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에는 “사대부 노태현 등 30여 명이 선인들의 훌륭한 행적이 사라지는 것을 염려하여
매년 춘삼월과 가을 구월에 모여 시를 읊으며 옛 사람의 유풍을 추모하고자 일종의 계(契)를 조직하였다.
또한 장차 비를 세워 그들의 행적을 기록하여 후세에도 그 뜻을 기리고자 하였다.
이번에 남쪽으로 섬진강 따라 유람하다가 이 대(臺) 앞에 이르러 근처에
이세립(李世立) 공이 바위 벽면에 모한대 세 글자를 크게 새겨놓은 것을 보았는데 사적을 기록한 비는 없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자료들을 정리하여 앙모의 정을 금할 수 없어 애오라지 몇 마디 소감을 적고 돌아간다”고 적혀 있다.
바위에 이세립이 한유한의 절개를 흠모하여 크게 새긴 모한대(慕韓臺)가 있고,
좌측에 세로로 송남 이세립 (松南 李世立)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넣었다.
모한대(慕韓臺) 글자 위에 바로 그 한유한이 새긴
취적대(取適臺)가 오랜 세월에 마모가 되어 알아보기가 힘들다.
[]송남 이세립(松南 李世立)]
정조(正祖) 14년(1790) 경술(庚戌)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을 했다.
악양의 부호였던 그는 한유한 선생을 사모하여 이 바위에 모한대(慕韓臺) 석각을 새겼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청학이골은 산죽으로 우거졌으며 최근엔 산꾼들의 발길도 뜸하기에
강우도 예보됨에 차량으로 원강사지와 활공장으로 하자는 의견의 일치를 하여 선불선원을 둘러봤다
‘세계일화(世界一花)’란 세계는 한 송이 꽃이란 말로서 <화엄경>에 나오는 말이다.
글귀가 하도 좋으니 여기저기 사찰의 주련이나 전각의 편액으로 많이 쓰인다.
원래 ‘세계일화(世界一花)’ 단어는
당(唐)나라시대 시인 왕유(王維)가 쓴 ‘육조혜능선사비명(六祖慧能禪師碑銘)’ 속에 나오는
‘세계일화 조종육엽(世界一花 祖宗六葉)’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세계는 하나의 꽃이며 조사의 종풍은 여섯 잎이라는 의미로
초조 달마에서 육조 혜능까지 내려온 중국 선종(禪宗)의 전등(傳燈)을 절묘하게 표현한 말이다.
우리나라 근세에 이 ‘세계일화’라는 말을 세상에 널리 알린 장본인은 만공(滿空, 1871~1946) 선사이다.
선사는 일제 강점기에 무학(無學) 대사가 달을 보고 견성한
서산 간월도에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해 조국독립을 발원하며 천일기도를 올렸다.
훗날 덕숭총림(德崇叢林) 수덕사(修德寺) 방장이 되신 만공 스님의 마지막 제자 원담(圓潭) 스님이 말하기를,
“만공 선사가 천일기도를 회향한 지 사흘 만에 조국은 해방을 맞이했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고 조국이 해방됐다는 소식을 만공 선사는 다음날인 16일에야 들었다.
신자로부터 그 소식을 듣고 길가에 핀 무궁화 꽃잎을 따다가 거기에 먹을 갈아 그 꽃잎에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네 글자를 쓰고 낙관(落款) 대신 근화필(槿花筆)이라고 썼다.
그리고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멋진 법문을 남겼다.
“세계는 한 송이 꽃.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
어리석은 자들은 온 세상이 한 송이 꽃인 줄 모르고 있어.
그래서 너와 나를 구분하고, 내 것과 네 것을 분별하고, 적과 동지를 구별해 다투고 빼앗고 죽이고 있다.
허나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라.
풀이 있어야 짐승이 있고, 네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네가 있는 법,
남편이 있어야 아내가 있고, 아내가 있어야 남편이 있고,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있고, 자식이 있어야 부모가 있는 법.
남편과 아내도 한 송이 꽃이요, 부모와 자식도 한 송이 꽃.
이 세상 모든 것은 한 송이 꽃이라는 이 생각 한 가지를 바로 지니게 되면 세상은 편할 것이요,
세상은 한 송이 꽃이 아니라고 그릇되게 생각하면
세상은 늘 시비하고 다투고 피 흘리고 빼앗아 죽이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참 뜻을 펴려면,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참새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심지어 저 미웠던 원수들마저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요.
다른 교를 믿는 사람들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니, 그리하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엔 의미심장하게
“한국이 이제 독립했으니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셨다고 한다.
그리하여 ‘세계일화(世界一花)’ 편액이 수덕사 금당에도 걸려 있다.
과거 이곳 원강사 터에서 살다가 내려왔다는 부춘 마을의 83세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 약 10여 년 전에 부산의 스님이 내 집이 있던 자리에 공부한다고 와서 토굴을 지었는데 바로 그 자리가 원강사 터이다.
원강사가 고려시대 때 엄청 큰 절이었다고 들었다.
12 가구가 그곳에 정착해 오래동안 살았기 때문에 현재 기와장 흔적이 남아 있을 리는 없고,
100여 년 전 선친이 처음 이곳에서 살 때 땅에서 녹물이 계속 흘러나와
이상히 여겨 파보니 어른이 안에 들어가 누워도 손발이 둘레에 닿지 않을 정도로 큰 무쇠솥이 세 개 나왔는데
그 속에 불상 등 온갖 불구들이 들어 있었고 관청에 신고하니 일본 사람이 와서 모두 가져갔다."(펌)
조선시대 유생들의 유산기 등을 포함한 문헌기록에 '원강사'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어
문헌상으로 그 위치에 대한 추정은 어려운 실정인데 아마도 이는 원강사가 고려시대의 사찰로서
일찍 폐사되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고 추정한다
하지만 부춘골 상부 지역이 원강골(현지인들은 원갱이골)로 불리고 원강재가 있다는 점 등,
현지인들에게 구전되어오는 내용이 문헌만큼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는 사실이 있다.(펌)
원강사 터에 대한 단서 세 가지는
1. 원강사 터에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자리에 과거 스님 토굴이 있다
2. 연꽃문양의 주춧돌이 있다
3. 기왓장이 흩어져 있는 축대가 있다.(펌)
원강사지에서 출토된 '청동정병(靑銅淨甁, 부처 앞에 정수를 올리는 공양구)과
'청동범종(靑銅梵鐘)'은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립 진주박물관의 '원강사지'에 대한 안내 글]
형제봉의 서남쪽에 있던 절터로
지금의 화개인 부춘리 일대이다.
금당지와 더불어 주변 부속 건물지와
우물터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