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 09월 20일 운양호사건 발생
강화도에 침입한 운양호
1875년 8월 21일 아침 강화도 초지진 앞바다에 군함 한 척이 나타났다. `운양호`란 이름의 이 일본 군함에서 작은 보트가 내려졌고, 보트는 초지진을 향해 서서히 접근해 왔다. 이양선 출몰을 경계하고 있던 초지진 포대에서는 당연히 접근하는 보트에 공격을 가했다. 그러자 이들은 즉시 모함으로 돌아갔고, 이어 운양호는 초지진에 대해 맹렬한 함포사격을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1875년 9월 20일 오후에는 제물포 앞바다로 옮겨 영종도에 포격을 가한 뒤 상륙해서 살육과 방화, 약탈을 감행했다. 운양호의 출현은 조선의 강제 개항을 위한 일본의 치밀한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즉 서해안으로 항로를 잡아 조선의 국방 요충인 강화도로 접근해 무력충돌을 유도한 것이다. 일본은 운양호사건이 발발한 후 "음료수를 구하려고 강화도에 접근하였다가 조선 측으로부터 갑자기 포격을 받아 할 수 없이 응전하였다"고 오히려 역선전하며 그 책임을 전가했다. 뿐만 아니라 부산에 있는 일본 공관과 교민의 보호를 구실로 춘일호, 맹춘호, 제2정묘호 등 군함을 잇달아 파견했다. 그리고 12월에는 육군중장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을 전권대신으로 하는 특명사절단을 군함 3척, 6백명의 병력과 함께 조선에 파견하여 운양호사건에 대한 책임추궁과 개항협상을 요구해 왔다.
결국 1876년 1월 강화도에서 조선측 대표 신헌과 일본측 대표 흑전 사이에 수호회담이 시작됐다. 2월 2일 인천 등 3개 항구 개항 등 일본측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됐고 이로써 조선의 쇄국정책은 막을 내렸다.
▶2012년싸이의 강남스타일 유튜브의 역대 최고 좋아요수로기네스북등재
▶2010년'유신헌법 제정 참여' 원로 헌법학자 한태연씨 별세
▶2009년'짱구는 못말려' 작가 우스이 요시토 실족사
▶2004년삼성전자 8기가비트(Gb)플래시메모리 반도체 개발 발표, 60나노시대 개막
▶2004년김인연, 허명숙 2004아테네 장애인올림픽 여자50m 소총 3자세에서 나란히 금,은메달 수상
▶2000년김영호 시드니올림픽 남자 펜싱경기에서 금메달
한국펜싱 국가대표인 공사소속 김영호 선수가 2000. 9. 20일 호주 달링하버시홀에서 열린 2000년 시드니올림픽 남자 개인 플러레펜싱 결승에서 독일의 비스도르프 랄프를 15-14로 누르고 한국펜싱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의 영광을 차지 했다.
김영호는 예선 첫 경기를 부전승으로 통과한 후 브리스 기야(프랑스), 클리프 베이여(미국), 고르비스키(우크라이나) 등을 꺽고 준결승에 올라 러시아의 체브첸코를 15-14로 제압하고 결승에 진출, 독일의 강호 비스도르프 랄프를 맞아 시종 팽팽한 접전을 벌였으나 특유의 장기인 어깨찍기를 이용한 과감한 공격으로 15-14로 누르고 한국선수단에게 귀중한 금메달을 선사했다.
▶1998년미국 프로야구 선수 칼 립켄 연속출장 2632경기 기록 수립
▶1995년미국 최대통신사 AT&T 분할발표
▶1995년제1회 광주비엔날레 개막
▶1994년미국 무대음악의 거장 줄리 스타인 사망
▶1986년제10회 아시안게임 서울서 개막
▶1985년남북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 서울과 평양 교환방문
▶1981년한국-바베이도스, 문화 및 경제협정 체결
▶1981년중국, 3개 위성발사 성공
▶1979년중앙아프리카 쿠데타로 독재자 보카사 추방
▶1978년스와질랜드왕국 마페브 드라미니수상 내한
▶1978년고려대장경 초본 59종 73권 발견
▶1975년프랑스의 외교관 겸 시인 생 종 페르스 사망
▶1971년남북적십자사, 가족찾기 예비회담 판문점서 첫 개최
▶1968년한국-뉴질랜드 정상회담
▶1962년서울에 무인공중전화 등장
▶1962년알제리아 총선서 벤 벨라파 승리
▶1961년미국-소련 군축 8원칙 공표
▶1961년혁명재판소, 최인규 이강학 한희석에 사형 선고
▶1960년콩고민주공화국 독립
▶1960년제15차 유엔총회 개막
▶1957년핀란드 작곡가 시벨리우스 사망
시벨리우스 [Sibelius, Jean, 1865.12.8~1957.9.20]핀란드의 작곡가.
본명 Johan Julius Christian Sibelius. 헤멘린나 출생. 9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15세 때부터는 바이올린과 작곡법을 배워 이 무렵부터 점차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가족들은 음악가가 되려는 그의 희망을 반대하여 1885년 헬싱키대학에 입학, 법률을 전공하는 사이사이 헬싱키음악원에서 베겔리우스에게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웠다. 그 후 음악을 전공하기 위하여 대학을 중퇴하고 당시 음악원 교수로 있던 명피아니스트 부조니에게 사사하였다.
시벨리우스는 본래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뜻을 품었으나 무대에 서면 상기하는 성격 때문에 연주가를 단념했다는 이야기는 그의 내성적인 성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베를린(1889) ·빈(90)에 유학하고, 빈에서는 브람스를 만나 가곡에 호의적인 평을 받았다. 민족적인 소재를 통속적인 묘사에 빠지지 않고 유럽풍인 지적 묘사로 처리한 그의 작풍은 유학시절에 쌓은 지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92년 모교 헬싱키음악원의 작곡과 바이올린교수가 되고, 작곡면에서는 국민적 대서사시 《칼레발라:Kaleval!!!!!a》에 의한 교향시 《크레르보》 《엔사가》, 모음곡 《칼레발라》 등으로 국외에서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어 《투오넬라의 백조》를 비롯한 《4개의 전설》, 교향시 《핀란디아》 《제1교향곡》 등으로 명성을 얻고 1897년에는 국가에서 종신 연금을 주기로 하여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아감에 따라 국외로의 연주여행도 많아졌으나, 《제2교향곡》을 완성한 1902년 전후부터 4년간은 귓병으로 고생을 하고 1904년에는 헬싱키 교외의 별장으로 옮겨 여기에서 죽을 때까지 반 은둔생활을 하였다.
24년 《제7교향곡》, 이듬해의 교향시 《타피오라》 이후는 거의 작품이 없고, 뇌출혈로 91세의 생애를 마쳤다. 7개의 교향곡 외에도 많은 교향시 ·바이올린협주곡 등이 있고, 《핀란디아》 《투오넬라의 백조》 등이 특히 널리 알려졌다
▶1956년국제원자력기구(IAEA) 창립총회
북핵 문제 등으로 인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1956년 오늘 뉴욕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제안으로 80개국의 서명을 받아 발족한 국제원자력기구는 원자력 에너지를 인류 복지를 위해 사용하자는 목적에서 창립됐다.
핵 에너지를 전쟁에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세계 평화를 위해 이용될 수 있도록 감시와 견제 기능을 하는 한편 원자력 에너지 개발에 대한 안전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는 총회 집행이사회 사무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회는 모든 회원국으로 구성되는 최고기관으로서 주요 정책을 결정하며 매년 한 번씩 정기총회를 개최하도록 되어 있다.
한국은 1957년 북한은 1974년에 각각 가입했다.
국제원자력기구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IAEA]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연구와 국제적인 공동관리를 위하여 설립된 국제연합 기구.
국제연합 총회 아래 설치된 준독립기구로서, 원자력 발전의 경제성 및 안전성 제고를 위한 국제적 협력을 목적으로 한다. 1953년 (12월 8일 제8차 UN총회에서) 미국의 드와이트데이비드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대통령은 국제연합 총회에서 유엔의 후원 하에 핵물질의 저장과 보호, 평화적 사용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기구의 창설을 제안함으로써, 파괴력 강한 무기인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주장했다. 이에 따라 1956년에 국제연합회원국 80개국이 IAEA의 설립헌장에 조인했고, 1957년 7월 29일 헌장 발효로 IAEA가 발족했다.
▶1951년동서독 통상협정 조인
▶1951년이승만대통령, 휴전에 4개조건 제시
▶1946년우리 학교(고신대학교)가 개교하다.
▶1946년제1회 칸영화제 개막
세계최초의 국제영화제 베니스 영화제가 무솔리니의 정치적 선전도구로 전락하자 프랑스에서 새로운 영화제가 모색됐다. 1939년 9월1일이 예정된 개최일이었으나 유럽 전역에 2차대전의 전운(戰雲)이 감돌면서 연기가 불가피했다.
다시 평화가 찾아온 1946년 9월20일, 제1회 칸영화제가 프랑스 남부의 관광도시 칸에서 열렸다. 축제형식으로 치러져 프랑스는 물론 미국ㆍ소련ㆍ인도ㆍ멕시코 등 대륙별 11개국 영화가 그랑프리를 수상했지만, 영화인들은 심사위원대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르네클레망 감독(프랑스)의 ‘철로의 투쟁’을 최고의 그랑프리로 꼽았다.
칸영화제가 가장 권위있는 영화제로 자리잡기까지에는 적지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1948년과 1950년은 영화제 개최가 무산됐었고, 1968년은 막상 개최는 했지만 5월혁명의 영향을 받은 데모대가 대회장을 점령하는 바람에 중단됐었다. 1979년에는 심사위원장이었던 작가 프랑소와즈 사강의 폭로발언이 영화제를 긴장시켰다. “그랑프리 선정에 뒷거래가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 심사결과는 ‘양철북’과 ‘지옥의 묵시록’이 8대2였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발표 때 5대5로 둔갑, 황금종려상을 공동수상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우리나라와는 ‘11편의 우수작품’ 중 하나로 선정된 이두용 감독의 ‘물레야 물레야’(1984년)를 시작으로 1999년 송일곤 감독의 단편영화 ‘소풍’(1999년)이 심사위원상을 받고 2004년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1945년미군정청 설치
▶1941년독일군 키에프 점령
▶1932년한중연합군이 일본군과 제 1차 쌍성보전투
▶1928년경성경마장이 개장
▶1913년이승만 호놀롤루에서 월간 `태평양잡지` 창간
▶1910년남아연방공화국 성립
▶1909년영국, 실업소개소법 성립-실업보험제도의 시작
▶1908년스페인 바이올린 연주자 겸 작곡가 파블로 데 사라사테 사망
▶1880년칠레의 대통령 몬트 사망
▶1878년미국 유머 작가 토마스 소프 사망
▶1875년운양호사건 발생
▶1863년독일의 형제작가 야고프 그림 사망
▶1840년파라과이 독재자 프란시아 사망
▶1792년발미 전투 발발
https://youtu.be/9bZkp7q19f0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