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복
□ 본문 : 창세기 21장 22-32절 (봉독은 22절, 23절)
성도의 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마지막 날에 예수님처럼 부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온전한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고 이성봉 목사님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천국 본점과 지점에 대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으면 천국에 갑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천국 본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서만 천국을 누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천국을 누립니다. 우리 안에 천국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가 가득한 이 세상에 살면서도 천국의 평안을 누립니다. 우리 안에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국 지점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임마누엘의 복을 받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인생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송하며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배신의 아픔과 외로움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련을 만나도 무너지지 않고 이겨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받은 복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이 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 미국인들의 꿈 가운데 하나가 크루즈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느 부부가 결혼 30주년을 기념해서 크루즈 여행을 하기로 하고 적금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워낙 가격이 비싸고, 또 물가가 계속 올라서 적금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여행을 위해 모아놓은 돈을 합해서 세계일주 크루즈 여행권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꿈에 그리던 크루즈를 타고 세계일주를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표를 사는데 모든 돈을 사용해서 정작 크루즈 안의 시설들을 이용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습니다. 여러 극장과 수영장, 선상 카페, 그리고 다양한 고급 레스토랑이 그림의 떡에 불과했습니다. 그래도 이 부부는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크루즈를 타고 세계여행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자고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식사도 출발할 때 싸가지고 음식들과 크루즈가 정박하는 곳에서 값싼 음식을 사서 해결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가고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이 부부는 큰맘을 먹고 멋있게 정장을 차려입고 가장 고급스러워 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비싸도 크루즈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부를 보고 지배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메뉴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메뉴를 보니 하나같이 굉장히 비쌀 것 같은 일류요리였습니다. 그런데 가격이 써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지배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이 부부에게 말합니다.
“가격이라니요? 여기에 있는 모든 메뉴는 얼마든지 마음껏 드실 수 있습니다. 크루즈 여행권에 이미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알고 보니 크루즈 안에 있는 모든 시설들, 극장과 수영장과 선상 카페 등도 여행권에 모두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이 부부는 한 달 동안 크루즈 안의 그 좋은 시설을 한 번도 이용하지 못하고, 최고의 음식들을 맛보지도 못하고, 자신들이 싸가지고 온 음식과 정박한 곳에서 산 값싼 음식들로 배를 채웠던 것입니다.
물론 실화가 아닙니다. 크루즈 여행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가장 기본적인 정보를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왜 제가 있을 수도 없는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는 것입니까? 이 부부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은 크루즈와 다릅니다. 굳이 신앙생활을 배에 비유하자면 우리는 크루즈가 아니라 전투선에 탄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도록 마귀와 영적전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천국 가는 그날까지 자기 힘으로 애쓰고 수고하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고생고생하며 살다가 천국에 들어갈 때, ‘고생 끝 행복 시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환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박해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따라 마음껏 즐기다가 결국은 지옥에 들어가는 유람선이 아니라,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영적싸움을 하는 전투선을 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의 미움을 받아도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행복합니다. 환난을 당하지만 환난 중에도 천국의 평안을 누립니다. 평화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박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육신은 말로 다할 수 없이 힘들고 괴롭습니다. 그런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넘쳐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전하는 것 때문에 매를 맞고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한 밤중에 깨어나 찬양했던 것입니다. 조용한 찬양이 아니었습니다. 감옥 안에 있던 간수와 모든 죄수들이 들을 정도로 큰 소리로 찬양했습니다. 바울과 실라 안에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소리 높여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 시간 그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데 왜 예수님을 전하다가 붙잡혀야 하고,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데 왜 매를 맞아야 하고,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데 왜 감옥에 들어가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것도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전도하다가 말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면 붙잡히지도 말아야 하고, 매를 맞거나 감옥에 갇히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전투선을 탔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영적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고자하면, 경건하게 살고자하면 핍박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지옥인데, 세상의 미움을 받는 우리 마음은 천국입니다. 유람선에 탄 사람은 쾌락을 위해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그 마음이 공허합니다. 그런데 전투선에 탄 우리 마음은 행복합니다. 만족합니다. 박해하는 사람은 걱정하고 염려하는데, 박해를 받는 우리 안에는 평안이 있습니다. 박해하는 사람의 얼굴은 분노가 가득한데, 박해를 받는 우리의 얼굴은 빛이 납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는 스데반 집사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이고 능력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지 않으면 이 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과 부활을 믿습니다. 천국을 믿고 영생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마태복음 6장 31절, 3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방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특징은 한 마디로 염려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인생의 가장 기본인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합니다. 이런 것들을 염려한다면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특징이 염려라고 한다면, 이 말씀을 기준으로 우리 자신이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이 질문에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모두 아멘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기에 이제는 걱정 염려하지 않습니까? 이 질문에 많은 분들이 이렇게 반응할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방금 전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아멘 했으면서도, ‘걱정 염려하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에 아멘 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실재가 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임마누엘이 자신의 삶속에서 진리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걱정 염려는 계속해서 우리를 찾아옵니다.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완전하다면 걱정하고 염려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불완전합니다.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하게 만드셨지만 죄를 지음으로 타락한 존재, 불완전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걱정과 염려가 계속해서 우리를 찾아옵니다. 영적으로 보면 마귀가 끊임없이 걱정과 염려의 가라지를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마음이 약해서 걱정과 염려가 되는 것을 말입니다. 육신이 약해서 걱정과 염려가 되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가정에 일터에 이런저런 어려움들이 생겨서 걱정과 염려가 되는 것을 말입니다. 이런 연약함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동일합니다. 이 육신을 벗어나서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는 걱정과 염려가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성도는 모든 걱정과 염려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찾아오지만 품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기에, 걱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평안을 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맡기지 않습니다. 아니 맡기지 못합니다. 맡기면 책임져주시는데 맡기지 않으니 걱정하며 염려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사는 것입니다. 걱정은 걱정을 낳습니다. 그래서 걱정은 끝이 없습니다. 그렇게 걱정하는 사람의 마음은 천국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더 이상 염려하지 않고 사는 축복을 받았는데,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평안을 누리는 축복을 받았는데, 그것을 모르고 걱정과 염려를 짊어지고 피곤하고 힘든 인생을 살아갑니다. 설교 서두에서 나누었던 예화를 기억하십니까? 크루즈 여행권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크루즈 안에서 궁색한 생활을 했던 부부처럼 말입니다.
나중에 천국에 가면 하나님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의 모든 염려를 다 맡아준다고 약속했는데, 내가 너를 위해 놀라운 평안과 안식과 기쁨을 준비했는데, 왜 너는 나에게 맡기지 못하고 그렇게 걱정하고 염려하며 고생하며 살았니? 왜 내가 준비한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그렇게 피곤하고 힘든 인생을 살았니?’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해 누리지 못하는 축복이 이것뿐이겠습니까?
그 중의 하나가 상한 마음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상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상처를 받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살아갑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자녀만 부모에게 상처를 받고 살겠습니까? 부모도 자녀에게 많은 상처를 받고 살아갑니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쪽이 더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일방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조차도 이렇게 상처를 주고받고 살아가는데 다른 관계는 어떻겠습니까? 사실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상처를 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친하지 않은 사람이 던진 말은 기분이 나빠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있는데, 친한 사람일수록 마음에 깊이 남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사람은 상한 마음을 붙잡고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 날마다 상한 마음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저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었어요. 저 너무 억울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사람이 어떻게 저에게 이럴 수가 있어요. 하나님, 저 너무 아파요. 이제는 사람이 두려워요.’ 이렇게 상한 마음을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상한 마음을 치유해 주십니다. 깨어진 마음이 새롭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이게 안 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상한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물론 이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그러나 상한 마음은 그대로 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때 그 일, 그때 그 말이 생각나서 마음이 괴롭습니다. 마음이 새워지지 않는 이상 이런 일을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상처는 점점 더 깊어집니다. 상처를 준 사람은 이제 나와 아무 관계도 없는데, 과거에 받은 상처를 계속 묵상하면서도 스스로 상처를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쓴 뿌리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쓴 뿌리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더욱 그렇습니다.
상한 마음을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 상한 마음을 드리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믿지 않으면 일평생 상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교리적인 신앙, 지식적인 신앙입니다. 교리가, 지식이 필요 없다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이 거기에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진리를 삶 속에서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평생 상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도 괴롭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괴롭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사랑을 누리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언제까지 상처에 얽매여 살아가려고 하십니까? 우리 하나님께는 새 그릇이 무궁무진합니다. 구하면 언제든지 새 그릇을 주십니다. 그러니 이제는 깨어진 그릇 내어버리십시오. 깨어진 마음 내어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새 마음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십니다.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설령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이 더러워지고 상했다 할지라도 괜찮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깨끗한 마음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십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22절, 23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그 때에’는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자신의 장막에서 내보낸 때를 말합니다. 그 때에 그랄에 살던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군대 장관 비골과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옵니다.
아브라함과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약 4년 정도 됩니다. 짧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길지 않은 시간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어색하고 불편합니다.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가나안 헤브론에 살던 아브라함이 블레셋 땅 그랄에 왔을 때,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랄 사람이 아내를 빼앗기 위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사라를 후궁으로 맞아들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아비멜렉과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죽임을 당할 뻔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권적인 개입으로 아비멜렉과 그에게 속한 자는 죽임을 면했고,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돌려보내라고 하시면서 아브라함이 선지자라고 말씀하십니다.(20:7)
하나님이 두려워서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급하게 돌려보냈지만, 아비멜렉이 보기에 아브라함은 선지자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지자가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실 아브라함 자신도 자신을 선지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사라를 돌려주면서 아브라함에게 원하는 곳에서 살라고 말했고, 이렇게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있고 약 4년 후에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그랄이 아니라 브엘세바에서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랄에서 브엘세바는 약 50km정도 됩니다. 그랄에 살던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군대 장관 비골과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온 이유는 동맹을 맺기 위함이었습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자국의 안전을 위해 동맹을 맺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동맹은 조금 이상합니다. 일반적으로 동맹은 주로 비슷한 수준의 나라가 맺습니다.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 사이에는 동맹을 맺지 않고 주종관계를 맺습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보호해주고, 그 대가로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에게 조공을 바칩니다.
아브라함은 북방 연합군을 물리친 318명의 용감한 군사를 거느린 힘 있는 족장입니다. 그래서 왕의 수준에서 대접할 정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왕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왕인 아비멜렉이 한 가문의 족장인 아브라함과 동맹을 맺으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계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요청한 동맹은 단순한 동맹이 아니었습니다.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과 손자 대까지 동맹을 맺자고 합니다. 아비멜렉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것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318명의 군사가 있다하나 자신은 군대 장관을 거느린 왕입니다. 군사력으로 보면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한 나라의 왕과 한 가문의 족장은 영향력에서나 힘에서나 비교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여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자신의 아들이 겉모습만 보고, 군사력만 보고 아브라함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무서운 일을 당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과 손자 대까지 동맹을 맺자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세상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성공했다고 세상 사람이 성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믿지 않아도 성공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많이 배웠다고 세상 사람이 성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믿지 않는 대단한 석학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이 많다고 세상 사람이 성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믿지 않는 재벌들이 수두룩합니다. 세상 사람이 성도를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를 보니 어쩌면 하나님이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우리를 보면 볼수록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은 두려워합니다. 비록 자신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있었기에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동맹을 맺자고 찾아올 정도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이 되었을까요? 그렇다면 전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다가 어떤 일을 계기로 아브라함과 함께 하기 시작하셨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계기는 이삭의 출생입니다.
아브라함이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1)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부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기근이 왔을 때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애굽 사람이 두려워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계셨기에 아브라함은 사라를 되찾을 수 있었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아내 사라의 말을 듣고 하갈을 첩으로 맞이하기도 합니다. 헤브론에 기근이 오자 또 다시 블레셋 땅 그랄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도 사람들이 두려워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와 똑같이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아브라함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분명히 믿지 못할 때 아브라함은 여지없이 흔들리고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삭의 출생을 통해 아브라함은 이전과는 다른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믿음으로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얻은 이삭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심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이것이 분명하니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니 더 이상 걱정도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니 아비멜렉에게 행한 부끄러운 죄도 상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까지 그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알 정도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동맹을 맺을 정도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아브라함이 두려웠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누리는 최고의 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진정으로 믿지 못하면, 여전히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랄 땅에 내려갔던 아브라함은 두려움으로 인해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믿지 못하니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이 이삭의 출생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분명하게 믿어졌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분명하니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했던 전부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아브라함을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계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두려워하여 그와 동맹을 맺고자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이 두려워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아브라함을 두려워하니 정말 놀라운 역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믿어지냐 믿어지지 않느냐가,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브라함의 인생에 이렇게 놀라운 차이를 만들어 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얻은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믿음으로 얻은 예수님을 날마다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간마다 순간마다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믿어집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합니다.
①예수님과 동행하는데,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는데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②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③상한 마음, 깨어진 우리의 영혼을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사랑의 예수님과 동행하는데, 내 마음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가득한데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누구를 사랑하지 못하겠습니까? 나의 마음도 천국이고, 내가 만나는 사람도 나를 통해서 천국을 맛보게 됩니다.
④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기에 어떤 문제를 만나고 어떤 환난을 만나도 우리 마음은 평안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복입니다. 받아야 할 복이 아니라, 이미 받은 복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날마다 시간마다 순간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을 누리며 삽니다. 그러면 세상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이것의 성도의 복입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