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숲 갈등나무 / 이규석
원시림 빽빽이 들어선 제주의 곶자왈 환상숲에는 갈등나무도 한 그루 살고 있었다. 비쩍 마른 때죽나무였다. 곁에는 칡넝쿨과 등나무를 거느리고, 그들 셋은 빼꼼히 열린 하늘을 먼저 차지하려는 듯 다투어 오르고 있었다. 화산이 터진 자리, 흙 한 점 없는 곳에서 그는 돌 틈에다 뿌리를 겨우 붙여 살아가는데 오른쪽에선 칡이 감아 오르고 왼쪽으로는 등나무가 타고 올랐다. 숨이 턱턱 막힐 텐데도, 누구도 양보는커녕 부지런히 상대의 목을 조르고 서로 몸을 칭칭 감기 바빴다.
이처럼 혼자 살겠다는 칡(葛)과 등나무(藤)의 얽히고, 꼬인 모습을 보고 갈등(葛藤)이란 글자가 만들어졌단다. 차라리 뚝 떨어져 살던가, 남을 의지해 살아가는 주제에 배배 꼬인 꼴을 바라보며 씁쓰레한 입맛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 안에서도 갈등나무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생이 쉬워질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며, 어른들의 반대에도 서둘러 결혼해 놓고도 왜 아내에게 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사랑은 기본으로 깔고, 더해서 두 개의 약속만 잘 지키면 우리 집 행복 나무는 저절로 자랄 줄 알았다. 열매는 덤이고. 첫째는 아파서 병원에 돈 갖다주느니 잘 먹고 건강하게 살자는 것이요 둘째는 처가의 대소사는 내가 챙기고 본가의 대소사는 아내의 결정에 따른다는 약속이었다.
연애 시절에는 아내의 다른 점들이 참 좋았다. 다르기 때문에 신비하고 다른 것이 매력이었지만 결혼생활은 다른 게 문제였다.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이요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더니 여태 보지 못했던 코털도, 땀구멍도 보이고 생각은 왜 그리 엉뚱한지, 말은 어찌 그리도 생뚱맞으며 행동은 어찌나 고집스러운지 그 많던 매력은 행방이 묘연해졌고 다툼은 끊일 날이 없었다. 부창부수를 외쳤으니 결코 져서는 안 되는 전투였다. 사랑만 있으면 모든 일이 만사형통이요 일사천리일 줄 알았는데, 부부생활이란 그림처럼 고즈넉한 숲길이 아니었다. 깜깜한 산길을 내달리느라 엎어지고 깨진 내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게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칡은 나무도 아니요 풀도 아닌 것이 산을 어지럽힌다고 욕을 얻어먹고도 잘도 살아가는데 난 무얼 망설이는 걸까. 곧 죽어도 굽어 살기는 싫고 곧게 서자니 힘에 부쳤나 보다. 그래서 내 안에서는 늘 둘이 다퉜다. 할까 말까, 줄까 말까, 쓸까 말까, 갈까 말까 마치 까말까 병에라도 걸린 듯 주춤주춤 주춤거리기 바빴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소신껏 살겠다고 외친 맹세는 다 어디로 갔느냐는 아내의 지청구가 날아들면 우리 집 갈등나무는 가뭄 끝에 단비 만난 듯 쑥쑥 자랐다.
칡은 생긴 꼴과는 달리 뿌리에는 갈증을 없애는 효능이 있어서 칡차로 널리 사랑받고 약용으로도 쓰인단다. 하지만 난 누구에게 유익한 사람이었던가? 남들에게 보이는 게 중하다기에, 돈이라도 쓰고 다니면 인심이라도 얻을까 싶어 푼수 없이 써재껴도 효용은 간데없고 주머니만 해지곤 했다. 얼마나 헤펐으면 우리 집에서는 내 돈 만 원과 아내 돈 천 원이랑 동가란다. 헛헛한 마음이 쌓여도 고약한 버르장머리는 때죽나무처럼 꼿꼿하게 서 있다.
등나무는 한더위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새순은 나물로 내주기도 하고 주렁주렁 매달린 자줏빛 꽃송이는 봄을 더욱 봄답게 치장해 준다. 아들딸 많이 낳으라고, 꽃을 말려서는 신혼부부의 배게 속으로 넣어준단다. 이 또한 뒤틀린 겉모습과는 달리 효용성 좋은 나무다. 하지만 우리 집 갈등나무는 허우대만 멀쩡했지 속은 텅 비었다. 부자유친하라는 삼강오륜도 섬겨야 했고 엄부자모가 되라는 가르침도 따르다 보니 헛갈린 걸까, 아들은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단다.
길섶에 배배 꼬인 갈등나무를 손가락질하며 저리 살면 안 되겠다고 놀려대지만, 싸우되 척지지 않고 다투되 서로 공존하는 그들의 사랑이 환상적인 숲을 이뤘다는 걸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이리 죽살이치면서 사는 게 칡과 등나무뿐이겠는가. 직선으로만 내달리던 나도 이젠 아내 등도 타고 올라야겠다. 구불구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