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의 포석』은 우리에게 소개되는 일본문학 중에서는 흔치 않은, 지적인 에세이 풍의 소설이다. 작가 호리에 도시유키는 프랑스에서 불문학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불문학자이자 소설가, 평론가, 번역가 등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아쿠타가와 상을 비롯해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 평론, 산문 모두에서 문학성을 인정받고 있는 그는, 스스로가 ‘비평이나 논문 역시 소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창작’이라고 밝혔듯, 특정한 장르에 귀속되기보다 자신의 감성과 교양을 바탕으로 장르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보여준다. 불문학을 전공한 작가답게, 그의 소설은 프랑스적인 색채가 짙다. 작가의 체험이 녹아 있을 프랑스 여행의 기록이 그렇고, 장황한 듯 섬세한 문장과 분방하면서도 묵직한 사유가 그렇다. 짧은 소설들이지만, 그 안에는 프랑스 시골 마을의 아름다운 정경, 여행자 특유의 달뜸과 무모한 용기, 여행지에서 만나는 유쾌한 사람들, 이국의 낯선 요리와 풍물들, 유대인과 일본인 사이의 미묘한 우정, 사소한 우연에 의해 좌우되는 역사의 아이러니, 타인의 아픔을 바라보는 제삼자의 어색한 시선, 역사적인 비극과 개인의 기억이 만나는 지점, 사랑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옛사랑의 아련한 기억 등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촘촘히 수놓여 있다. 노르망디 시골 마을로 떠난 짧은 휴가 그곳에서 만난, 일생에 다시 없을 특별한 순간들 공적인 슬픔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하고 나는 얀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하고 있었다. 슬픔이란 한 사람 한 사람이 견뎌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진정한 의미의 공적인 분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노나 슬픔을 불특정 다수의 동포와 나누어가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아름다운 환상에 불과하다. 아픔이란 우선 개인에 머물러 있음으로 해서 구체화되는 것이다. ― 「곰의 포석」 중에서 제목부터가 어떤 수수께끼 같은 느낌을 주는 표제작 「곰의 포석」은 번역일을 하는 주인공이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옛 친구인 얀을 만나 노르당디 지방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보내는 며칠간의 이야기를 그린다. 작은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지적인 관심을 따라 펼쳐지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따라가는 동안, 독자는 노르망디 지방의 풍경과 여러 가지 요리와 역사지리지적 지식, 그리고 프랑스어 사전을 편찬한 언어학자 에밀 리트레의 이야기와 유대인 수용소를 다룬 작가 호르헤 셈프룬의 일화, 라퐁텐의 우화 등과 만나게 된다. 특별한 사건 없이 이국적인 풍물들이 스쳐가는 나른한 여행에 동참하고 있다는 느낌이 얼핏 드는 것도 잠시, 제목 ‘곰의 포석’의 유래가 드러나는 대목 근처에 이르면, 잔가지인 줄 알았던 소설의 모든 부분들이 실은 치밀하고 교묘하게 직조된 장치이자 상징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 하는 탄성을 지르게 된다. 이 제목 ‘곰의 포석’은 라퐁텐의 『우화』 8권 10화의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야기인즉, 외진 산 속에 사는 곰 한 마리가 혼자 사는 노인과 친구가 되었는데, 이 곰이 노인이 낮잠을 자는 동안 그의 코끝에 앉은 파리를 쫓으려고 근처에 있는 포석(鋪石, pavement)을 집어던졌다가 파리와 함께 노인의 머리까지 깨뜨려버렸다는 것이다. “이 우화가 변해 지금은 쓸데없는 호의나 간섭이라는 뜻으로 ‘곰의 포석’이라는 표현이 남아 있”는데, 소설에서 이는 곧 주인공이 유대인 친구와의 우정을 성찰하게 하는 장치가 된다. “사실은 서로가 보이지 않는 파리를 죽이고 있었던 게 아닐까. 던져야 할 것을 잘못 집어들었던 것이 아닐까.” 요컨대, 우정과 이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의 내면의 상처를 아무렇지도 않게 건드려버리는 친구란 무관심하고 냉담한 타인보다 오히려 위험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것. 그 시점에서 뒤돌아보면, 곰의 등을 밟는 소설 첫머리의 불가해한 꿈, 시각장애인 꼬마가 친구처럼 들고 다니는 곰인형, 페탕크(프랑스의 전통 구기)나 ‘카망베르 던지기’와 같은 ‘던지기’와 연관된 일화들이 소설 곳곳에 치밀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또다른 단편 「모래장수가 지나간다」는 친구의 삼주기에 참석하기 위해 찾은 친구의 고향에서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서 어린 딸아이를 기르는 친구의 여동생을 만나는 이야기이다. 두 모녀와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는 동안, 그녀와 얽힌 어린 시절의 기억과 캐나다 마들렌 섬에서 열리는 모래성 쌓기 대회에 관한 일화가 서로 얽혀들며 잔잔하게 그려진다. 짧은 소품인 「성터에서」 역시 프랑스에 사는 친구를 찾은 일본인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친구의 집 근처에 있는 복원중인 성터를 구경하기 위해 감시원을 눈을 피해 몰래 숨어들어가서 겪은 짧은 일화가, 엉거주춤한 구경꾼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위치에 대한 어렴풋한 자각을 깨우친다. 당사자도 방관자도 아닌, 미묘하고 예민한 거리감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할 당시, 심사위원들 가운데에는 이 작품이 단순한 에세이가 아닌가 하는 부정적인 의견을 낸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 작품 「곰의 포석」에 일본의 권위 있는 아쿠타가와 상이 주어진 것은 심사위원들이 이 작품이 가진 문학성을 인정한 결과이겠지만, 그만큼 이 작가의 글쓰기는 여러 가지 경계에 모호하게 걸쳐 있다. 일본적인 것과 프랑스적인 것, 소설적인 것과 에세이적인 것, 일상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당사자의 관점과 관찰자의 관점, 가벼운 위트와 무거운 성찰, 그 사이의 미묘한 거리가 그의 작품을 계속해서 고쳐 읽게 만든다. 오랜만에 만나는, 흔치 않은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