종을 배운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여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고통의 신학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신학도 없고, 인격 형성이나 영성 형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
영적 성숙의 특징과 본질을 구체적으로 논하기 전에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나는 영성 형성과 인격 형성에 대한 우리의 전망에 기독론적 기초를 제시하고자 했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인격 계발과 참된 제자도를 기르는 데 실패했다면, 이는 그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본질적인 요소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이런 기초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교회 안에서 영성 형성과 영적 성숙을 열심히 추구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잘못된 기초 위에 이 집을 지을 수 없음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는 바닥에서 시작해 위로 올라가야 하며, 먼저 이런 물음을 던져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셨는가?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여기서 기본 전제는, 영성 형성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고양하는 것이며, 우리는 이 목적을 위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요 15:4) 살고 일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사역에 우리가 의존할 때, 그분의 사역은 부활하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능동적이며 의도적인 참여로 전환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차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삶으로부터 흘러나오며 그 삶이 맺은 열매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규정할 때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와 한 인격체-그리스도라는 인격체와의 관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물론 우리는 이 모든 것에서 기독교 신앙의 근본 원리를 분명히 받아들인다. 즉, 기독교는 이슬람처럼 책의 종교가 아니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궁극적으로 한 인격체이다. 그 핵심은 바로 지금 부활하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삶에 역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82-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