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일(토)
* 시작 기도
주님...
6월의 첫날 아침, 베드로전서를 묵상합니다.
주님과 함께 사역할 때는 마치 천방지축이었지만 그가 사도로서 성령을 받은 이후에는 그의 성격처럼 과감성 있는 결단력과 섬세함 또한 보여주었지요.
무엇보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를 너무 좋아했고 따라서 그와 같이 죽되 자기 같은 죄인이 어떻게 주님과 똑같이 죽을 수 있느냐면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도 했습니다.
나서기 좋아하던 그를 보면 베드로가 쓴 서신에는 자기 자랑이 주를 이룰 것 같은데 진짜 자기를 드러내는 자랑은 찾아볼 수가 없고 오히려 자기부인을 바탕에 깔고 주님을 드러냅니다.
그를 통하여 주님을 뵈옵니다.
나도 주님을 따라가는 종이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원하지만 나를 주장하는 옛 사람으로 인하여 너무나 쉽게 넘어지고 또 넘어집니다.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옛 사람과 나의 의는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어 주와 함께 연합한 자로 살게 하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이 하루도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기 원하오니 나를 주의 영으로 장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벧전 1:1-9
제목 :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잇게 하심.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나의 묵상
베드로전후서의 저자는 책 제목에 나오는 것처럼 베드로이다.
이 서신을 받는 수신자는 소아시아 일대에 흩어져 사는 모든 성도들임을 본문 1-2절이 기록하고 있다.
본 서신의 기록연대는 베드로가 로마에 장기 체류하면서 갖은 박해를 받았던 바 전서는 주후 64-68년 중 초반, 후서는 이 기간 중 후반으로 추정한다.
본 서신을 관통하는 전체의 주제는 하늘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진 성도들의 거룩한 나그네로서의 삶과 고난을 극복하는 자세로 살 것을 권면하는 내용이다.
베드로는 벧전 4:12-19절에 의하면 주후 64년 로마 황제 네로가 로마시의 대화재를 그리스도인의 소행으로 몰아 대박해를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소아시아 일대에 흩어져 살던 성도들 역시 이방 사회 속에서 여러 가지 애매한 고난을 많이 겪었다.
그들은 다수의 이방인들 중에서 소수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그 자체가 곧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들일 수밖에 없다.
다수의 이방인들은 음란하고 방탕한 삶을 사는 것에 반해 구별된 삶을 사는 소수의 그리스도인 이들은 그들 속에서 나그네처럼 살았던 것이다.
그런 모습으로 살 때 다수의 이방인들은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사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눈엣가시처럼 보였을 것이고 그들을 더 박해하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벧전 4:4절에 나오는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비방’하는 다수의 이방인들의 모습이다.
베드로는 이 서신을 받는 수신자들이 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이방인들 중에 이방인이요 나그네로서 극히 어려운 삶을 살아가지만, 그들의 육적인 어려움을 영적으로 승화시킨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라 부르며 나아가 천국을 향해 순례의 길을 가는 ‘거룩한 나그네들’이라는 신분적 정체성을 확고하게 세워준다.
따라서 잠시 잠깐 있다가 없어질 풀이나 꽃들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그 고난도 견뎌낼 것을 권면한다.
사실 고난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두려움이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비신앙인들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성도라 할지라도 아직 미성숙한 성도는 그가 당하는 고난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설령 비교적 성숙한 성도라 할지라도 신앙생활 중에 잠깐씩 고난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한다 할지라도 이들 역시 그 고난에 대하여 부담스러워하거나 힘겨워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본 서신을 쓴 베드로 사도는 고난의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기록하였다.
사도 역시 처음에는 고난을 싫어했지만 후에는 고난의 증인으로서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4:12-13)고 말한다.
고난에 대한 그의 시각이 이처럼 180도 바뀔 정도로 고난이 우리의 인생에 주는 실제적인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 수제자였다.
그런 그가 예수님이 죽으신다는 그 말에 격하게 반응을 보인다.
당신이 그렇게 죽어버리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면서 말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모든 것을 보호해 주고 안전장치로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마땅히 행하실 구속 사역을 그만 두실 수는 없다.
주님은 이 땅에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십자가를 지러 오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대제사장과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으신다.
그 때 제자 베드로를 향하여 네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을 말씀하신다.
과연 새벽에 닭이 울자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님을 부인한 것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통곡하였다(마 26: 69-75).
예수님을 가장 잘 따르고 따라야만 했던 베드로, 그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게다가 저주까지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그가 받을 고난이 두려워서이다.
그 고난 때문에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 맹세한 것이다.
그런 그가 후에 사도로써 베드로전후서를 기록할 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가 행한 기적이나 표적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을 배신하여 부인하고 저주했던 그 일이었다.
그 일이 비록 그에게는 없었으면 좋았을 일이지만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 했던가?
그 일 이후로 그는 철저하게 회개하였고 주님과 연합하여 동행하는 자가 되었다.
그 일이 그에게 뿐 아니라 이후에 예수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삶의 지표였음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래서 베드로서에서 그는 이 고난을 기쁘게 받으라고 권면 또 권면 하는 것이다.
물론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베드로가 살던 당시의 상황과는 크게 다르다.
예수를 믿는다고 박해를 당하거나 욕을 먹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이 말씀을 온전히 받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이 결코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땅을 나그네와 외국인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다.
믿음의 선조들도 역시 그렇게 사셨다.
(히 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처럼 약속된 예수 그리스도를 받지 못하고 그 분에 대한 증거만 받았음에도 이런 귀하고 복된 삶을 산 자들이 믿음의 선조들이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오늘 우리가 그들보다 더 복되다고 증거한다.
(히 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우리를 통해서 그들이 온전해진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의 실체를 받은 우리와 함께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된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오늘 우리나 믿음의 선조들이나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는 그 소망은 동일하다.
나는 이 복음을 알지 못하였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으로 받을 그 나라를 우리에게 소망으로 주셨지만 나는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처럼 지금 현재 내게 있는 이 땅의 현실을 나의 실제적인 삶으로만 여겼던 것이다.
이 땅에서 아무리 내가 원하는 대로 산다 할지라도 변하지 않는 진리는 여러 가지 시험의 도래이다.
그 시험 안에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고난도 있다.
그 고난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주시는 것임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장사복음이다.
이 장사복음의 핵심은 무덤이다.
무덤이란 그동안 우리가 세상적이요 정욕적으로 살아온 것에 대한 모든 쓰레기를 처리하는 장소이다.
이 무덤이 없이는 참된 기쁨이 있을 수 없다.
처음부터 고난과 같은 시험을 즐거워하는 이는 없다.
다만 그 고난으로 인하여 근심하지만 잠깐 근심하는 것이기에 그 고난의 무덤을 수용하여 주님의 무덤 안에서 종말처리하게 되면 그것은 곧 기쁨으로 승화된다.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심령이 변화되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를 보지 못한 것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선조들이나 베드로 당시 흩어진 나그네들이나 오늘 나와 같은 그리스도인들도 다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과 기쁨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정금은 뜨거운 불로 연단하여 순금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믿음은 이런 정금보다 더 귀하다.
그리하여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사람들에게서 받는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완전한 칭찬을 받게 된다.
거기에 영광과 존귀인 진짜 믿음의 연단을 통한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열매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짜 상급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우리의 가치관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이 세상 만물 안과 하나님 나라 두 세계가 있음을 알면서도 나의 마음은 지금 현재 육신의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진짜라고 생각하며 살았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 세상 만물이 좋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 썩어지고 쇠하며 없어질 쇠락의 법칙에 적용을 받는 것들임을 인정합니다.
자연 만물이 생육하고 번성하다가 다시 쇠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는 현장학습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고 하신 그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주는 체험학습임을 고백합니다.
나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이 종의 부족함을 하감하시어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주 안에서 살되 내 안에 항상 거하시는 임마누엘 되신 주님과 연합하여 살게 하소서.
나의 뜻은 내려놓고 주님의 뜻만 오롯이 드러나는 우리의 인생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