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57
10월28일[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연중 제29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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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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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BuMZkO1XdcM
(한국외방선교회 김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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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과분하게도 내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
복음서를 읽다 보면 베드로나 안드레아, 야고보나 요한처럼 자주 등장하는 사도들이 있는가 하면, 거의 침묵하고 계셔서 그 존재감이 미미해보이는 사도들도 계십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10번째, 11번째로 소개되고 있는 사도들인데, 시몬과 유다(타대오) 사도입니다.
시몬 사도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갈릴래아 카나 출신이며 전직 열혈당원이었다는 것뿐입니다. 그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유추할 뿐입니다.
‘유다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서 폭력과 살상도 마다하지 않던 독립군 유다가 예수님을 만나 주님의 군사로 변화되었다.’
유다 사도의 이름은 신약성서 전체를 통틀어 딱 세 차례에 걸쳐 아주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두 번에 걸쳐 등장하는 사도들의 명단에는 유다라는 이름이 빠져있습니다. 대신 타대오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유다 사도를 예수님의 형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유다 사도는 메소포타미아 지방 선교사로 활동했으며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수호자’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백과사전은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 모호한 인물에 대해서는 신뢰할만한 정보가 없다.”
두 사도에 대한 관련 자료나 문헌이 적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베드로 사도나 요한 사도처럼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도단 내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해서 그 영향력이 미미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반대쪽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말보다 행동으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과묵하면서도 충직했습니다. 고민하고 따지기보다는 묵묵히 실천했습니다.
‘스승님의 모든 말씀은 내게 있어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목숨 걸고 준수해야 할 명령입니다!’라고 여기며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에 충실했습니다. 사도로서 자신의 신원에 걸맞게 살려고 애를 쓰다보니 따로 말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당시 추수할 일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 앞에서 말하기보다는, 하루 온종일 죽기 살기로 헌신하고 뛰어다닐 일꾼이 필요했었는데, 그들이 바로 시몬과 유다 사도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도 많은 말보다는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주님을 증거할 또 다른 시몬과 유다 사도가 필요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열두 사도를 부르셨던 것처럼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우리가 잘나거나 특출해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측은해서, 이런 우리와 당신 사명을 공유하기 위해, 결국 우리를 구원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과분하게도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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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2)우리 모두 거룩함에로의 부르심을>
누군가가 한 단체나 기관의 최고책임자로 임명되고 나면 통상적으로 가장 중요시 여기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인선’입니다.
새로운 리더가 구상하는 바에 따라 대규모 인사이동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른 대대적 물갈이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대체로 요직에는 어떤 사람들을 뽑습니까? 그간 리더 편에 서서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사람, 능력이나 경력이 출중해서 잘 보좌해줄 사람, 필요한 분야에 통달한 전문가, 결국 학력이나 가문, 배경을 고려해서 최종적인 낙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인선은 세상의 방식과는 철저하게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들을 뽑기 전에 홀로 산으로 들어가셔서 밤새워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이 말은 제자들의 인선에 엄청난 정성과 공을 들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딱’ 열어봤더니, 세상 사람들의 인선 기준과는 너무나 달라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제자단에 뽑힌 사람들의 면면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니 학력이나 능력, 가문은 거의 고려가 되지 않았습니다. 인물들 안에는 ‘어떻게 저런 사람을???’하고 의문을 품을 정도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의 인선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세상적인 잣대와는 철저하게도 다르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유는 ‘똑똑함’, ‘있어 보임’, ‘대단함’ ‘출중한 능력’ ‘화려한 경력’이 아니라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다른 무엇에 앞서 무상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가장 뚜렷한 표현이 바로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은 어떤 사람이 받는 걸까요?
사제나 수도자에게만 해당되는 특권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명에로 초대된 것만 해도 과분한데 우리는 한 번 더 그리스도인으로 초대받았습니다.
그 위에 각자의 처지에 따른 부르심이 추가되는 것입니다. 농부로, 회사원으로, 가정주부로, 기술자로, 교사로, 사제로, 성직자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의 말씀에 따르면 여러 다른 종류의 과일 나무들이 각각 다른 열매를 맺는 것처럼 교회 내 각 구성원들은 각자 주어진 신분과 처지에 따라 각기 다른 고유한 신심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주교가 관상수도회 수도자처럼 하루 온 종일 경당 안에서 기도에만 전념한다면 그가 맡고 있는 양떼들은 누가 돌보겠습니까?
가정을 가진 주부가 카푸친회 수도자처럼 금전을 소홀히 한다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신심은 참으로 우습고 질서를 뒤집는 신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각자에게 적합한 신심생활을 추구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신심생활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심생활이 군인들의 내무반이나 근로자들의 작업장, 제왕들의 왕궁, 결혼 생활하는 사람들의 가정 안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의 교설입니다.
구약시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사라 레베카 같은 인물들 보십시오. 거친 세상의 한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뜻만을 추구하는 거룩한 신심생활을 영위하였습니다.
성녀 안나, 마르타, 모니카 같은 성녀들을 보십시오.
그녀들은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거룩하였고. 성 고르넬리오, 세바스티아노는 군인이자 대단한 신심가였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어떤 처지나 환경 속에서 살아가든지 부르심에 합당한 신심생활을 추구해야 하며, 자신의 삶을 통해 복음을 실천해야 하며, 거룩함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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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거룩한 교환 >
전에 ‘주군의 태양’이란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인물 설정은 이렇습니다. 태양은 여자인데 귀신을 보는 능력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을 보는 것은 너무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이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합니다. 옥탑 방에서 불쌍하게 살아가던 태양은 우연찮게 주군을 만납니다.
어렸을 때 사랑했던 여자로부터 배신당했던 상처를 안고 있는 주군은 커다란 백화점의 사장입니다. 인간관계에 대해선 관심이 없고 사람도 돈 때문에만 상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일 싫어하는 것은 누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양이 귀신에게 쫓기다가 주군과 부딪히게 되었는데 쫓아오던 귀신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입니다.
인간몰골이 아닌 태양이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을 소름끼칠 정도로 싫어하는 주군은 다시는 태양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지만, 태양은 주군의 몸을 만지거나 손을 잡으면 귀신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편안하게 잠도 한 숨 잘 수 있는 것입니다.
주군의 상처는 차차 태양의 발랄함과 사랑에 의해 치유되는데, 그럴수록 태양은 주군의 품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결국 주군은 태양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는 것이 자신의 오랜 상처로부터 치유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설정은 ‘받아들임’이란 것이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음을 알기는 하지만, 내가 풀어내지 못한 상처가 있다면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 상처는 누군가의 사랑을 통해 치유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도 얼마 전에 저희 성당 청년 하나가 희귀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을 때 중환자실로 병자성사를 주러 간 일이 있었습니다. 처음 보는 바이러스 감염 환자의 모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온 몸이 부어 있었고 눈두덩이도 부어 있어서 눈을 제대로 깜빡일 수도 없었고 눈은 검은자보다 흰자가 더 많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에게 병자성유를 바르는데 얼핏 바이러스가 옮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살이 닿지 않는다면 어떻게 성유를 바를 수 있겠습니까?
살이 닿는다는 것은 상대의 것이 나에게 옮겨올 수 있다는 것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기 위해 필연적으로 상대의 것을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들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했다고 합니다. 병자가 예수님께 손을 댄다는 것은 물론 그들은 치유의 은총을 얻겠지만 예수님은 부정한 사람이 됨을 감수하시는 것입니다.
12년 동안 하혈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아 병이 치유되었는데 이 역시 예수님은 부정한 여인에게 몸을 닿았기 때문에 유다인들의 법으로는 부정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신학에서는 ‘거룩한 교환’이라고 합니다.
내가 지닌 좋은 것을 주고 다른 사람이 지닌 나쁜 것을 대신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뒤집어쓰시고 대신 당신의 거룩한 은총과 생명은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신비가 ‘거룩한 교환’인 것이고 미사 때 가끔 들을 수 있습니다.
한 번은 정신이 오락가락 하시는 병자에게 병자영성체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정신이 없으셔서 성체를 인지하지 못하셨습니다. 오물오물하기는 하는데 넘기지 못하셨고 급기야는 고춧가루와 함께 섞여서 뭉개져버린 성체를 뱉어내셨습니다.
성체이기는 하지만 역겨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옛 신부님들은 결핵 환자들이 모시다가 뱉은 성체도 그 자리에서 영하셨다는 말씀이 생각나 그것을 제가 모셨습니다. 몇 시간 동안 속이 거북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평화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우리 죄들을 당신 것으로 하실 때는 너무도 역겨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살리시고 아버지 뜻을 따르셨다는 생각에 마음에서는 평화가 샘솟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교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평화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사촌 형제로 여겨지는 유다 타대오와 독립 운동가였다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시몬의 축일입니다.
여러 전승이 있지만, 유다 타대오는 페르시아에서 전쟁용 도끼에 맞아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시몬은 톱에 몸이 잘려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환을 잇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죽어야 하는 이들을 위해 그 죽음을 내가 대신 받으며 내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불을 전해주는 것. 내 안에 있는 좋은 것들을 지키려고 하면서 어떻게 그 좋은 것을 동시에 줄 수 있겠습니까?
선거철에 시장 사람들을 좋아한다며 악수를 하고 다니다가 한 아주머니가 손을 잡으려고 뛰어오니 자신의 손을 뒤로 감추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내가 더럽혀지지 않는다면 내가 손해 보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이웃을 깨끗하게 하고
부유하게 하겠습니까?
우리도 거룩한 교환의 삶을 살아가며 이웃의 더러움과 가난을 나의 것으로 하고, 또 나의 깨끗함과 부유함을 이웃에게 주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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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한국 성지순례 중에 각 지역마다 ‘사도’로 존경받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제주도에는 제주도 출신의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를 제주도의 사도라고 이야기합니다. 김기량 순교자는 1857년 중국 광동 해역까지 표류하다가 영국 배에 구조되어 홍콩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때마침 휴양 중이던 조선 신학생 이만돌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워 그해 5월 31일 루세이유(Rousseille)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아 입교하였습니다. 이듬해 우리나라 국경인 의주부를 거쳐 귀국해 이 바울리노가 전해 준 서한과 안내 정보를 가지고 많은 어려움과 고생을 겪으며 교우촌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교우촌에 도달하여 최양업 신부를 만났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성실함과 그의 신앙에 대한 열성을 보고는 그가 제주도의 훌륭한 사도가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한창일 무렵, 김기량은 세례 받을 준비를 마친 예비 신자들을 데리고 가족들과 함께 육지로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1866년 통영 관아에 이송된 그는 문초를 받는 과정에서 떳떳이 신앙을 고백하고 함께 이송된 교우들에게 치명할 것을 의연히 권면하였습니다. 제주 출신의 첫 신자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장렬하게 순교하였습니다. 김기량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와 벗님네야 치명길로 횡행하세. 어렵다 치명길이야 평생소원 사주모요 주야 앙망 천당이로다. 펠릭스 베드로는 능도 주대전 하옵소서.” 이렇게 교회는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를 제주의 사도라고 이야기합니다.
거제도에는 거제의 사도 윤봉문 요셉이 있습니다. 거제도는 예로부터 유배지였습니다. 이 고장에 복음이 전해 진 것은 병인박해 때 부산 영도에서 피난하여 온 윤사우 다니슬라우에 의해서입니다. 윤봉문은 바로 윤사우의 둘째 아들입니다. 윤봉문은 1851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 부친을 따라 피난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이 거제도로 들어간 것은 1868년경입니다. 그들 가족은 우연한 기회에 옥포에서 동수로 있던 진진부와 인연을 맺고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훗날 윤봉문은 전진부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복자 윤봉문 요셉은 거제의 사도로 교회 회장직을 맡아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붓 장사를 하면서 전교에 힘썼습니다. 순교자 윤봉문은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치고 전교에 힘쓰는 한편 자신의 수계에도 열심이었습니다. 1887년 11월 병인박해 후 처음으로 당시 대구 본당 초대 신부였던 로베르(Robert) 신부가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거제를 방문하자 그는 자신이 가르치던 예비신자 15명을 영세 입교시켰습니다. 그러나 한 달 후 뜻밖에도 이 지역에는 공식적인 박해가 아닌 사사로운 탄압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순교자는 칡넝쿨로 발목을 얽어 끌고 갔기에 살이 뭉개지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거제의 사도 윤봉문 요셉은 1888년 2월 20일 37살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조선의 초대 교회에는 이밖에도 호남의 사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있고,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가 있습니다. 이런 사도들의 열정과 신앙이 있었기에 모진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교회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50년 역사를 자랑하는 미 동북부의 한인 천주교회에도 뉴욕에는 정욱진 토마스 신부님과 뉴저지에는 박창득 아우구스티노 몬시뇰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1970년대 초반에 이민자들을 위한 공동체를 설립하였습니다. 정욱진 토마스 신부님의 헌신과 열정으로 뉴욕에는 퀸즈 정하상 성당, 베이사이드 성당, 우드사이드 성당, 브루클린 성당, 롱아일랜드 성당이 생겨났습니다. 사제성소에도 관심을 기울여서 많은 젊은이들이 사제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10여 명 이상의 1.5세 사제들이 사목하고 있습니다. 박창득 아우구스티노 몬시뇰의 헌신과 열정으로 뉴저지에는 메이플우드 성당, 데마레스 성당, 103위 성당, 마돈나 성당, 마이클 성당이 생겨났습니다. 사제성소에도 관심을 기울여서 많은 젊은이들이 사제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20여명 이상의 1.5세 사제들이 사목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욱진 토마스 신부님과 박창득 아우구스티노 몬시뇰은 뉴욕과 뉴저지의 사도라고 생각합니다. 신부님들과 함께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며 힘들게 공동체를 가꾸었던 교우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민 초기에 한인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던 교우들 역시 뉴욕과 뉴저지의 사도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사도 시몬과 유다(타대오) 성인의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불러 주셨던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 갔고,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며 거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사랑하고 살기에도 부족한 인생입니다. 나누고 살기에도 바쁜 인생입니다. 늘 감사드리고, 항상 기도하고, 언제나 기뻐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또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사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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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12-19: 제자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두 사도는 열두 사도 중의 두 사도로서, 시몬은 사도들의 이름 목록에서 열한 번째에 놓인 사도이고, 가나 출신으로서 유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혁명당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성 유다는 타대오라고도 하며 최후 만찬 때 주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요한 14,22) 여쭈어본 사도였다.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계속할 제자들을 선택하신다. 제자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항상 사람들과 사귀시며 함께 일하시고 하시는 일에 사람들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이다. 마르 3,14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이유 중의 하나가 당신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제자의 신분은 그분의 도구나 심부름꾼이나 종이 아니라, 당신의 일을 함께 생각하고 염려하고 기쁨을 나누는 친구의 신분과 같다. 그러니 이렇게 죄를 짓고 부족한 사람을 부르시고 택하시고 친구로서 대하시는 것을 볼 때 참으로 큰 은총이다.
예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의 모습들을 보면 서로가 완전히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모두가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한 공동체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신다. 이것은 각자가 모두 다르지만, 주님 안에, 주님의 사랑 안에 하나가 되어 당신을 각자가 처한 삶의 장에서 증거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사도로 선택받은 이들이 그렇게 특별한 교육도 받은 일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것을 보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인간의 힘과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심으로써, 우리 인간이 모두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게 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이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인간의 신분으로 당신을 낮추셨기에, 인간은 하느님의 아들과 동등한 자격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이 이미 하느님의 크신 은총인데, 그것이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것으로 증명이 된 셈이다. 다음으로 예수께서는 당신 사업의 중책을 맡기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13절) 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자는 본시 배우는 사람이요, 스승이란 가르치는 분이다. 여기서 제자의 본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제자는 스승에게 배우고, 자신도 스승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말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언제나 배우고 따르며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오늘날 부름을 받은 우리의 할 도리이며, 예수님께서 오늘의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다. 예수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란 예수에 대해서 언제나 더욱더 배우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뵐 때까지 언제나 신앙의 진리를 들으려고 하는 배우고자 하는 제자의 자세를 항상 가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열두 사도가 믿음에 있어서 또 실천적인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훌륭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흠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 자신에게도 그런 결점은 있다. 아니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 선택해 주신 그분께 감사드리며 우리도 사랑의 삶을 산다면 우리도 그분을 닮을 수 있다.
주님의 제자의 삶이란, 우리 신앙인들의 삶이란 바로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함께 생활하고 “그분처럼”(1요한 3,2) 되는 것이다. 항상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제자로서의 신앙인이 되기를 힘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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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도, 사도직, 섬김>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 (루카 6,13)"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두 사도를 따로 뽑으신 것은 그들에게 특별하고 중요한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신자들)보다 더 높은 사람을 뽑으신 것은 아닙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6) (여기서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다스릴 열두 명의 지도자를 뽑으셨지만,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들'을 뽑으셨습니다. (사도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이지만 가장 낮은 사람들입니다.)
열두 사도는 교회의 주춧돌입니다.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묵시 21,14)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에페 2,20) 건물에서 주춧돌은 특별하고 중요한 일을 합니다. 그러나 가장 낮은 곳에 있습니다. 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주춧돌의 모습은 '섬기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높은 사람'은 누구인가? ('섬김'을 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섬기는 사람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 여기서 '누구든지' 라는 말은 사도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모두가 다 높은 사람이고, 모두가 다 낮은 사람이고, 모두가 다 섬기는 사람이고, 모두가 다 섬김을 받는 사람입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자신을 낮추고 '서로 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서로 섬기는 일을 지금 이곳에서부터 실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
이 명령은 사도들에게만 하신 명령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명령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긴다면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받아야 하고, 주님이신 예수님의 명령을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에 '신앙인들끼리만' 서로 섬기면서,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당신들이 신자가 되면 그때 당신들을 섬기겠다."라고 말한다면, 그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끼리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섬겨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남도 아니고 적도 아닙니다. 가족이고 형제입니다. 서로 섬기는 일은 교회 안에서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온 세상으로 확대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이 말씀에서 '착한 행실'이라는 말은 '선행'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그대로 실천하는 '신앙인의 삶'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착한 행실'에는 사랑, 섬김, 겸손 등도 모두 포함됩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세상 사람들을 진심으로 섬기면, 그 섬김은 사람들을 비추는 하나의 빛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빛을 받아서 세상 사람들도 주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이 말씀은, "사랑으로써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이라는 말은, "배타적으로 너희끼리만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너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라."입니다.
이 말씀을 "서로 발을 씻어 주어라."라는 명령과 합하면, "서로 섬김으로써 사랑을 실천하여라.", 또는 "사랑으로써 서로 섬겨라."라는 명령이 됩니다. '사랑'은 곧 '섬김'입니다. 만일에 사랑 없이 섬기기만 한다면, 그것은 노예의 굴종이 될 뿐입니다. 또 섬기지는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진심으로 섬기게 됩니다. 사도직 수행은, 즉 선교활동은 말로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과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과 '섬김' 자체가 복음 선포가 됩니다.
혹시 세상 사람들을(안 믿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해도, 그들을 섬겨야 한다는 말에는 거부감을 느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6)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습니까? 성모님과 요셉 성인 외에는, 전부 다 '안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안 믿는 사람들'을 섬기신 분인데, 그 사람들이 나중에 '믿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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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두 분의 사도를 기리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우리 모두가 하나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예수님께서 제자단을 구성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이들 중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영적으로 계승하는 열두 명을 따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밤을 세워 하느님과 의논하시며 그분의 뜻을 찾으셨지요.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고 ……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루카 6,17)
산에서 내려온 예수님 일행 앞에 큰 무리가 몰려듭니다. 다른 제자들도 있고 가르침과 치유를 청하는 군중도 있지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소문에 그들이 얼마나 놀라고 기뻐하며 달려왔을지 짐작이 갑니다. 가난하고 단순 소박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수님의 출현은 하느님의 메시지이고 구원의 희망입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앴를 썼다."(루카 6,19) 예수님께서 구마와 치유로 사람들을 고쳐 주시니 사람들이 예수님 가까이로 몰려듭니다. 손을 뻗어 예수님께 대려는 적극적 행위 안에는 그들의 절박한 심정과 간절한 바람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그분에게서 나오는 힘에 닿고 싶고 그 힘을 입고 싶은 애절한 간원이 그들을 움직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과 예수님, 사도들과 우리와의 관계를 눈에 보이는 건물로 설명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에페소서 2,20)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는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구원 사건과 시공간적으로 큰 격차를 지닙니다만, 하느님의 목소리로 살았던 예언자들,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고 기쁜 소식의 초대 메신저요 실행자가 된 사도들과 현재의 우리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생생히 표현했듯, 예수님께서 모퉁잇돌로서 그 중심이 되고 사도와 예언자들이 기초를 이룬 토내 위에 우리가 차곡차곡 쌓여 교회가 지어지는 중이지요.
'우리'에 포함된 무수한 시대와 문화, 민족과 인종의 고귀한 인격들을 관상하면, 과연 물리적으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다양하며 긴밀한 연결체임을 감지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소서 2,22)
이렇게 지어지는 교회가 곧 "하느님의 거처"입니다. 그 안에서는 누구 하나 중요하지 않은 이가 없지요. 하느님의 목소리가 된 예언자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한 사도들,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 예수님의 선한 뜻을 실제로 세상에 구현한 실천가와 봉사자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그 어느 쯤에 놓여 하느님의 거처를 이루는 중입니다. 그 안에 함께하는 자체가 주님과 우리가 닿아 있음을 증명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우리는 모두 사도들과 예언자들, 순교자들의 양분 위에서 하나의 몸을 이룹니다.
코로나19 감염병 사태로 거의 2년 가까이 교회와 물리적 거리감이 지속되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있는 힘껏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사도 축일을 맞아 우리를 이어주던 결속감과 공동체 사랑을 기억하며 다가올 위드코로나 시대를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성 시몬과 성 타대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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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몇 년 전에 나온 공익 광고 내용입니다.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태극기를 다는 국경일 하루만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국가 대표 축구 경기를 보는 90분만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순국선열을 위하여 묵념하는 1분만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독도에 관한 뉴스를 접하는 그 순간만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나라 사랑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이 광고 내용을 하느님 나라의 백성에게 맞추어 바꾼다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성체를 모시는 그 짧은 순간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성가를 부르며 감동을 하는 순간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비신자인 배우자가 오늘도 성당 가냐고 구박을 할 때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힘든 일이 생겨서 주님께 기도를 해야 하는 경우에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외국에 가면 누구나 다 애국심이 생기고, 국가 대표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도 성당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순간 교회의 대표, 하느님 나라의 국가 대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뽑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십니다. 사도란 ‘파견된 자’라는 뜻입니다.
이 열두 명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녕 사도들은 자신들의 삶 전체를 통하여 예수님을 증언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도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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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청 사도요한 신부님]
오늘 우리는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의 축일을 지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명단에 등장하는 이름 말고는 이들에 대한 언급이 따로 없어서, 다른 사도들에 견주어 덜 알려진 것이 사실입니다.
시몬 사도는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서의 곳곳에서 늘 열혈당원으로 소개됩니다. ‘열혈당’은 당대 패권을 쥔 로마 제국에 무력으로 대항하려고 기원후 6년 무렵 조직된 유다 민족주의적 당파로 ‘젤롯파’라고도 불립니다. 시몬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이러한 독립 운동에 가담할 만큼 열성적이었고 또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던 인물로 보입니다.
유다 사도는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과 이름이 같습니다. 루카 복음의 열두 사도 명단은 유다라는 이름과 함께 그를 야고보의 아들로 소개하지만,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의 명단에는 유다라는 이름 대신에 ‘타대오’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타대오는 아마도 유다 사도의 그리스식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시몬과 유다 사도는 함께 선교 활동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몬과 유다의 수난기』라는 초기 문헌에 따르면, 두 사도는 시리아와 소아시아를 함께 여행하며 복음을 선포하였고, 선교 영역을 페르시아까지 확대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사도 모두 페르시아 지역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들의 순교에 대하여 여러 전승이 있는데, 시몬 사도는 톱으로 몸이 잘려 순교하였고, 유다 사도는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는 전승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술 작품에 두 사도가 표현될 때, 시몬 사도는 톱과 함께, 유다 사도는 창과 함께 묘사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가운데에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루카 10,1 참조) 고된 선교 여정 가운데 서로에게 의지하며 힘이 되어 주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시몬과 유다 사도는 그러한 예수님의 의도를 제대로 알아듣고 기쁜 소식을 함께 전하러 다닌 사도들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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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스승과 제자>
축일을 맞이한 모든 이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굳건한 믿음과 사도적 열성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냥 뽑으신 것이 아니라 밤을 새우시며 기도한 다음 뽑으셨습니다.
그 기도의 열매는 확실했습니다. 열혈당원이라 불리는 시몬과 세리 마태오를 비롯하여 배신자 유다까지도 그 대열에 속해 있었습니다. 시몬과 마태오는 서로의 위치가 대립적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군과 친일파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도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26,33) 하고 장담했지만 죽음 앞에서는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26,72) 하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개별적으로 볼 때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뽑힌 것입니다. 이것이 밤새껏 기도한 결과입니다. 그냥 뽑았으면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뽑혔을 텐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렸기에 장차 당신을 배신할 배반자들까지도 뽑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이것이 스승의 참모습입니다. 그분의 품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내가 그분의 품을 떠날 뿐입니다. 예수님은 잘나고 똑똑한 사람을 뽑은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을 선택하여 당신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한눈팔지 않는 이들로 만드셨습니다.
제자들은 부족함 투성이였지만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잘못을 범한 베드로는 으뜸 제자로써 역할을 다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열혈당원 시몬은 늘 투쟁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투쟁과는 상관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살았고 또 전했습니다. 죄인 취급 받던 마태오도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세관장 자캐오를 생각하면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남을 속여먹은 것은 네 곱절로 크게 갚아주고 구원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세리 마태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는 잘못은 뉘우쳤지만,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변화된 삶을 살면 행복이 오고, 변하지 않으면 끝이 불행합니다. 주님의 자비를 믿으면 미래가 열리고, 믿지 못하면 그 자체가 영벌입니다.
일상의 삶을 봅니다. “여자는 결혼 후 남자가 변하길 바라지만 남자는 변하지 않는답니다.” 아니 오히려 기대와는 반대로 변한답니다. 또한 “남자는 결혼해도 여자가 변하지 않길 바라지만 여자는 변한답니다.”
여자도 역시 남자가 기대하는 바와는 다르게 변한답니다. 집에서는 체육복을 입고 그야말로 아줌마가 된답니다. 서로서로 부족함을 채워주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변해야 하는데 부족함에 대해 서로 잔소리만 늘어가면 불행합니다. 변하되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고 내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전이나 세례 후나 변한 게 없으면 불행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예수님과의 만남이 깊어져야 행복합니다.
사도들이 주님을 만나 새 삶을 살았듯이 우리도 새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스승 앞에 참된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필리3,21)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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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돈이 아무리 많아도 행복도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긴 새 주택을 구하고, 원하는 물건을 구매하면 처음에는 행복도가 높아지지만 계속해서 그 행복도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어느 순간이 되면 그 전과 같은 상태가 된다고 하지요. 그래서 돈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많습니다. 그런데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심리학과 엘리자베스 던 교수와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마이클 노튼 교수는 돈으로 행복을 높이는 좋은 방법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돈으로 경험을 구매하라.”
물건은 점차 남루해지고 유행도 바뀌고 지겨워지지만, 가령 여행지에서의 새로운 경험은 시간이 지날수록 달콤해진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좋은 사람과 함께한 경험을 많이 만들면 행복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파멸로 이끌 수 있는 경험을 사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파멸로 이끌 수 있는 경험은 지속될 수 있는 행복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가정을 파괴하는 외도, 자신을 파괴하는 마약류의 섭취, 다른 이의 몰락을 위해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것 등은 순간의 만족을 가져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속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파멸로 이끌 뿐입니다.
지속적인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위해 돈을 쓴다면, 분명히 행복의 길로 이끌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모범을 계속해서 보여주셨습니다. 병자를 고쳐 주셨고, 마귀 들린 사람을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돈이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돈이 더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참된 행복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기에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그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또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보상이 전혀 없는 어렵고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따라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참 행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이 부름은 세상의 것과는 분명 구별되는데, 우리는 세상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문제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들게 사느냐면서 불평불만을 멈추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보다는 더 편하고 쉽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면서 반문합니다.
지속될 수 있는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가질 수 있는 행복이어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할 때, 행복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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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루카 6,12-19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그분께서
산에 오르시어
하느님께 기도하시는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그분께서
칠흑 같은 어둠을
빛나는 영혼으로 사르시는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그분께서
홀로라도 끝내 가야 할 길을
가슴 깊이 아리게 새기시는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그분께서
가슴 벅찬 길을 함께 걸을
벗들을 마음으로 헤아리시는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그분 곁에
삶과 죽음을 그분과 함께하고픈
그분의 벗들이 함께 하는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그분은 벗들에게 더욱 가까이
그분의 벗들은 그분께 더욱 가까이
갈림 없이 서로를 향하는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이내 먼동이 트면
그분과 벗들이 하나 되어
새 길 여는 발걸음 곧게 내딛는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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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탈바꿈>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오늘 두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자연스럽게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왜 두 사도의 축일을 같이 지내는지 그것이겠지요?
그리고 두 분의 축일을 같이 지내는 것은 두 사도가 주님의 형제들이라고 교회가 인정하기 때문인데 두 분이 사도가 된 것은 자원한 것인지 아니면 오늘 복음 말씀처럼 주님께서 뽑아서 된 것인지 그것이 두 번째 질문이지요.
제 생각에 두 분이 제자가 된 것은 자원한 것이고, 열두 사도 중의 하나가 된 것은 뽑힌 것일 겁니다.
저의 이런 생각은 열두 사도 외에 주님을 추종한 사람들 곧 제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에 근거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자가 되기로 자원할 때와 사도로 뽑힐 때
두 분의 마음이나 의도는 어땠을까 다시 생각이 됩니다.
망설임은 없었을까요? 두려움이나 조심스러움은 없었을까요? 오히려 불순한 의도나 뻐기는 마음이 있었을까요?
불순한 의도나 뻐기는 마음이라면 주님의 형제라는 것을 이용하여 주님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셨을 때 한 자리 차지하려는 것과 사도단 가운데서 자기들은 주님의 형제라는 것을 뻐기는 것이지요.
만일 두 분이 이랬다면 제자에서 사도로 뽑힐 때는 기뻤을 것이고, 그러나 나중에 진정한 주님의 사도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절망과 죽음의 계곡을 건너는 회개와 세례가 필요했겠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의 형제라는 것 때문에 제자와 사도 되는 것에 망설임이나 두려움이나 조심스러움이 없었다면 열두 사도 중 주님의 진정한 사도가 되기 위해 제일 많이 탈바꿈해야 할 분은 두 분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탈바꿈에 대해 생각해보려는데 탈바꿈의 사전적 의미는 모양이나 형태나 상태가 바뀌고 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동물의 경우는 매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유충이나 유생에서 성충이나 성체로 탈바꿈하고, 식물의 경우는 본래의 것과는 아주 달라져 독립된 종으로 탈바꿈하지요.
그러니까 탈바꿈이라는 말에는 성숙과 완전한 변화라는 좋은 뜻이 있고, 그렇게 되기 전에는 미숙하고 불완전하였다는 뜻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두 분의 축일을 같이 지내는 것은 두 분이 이런 탈바꿈의 대표이고 모범이기 때문이겠는데 우리는 두 분의 탈바꿈을 영적인 탈바꿈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 영적인 탈바꿈은 요한 복음에서 세례자의 물의 세례와 비교하여 주님의 세례를 불의 세례, 성령의 세례라고 한 것과 같이 성령의 세례를 받아 완전히 영적인 존재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영적인 탈바꿈은 존재의 영적 탈바꿈 뿐 아니라 삶과 역할도 영적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자기만 영적으로 탈바꿈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탈바꿈하도록 모범이 되고 역할을 하는 겁니다.
두 분의 경우 단순한 제자에서 사도로 탈바꿈하는 것인데 사도란 열두 지파의 대표로서 주님 교회의 기둥이 되는 것이니 두 분을 본받는다면 우리도 제자에서 사도로 영적 탈바꿈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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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과 선을 선포하는 사도>
성 시몬과 성 유다는 열두 사도의 일원이었습니다. 시몬은 에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기 전까지 유다 국가의 민족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결성된 열혈당의 일원이었습니다(6,15). 따라서 그는 구약의 하느님 말씀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그는 페르시아에서 선교하다가 톱으로 몸이 잘리는 형벌을 받아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유다 사도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과 구별하여 ‘타대오’(마태 10,3; 마르 3,18)라고 불리기도 하지요.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동생인 유다”(유다 1,1)로 기록된 유다서의 저자는 아닙니다. 유다서 저자가 사도라는 확실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다 사도는 유다 지방에서 선교하다 순교했다고 전해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다음’ 제자들 가운데 열둘을 사도로 뽑으셨지요(6,12-13). 그분께서는 계시와 기도의 장소인 '산'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오직 하느님 눈으로 그들을 사도로 뽑으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인간적인 성숙도나 효율을 선발기준으로 삼으셨다면 그 누구도 뽑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 모두 복음선포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었겠지요.
하느님의 계획은 그렇게 인간적인 기준이나 관점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에페 2,19-20)
우리도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서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사람답게 처신해야겠습니다. 곧 어떤 일이나 사물을 대할 때 나의 생각이나 뜻이 아니라 먼저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뽑힌 사도들처럼 세상적인 야망이나 계획, 행동방식, 습관, 가치관을 떨쳐내고 모퉁잇돌이신 그분으로 옷을 바꿔 입어야겠지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우리 안에는 늘 하느님 나라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지음 받은 우리가 사랑이신 분께 되돌아가기 위한 유일한 길은 사랑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선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선을 되돌림으로써 '좋음' 자체이신 그분과 일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과 선의 사도, 정의와 평화의 사도로 부르시고 파견하신 주님의 뜻임을 상기해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으로 내 인생길에 늘 동행해주시며 사랑의 도구로 삼아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려야겠습니다. 기도하시며 사도들을 뽑으신 예수님처럼 주님 안에서 주님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스도를 모퉁잇돌 삼아 죽기까지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주님을 선포했던 사도들을 본받도록 힘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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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장중인 신앙의 사랑 공동체>
-기도와 말씀-
오늘은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입니다. 두 사도의 삶을 요약한 아름다운 찬미가 두연을 나눕니다.
“사도시몬 천상적인 열성을품고, 주예수의 발자취를 뒤따르시며
아낌없는 진실로써 열정다하여, 만천하에 주예수를 선포하셨네
사도이신 성유다는 제자며형제, 혈육이나 영적으로 주님의형제
저서로써 스승예수 전파하시며, 온세상에 주님말씀 가르치셨네”
새벽 휴게실에 들렸다가 어제 금요 강론 자료를 읽었습니다. 어제 읽었던 한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대가들의 글을 읽어야 배울 것이 많다.” 그러니 기라성 같은 대가들의 주옥같은 말씀이 배경을 이룬 가톨릭 교리서의 공부는 성장중인 신앙 공동체에 큰 도움이 됨을 깨닫습니다. 가톨릭 교회 신학의 대가인 성 예로니모와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말씀, 그리고 신앙의 일곱가지 특징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다시 나눕니다.
“성경을 모른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과거가 아닌 현재에 말씀하고 계시며, 오늘 우리와 이야기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빛을 주시고 생명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또한 우리에게 공동체를 선물하시고, 평화를 누리도록 우리를 준비시키며 우리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대가들의 글을 보면 개인 신상에 관한 사적인 말들은 거의 없고 보편적인 진리만을 말합니다. 신앙은 일곱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신앙은 순전히 하느님의 선물이며, 우리가 진심으로 청할 때 얻게 된다.
2.신앙은 구원을 얻기위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초자연적 능력이다.
3.인간이 하느님의 초대에 응할 때, 신앙에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4.예수님이 신앙을 보증하시기 때문에 신앙은 전적으로 확신할 만하다.
5.신앙이 사랑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불완전하다.
6.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더욱 주의 깊게 경청하고, 기도를 통해 그분과 살아있는 관계에 머문다면 신앙은 성장한다.
7.신앙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보여 준다.
그러니 신앙이 없는 인간은 인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인간의 본질이다, 신앙할 때 비로소 참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의 신앙이요 신앙의 은총이요 신앙의 성장입니다. 신앙 공동체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이런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끊임없이 내적성장중에 있는 역동적 실재입니다.
어제의 즐거웠던 추억을 잊지 못합니다. 70대를 넘어선 사촌 형제들과 남한산성 하루 나들이를 했습니다. 수도원에서는 미쳐 몰랐는데 요즘 산마다 단풍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남한산성은 약 400년전 인조임금이 병자호란(1636-1637)을 겪어낸 참혹한 장소입니다. 인조임금의 행궁 후원 400년쯤 된 느티나무에 감동했습니다.
커다란 느티나무가 흡사 사람처럼, 공동체처럼 생각되었습니다. 함께 한 70대 사촌 형제들도 세월과 더불어 연륜을 지닌 나무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무한한 추억을 지닌 나무같은 사람입니다. “침묵하는 나무”와는 대조적으로 “말하는 나무”같은 사람입니다. 주로 나눈 대화는 50-60년대 공유한 아기자기한 추억들이 담긴 이야기들이었고 아픈 몸들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나이들면 누구나 아픈 것은 일상입니다. 사촌 친지들과 사진도 찍었고 이 사진에 대한 수도형제의 평도 고무적이었습니다.
“와우...멋집니다. 나무도 사람도 모두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고 우뚝 선 거목들 같습니다.”
나이들어갈수록 평등해지고 겸손해지는 나무들 같이 참 서로들 편안했습니다. 함께 했던 사촌들은 저 빼놓고는 열심한 개신교 신자이며 한분은 침례교회 목사님입니다. 사촌 아우 부인인 제수씨는 뜻밖에 슬며시 선물금을 제 주머니에 넣어 주었고 진정성 가득한 따뜻한 신앙의 마음에 참 마음 뿌듯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내일 미사봉헌하겠다 말씀드렸습니다.
400년쯤 수령의 느티나무에서는 “침묵, 고독, 인내, 믿음, 기도”를 배웠습니다. 말그대로 느티나무는 인고의 세월을 하늘 향해 침묵과 고독중에 인내하며 기도하며 끊임없이 성장중인 개인을, 공동체를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수도자들은 물론 참 사람으로, 참 공동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침묵과 고독, 사랑의 기도와 인내의 믿음”이 절대적입니다.
“나무와 같은 사람이다. 나무처럼 사는 것이 잘사는 거다” 라는 생각과 더불어 서로 닮아가는 노목과 노승을 연상했습니다. 어제의 40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참 좋은 친구와의 만남인 듯 오후 내내 행복하고 뿌듯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복음의 예수님 제자공동체는 예수님 기도의 산물이자 하느님의 선물인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중심한 살아있는 한몸 공동체로 계속 성장해야 하는 살아 있는 공동체요, 그대로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로 면면히 계승되어온 제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태어난 공동체이기에 우리 또한 한결같은, 끊임없는 기도가 예수님과의 살아 있는 우정 관계에, 신앙공동체의 성장에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교황님이 많이 강조하는 말마디가 “더불어(together)”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반드시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우리 모두가 더불어 예수님 한몸 운명 공동체에 속한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이며 이 두분 사도 역시 우리 교회 공동체에 초석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 교회 공동체의 특성을 참 적절하고 은혜롭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현재진행형으로 완성을 향해 성장중인 미완의 살아 있는 한몸 공동체요, 바로 여기 지체에 속한 우리들입니다. 작게는 우리 수도공동체이지만,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2000년 전통의 거목의 가톨릭 교회 공동체에 속한 지체들인 우리임을 알게 됩니다. 2000년 전통의 가톨릭 교회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사랑의 보물 열매들인 성인성녀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만의 자랑이며 긍지입니다. 이런 자각이 날마다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금도 여전히 잠깨면 맨 먼저 만세육창을 하고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1.하느님 만세
2.예수님 만세
3.대한민국-한반도 만세
4.가톨릭 교회 만세
5.성모님 만세
6.요셉 수도원 만세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만세육창대로 이루어 주시며, 우리 가톨릭 교회 공동체를 날로 성장, 성숙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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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6,12)
<기도!>
오늘 복음(루카 6,12-19)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많은 제자들 중에서 세상으로 파견되어질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이 중요한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기도하십니다. 조용한 산으로 가셔서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뽑힌 이들이 바로 "베드로(시몬)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와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루카 6,14-16)입니다.
오늘은 열두 사도 중에서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타대오.다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기도하신 예수님, 그것도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예수님,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 날 밤에, 겟세마니 동산에서 간절하게 기도하신 예수님 안에 머물러 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루카 22,42)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이유는 당신 뜻대로 하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 열두 사도들은 하느님께서 뽑으신 이들, 하느님으로부터 뽑힌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런 자녀들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멋지고 위대한 존재들이고, 이것이 우리의 자존감'입니다.
중요한 순간에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기도합시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고, 이 뜻에 순종하도록 합시다!
이것이 바로 '시노달리따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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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lAHb47gtI2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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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루카 6, 13)
가을의
부르심에
충실한
가을 국화가
향기롭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선택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훌륭한 선택은
이와 같이
훌륭한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예수님의
가장 좋으신
마음의
반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통하여
희망을 선택하십니다.
길 위에어
깨닫게 되는
사도들의
희망찬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믿어주십니다.
불가능이
비로소
가능으로
바뀝니다.
뽑아주신 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활동과
예수님의 말씀이
지향하는 바를
받아들여
공동체를
이끄는 것입니다.
신앙 또한
선택의
연속입니다.
사도들이
사도들의
사명에
충실하였듯이
우리 또한
우리의 사명인
복음에 충실하길
기도드립니다.
올바른 선택은
부단한 식별의
올바른 여정이
필요하며
올바른 식별은
겉모습이 아닌
자리가 아닌
우리 내면을
말씀으로 비추는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충실함과
배신과 배반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십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간절히
청하는 지혜가
필요한 선택의
여정입니다.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가을 물이
드디어
바다에 이르러
결합되고
하나되는
선택의 일치입니다.
선택의 신비를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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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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