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중현과 엽전들' 창설 멤버로 활동한 김호식 드러머. 일선에서 물러난 지 20년이 다 됐지만 지금도 매일 아침 적어도 30분씩은 연습을 하고 있다.
■ 7년전 동이면 조령리에 자리잡아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어딘지 익숙한 글귀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아마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노래, 신중현씨가 작사 작곡한 '미인'이란 곡의 첫 소절이다. 한국적 록의 시초라 불리는 이 노래는 신중현씨가 결성한 그룹 '신중현과 엽전들'이 1974년 발매한 정규 1집에 수록된 곡이다.
한국 음악의 흐름을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노래를 당시 신중현씨와 함께 연주했던 음악가가 우리고장에 있다. 드러머 김호식(68, 동이면 조령리)씨다.
▲ 김호식씨
김호식씨는 1973년 신중현씨와 함께 '신중현과 엽전들'이란 그룹으로 활동하게 된다. 신중현씨가 기타와 노래를 맡았고 김호식씨가 드럼을, 이남이씨가 베이스를 맡았다. 한국 최초 3인조 록 그룹이 만들어진 것.
'미인'이 수록된 1집 정규 앨범은 초기 버전과 후기 버전 두 가지가 존재한다. 김호식씨가 참여해 제작한 초기 버전은 1973년 오일쇼크로 사정이 좋지 않던 음반사에서 팔리지 않을 음악으로 치부해 1천장을 비매품으로 찍었다. 이 앨범은 현재 LP로 구입하려면 100만원이 넘는 가격을 제시해야 구할 수 있다고 한다.
두 번째 버전은 김호식씨가 팀을 나가고 권용남씨가 드러머로 활동하며 제작한 버전이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미인'은 후기 엽전들 1집 앨범에 수록된 노래다. 이 앨범은 석유파동이란 불황 속에서도 10만장 가까이 팔려나가는 기록을 달성했다.
■ '덩키스'로 시작된 신중현과 만남
김호식씨와 신중현씨의 인연은 엽전들로 활동하기 약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씨는 20살 어린 나이였지만 드럼 연주에 두각을 나타내 서울 미8군 무대에서 알아주는 연주자 중 한 명이었다. 17살에 드럼을 처음 접한 김씨는 3개월 만에 자기 악기를 사고 미8군 무대에서 꾸준히 활동을 해 왔다.
김씨에 대해 소문을 들은 신중현씨가 김씨를 찾아 '덩키스'란 멤버로 함께 연주하자고 제안한다. 베이스에 이태현씨와 또 한 명의 기타 오덕기씨, 오르간 김민랑씨가 결합해 덩키스가 결성됐다. 덩키스는 미8군 무대를 주무대로 활동했다.
덩키스 첫 객원보컬이 '봄비'와 '꽃잎'을 부른 이정화씨다. 두 곡은 훗날 명곡으로 인정받아 지금도 많은 가수들과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겹쳐 미8군 무대마저 사양길로 접어들어 이정화씨는 베트남으로 떠났다.
하지만 덩키스는 1970년 김호식씨가 군대 가기 전까지 굵직한 가수들을 배출했다. 김씨는 당시 덩키스를 거친 가수들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저희 정식 명칭은 덩키스였지만 당시는 지금처럼 밴드 이름을 전면에 내세워 활동하지 않았어요. 가수들이 중심이었기에 이정화씨가 객원보컬로 있을 때 이정화라는 이름만 내세워 활동했죠. '님아'와 '커피 한 잔'을 불렀던 펄시스터즈, '대머리 총각'을 부른 김상희씨, '시골길'을 부른 임성훈씨 연주도 덩키스가 맡았죠. 제가 군대 가기 막 전에 김추자씨 노래를 연주했죠.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와 '늦기 전에'가 아마 마지막으로 연주했던 곡일 거에요."
▲ 그룹 덩키스 멤버들 사진. 1968년 무렵 찍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가운데 여성인 '봄비'를 부른 이정화씨. 이정화씨 왼쪽이 김호식씨, 오른쪽이 신중현씨다. <사진출처: 네이버 아이디 '안톤(arpuer)' 블로그>
■'잠 잘 시간도 없이 연주했죠'
김씨가 음악에 눈을 뜨게 된 건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김씨가 드럼을 배우게 된 것도 어머니의 권유에서 시작됐다. 여중학교 무용 교사였던 어머니는 여성 보컬그룹 '김시스터즈'의 팬이었고 아버지 역시 클래식 애호가였다.
음악을 사랑하는 부모님의 영향이었을까, 3남1녀인 김씨 형제는 모두 음악과 가까운 삶을 살았다. 김씨의 큰형 김주식씨는 88서울올림픽 공식 노래 '손에 손잡고'를 부른 '코리아나'에서 베이스와 보컬로 활동했다.
남동생 김원식씨는 '달무리' '등불' 등 명곡을 남긴 70년대 실력파 밴드 '영사운드'에서 기타를 쳤다. 지금은 부산에서 악기점을 하고 있다. 여동생 역시 미8군 무대에서 '르꽈리스'란 팀의 보컬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부모님이 음악을 좋아하셨고 반대하지 않으셨죠. 당시는 음악하는 사람을 '딴따라'라고 해서 반대하는 부모님도 많았지만 그런 건 없었죠. 형제 모두 음악을 접했지만 제가 제일 빨리 접한 편이죠."
군대에서도 음악과 인연은 계속됐다. 애초 군악대에 갈 생각은 없었지만 미8군 무대와 덩키스로 활동했던 이력이 알려져 공군 군악대로 차출돼 연회식과 파티장에서 연주를 하며 군생활을 보냈다.
군 전역 후 김씨는 앞서 봤듯 '신중현과 엽전들' 드러머로 약 1년간 활동을 끝으로 밴드 생활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전문 연주자로 나섰다. TBC 이봉조 악단에서 약 6개월간 활동했고 이후 낮에는 녹음실에서 악기 레코딩을 전담하고 밤에는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당시 전국에 음반사는 꽤 있었지만 녹음실은 딱 두 군데 있었어요. 왕십리 뒤쪽 사근동에 하나, 장충동에 하나 있었죠. 저는 사근동에서 드럼 녹음을 맡았죠. 작곡가들이 곡을 가지고 오면 애드립과 제 느낌을 섞어 연주했죠. 하루에 적을 때는 20곡, 많을 때는 40곡 이상 녹음했어요. 녹음실이 두 군데밖에 없었으니 사실상 당시에 나온 노래의 절반을 녹음한 셈이죠. 임금이 좋았어요. 반나절 일하면 방송국에서 3일치 일한 임금 정도 나왔으니까요. 이때가 제일 전성기였던 것 같아요. 잠 잘 시간도 없었죠."
7년간 이 곳에서 연주를 한 김씨는 1981년 녹음실을 나오고 나이트클럽과 호텔에서 연주를 이어가다 1995년 무대 일선에서 물러나 옥천으로 향한다.
■ 연주 능력 주민과 나누고 싶어요'
옥천에 특별한 연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김호식씨의 아버지가 우연히 옥천에 들렀다 살기 좋은 곳으로 여겨 1985년 지금 김씨가 살고 있는 동이면 조령리에 터를 잡았다. 김씨는 10년 뒤인 1995년 이곳으로 내려와 염소를 키우고 지내며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
하지만 1년 뒤 다시 서울로 올라가 연주를 하려 했지만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점점 뒤처짐을 느꼈다.
"처음에는 음악 할 생각 없이 다시 서울로 올라갔는데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이라 조금씩 하게 됐죠. 하지만 시대가 변해 뒤쳐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결국 음악으로 밥벌이 하긴 힘들겠다 싶어 소일거리를 찾아봤어요. 마침 자동차면허 학원에서 강사를 모집한다기에 거기서 일하기 시작했죠. 좋았어요. 음악할 때는 쉬지도 못하고 여유 없이 살았는데 이 일을 하니 저녁에 시간도 나고 일주일에 하루 쉴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지내다 2008년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옥천으로 완전히 내려와 살게 됐죠."
김씨는 서울에서 운전면허 강사로 일한 경력을 살려 지금은 군북면에 있는 동원자동차운전전문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다.
그렇다고 김씨가 음악과 담을 쌓고 사는 건 아니다. 단지 밥벌이로만 하고 있지 않다는 것. 지금도 매일 아침 최소 30분씩은 드럼을 치고 있다. 올해 초 평생학습원에서 진행한 1기 두드림 지원서비스 사업에서 드럼 강사로 주민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김씨는 자신이 지닌 재능을 주민들에게 어떻게 나눠줄 지 고민 중이다.
"옥천 주민으로 산 지 7년이 다 됐네요. 항상 주민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동생이 부산에서 악기점을 하는데 다음에 부탁해서 퍼커션 같은 타악기들을 좀 받아오려고요. 그걸로 주민들에게 연주도 가르쳐 드리고 마을에서 행사 같은 게 있을 때 직접 연주도 하려고 생각 중이에요."
얼떨결에 음악을 시작해 먹고 살기 위해서 음악을 했다는 김호식씨. 하지만 김씨는 음악을 하게 된 걸 후회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처음엔 직업으로 음악을 하게 됐는데 돌이켜 보면 참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음악을 하면서 '리듬'이란 걸 알게 됐어요. 음악만이 리듬이 아니에요. 걸음걸이 하나부터 우리 삶 모든 게 리듬의 연결이에요. 그걸 보는 눈이 생긴 것 같습니다. 어머님 꿈이 가족 모두가 함께 연주를 하는 건데 아직 그걸 이루지 못해 좀 아쉽긴 하네요."
첫댓글 어딘가 모르게 목사님과 닮은듯~ ^^ 합니다.
환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