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늦가을 가은산 능선을 넘던 어느날이었습니다.
대성고등학교의 어느 선생님으로부터 고교 동문인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인물칼럼을 써
달라는 원고청탁을 받았습니다. 산악회의 송년축시를 청탁 받던 것처럼 기뻤습니다. 그래
서 흔쾌히 승락했습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저와 동창입니다. 저처럼 원주산이고
원주의 자랑이고 강원의 자랑인 이나라 경제의 수장입니다. 산악회 카페에 칼럼 전문을
옮깁니다. 학창시절 느꼈던 순수한 기억을 떠올려 어설픈 소견으로 주열 친구에 관한 지
난날과 지금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내일 졸업식장에서 졸업생과 재학생 그리고 원주 지역
사회단체에 모교의 교지인 "치악"이 배부된다고 합니다. 행여 서툴거나 주제 넘은 문맥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2016. 2. 3 한 필 수 드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대성 동문인 까닭에
제 14회 동문
전 원주문화방송편성부장
“화폐개혁 필요성에 공감한다”
작년 가을 국정감사장에서 어느 국회의원의 질의에 대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짤막한 답변이다.
당장 화폐개혁을 검토하겠다는 발언이 아니었음에도 정치권과 재계는 삽시
간에 술렁였고 급기야 한은측에서는 “원론적인 설명이었을 뿐 리디노미네
이션의 추진 의사를 표명한 것은 절대 아님“ 이라는 긴급보도 해명자료를 내
사태를 수습하는 일대 곤혹을 치러야했다.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 선 우리나라지만 1962년 마지막 화폐개혁을
한 지 50년이 넘도록 선뜻 화폐개혁을 시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회적 파장
이 그만큼 크게 작용하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이 나라의 정치권과 재계가
한국은행 총재의 그날그날의 말 한마디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가 거기
에 있다.
그래서 혹자는 한국은행 총재를 일컬어 이시대에 대통령 다음으로 막중한
자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는 바와 같이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모교인 대성중고등학교 동문이다.
그런데 그가 정치권에서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제 25대 한은 총재 인사청
문회가 열릴 즈음에서였을 것이다.
이주열 동문은 1977 년 한국은행에 입사한 이래 오직 한은에서만 35년을
봉직하고 지난 2012년 한은 부총재를 끝으로 현직에서 정년으로 물러났다.
이때 여당과 야당에서는 이주열 동문과 친분이 두터운 인맥의 지인들을 동
원시켜 끈질기게 입당을 권유하였다. 곧 있을 지방선거에서 이주열 동문이
고향인 원주에서 출마하게 되면 당선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계산을 했었
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그는 정치권의 집요한 입당 권유에도 단호히 거절하고 모교인 연세
대학교로 되돌아가 후학을 가르치는 교수의 길을 택했다.
이럴즈음 정치권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발탁한 총리와 장관 후보자들이 인
사청문회를 거치는 과정에서 잘못된 전관예우와 부동산 투기의혹 등으로
잇달아 낙마하는 초유의 사태가 계속되고 있는 혼돈의 시기였다.
2014년 3월 19일 이주열 한은총재후보자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정치권은 물론, 재계와 강원도민 그리고 고향인 원주 시민들이 TV로 생중
계되는 청문회를 눈을 부릅뜨고 지켜봤다. 청문회가 마무리될 무렵이 되면
서 어느 야당 국회의원이 던진 한 마디는 아직도 정치권에 전설처럼 회자
되고 있으니 “이주열 후보자를 아무리 털고 털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더라“
였다.
그런 그가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요, 대성 동문이다.
한국은행 총재가 어떤 자리인가?
대통령이 추천하는 임명직이기는 하지만 정권이 바뀐다 하더라도 4년의 임
기가 보장 되는 즉,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국가 경제의 현재와
미래를 보고 경제를 운영하는 독립기구의 수장의 지엄한 자리다.
오늘날 한국은행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히게 화폐를 발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서 통화신용정책을 수립, 집행하고 있으며, 금융시스템의 안정
을 도모하는 책무는 물론 정부와 함께 국가비상시 대외지급능력으로서 안전
판 역할을 하는 약 3천7백억 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액을 관리하고 있는 기관
인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일거수일투족마다 유수의 TV와 신문이 뒤를 쫏는다.
필자가 일찍이 언론사에 오래 근무했었기 때문일까, 아마도 이 나라에서는
지금 대통령 다음으로 언론 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이는 이주열 동문이 아닌
가 싶다. 국내 정치권은 물론이고 전경련과 경제계에 미치는 영향이 심대하
고 우리 가정의 살림살이에까지 적잖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이주열이다.
이주열 동문과 필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1964년 3월 모교인 대성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는 고등학교까지 쭉 6년을 같이 다녔으니
그야말로 순수한 대성맨인 셈이다. 평원동과 봉산동을 사이로 다리 하나만
건너면 그의 집이여서 책을 빌린다는 핑계로 사흘이 멀다 하고 친구의 집을
드나들었었다. 그 친구에게는 입술이 도톰하고 귀여운 세 살 아래의 여동생
이 있었다. 갈 때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오빠만큼이나 날 반겨주었는데 그의
집을 자주 가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제야 얘기지만 바로 그 여동생을 보기 위
함도 있었던 게 사실이었던 것 같다.
동아전과를 빌리러 갈 때에도 그 아이를 볼 수 있었고 영어실력기초 책을 빌
릴 때에도 여동생은 거기 있었다.
뻔질나게 드나들면서도 좋아했다는 말 한마디 차마 건네지 못하고 6년이란
청소년기가 휙 지나갔으니 그 시절에는 숫기가 없이 다 그랬었나 보다.
지난해 5월 개교 61주년 한마음대축제에 이주열 동문이 모교를 찾았다. 전날
까지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새벽같이 귀국하여 시차적응도 못하고 모교의 행
사에 참석한 것이다.
이날 많은 후배들은 이주열 동문을 알아보고는 그와 악수하고 같이 사진을
찍느라 길게 줄을 섰으며 그 역시 오래도록 후배들과의 시간을 같이 하며 의
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가 대성 동문임이 자랑스러운 이유는 뭘까?
꼭 한은 총재로, 이른바 출세한 인물이기 때문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정치
권의 영입제의에도 기웃거리지 않고 오직 금융인의 모습으로 학교로 돌아가는
그 뒷 모습이 아름다운 것이고 박근혜 정부 들어서서 무결점으로 인사청문회
를 통과한 최초의 고위공직자라는 엄연한 사실에 우리 동문 모두는 그가 자랑
스러웠으리라.
대성인이여! 대성동문이여!
지난해 대성동문 한마음축제에서 이주열 총재를 만나니 얼마나 반가웠던가,
그리고 얼마나 자랑스러웠던가!
우리 모두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대성출신임에 자긍심을 갖자.
그런데 그의 고향 우리 모교에서 이주열 동문이 자랑스러운 인물인 것처럼 그의
대학 모교인 연세대학교 역시 지난 1월 12일 연세대학교 총동문회 신년 인사회
에서 2016 자랑스런 연세인상을 안겼다.
지난 연말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미국의 금리인상 움직임과 중국의 경제성장
둔화 등으로 이른바 G2 리스크로 인해 “앞으로 세계 경제의 키워드는 불확실성“
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2016년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위한 키워드는 뭘까?
이주열 동문이 한국은행 총재로서 새해 벽두에 던질 화두가 궁금하다.
끝
지난 1월 31일 설악산 토왕성폭포를 다녀왔습니다. 오는 주말에는 지리산이 오랍니다.
첫댓글 멋진글감사합니다.
늘 멋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