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nus Dei, Samuel Barber ⸻내가 아는 한 노동운동가에게 진은영 밤이여, 너의 긴 팔에 몇 개의 못 구멍을 내라 뿔피리처럼 맑은 눈을 떠라 당신이 집을 떠나 공장에서 썼던 일기의 첫 줄은 명랑했을 거라 상상합니다 진보라니, 언제나 그 말은 아득하게 들립니다 꿈속에서 누군가와 알몸으로 사랑을 하고 빵을 나누는 일처럼 자면서 벌어진 입술로 새어나오는 잠꼬대 같은 진실들 그런 걸, 믿으라는 말인가 나는 오랫동안 묻곤 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을 지우면서 당신은 스스로 답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그러나 결코 욕심 부리지는 않았죠 한낮이 아니라 별들이 아니라 용접기 불꽃이 만든 한 개의 반짝이는 구리 반지를 벽보 속에, 슬픔 속에, 한 노동자의 얼굴 속에 넣어뒀을 뿐) 당신은 확신했습니다 나는 세상의 소금이다 나는 약간의 소금, 나를 넣어주세요 (그렇다고 역사의 바다가 더 짜지지는 않을 테지만) 모든 것은 둥둥 떠오를 것입니다 거짓은 생각만큼 무겁지 않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염도의 합법칙성이 아니라 소금 한 알 흰 깃털의 어둠 속에서 얼굴을 씻는 나무들 어쩌면, 높은 데서 딴 열매는 빛의 밤송이 같은 것, 배가 고프고 따갑습니다 때때로 빈속에 삼킨 정직은 우리의 창자를 찢으며 내려갑니다 나는 완벽한 사실의 평면, 혹은 고통이라고 믿는 벽에 뚫린 아주 작은, 단 하나의 구멍 나는 그것을 통과해서 나갈 거니까 앞으로 앞으로 마지막 순간에 당신은 중얼거렸습니다 …… …… 나는 그 순간에 덧붙일 정치철학적 논평은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질문으로 다시 질문을 지우며 당신과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신념으로 어제까지 신이 머물렀다 막 떠난 도시처럼 이곳이 아직 따듯한 것이라고 조용히, 당신처럼, 비유로 말하고 싶습니다
⸻계간 《창작과비평》 2018년 가을호 ------------ 진은영 / 1970년 대전 출생. 2000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우리는 매일매일』『훔쳐가는 노래』등.
파위교 (외 1편) 김명리 해질 녘, 저 박명의 시간 여름꽃 향기 더없이 짙어지는 블루 아워에 물골안 파위교로 날아드는 뭇 새들은 봄꽃 나무 텅 빈 가지 흔든다 매화말발도리, 매화말발도리… 납작한 부리 뱃바닥 붉은 새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방꽃차례로 운다 저녁 해의 불꽃 이내 흩어지고 서둘러 잎 내고 꽃 피우던 여름꽃 진다 체로금풍의 시절이 머지않았으니 여름의 핏자국들 이내 희미해지리 우리도 끝내 자욱이 돌아서리라 대오를 벗어난 새 한 마리 안 보이는 적막한 하늘 아래 어느 꽃의 붉은 꽃잎, 푸른 꽃받침이 저다지 낮게 고요히 덜컹거리는지 슬픔이 서로 다른 빛깔로 마중 와 있는 파위교 밤의 해변에서 새벽 두 시 바다에 이르렀다 휘황한 밤이다 잠들지 않은 아이들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불꽃놀이 한창인 속초 해변을 맨발로 걸었다 부서진 조가비들이 사람의 맨발보다 먼저 아얏, 비명소리를 지르는 밤의 해변 먼 바다 고깃배들의 탐조등 등빛 쪽으로 봉두난발 파도소리, 내 마음의 철천지원수들 희희낙락 떠내려가는 소리 영금정 누각 위로 어둠이 방동사니풀처럼 휘청거릴 때 내몰하는 파도의 저 이백 미터 상공 위로 막사발만한 달이 떴다 캄캄해져라, 마저 캄캄해져라 확 채어서 그대로 내동댕이치고픈 상현(上弦) ⸻계간 《모:든시》 2018년 가을호 ------------ 김명리 / 1959년 대구 출생. 198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시집『물 속의 아틀라스』『물보다 낮은 집』『적멸의 즐거움』『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제비꽃 꽃잎 속』등.
틴티나불리* 황유원 초겨울 추위 속에 교회 종이 한 번 뎅그렁, 내면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오늘 나의 존재는 종소리 울려 퍼지다 희미해지는 데까지 한겨울 추위 속에 교회 종이 한 번 뎅그렁, 내면에 몰아치는 눈보라 소리를 들으며 내일 나의 존재는 도자기 잔 속으로부터 대기 중에 울려 퍼지다 대기와 뒤섞여 더는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지점까지 뜨거운 물과 오렌지 향이 나의 내면으로 흘러들어와 나의 전신에 퍼져나가는 이 겨울 지금 차가운 창밖으로 고개 내밀어 네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데까지가 나의 내면 추위로 얼굴 온통 얼어붙고 너의 흰 뼛속에 스민 추위가 스미고 스미다 희미해지는 데까지가 나의 전신 희미해지다 마는 곳 너머까지가 너의 영혼 고요해진 눈밭에 교회 종이 한 번 뎅그렁, 잘 정리된 흰 수염 같은 세상 종소리에 모두들 내면엔 금이 가도 외면엔 여전히 차디찬 고드름 쨍그랑, 술잔을 부딪치던 시절은 이제 안녕 술 없이도 취해 있고 더 이상 취해도 취할 수 없는 날들까지가 이 겨울의 끝 테이블 위에는 식어빠진 찻잔 속에 곤히 잠든 오렌지차가 한 잔 ⸻⸻⸻⸻⸻ * 틴티나불리 : 에스토니아의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의 작곡 기법으로, ‘작은 종’ 또는 ‘일련의 종소리’를 뜻하는 라틴어 틴티나불룸(tintinnabulum)에서 가져온 말.
⸻계간 《문학동네》 2018년 가을호 ------------ 황유원 / 1982년 울산 출생. 2013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세상의 모든 최대화』.
사과의 심장 (외 2편) 최춘희 붉은가슴울새 깃털을 모아 바닷가 절벽 위에 세상에 단 하나뿐인 둥지를 만들고 싶어 죽을 만큼 아프거나 견딜 만큼 아프거나 일 년 삼백육십오 일 아프다는 너를 위한 조그만 호스피스 병동 짓고 싶어 벌레들이 파먹어 썩어 문드러진 사과의 심장 피돌기가 막힌 그곳에 잘 벼린 칼 하나 찔러 넣고 싶다고 너는 말하지 소금밭을 기어가는 민달팽이 쓰린 살갗을 뚫고 핏빛 양귀비꽃 피어나듯 환하게 통증이 순간 사라질지도 몰라 거짓으로 옥죄여 온 욕망의 사슬 단칼에 끊어내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환생할지도 모르지 저 먼 우주에서 억겁의 시간을 건너뛰어 나를 건너가는 너를 만나 통정하고 싶은 봄밤 목련 뚝뚝 떨어지고 허공에 매달린 검은 별들 결가부좌를 풀었다 봄밤 밤의 천변 지나가는데 물가에서 뒤척이는 새소리 걷던 걸음 멈추고 귀를 세워본다 산책로 길을 따라 촘촘히 박혀 있는 키 작은 회양목 사이 영산홍 붉은 꽃빛 소식 끊어진 지 오래인 옛사랑 같다 인도인들은 코끼리를 숭배하고 페루 사람들은 흰 라마를 아프리카의 어느 종족은 검은 양과 검은 송아지를 숭배한다고 한다 나는 그 시절 무엇을 갈망했을까 내 숭배의 대상은 그 하고많은 세상의 좋은 것들 다 버려두고 시베리아 설원의 자작나무 같은 당신이었지 자작나무 닮은 아이를 낳고 싶었지만 일찍 피었던 봄꽃 떨어지고 빈 가지에 꽃술만 남아 지나가는 바람에게 입술을 빌려준다 두 눈 친친 동여맨 사랑을 찾아 나는 오늘 밤 마른 물고기를 타고 진흙별에까지* 다녀오고 싶다 ⸺⸺⸺⸺⸺⸺ * 장석남의 시 「추억에서의 헤매임」에서 인용. 어느 날 문득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 낯설다 익숙한 모든 것이 처음 본 순간으로 다가와 말을 건네고 그 자리를 지키던 익숙한 당신이 무섭고 불편하다 당연한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 인간은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 스스로 괴로워하는 존재라고 말한 이도 있지만 쓸데없는 일이 스스로를 증명하고 존재하게 한다는 걸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치명적 오류임을 길 없는 길이 길을 만들고 모든 길은 첫걸음부터 시작되는 것 익숙한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다 늪처럼 고여서 썩어가는 일상으로부터 익숙한 모든 것들이 나를 배반하고 미친 듯이 봄꽃들 피었다 진다 당신이 만든 완벽한 알리바이가 무너지는 봄날이 무섭다 무너진 폐가에 서있는 붉은 꽃나무 꽃나무 아래 서있는 당신이 난생 처음 본 사람처럼 낯설다 무수한 생각들 꽃으로 피어나 나를 삼키고 간절함이 쓸쓸한 꽃으로 지고 있다 익숙한 풍경이 너무나 익숙해서 낯설다 ⸺시집 『초록이 아프다고 말했다』 (2018.9)에서 ------------ 최춘희 / 1956년 경남 마산 출생.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0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세상 어디선가 다이얼은 돌아가고』『종이꽃』『소리 깊은 집』『늑대의 발톱』『시간 여행자』『초록이 아프다고 말했다』.
돼지로 카드 쓰는 법 임지은 종이 위에 돼지를 올려놓으세요 일요일입니다, 아직 겨울입니다 같은 문장은 돼지에게 좋은 먹이가 됩니다 돼지를 깨우기 위해선 맛있게 인사를 해야 합니다 안녕을 음미할 수 있게 주변의 관계들은 지우세요 이제 돼지가 발을 빼지 않도록 내용물을 찐득하게 만들 차례입니다 다디단 단어들의 향연 제발, 진짜, 너무 같은 부사들은 돼지에게 달라붙어 불에 탄 향기를 냅니다 너에게 좋은 냄새가 날 거야 진흙을 고루 바른 돼지가 종이에 온몸을 문지릅니다 이런! 돼지가 지나간 자리마다 해서는 안 될 말들이 쓰여 있군요 당신이 카드를 열면 광기로 물든 돼지 한 마리가 뛰어다니고 깜짝 놀란 입꼬리는 내려오질 않고 자, 돼지를 사로잡는 법에 성공했습니까? 의심이 많은 생각은 반으로 접히지 않습니다 ⸻계간 《모:든시》 2018년 가을호 ------------ 임지은 / 1980년 대전 출생.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및 같은 과 대학원 졸업. 2015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매일 자는 아이 (외 2편) 하재청 야간 자율학습 시간 그 녀석의 책상을 걷어찼다 아무것도 아닌 줄 알고 한 번 걷어찼을 뿐인데 텅 빈 소리가 오랫동안 밤공기를 가른다 텅 빈 그림자에 피가 얼룩진다 책상에 엎드려 매일 자는 줄 알았는데 깊은 침묵으로 밤마다 피 흘리고 있었구나 하얀 어둠 속에 자신의 그림자 새기며 아스피린처럼 깨어 있는 아이 어둠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는 아이 무심코 한 번 걷어찼을 뿐인데 신음소리도 내지 않고 너무 아픈 소리를 낸다 이제 달과 구름도 새기지 못하는 너, 아무도 오지 않는 자기의 어둠 속을 바라보며 오래 묵은 기억을 부여잡고 있었구나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교실 형광등도 진저리를 치고 있다 사라진 얼굴 바닥을 쓸면서 잊어버렸던 얼굴을 찾았다 포대기 하나 덮어쓰고 사라진 얼굴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온몸에서 눈물을 짜내며 요란하게 울던 그를 이제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늘 거기에 있었다 담았던 바람을 다 쏟아내는 날 새로 바람을 온몸에 담기 위해 검은 자루 속으로 사라졌을 따름이다 그는 지금 바람을 몸에 담고 있는 중이다 거리를 활보하는 바람을 담으며 새로운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람을 몸에 담아 힘껏 짜내면 눈물이 난다 한 번 힘차게 울기 위해서 그는 오늘도 바람을 모으고 있다 울음이 다 빠져나간 포대자루 하나 허공에 펄럭인다 참 이상한 일이지, 잘못 배달된 것인가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누가 나를 여기에 두고 떠났는지 모르겠다 그 자리 그 자리에 가 보았네 움푹 패여 이끼 낀 고사목 비늘이 비늘을 벗겨내면서 아직도 늙어가고 있었네 그 한가운데 늙은 뱀 한 마리 아홉 겹 미로를 만들고 있었네 자신이 만든 미로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 백태 낀 생채기 붉은 낙엽이 쌓여 삭고 있는 그 오래된 우물 속에 내 푸른 입술도 썩고 있었네 ⸺시집 『사라진 얼굴』 (2018. 10)에서 ------------ 하재청 / 경남 창녕 출생. 계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4년 《시와 사상》으로 등단. 2018년 진주제일여고 교사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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