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
vol.5/no.17 [20030901] 개구쟁이 로커와의 한낮의 몽중대화: 김창완과의 인터뷰 이용우 garuda_in_thom@hotmail.com | contributor |
일시 및 장소: 2003년 2월 11일 서울 홍대 앞 'Sortir' 질문: 신현준, 최지선, 이용우 정리: 신현준, 이성식 "D코드만 30분 동안 쳤어요. 그 소리가 저한테는 참 아름다웠고, 제가 음악을 하게 된 계기였죠.": 3형제 주말마다 집에서 합주를 하다 ![]() - 우리 때도 농대 캠퍼스가 수원에 있었죠. 2학년 때 잠깐 하숙을 한 걸 제외하면, 쭉 통학했어요. 그때만 해도 수원 가는 전철도 없었어요. 휴교도 많았고, 수업을 한 사나흘 몰아서 시간표를 짜서 학교는 많이 안 갔지요. 4학년쯤 되어서는 우리가 교수님들보다 학교에 내려가는 횟수가 적었어요. Q:대학 시절, 다른 캠퍼스 그룹들과 교류는 없었는지, 또 히 식스 등 여러 선배 프로페셔널 그룹들과 교류는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 다른 캠퍼스 그룹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선배 그룹들과 산울림은 전혀 관계가 없었고 기타 캠퍼스 그룹들과도 거의 상관이 없었어요. 저희는 그때 있었던 학생들의 움직임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다만 (김)창훈이의 경우 베이스 기타를 배울 기회가 없으니까 '밴드에 들어가서 베이스를 배우고 와라' 이렇게 해서 샌드 페블스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Q:김창완 님이 보기에, 동생 김창훈 님이 활동한 샌드 페블스는 어땠습니까. - 대학가요제에 나왔던 팀이 샌드 페블스 6기니까 (김)창훈이가 샌드 페블스 5기정도 될 거예요. 당시에는 서클 형식으로, 학교 지원도 거의 없을 때라 변변한 연습실조차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정기 발표회 때 한 번 정도 구경을 갔는데 대학생들보다 동네 사람들이 더 많이 와서 완전히 동네 잔치 같았던 기억이 나네요. 그 때 유라이어 힙(Uriah Heep)의 "July Morning" 같은 음악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샌드 페블스에 관해 더 자세한 건 (김)창훈이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나을 겁니다. Q: 보통은 또래끼리 어울려서 음악을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산울림은 특이하게도 3형제가 모여서 음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형제끼리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 지금 생각하니까 그러네요. 또래끼리 모여서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전혀 못해 봤어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잘 하지도 못하는데 누가 저와 연주를 같이 해줬겠어요. 또 다른 이유는 중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 중에 그룹 사운드를 하던 친구가 거의 없었어요. 친구 중에 신창윤이라고 비틀스 노래를 잘 부르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당시 무교동 낙지골목에 있던 선술집에서 밴드를 했어요. 그 친구 빼고는 주변에서 연주하는 친구들을 못 봤어요. Q:무교동, 명동 등지에 오비스 캐빈 같은 생음악 살롱들이 유행하던 때인데, 그런 곳에서 직접 연주한 경험은 없나요? - 그때 라이브로 연주하는 곳이 많았죠. 재개발되기 전 무교동에도 뒷골목에 그룹 사운드가 연주하던 곳이 많았어요. 그런 데를 뭐라고 불렀는지, 뭐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네요. 초가집 같은 상호였고, 주막이나 선술집 분위기였는데, 다들 그룹이 연주했죠. 그런 곳에서 연주한 적은 당연히 없죠. 오비스 캐빈은 술 마시러 몇 번 간 적이 있네요. Q:김창완 님이 한창 대학을 다닐 때 통기타로 연주하는 포크 성향의 음악이 많이 유행했습니다. 또 신중현, 히 식스 같은 그룹 음악도 인기가 높았구요. 김창완 님은 두 부류 중 어떤 음악을 많이 들었나요? - 포크 쪽은 고등학교 때부터 군대 다녀올 때까지 전혀 안 들었어요. 그래서 그 쪽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어요. 나중에 사람들이 포크 계보가 어떠니 그룹 사운드 계보가 어떠니 하면서 '산울림은 어디에 넣어야 되나' 이런 얘기를 해서, '아 그런 쪽이 있구나' 그러고는 '우리는 이쯤에 자리하면 되겠다' 생각했을 정도예요. 우리는 학교 다닐 때 집과 도서관 밖에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신중현 씨 음악이야 알죠. 펄 시스터즈를 좋아했으니까. 그래도 엽전들의 "미인"이 히트하기 전까지는 신중현 씨가 한국 록 음악계의 거목이고 하는 건 잘 몰랐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펄 시스터즈도 록 음악이라고 좋아했던 것은 아닌 것 같고... 글쎄요, 왜 좋아했는지 얘기하기는 참 힘드네요. Q:말씀을 들어보면 학창시절에는 음악에 완전히 빠져있던 것은 아닌 셈인데, 그렇다면 언제 어떤 계기로 음악을 연주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 특별한 건 없어요. 저는 음악학원에 다닌 적도 없고, 대학교 1학년 땐가 종로 2가에서 클래식 기타 교본하고 통기타를 같이 샀어요. 교본의 첫 장에 줄맞추는 법이 나와요. 그리고 그 뒤에 코드가 나오는데 처음에 나온 것이 D코드였어요. D코드를 잡으면서 쳐봤는데 소리 자체가 굉장히 좋았어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연주하는 기분으로 D코드만 30분 동안 쳤어요. 그 소리가 저한테는 참 아름다웠고, 제가 음악을 하게 된 계기였죠. Q:통기타를 치다가 전기 기타를 잡게 되고, 또 형제분들과 함께 연주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 둘째가 대학교에 들어갈 때 아들 3형제가 기타를 연주하고 (김)창익이는 냄비 뚜껑부터 숟가락 통까지 아무거나 두드리고 다니니까 집안에서는 입학 선물로 피아노를 사주겠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우리 형제가 피아노는 너무 여자 애들 같으니까 그룹 연주를 할 수 있게 악기 세트를 사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드럼 세트, 앰프 두 대, 기타 두 대를 샀어요. 그렇게 흑석2동 우리 집에서 우리끼리 연주를 시작한 거예요. 다들 학교 다니니까 주말마다 모여서 3형제가 연주를 했죠. 그런데 시끄러우니까 왕십리에 가서 계란 판을 사와서 방에다 붙여놓았어요. 그때 계란 판을 사러 갔는데 겨울에는 안 만든다고 계란 판을 안 파는 거예요(옛날에는 기와장이랑 계란 판을 햇빛에 말려서 만들었는데 해가 없는 겨울에는 작업을 안 한다는 거죠). 어렵사리 계란 판을 구해서 방안에 딱 붙여 놨더니 완전히 스튜디오 사운드가 나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봤자 방에 계란 판만 붙인 정도니, 바깥에선 여전히 시끄러웠을 거예요. 하루는 보니까, 동네 애들이 담 넘어 들어와서 후추 가루 통, 고춧가루 통 다 열어 놓고 난리를 치는 거예요. 아마 그 모습을 보고 1집에 어린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그려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연주하면 애들이 즐겁게 놀던 그때 생각이 나서. 그래서 앨범 표지 작업할 때 애들을 모아서 큰 도화지랑 크레파스 하나씩 주고 마음대로 그리라고 했어요. 그런데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왔더니 애들이 하나같이 빨강색만 갖고 애들 그림만 그려 놓은 거예요. 괜히 아이스크림 값만 아깝더라구요. 원래는 그 그림을 넣었어야 되는 건데 내 눈에는 안 차더라구요. 그래서 '거짓말로' 제가 다시 그린 거예요. Q:집에서 주로 어떤 곡을 연주했나요? 아무래도 처음이니까 자작곡은 별로 없었을 것 같은데. 처음 작곡을 시작한 건 언제인지도 궁금합니다. - 우린 우리 노래 밖에 안 해봤어요. 다른 음악은 한 적도 없고 할 줄도 모르고 일단 다른 음악은 하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작곡은 기타 사자마자 그 다음날부터 했습니다. 기타 사고 한 달쯤 지나서 처음 완성한 곡이 "왜 가"라는 노래예요. 음악 시간에 배워서 악보는 그릴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만든 곡을 다 악보로 남겨놨는데 데뷔하기 전까지 자작곡이 한 100곡 정도 되었어요. "우리 음악이 수록되어 있는 앨범을 갖고 싶다 이 마음 하나 뿐이었어요.": 3형제, 집에서 벗어나 다름없이(無異) 대중 앞에 서다 그리고 울림을 주다 ![]() - 산울림이란 이름은 나중에 판이 나올 때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다 지은 것이고, 우리가 대학가요제('제1회 '77 mbc 대학가요제') 출전 할 때만 해도 그룹 이름이 산울림이 아니라 '다름이 없다'라는 뜻의 무이(無異)였어요. 우리가 미8군에서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파티를 하는데 가서 한번 연주한 적은 있어요. 미8군 부대 영내는 아니었고 사람도 별로 없었어요. 악기를 직접 가지고 가서 연주를 했는데 어떻게 연주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어요. 연주했던 팀도 무이 밖에 없었는데... 어쩌면 지금 제가 꿈꾼 거 얘기하는지도 몰라요.(좌중 웃음) Q:그렇게 집에서만 연주를 하다가 첫 음반을 낸 게 1977년 말이죠? 그 음반(산울림 1집)은 흔히 말하는 기념 음반으로 낸 건지, 아니면 프로로 뛰어들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건지 궁금합니다. 발매는 12월에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녹음은 언제부터 했는지도 말씀해주세요. - 대학가요제에서 우리가 예심 성적 1위였고, 샌드 페블스가 2위였는데, 우리는 제가 졸업생이라고 탈락된 거예요. 샌드 페블스가 대상 받은 곡("나 어떡해")은 (김)창훈이가 만들었으니까, 우리가 만든 곡이 예심에서 1-2위를 모두 차지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이 정도라면 음반을 내도 성과가 있겠다' 해서 음반 준비를 시작했어요. 그래서 대학가요제 끝나고 나서 바로 음반 녹음에 들어갔지요. 하지만 앨범 레코딩을 하면서 그게 상품이 된다는 건 생각도 못했어요. Q:제1회 대학가요제 예심은 어디에서 열렸나요? 밴드는 앰프 같은 것을 직접 들고 가야했겠죠? - 장소는 정동이겠죠. 예심을 한 번 했나? 그 때만 해도 밴드들은 용달차 불러서 앰프나 악기를 직접 들고 가야 됐어요. 우리(무이)는 "문 좀 열어 줘"로 참가했죠. 그 때 무이와 샌드 페블스가 대학 가요제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학교 홍보를 많이 했다고 생각해요. Q:산울림이 데모 테이프를 가지고 음반사를 찾아갔다고 들었습니다. 그 데모 테이프에 "나 어떻게"가 수록되어 있었나요? 또 서라벌 레코드에 들고 간 데모 테이프는 나중에 음반화된 산울림 1집과 비교해서 어땠는지요. 데모 테이프를 듣고 서라벌 레코드 측에서 보인 반응도 궁금합니다. - "나 어떻게"는 없었을 거예요. 있었나? 모르겠어요. 데모 테이프는 삼촌이 사주신 조그만 JVC 포터블 녹음기로 녹음을 해서 만들었는데, 곡 숫자도 적고 1집하고는 달랐지요. 그 데모 테이프를 들고 어디를 갈까 하고 음반사들 리스트를 쭉 보는데, 오아시스 레코드는 을지로에 있고 지구 레코드는 벽제에 있는데 서라벌 레코드는 종로 2가 화신 백화점 건너편 서울예식장 뒤편에 있더라구요. 집에서 84번 버스를 타면 한번에 갈 수 있다는 이유로 데모 테이프를 들고 서라벌 레코드를 찾아가게 된 거예요.(좌중 웃음) 그런데 이흥주 사장님이 음악에 관심을 보이면서 잘 하면 히트할 것 같다고 하시더라구요. 우리야 아까 얘기했다시피 앨범을 무슨 상품이나 데뷔의 발판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단순했어요. 우리 음악이 수록되어 있는 앨범을 갖고 싶다 이 마음 하나 뿐이었어요. Q:데뷔 앨범을 애초에 기념 음반으로 생각했다면, 그와는 별개로 다른 일을 하겠다는 계획 같은 게 있었겠네요. - 저는 은행원이 될 뻔했어요. 근데 은행 입사 시험 날짜와 레코딩 날짜가 겹친 거예요. 취직 시험이야 그 다음이라도 찬스가 있는데 레코딩은 평생에 한번 있을 일 같아서 일단 레코딩을 하기로 하고 은행 시험을 포기한 거죠. 그 뒤로는 취직 시험을 본 적이 없어요. 레코딩은 계속 했고. Q:서라벌 레코드에서 녹음을 하실 때 프로듀싱 해주신 분이나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은 어떤 분이 계신가요? - 프로듀서는 그 때 서라벌에 문예부장으로 있던 방기남 씨였어요.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분이 산울림 데뷔 시절부터 KBS에서 대상 받을 때까지 매니저를 해준 주영철이라는 분이에요. 그 분이 산울림을 키웠다고 할 수 있죠. 그 분이 당시 40대 중반 정도였는데 서라벌 레코드에 직원으로 있으면서 매니저를 하셨어요. 매니지먼트를 위해서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는 전혀 모르지만 우리를 키워준 좋은 매니저로 기억하고 있어요. 아버지처럼 우리를 격려 해주고 그랬으니까. Q:산울림 1집이 서라벌 레코드에서 발매되었지만 성음사(省音社)에서 실질적인 제작을 했다고 하던데 두 곳의 관계는 어떻게 보면 될까요? - 그 당시 성음사는 레코드사하고 다른 개념이었어요. 성음사는 '영화음악 전집', '가요 반세기' 이런 음악 전집물을 판매하는 회사였어요. 그 레코드를 제작하는 회사가 서라벌이고 외판원을 통해서 판매하는 회사가 성음사였죠. 성음사에서 그런 전집물 외에 하수영 씨나 최백호 씨 같은 분들 독집들도 발매했어요. 성음사 사장을 하던 이흥주 사장이 서라벌 레코드사하고 관련이 있었던 거죠. 서라벌 레코드에서 주문을 해서 갖다 파는 거니깐. 그런데 산울림 앨범에 관해서는 성음사 사장이 판권을 가지고 있었나봐요. 나중에 이 사람이 돈을 많이 벌어서 서라벌이랑 결별하고 대성음반을 차린 거예요. 저는 이사를 시켜주더라구요. 성음사 사장이 산울림이란 이름도 지어 준 거예요. 뭐 그 때는 계약서 쓴 적도 없고 구두 계약도 없었어요. Q:1집 녹음은 얼마 동안 하셨나요? 하나 궁금한 것은 1집 들어보면 특유의 기타 톤이 있는데 퍼즈를 쓴 건지 앰프에 오버드라이브를 건 것인지 궁금하네요. - 1집 녹음은 하루에 다 끝냈어요. 처음 한 프로(3시간 반)는 기타 줄이 풀리는 바람에 날려버렸고, 음악 평론가 이백천 씨한테 텔레캐스터와 베이스 기타를 빌려서 한 프로만에 다 녹음한 거죠. 그나마 그것도 많이 쓴 셈이어서 좀 말도 들었는데... 투 트랙 레코딩이라, 틀리면 다시 갈 수도 있는 건데 1집 앨범 녹음은 한 번에 다했어요. 그때는 연습이 다 돼있어서 눈감고도 하니까 노래만 따로 하고 연주는 한꺼번에 간 거예요. 1집 때 기타 톤은 퍼즈 이펙트를 사용해서 만든 겁니다. 경남전자 퍼즈라고 퍼즈와 와와가 같이 달린 것을 데뷔전부터 썼어요. Q:"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에서 곡 중간에 조가 바뀌잖아요 E에서 Em로 바뀌나요? F로 바뀌었다가 딴다다 할 때 D로 시작하고 그런 거는 그냥 만드시는 거예요? 아니면 작곡할 때 이론적으로 코드를 만드시나요? - E major인데요. 음... 그렇게 얘기하니까 잘 모르겠네요. 기타로 작곡하면서 조 바꾸는 건 자연스럽게 나온 거예요. 이렇게 저렇게 조를 바꾸겠다 막 그런 건 아니에요. 지금 제가 제일 안타까운 게 이제는 머리도 굳어서 악상이 안 떠오르는 거예요. 예전에는 자유자재로 조가 변환이 되고 그랬는데 지금은 딱 하면은 조가 콱 생겨서 자유로운 얘기가 안 생기는 거 같아요. 그래서 이제 변화를 모색하면 의도가 드러나고... 정말 배워도 독이에요. Q:1집을 만드시고 '얻은 것은 악기고 잃은 것은 음악이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무슨 의미인가요? - 그런 얘기 했었죠. 비슷한 심정이었으니까. 글쎄, 우리가 1집 만들고 나서 그게 팔리는 물건인지 몰랐다니까요? 그런데 그걸 파는 것을 보고 굉장히 당황했어요. 사실 여기저기서 우리 노래가 나오고 가게에 우리 노래가 걸려있다는 게 참 창피하기도 하고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음악에 담겨있는 것은 저의 내밀한 마음인데 그게 주렁주렁 정육점 고기처럼 매달려있으니까 당황스러웠죠. "그때 우리가 BBC에서 레코딩을 했다면 아주 다른 사운드가 나왔을 거예요. 근데 안되더라구요.": 산울림, 음반들을 쏟아내지만 사운드에 만족하지는 못하다 ![]() 왼쪽부터 김창완(보컬, 기타), 김창훈(베이스, 보컬), 김창익(드럼) Q:1집 녹음하러 가서 "스튜디오에 만원 짜리 기타를 갖고 온 건 너희들 밖에 없을 거다"라는 말을 들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내려오는데요.(웃음) 언제부터 좋은 악기를 사용하셨는지요. - 처음 녹음하러 갔을 때 갖고 간 베이스 기타는 국산이었고, 제 기타는 필리핀 밴드가 사용하다가 버리고 간 것을 주워와서 재활용한 거였어요. 진짜 이상하게 생긴 기타였는데 중고도 보통 중고가 아니었지요. 기타 연주하다가 줄이 막 풀리고 그랬으니까. 그래서 양희은 씨가 방송국에서 우리 볼 때마다 "튜닝 좀 해서 치세요" 그러곤 했어요.(좌중 웃음) 사실 우리는 평소에 그 기타에서 굉장히 좋은 소리가 난다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그때 우리는 튜닝을 잘 못했어요. 음악 교육을 정식으로 받은 것도 아니고, 튜닝 기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다 귀로 들어서 했는데, 대충 맞춘 거니까 남의 귀에는 이상하게 들렸나봐요. 우리 귀에는 좋기만 하더만.(좌중 웃음) 암튼, 1집이 성공한 후 음반사에서 악기나 장비 같은 것들은 지원 해줬어요. 그래서 2집부터는 장비도 최고의 것들을 썼죠. 미스트레스, 펜더, 깁슨에 베이스 앰프도 좋은 것들로 해서. Q:2집과 3집은 1집보다 사운드가 복잡한데 마찬가지로 한 번에 간 건가요? 또 2집에는 플렌저도 쓰신 것 같은데 맞나요? 하나 더 궁금한 것은 1집에서 건반은 김난숙 님이 연주했는데, 2집은 누가 건반을 연주했나요? 변성룡 님이 연주했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 2-3집도 거의 투 트랙으로 레코딩을 하긴 했는데, 한 프로는 넘었어요. "그대는 이미 나"(3집 수록) 같은 곡은 너무 길잖아요. 18분 몇 초 동안 연주해야 되니까 3부분인가 4부분인가로 나눠서 녹음하고 편집했어요. 달력 뒤에다 쫙 적어 가지고... 이런 방식이 7집 때까지 계속 됐던 것 같아요. 녹음 스튜디오는 서울 스튜디오하고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계속 했구요. 플렌저에 관해서는... "안개 속에 핀 꽃"의 플렌징 소리에 사용된 이펙트 박스 이름이 아마 미스트레스일 겁니다. 근데 뭐 그때 잘 쓸 줄 알아야지...(좌중 웃음) 2집에서는 이것저것 여러 시도를 해봤던 것 같아요.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나 "안개 속에 핀 꽃" 같은 곡에 건반이 나오는데 난 2집까지 김난숙이 했던 걸로 기억하거든요? 근데 2집을 변성룡 씨가 했나? 그랬나봐요. Q:선곡이나 편곡에 다른 분의 개입은 전혀 없었는지요. "그대는 이미 나"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같은 경우 너무 길다는 얘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또 편곡 같은 작업은 산울림 내에서도 김창완 님이 도맡아서 하셨는지, 아니면 동생들과 협의를 하셨는지요. - 사실 편곡이나 선곡에 다른 사람의 개입은 크게 없었는데,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같은 경우 라디오에서는 짤려서 나올 정도였고 한 면을 한 곡으로 채운 것은 한두 사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뭐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런 시도는 1, 2집이 성공한 것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조금 만용이기도 했는데 다시는 그런 건 못할 거라는 예상을 했었어요. 편곡 같은 경우 동생들과 협의를 하기는 했는데 협의라는 말보다는 자기 곡에 대해서는 자기가 알아서 하는 정도였지요. Q:1집부터 3집까지는 거의 같은 시기에 작곡한 거라고 봐도 될까요? - 거의 비슷한 시기로 봐도 될 거예요. 왜냐하면 1971-1975년 사이에 악기를 갖추고 나서 만들어진 노래가 대부분이거든요. 앨범 [개구장이(어린이에게 보내는 산울림의 동요선물 제1집)](서라벌, 1979-02-10)와 [산 할아버지(어린이에게 보내는 산울림의 동요선물 제2집)](대성음반, 1981-10-01)를 만들면서부터 우리가 새로 만든 곡들이 들어갔어요. Q:산울림은 1977년 12월에 데뷔 앨범 발매한 이후 1년 2~3개월 사이에 대략 8장의 음반을 냈습니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많은 음반을 낸 건 동생들 입대하기 전에 최대한 많이 내려고 했던 건지 아니면 무슨 계약 문제가 있었던 건지 궁금합니다. - 8장? 그러니까 도둑놈들이죠.(좌중 웃음) 계약서 때문이란 건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앨범을 많이 발매한 것은 음악인이면 누구나 그렇지만 스튜디오에서 제일 행복해 하잖아요. 그러니까 다 한 거예요. 잘한다 잘한다 그러니까 신나서... Q:초기 음반의 사운드를 유심히 들어보면 베이스와 키보드 소리가 앞에 나서고 기타는 좀 뒤에 물러서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는 의도적인 것이었나요? - 우리가 의도해서 이렇게 하고 싶다 그런 건 없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솔직히 AC/DC 같은 사운드를 원했어요. 그런데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면 기타 소리도 위윙윙 이상하게 잡아놓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보컬만 들리고 연주 소리는 들리지도 않아요" 그러면, "그렇게 하는 거야. 그래야 라디오에서 잘 들려" 이러는데 저희가 뭐라 그래요. 그런가 보다 하는 거죠. 우리는 젊으니까 당연히 묵직한 사운드를 원했죠. 그런데 당시 한국에서는 덤핑 있는 사운드를 만드는 노하우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결국에는 토끼 같은 소리가 나는 거예요. Q:2-3집을 놓고 프로그레시브 하다거나 헤비 메탈 같다는 평들이 있는데요. -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좌중 웃음) 그때 우리가 BBC에서 레코딩을 했다면 아주 다른 사운드가 나왔을 거예요. 근데 안되더라구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야, 청춘을 일갈할 정도로, 청춘을 거추장스럽게 생각 할 만큼 내가 청춘이었구나' 그런 생각은 들어요.": 동생들의 입대와 제대, '청춘'의 뒤안길 ![]() - 글쎄요. 뭐 저와는 달리 둘째(김창훈)는 경향을 쫓으려 했던 면이 없지 않았어요. 산울림 음악에 큰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둘째는 그 당시 뭐가 유행이다 그러면 조금씩 시도해보고 그랬어요. 디스코, 훵키, 레게 같은 음악이 당시 트렌드라 시도는 했었죠. 그런데 도입한다고 그게 산울림 음악이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5집은 동생들 휴가 전에 기획해서 휴가 중에 마무리 한 앨범이 맞아요. Q:5집이 동생 분들 휴가 중에 녹음한 것인 반면, 6집은 박동률, 유지연 님 등으로 구성된 고장난 우주선이란 팀이 녹음에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맞아요. 고장난 우주선은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프로젝트 팀인데, 베이스는 박동률, 드럼은 김영국, 통기타와 하모니카는 유지연이었어요. 그때 유지연과 박동률이 대성음반에서 음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마침 산울림은 공백이 있었으니까... 유지연 곡도 넣고 해서 고장난 우주선으로 앨범을 낼지, 아니면 산울림 이름으로 앨범을 낼지, 그도 아니면 제가 기획하고 있던 그룹을 새로 런칭해야 할지 고민을 했었어요. 그런데 6집 만들 때가 [기타가 있는 수필]을 낼 당시였기 때문에(주: 시기를 혼돈한 것 같다. 산울림의 6집은 1980년에 발매되었고, 김창완의 [기타가 있는 수필]은 1983년에 발매되었다), 새로운 그룹을 하게 되면 제 음악적인 색깔을 너무 많이 바꿔야 되니까 솔로 앨범도 내고 고장난 우주선도 내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룹 사운드 경향의 음반을 낸다면 산울림 이름으로 내야겠다고 결심했죠. 솔로 앨범은 [기타가 있는 수필]을 냈으니까, 할 수 없이 고장난 우주선 계획은 폐기 처분했고, 얼마 있다가 동생들이 제대하고 7집을 만들게 된 거죠. 어쨌든 6집에서는 동생들이 전혀 연주를 안 했어요. Q:얘기 나온 김에, 김창완 님의 솔로 앨범 [기타가 있는 수필]과 MBC 베스트셀러 극장 <내 마음의 풍차>의 관계에 대해 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 어느 날 김한영 씨가 전화를 했더라구요. "<내 마음의 풍차>라는 드라마를 만들었는데, 음악을 좀 맡아줄 수 있냐"고. 마침 새 앨범([기타가 있는 수필])의 레코딩을 마쳤는데 발표 전이어서, 잘 되었다 싶어서 그 앨범에 담긴 곡들을 드라마 삽입곡으로 쓴 겁니다. 드라마가 방영되고 난 후 바로 앨범을 발표했죠. Q:7집에 실린 곡들의 가사를 유심히 들으면 "청춘"도 그렇고 김창완 님의 목소리 톤은 어린아이 같이 천진한 듯하면서도 유심히 들으면 절망적이고 죽음이란 것도 등장하거든요? 이런 점은 7집에 특히 짙게 나타나는데, 특별한 정황이 있었던 건지... - 그런 건 없었어요. 그때가 술 제일 잘 먹고 그랬을 땐데, 하하하. 근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야 청춘을 일갈할 정도로 진짜 청춘에 있었구나', '청춘을 거추장스럽게 생각 할 만큼 내가 청춘이었구나' 그런 생각은 들어요. Q:8집은 '이렇게 만들면 대중들이 좋아하겠구나'라는 걸 알고 만드셨다고 그러셨는데, 7집의 "청춘"이나 "독백" 이런 곡들도 같은 맥락인가요? - 아니에요. "청춘"은 애기 돌날에 만든 노래거든요. "독백"은 둘째가 군 생활하면서 초소에서 만든 노래예요. 그래서 어머니가 "독백" 노래만 나오면 그렇게 눈물을 흘리세요. 다 현실에 뿌리가 있는 노래들이에요. 다만 "노모"는 7집 중에 가장 뻥이 심한 노래예요.(좌중 웃음) 하여간 7집과 8집은 완전히 성격이 다르다고 봐야죠. 8집은 완전히 장사였어요. 이거 딱 하니까 사람들은 좋아하고... Q:7집을 보면 "가지마오" 같은 곡은 초창기와 비교해보면 기타 톤이 완전히 달라졌거든요? 메탈 같기도 하고 좀 차갑다는 느낌도 드는데, 그런 변화는 어떻게 생긴 건지... - 그건 최세영 씨가 연구를 많이 한 부분이에요. 우리는 1집도 판이 그렇게 나왔으면 했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기술적으로 해결이 안 된 거죠. 그리고 7집은 연주 기량이 좋아졌어요. 동생들이 군악대에 있으면서 실력을 갈고 닦았기 때문이죠. Q:산울림이 대중을 고려하고 음악을 한 것은 동생 분들 제대 후라는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 - 원래 산울림은 대중에게 친절한 그룹은 아니었어요. 산울림이 가장 대중적으로 된 것은 8집 때예요. 8집 만들 무렵, 우리는 대중의 취향을 너무 명민하게 알아버린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저는 8집을 제일 싫어해요. 8집이 성공을 거두고 스테디셀러로 계속 팔려 나갔지만 우리는 그런 사실에 자책을 했어요. 그래서 9집 때 우리의 본질을 보여주자고 의욕적으로 작업을 했는데 그 앨범은 평가가 매우 안 좋았어요. 결국 록으로 복귀를 선언하고 초창기 산울림 사운드를 구사하겠다고 하면서 10집을 낸 거예요. 그래서 10집 앨범은 참 좋아해요. 이치현 씨도 연주를 같이 하고 연주도 참 좋았던 것 같아요. Q: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앨범이 9집이라고 하셨죠? 혹시 초기 앨범도 포함한다면 달라질까요? - 최신 앨범이 제일 마음에 듭니다. Q:10집을 들어보면 기타가 두 대 나오던데, 더빙한 거지 아니면 세션으로 참여한 기타리스트가 있는 건지요. 또 신서사이저는 어떤 분이 연주했는지 궁금하네요. 하나 더 질문하자면, 11집의 드럼 사운드는 마치 드럼 머신으로 연주한 것처럼 들리는데요. - 10집에서 기타는 김광민 씨하고 저하고 둘이 연주했을 거예요. 신서사이저는 세션맨이 연주했는데 누가 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네요. 11집은 스튜디오에서 녹음했고 드럼 머신은 안 썼는데... 아마 연석원 씨가 어레인지 했을 거예요. 개인적으로 저는 연석원 씨가 편곡자보다는 연주인으로 계속 주력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았고 생각해요. Q:많이 들은 얘기일 텐데요. 솔로로 활동하면서 '음악이 부드러워졌다'는 지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를 두고 원래 있던 감성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라는 시각도 있고, 나이를 먹어서 감성이 순화된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는데요. - 그렇지 않아요. 제일 나중에 만든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가 부드러운 음악이 아니잖아요? "회상", "너의 의미"가 소녀 취향의 발라드 아니냐 그런 질문은 제가 제일 경멸하는 건데, 왜냐하면 대중이 요구하는 음악이 무엇인지 알고 딱 맞춤으로 만든 노래들이기 때문이에요. Q:대성음반에 입사해서, 로커스트나 노고지리 같은 팀의 음반 프로듀서를 맡기도 했습니다. 뒤에는 꾸러기, 동물원의 음반에도 관여하셨는데. - 대성음반 이흥주 씨가 성음사 사장 하다가 우리 때문에 돈 벌어서 대성음반을 만든 거라는 얘기는 했지요? 글쎄 그렇게 입사가 된 거예요. 그때 산울림 7집이 대성음반 (음반번호가 DAS-) 0001이었고, 로커스트가 0002였어요. 제가 프로듀서 하면서 곡도 써주고 그랬어요. 또 노고지리는 그 전에 민요를 록으로 만든 데뷔 앨범을 발표했던 팀이었는데 이흥주 사장이 노고지리 음반을 한번 만들어보라고 해서 만든 거예요. 꾸러기랑 동물원도 회사 사장이 좀 해 줬으면 해서, 그냥 한 거예요 Q:김창훈 님은 연석원 님과 함께 이은하, 김완선 등의 음반들을 만들었는데요. 그런 작업들은 김창완 님과는 무관한 건가요? - (김)창훈이 한 건 저와 전혀 상관이 없이 독자적으로 한 거예요. 레코드사도 다르구요. "사람들이 곡의 내용에 집착을 하는데 사실은 내용보다 '왜 노래를 하게 하는가', '왜 당신은 노래를 듣는가', '우리에게 노래는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거든요.": 3형제의 맏형, 1970-80년대 청춘 스타, 무엇보다 '작가', 그리고 인기 연기자 김창완의 후일담 ![]() - 시도는 몇 번 했어요. 자평을 하자면 뭐 "땅강아지" 같은 곡은 아주 세련된 시도였다고 생각해요. 그밖에 "청자", "백자", "떠나는 어린이", "무녀", "돌아오려무나" 이런 곡들이 있는데, 그 중에 "돌아오려무나"가 제일 파격적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Q:앨범 중에 감기 걸린 상태에서 녹음을 해서 목소리가 좀 이상한 음반도 있다던데 어떤 음반인가요? - 앨범을 한번에 다 마친 적은 거의 없으니까 앨범 전체적으로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감기가 든 상태에서 레코딩 한 곡은 몇 개 있을 거예요. 근데 지금 그게 어떤 곡인지는 기억에 없네요. 사실 제가 평소 술을 하도 마셔서, 컨디션이 좋은 상태에서 녹음 한 적은 거의 없어요. Q:공연에 관해 질문 드리자면, 듣기로는 박영걸 님이 첫 콘서트 기획했다고 들었는데, 맞는지요. 또 콘서트 이외에 대학 축제 같은 무대에도 자주 참여했는지... - 아니에요. 첫 콘서트는 구자형 씨 형인 구자룡 씨가 기획하고 DJ 연합회가 주최한 문화체육관 공연이에요. 이홍렬 씨가 사회보고 우리는 게스트였어요. 그리고 나서 단독 콘서트가 그 이듬해 1978년 2월 28일, 3월1일에 문화체육관에서 있었어요. 그때 이제 박영걸 씨가 공연장으로 나타난 거예요. 대학축제는 가끔 했어요. 그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건 고려대에서 공연을 할 때 인산인해라는 걸 처음 봤어요. 고려대 운동장에서 한 시간 정도 공연을 했는데, 그 큰 운동장이 사람의 파도, 사람의 바다로 넘실댔어요. 그때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앞에서 몇몇 사람들은 춤을 췄지만 요새 같이 막 춤추는 분위기는 아니었고 얌전한 관객들이 대부분이었어요. 1980년대에 나 혼자 솔로로 대학에 공연하러 다닐 때, 운동권 풍물패들이 꽹과리 치고 전원도 빼놓고 훼방 놓은 적도 있었죠. Q:산울림은 사랑과 평화와 무대에 같이 설 기회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산울림은 독학으로 시작해서 아마추어리즘에 가까운 경우이고, 사랑과 평화는 미8군 무대부터 직업적으로 시작해서 프로페셔널리즘으로 나간 경우인데요. - 사랑과 평화와는 자주는 아니고 가끔 특집 편성할 때 같이 무대에 오르곤 했어요. 같이 무대에 서면 재밌었죠. 그런데 각기 밴드가 갖고 있는 한계가 있지요. 사랑과 평화는 실력은 출중함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할까 이성적인 자극이 안 된다고 할까? 어떤 곡들은 괜찮은데 어떤 곡들은 가사를 어색하게 꿰어 맞춘 것 같아서 좀 공허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 면에서 좀 안타까운 점이 있었죠. Q:외람되지만, 혹시 동생 분들과 사이가 안 좋은 적은 없었는지요? 큰형의 독선 때문이랄지...(웃음) 그리고 산울림은 음반을 통해서는 수입이 없었던 셈인데, 그렇다면 산울림은 주로 어디에서 수입을 얻었는지요? - 허허. 그 부분은 동생들한테 직접 들어 봐야 되겠네요. 산울림은 돈벌이가 안됐어요. 수입이라면 주로 공연 수입일텐데, 공연 횟수가 많지도 않았고 개런티도 비싸지 않았어요(대학축제를 간다든지 그런 건 좀 있었지만). 당시 밴드들의 가장 큰 벌이는 업소에서 공연하는 거였는데 업소에도 안 섰으니 돈이라곤 구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업소에 서면 사람이 다 망가지는 줄 알았어요. 사실 그렇지도 않은데. 차라리 업소에 서면서 돈이나 왕창 벌어둘 걸...(웃음) Q:예전 LP 음반들은 서라벌 레코드나 대성음반에서 발매되었는데, 8장 짜리 산울림 전집 CD 박스 세트 [The Complete Regular Recordings in 1977-1996](JCDS 06061~4, 1996)은 지구 레코드에서 발매되었습니다. 지구 레코드에서 박스 세트를 찍은 이유는 무엇인지, 실례가 안 된다면 지구 레코드와의 계약조건은 어떤 건지 알고 싶습니다. - (서라벌이나 대성이나) 명목은 유지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 회사들이 다 망했기 때문이지요. 저와도 결별을 했고요. 내일 모레면 지구 레코드와의 계약이 끝나요. 지구 레코드와는 인세 계약을 했는데, 보통 판매가에서 15%~20% 정도 받는 것이 관행이에요. 그런데 이런 부분은 속이는 곳도 많고 현재까지도 비교적 투명하게 이행이 되지 않고 있어요. Q:산울림 음악을 굉장히 심오하고 진지하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면 김창완 님은 언젠가 "산울림 노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 얘기를 한 적도 있습니다. 산울림 음악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얘기였나요? - 그런 부분이 있나봐요.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도 한 여름에 자동차 안에서 땀 뻘뻘 흘리면서 썼거든요? 제가 그 때 한 말이야 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줘야 되는데, 아무도 안 믿어요.(좌중 웃음) 그때 사람들이 곡의 내용에 집착을 하는데 사실은 내용보다 '왜 노래를 하게 하는가', '왜 당신은 노래를 듣는가', '우리에게 노래는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거든요. 노래 내용 자체도 그런 게 많고. 그런데 사람들은 곡이 그려내는 이미지나 또 말의 뜻에 집착하고 있어서 그런 얘기를 한 거예요. Q:가십 거리로 질문하자면. 김창익 님이 직장인 대상 미팅프로그램에 나간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회자가 산울림의 김창익 님인지 몰라봤다고 하던데. 또 하나는 황신혜밴드 김형태 님과는 언제 만난 건지요? 김형태 님의 결혼식 때 주례 봤다는 얘기는 유명한데요.(웃음) - 막내가 그런 일이 있었어요? 모르겠네요. 음... (김)형태랑은 알고 지낸지 오래되었지요. 근데 그 주례사는 아직도 길에 떠돌아다니나? 어후, 나도 한번 봐야지. 근데 보면 섬뜩할 거 같아요. ![]() -그래요.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검열이) 없었더라면 굉장히 퇴폐적이었겠죠. 서태지가 젊은이들의 심정을 잘 대변하는 것 같이 얘기하는데 저희가 그때 썼던 가사는 서태지보다 더 적나라하면 적나라하지 덜 하지는 않았어요. 근데 그때는 (검열을) 걱정하고 고쳐서 나왔기 때문에 다른 가사에 비해서 좀 순하고 건전하고 타협적인 걸로 오해하고 있는데, 그건 시대 상황을 몰라서 그래요. 누군들 (젊은애들이) 그런 노래를 하고 싶겠어요?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 그런 젊음이 있겠어요? 그런데 나중에 젊은이들이 '산울림은 저항적인 노래는 왜 없냐'는 등의 얘기들을 많이 제기했어요. 오히려 그 뒤로는 늙은이 취급해서 더 이상 가사에 대해서 가타부타 하지 않았지만. Q:그럼 "아니 벌써" 같은 곡은 앨범에 실린 가사가 아닌 원래의 가사가 있었고 또 공개적으로 부른 적도 있었나요? - 연습장 같은 데 적어 놓긴 했는데 부를 찬스는 없었죠. 아쉬운 게 기억나는 게 거의 없다는 거예요. "아니 벌써"를 포함해서 옛날에 심의불가되었던 가사들을 나중에 찾아달라고 하니까 못 찾겠다고 그러더라구요. 또 미발표 곡 중에 제가 아끼는 노래가 담배 피워 물고 쓸쓸한 청춘을 노래한 곡이 있어요. 뒤 부분 가사를 더 쓰고 싶은데 아휴, 더 이상 쓸 수가 없는 거예요. "아니 벌써 술 먹구 죽자"지 무슨 해가 솟았냐는 둥 하하하. Q:가사에 상징이나 은유를 많이 쓴 이유에는 검열을 의식한 측면도 적지 않겠군요. - 예. 검열을 의식해서 모호하게 넘어간 곡들이 몇 있어요. "둘이서"도 상징을 쓴 거고, "소녀"의 원제는 늑대예요. 왜 늑대냐 하면 사내를 보통 늑대라 하잖아요. 그래서 사내들의 음흉한 마음 이런 것들을 노래 한 거예요. 그 곡에 와와 소리를 넣은 건 늑대를 표현하는 거예요. 근데 검열에 또 걸린 거예요. 너무 화가 났지만 이미 판정이 내려진 걸 어떡하겠어요. 비슷하게 해서는 얘기가 안될 거 같아서, 제목을 뒤집자, 늑대의 반대가 뭐냐, 그래서 소녀로 뒤집었어요. 그 가사를 다 뒤집어서 부르면 반주랑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요. 한번 해보세요. 그런 노래 많아요. 그러니까 1집은 완전 전면 개작이었고, 2집은 부분적으로 수정을 했고, 3집의 "그대는 이미 나", "내 마음(내 마음은 황무지)" 이런 곡들에서 거의 자기 목소리를 찾은 거예요. 근데 "내 마음" 같은 경우도 젊은이의 저항 같은 게 느껴지니까 좀 논란이 됐죠. "소나기" 뮤직 비디오 찍은 감독이 불려가고 그랬었는데 3집 때만 해도 이미 거세된 분위기가 있었죠. 워낙 넣는 곡들마다 부결이 심하니까 많이 꺼끌꺼끌 했어요. 그 다음부터 가사를 쓸 때 많이 타협하게 되더라구요. 검열 철폐를 주장했던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주의예요. 그게 물론 철폐되어야 하지만 그 이전에 '현실이 모든 걸 잠재우지 못한다'라는 거예요. Q:김창완 님은 창작하실 때 가사를 먼저 쓰나요, 아니면 곡을 먼저 만드나요? 관련해서, 산울림의 독특한 가사를 보면 김창완 님의 문학적 감수성을 느낄 수 있는데,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 곡 쓸 때 저는 가사를 먼저 만드는 쪽이에요. 문학 작가는... 글쎄요. 저는 세상을 너무 모르기 때문에 그런 쪽에는 특별히 대답할 말이 없네요. Q:나쁜 뜻이 아니라, 김창완 님은 좀 분열적이고 양면적으로 보입니다. 남들이 진지한 아티스트로 간주하면 '나는 연예인이야'하고 연기도 하고, 어떨 땐 '난 연예인 아니야' 하듯이 심오한 뭔가가 있는 거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천진난만해 보이고 다른 한편으론 광기 어린 사람으로 보이고... - 그런 이미지는 굉장히 선구적이고 계산되어 있는 거예요. 하하하.(좌중 웃음) ![]() - 연쇄 살인범 딱인데요? 하하. 연기자로서 이미지가 부드러운 중년 남자 쪽이라면, 그건 대부분 섭외가 그런 쪽으로만 들어와서 그래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역들은 감독이 게을러서 섭외를 안하더라고.... Q:김창완 님을 대상으로 쓰여진 글들은 많습니다. 근데 대부분 비슷비슷한 이미지로 다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이렇게 다뤄지는 건 싫다', '이런 식으로 다뤄졌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게 있나요? - 그런 건 없어요. Q:시간 내서 좋은 말씀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질문할께요. 델리 스파이스를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좋게 생각하는 다른 후배들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또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요즘 후배들이 많이 힘들어하던데요. - 델리 스파이스 좋아해요. 음악 환경은 요즘이 더 좋아진 것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더 힘든 것 같아요. 그런데 어쩌면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몰라요. 후배들한테 하고 싶은 말은 알 카에다에 대해서 좀 연구를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좌중 웃음) ![]() |
첫댓글 나머지 참고문헌 하나는 박준흠씨와 진행되었던 인터뷰내용인데..
"인터뷰어였던 박준흠씨의 무례한 질문에 김창완씨(이하 존칭 생략)가 행한 '고의적인' 대답 내용들이 여과 없이 실려있는 글입니다. 본문을 잘 읽어보면, 인터뷰어가 인터뷰이에 대한 사전준비없이 인터뷰함을 넘어서, 기본적인 예의없이 자기의 얄팍한 지식이나 자랑하고 있고, 심지어 무례하기 그지 없는 질문들을 하고 있습니다."이라는 평이 있기때문에, 굳이 옮겨 오지 않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이 인터뷰 하신지도 15년의 세월이 흘렀네요...
과거의 영광에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노력하시고 발전하고 계신 점이 팬으로서 자랑스럽습니다.
늘 건강하셔서 오랫동안 함께 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늘 건강하셔서 오래오래 공연해주시고, 노래 만들어주시면 너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오호호
하하하~~!!ㅎㅎ
언제 읽어도 감동적인 산울림탄생이야기. 역사
잘읽었습니다. 감사해요~
산울림매니아를 위해 애많이쓰시는 회상님께도 감사드려요~~!!ㅎㅎ
살아보자ㅋ님,감사합니다~!!
"Q:김창완님은 창작하실 때 가사를 먼저 쓰나요, 아니면 곡을 먼저 만드나요?"
"A:곡 쓸 때 저는 가사를 먼저 만드는 쪽이에요."
이것이 제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산울림 공부를 열심히 하겠습니다~~
ㅋㅋ 로멘스님 같이 공부 열심히해요~~! 저도 아직은 산울림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이 부족한, 초보 산울림 매니아에요~!!ㅎㅎ
예전에 읽어본 기억이 납니다 두고두고 읽어도 좋은 기사네요 ~정식 음악수업을 받지않앗는데도 정말 대단하십니다 ^^
역시는 역시!인가봐요~~!!ㅋㅋ
저번에 읽었는데 댓글이 늦었네용 좋은글 고마운 살아보자 ㅋ님~~^^
재밌게 읽으셨다면 저야말로 고맙죠~~!!^^배추벌레님~~^^
기타의 D코드를 30분동안 쳤다는것이흥미로워요
그쵸~!ㅎㅎ 그 30분의 시간 덕분에 위대하고 멋진 산울림 음악의 여정이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으니 말이에요!ㅎㅎ
돈을 벌 생각이 별루 없으셨을꺼 같다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