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이 말라버린 오후 / 박기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우리의 하루는 조금씩 사라진다. 설날 아침은 모두 들뜬 분위기다. TV 속 아나운서부터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설날의 분위기를 띄운다. 입춘이 지나서인지 아니면 지구온난화 때문인지 날씨는 따뜻하다. 올해는 다른 해보다 빠르게 봄꽃도 활짝 웃으며 조용히 온다고 한다.
예년 같으면 우리 부부도 인천 사시는 본가 어머니 집에 설 전날 가서 만두도 만들고 전도 부치고 했을 터였다. 그리고 아침 차례를 지내고 세배하고, 떡국을 먹으면서 덕담하고 했을 것이다. 식사 끝나고 나면 형제들과 조카들과 윷놀이하며 한바탕 웃고 떠들며 재미있게 지냈을 것이다. 형제들의 올해 소망들을 들었을 것이고, 조카들의 꿈과 고민거리를 들었을 것이다. 보통 집안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가장 소박한 행복을 누렸을 것이다.
그런데 올해는 그러지 못했다. 고관절 수술로 걷지 못하시고 휠체어 타시는 장인어른을 우리 집에서 모시고 일주일에 세 번 신장 투석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매주 화, 목, 토 신장 투석일인데 하필 설날이 토요일이어서 신장 투석 날이다. 11시에 출발해 여의도 S 병원까지 가는 길은 평상시보다 2배는 더 걸렸다. 고향으로 향하는 차량은 설렘을 안고 시간과 나란히 달리고 있다. 백미러에 햇살이 걸려 있다. 병원의 텅 빈 주차장도 외로웠는지 환영이다.
평일보다 더 무표정한 경비 아저씨를 지나 휠체어가 지나간다. 신장투석실은 지하 1층, 가는 길까지 공휴일이어서인지 더욱 어두침침하다. 마치 휴식을 방해받은 어둠이 시위하는 거 같다. 어둠에 어깨가 무너져 내릴 즈음 도착한 신장투석실은 너무 눈부셔서 나는 웃고 말았다.
설날에도 7개월째 보는 환자들과 보호자와 간호사들을 보니 왠지 가족 같다. 반갑게 눈인사하고 그 사이 신이 부른 환자는 없는지 환자용 침대를 둘러본다. 보호자들 대부분은 딸이다. 간혹 아들이 부모의 휠체어를 밀고 오기도 하고, 머리 하얀 백발의 노인이 투석 중인 아내 옆에 앉아서 졸고 있기도 하다. 힘겨운 호흡으로 살려달라 외치는 중년부터 젊은 아내의 머릴 쓰다듬으며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남편, TV 삼매경에 빠진 환자까지.
병실 풍경은 세상의 한 단면을 한 컷 한 컷 잘라 놓은 거 같다. 침대에 누운 장인어른 팔에 간호사가 익숙하게 혈관을 찾아내 바늘을 꽂는다. 물레방아처럼 도는 인공투석기는 우주에서 버림받은 노폐물을 몸 밖으로 던져 버린다. 마라톤보다 숨찬 네 시간의 달리기에 불규칙한 맥박은 간혹 위급을 알리고 두 시의 미열에 지친 기계 소리만 요란하다. 이제부터 장인어른은 4시간의 힘듦이 시작되고, 우리는 자유가 생긴 것이다.
12시가 넘어 허기진 배를 안고 텅 빈 도시를 걸었다. 회색의 도시가 온통 콘크리트 정원 같다. 설날이라 모든 음식점은 가족들과 지내느라 텅 비었다. 소란이 말라버린 오후. 그나마 여러 브랜드의 커피 가게만이 불을 켜놓고 한낮의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아내가 시켜준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이 힘든 상황이 끝나면 전국 일주를 한 달간 떠나자는 원대한 꿈을 꾸어 본다. 7개월째 24시간 간병하는 아내의 상한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아내를 생각하면 장인어른이 요양병원으로 가시겠다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전혀 그럴 생각이 없으시다.
당신은 편하겠지만 간병하는 아내의 고생은 상상을 초월한다. 신장염 환자이면서 미식가인 장인은 먹고 싶은 것을 아내에게 주문한다. 새조개, 닭볶음탕, 보쌈, 복요리 등 90의 나이에도 여전히 드시고 싶은 게 많으시다.
먹는 것에 그다지 진심이 아닌 나는 아내에게 음식을 주문하기보다는, 아내가 해준 음식으로 뭐든지 불평 없이 잘 먹는다. 음식은 환자이면서도 매우 짜게 드신다. 소금을 음식에 엄청나게 투척하거나, 요리를 간장 범벅으로 드신다. 30년 넘게 그렇게 짜게 드셨으니, 신장이 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특별한 음식을 드신 날은 저녁이 문제다. 소화 기능이 떨어져서 밤새 기저귀를 2~3번 가신다. 그것도 본인이 이야기하지 않고 아내가 잠결에 냄새로 안다. 사람이 잠을 편하게 자야 하는데 아내는 7개월째 매일 선잠을 자니 몸이 많이 상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15년 전에 디스크 수술을 한 아내는 여전히 허리 통증에 시달리고, 이제는 관절에 무리까지 와서 한 달에 몇 번씩 관절에 찬 물을 빼내고 있다. 48킬로의 장인을 일으키고 화장실에 데려가고, 목욕을 시키곤 한다. 손자를 셋이나 둔 육십 대의 나이에 간병하기는 무리다.
간병은 순간의 자유도 허용되지 않는다. 하루 21시간이 모자란다. 시간에 맞춰 식사와 약을 챙겨야 한다. 낙상하거나 상태가 급변할까 싶어 환자 곁을 떠나지 못한다. 유일한 자유 시간은 요양보호사가 방문하는 오전 8시부터 11시까지 3시간 동안이다. 이 시간에는 아내도 정형외과에 가서 허리 등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
우리나라도 65세 이상 노인인구 1,000만 명 시대를 맞이했다. 노인 ‘간병’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른다. 직접 경험해 보니 간병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3년 간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실감 나는 요즘이다.
간혹 가족 간 장기간 간병 끝에 간병 살인이나 동반자살로 끝나는 뉴스를 보면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지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또한 핵가족화로 인해 노인이 노인을 간병하는 ‘노노간병’ 끝에 비극이 일어나는 일도 있다.
영화 ‘아무르’는 ‘노노간병’을 다룬 영화이다. 아무르는 프랑스어로 ‘사랑’이라는 뜻이지만 영화는 노년의 질병과 간병,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반신불수와 치매에 걸린 아내를 몸과 마음을 바쳐 돌보던 남편은 서서히 지쳐간다. 결국 아내를 베개로 눌러 숨을 막히게 한다. 착한 사람들도 오랜 간병 끝에 살인에 이르게 된다는 가슴 아픈 설정이다. 숙연해지는 사랑의 끝이다.
초고령 사회를 맞이한 우리나라에서는 1명의 가족이 중증 환자를 돌보거나, 24시간 간병인을 써야 하는데 간병비가 한 달에 400만 원이 훌쩍 넘는다. 이에 따라 ‘간병 파산’에 이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가족에게 당연한 듯 간병과 돌봄을 맡기는 우리나라의 의료 시스템에서, 간병과 치료에 들어가는 비용은 점점 늘어나지만, 정작 일을 할 수가 없어서 이 비용을 감당하기 위한 소득은 점점 줄어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제는 국가가 간병을 개인에게 방치할 것이 아니라 직접 나서야 한다. 서글프지만 그것이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다. 웰 다잉의 무게를 가늠해 보는 오후, 왔는지도 몰랐는데 봄이 훌쩍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