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 自序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하, 반야심경]을성문聲聞하고, 필사 筆寫하면서,증득 證得한 것은 연각 緣覺이다보살 菩薩의 염念을 보내 주심에경배 敬拜드린다반야심경 시 詩로늘어 놓으니 조그마한 조력이라도되었음 할 뿐이다2024 원단에창덕합장
반야시(般若詩)천영필 시인이 수년에 걸쳐 불교에 경도되면서 대표적인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반야심경』에 심취한 것으로 보인다. 반야심경은 방대한 불교의 경전을 짧게 요약해 놓은 경전인데, 그 핵심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할 수 있다.나는 불교의 문외한이지만 내 나름으로 풀이를 해 보자면 “우리의 감각으로 인식되는 수많은 현상들은 장차 스러져 소멸하고 말 것이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지금 우리 앞에 텅 비어 있는 공간도 장차 무엇이 생겨나 채울지 모르니 비었다고 이를 것이 못 된다.” 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말로는 쉬울지 모르지만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현상적인 실상을 부정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지난(至難)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천영필 시인은 이 『반야심경』에 경도되어 수년 동안 많은 자료들을 모으고 깊이 고구하면서 자신의 소회를 시(詩)에 담는 작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천 시인의 이러한 불교적 성향의 시에 ‘반야시(般若詩)’라는 이름을 달기로 했다. ‘반야(般若)’는 만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고 불법을 꿰뚫는 지혜를 이름이니 앞으로 그의 반야시에 대한 기대가 적지 않다. 독특한 시의 한 경지를 개척해 나아가기를 기원해 마지않는다. 나무 관세음보살 임보 합장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천영필
세상의 모든 것은지금 바로 이 순간에 존재한다.
살아 있다는 것도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생명이 숨 쉬고 있음을 말한다.
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든몸 바깥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든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경험들은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일어나는 것이다.
좀 더 확실하게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고,불안과 공포 또는 우울과 같은정서적 어려움에 대해보다 효과적으로 대처해 나가며,풍요한 삶의 아름다움과 행복감을맛보며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바로 지금 바로 여기’라는 이 순간에보다 튼튼하게 발을 디딘 채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주의를 집중하여이 순간 속에밀착감을 가지고살아가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어려운 일이긴 하지만흥미진진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집중하여 주의하지 못하고
시간의 흐름에 무의미하게 편승해살아가는 삶에 타성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충실하게 경험하고 살아가는 것을배운다는 것은참으로 고귀한 삶의 경험이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자등명>
천영필
불교에서는
인간 행위의 의지 처로서의 법을
세우기도 한다.
석가모니의 최후 설법 가운데에는
“자기 자신 말고는
어느 누구도 아닌,
오직 자기에게 의지하라.
법에 의지하라.
자기를 등불로 삼아라.
법을 등불로 삼아라.”
라는 말이 있다.
즉 인간이 자신의 이법(理法)을
실천하는 곳에
참다운 자기가 구현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도솔삼관(兜率三關) - 도솔 종열 화상 화두
자비,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하는 유일한 방법
갓등과 연료, 인연 다하면 등불이 그냥 사라지듯이, 육신이 사대로 흩어지면 우리 또한 그냥 사라질 뿐, 자비의 수고로움을 감당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삶과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도솔(兜率) 종열(從悅) 화상(1044~1091) 은
세 가지 관문을 설치해서 배우려는 사람에게 물었다.
“깨달은 사람을 찾아 수행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불성을 보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대의 불성은 어디에 있는가?
자신의 불성을 알았다면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어떻게 그대는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하겠는가?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다면
바로 가는 곳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육신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가 흩어질 때,
그대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제1관문 탐구
등불을 켜 들고 있는 사람을
찾아간 것은 그가 들고 있는 불로
자신을 되돌아보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몸이 등갓이자 원료라는 사실을,
그리고 마음이 그 것들로 켜지는 등불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불성을 본 겁니다.
한 마디로 견성(見性)한 것이지요.
이럴 때 자신의 불성에
불을 밝히는 순간,
우리는 자신도 스승과 마찬가지로 자신과 세상을 비추는 당당한 등불이 됩니다.
마침내 우리는 부처가 된 거죠.
정말 부처가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종열 스님은 물어봅니다
.“그대의 불성은 어디에 있는가?”
자신에게도 있다고 해도 되고,
세상에 있다고 해도 됩니다.
등불이 켜지는 순간, 그 불은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도 모두 환하게 밝히니까 말입니다.
제2관문 탐구
등불은 세상을 비추는 도구입니다. 그것은 얼마나 힘든 삶인가요. 자신을 모두 소진해서 세상을 밝히는 일이니까요.
자신을 비추고 남을 비추는 자비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은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비의 삶이 얼마나 수고스러운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것,
제자를 깨달음에 이끄는 것, 어느 하나 힘들지 않은 일은 없으니까요. 결국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에게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안식(安息)으로 다가오는 법이지요. 그러니 정말로 죽음에 이르렀을 때, 깨달은 사람은 희미한 미소를 보이거나 박장대소하게 되는 겁니다. 불교에서 열반(涅槃, Nirvāṇa)이 깨달음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죽음을 의미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제3관문탐구
세상을 비추던 등불이 꺼지는 순간, 등불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어디로도 가지 않습니다. 그냥 그대로 꺼질 뿐입니다.
갓등이 헤어져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견디지 못하고 꺼진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연료가 다 떨어져 꺼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을 환하게 비추던 그 등불은 어디에도 가지 않습니다. 그냥 꺼질 뿐입니다. 갓등이나 연료 사이의 인연이 다하는 순간, 등불도 사라집니다. 이런 연기(緣起)의 법칙을 모르는 사람들은 종열 스님의 마지막 질문에 우물쭈물하게 될 겁니다.
地水火風,
불교에서 사대(四大, Catvāri mahābhūtāni)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이 네 가지 요소가 인연에 의해 결합되어 지속할 때,
우리의 삶도 그리고 우리의 정신도 있는 겁니다.
반면 이 네 가지 요소들이 인연이 다해 흩어질 때,
우리의 삶도 그리고 정신도 사라지는 겁니다. 마치 겨울 내내 꽁꽁 얼어있던 얼음도 날씨가 풀리면 녹아서 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고 얼음이 어디론가 갔다고 슬퍼하지는 마세요. 천국으로 간 것도 아니고 지옥으로 간 것도 아닙니다. 그저 풀려서 사라진 거니까요
오취온
천영필
부처[觀自在菩薩]는
나라고 여길 만한
다섯 덩어리오온(五蘊)이
다 비어 있[空]으며
환(幻)이고 자성이 없다고
자신 스스로 관찰할[觀自在] 때
일체고액에서 해방 된다
중생은 오취온 하에 묶여*
오온에 집착하면서
윤회전생에 빠진다
五蘊을 **五取蘊이라고 한 것은
붓다의 혁명적인 발견이다.
괴로움을 극복하고 싶다,
해탈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五蘊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윤회전생을 벗고 구경열반에 든다
*오온, 나라고 여기는 다섯 덩어리. 색수상행식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은 모두 공한 것이므로 집착을 버리면 해탈이다 **五蘊은 집착할 가치가 없는 無常(무상)인 것이다. 순간순간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타인 탓으로 돌리는 것은 기분이 좋은 것이다. 불교는 이 상태를 무명(무지)이라고 말한다.‘無明(무명)에 의해서 괴로운 것이다. 마음이 오염된 것이다.’라는 것이 불교의 이야기이다. 無常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五蘊에 집착한다. 그래서 마음이 오염되고, 번뇌가 나타나고, 괴로움이 계속한다. 죽음을 맞이하고도 하고 싶은 일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아직 죽고 싶지 않으므로, 좀 더 살고 싶으므로(行取蘊) 다시 어딘가에 태어나게 된다. 또 다시 五蘊에 집착해서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이것을 輪廻(윤회)轉生(전생)이라 한다. 輪廻轉生의 원인은 五蘊에 집착하는 것
[五取蘊]이다. 집착하고 있다고 해도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라고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 인간이 천국, 영원의 낙원, 극락정토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천계, 영원의 낙원 등의
개념(想)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신에 대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불완전하고, 아무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이며, 또한 괴로움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특색이 아무것도 없는 전지전능한 神을 망상한다. 그 개념(상온)에 집착하는 것을 ‘사랑(愛)’이라고 말한다. 神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남을 사랑하기란 어렵다. 연인이나 애완동물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뿐이다.
想蘊(상온)이다. 그 즐거운 추억을 계속 하고 싶은 것 (行蘊)이다.
그 결과 다시 마음에 애착이 생겨난다.
그것을 남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자신의 생각(想)에 애착하는 새로운 생각(想)이 더해졌을 뿐이다.
해탈문, 空
천영필
12연기법에서 뭘 박살내야만
해탈(탈윤회전생)할 수 있을까요?
바로 무명입니다.
무명을 박살내야 행이 사라지고
나머지 것들도 사라지게 됩니다.
무명이란 존재를 포함한 만물의 존재방식을
모르는 것이며,
그 존재방식을 설명한 것이
바로 연기법이고,
연기법이란 인과 연이 서로 상호의존해서
법이 생김으로써
그 법에는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서
空한 것이니
그 空을 알지 못하는 게
바로 무지/어리석음입니다.
그러므로 무명을 박살내야 합니다.
그 무명을 박살내는 게
바로 *空입니다.
그러므로 空함을 아는 것이 지혜..
즉 반야이며 통찰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이고
소승이고 할 것 없이
空이 곧 해탈문 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공성(空性) 공 그 자체.
공의 진리. 공의 자성. 부정성. 상대성.
부따구햐의 풀이에 따르면
소취ㆍ능취의 자성이 없어
허공과 같음을 이른다.
출처:
https://studybuddha.tistory.com/entry/공성
환멸문 ( 還滅門 )
천영필
*연기를 역관으로 관찰하신 부처님
無자 통찰의 지혜
연기를 끊어
해탈에 이르는
환멸문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음/죽음도 없으며,
또한 늙음/죽음이 다하는 것도 없다.
12연기법의 역관으로 수행[참구]하여
중생들의 고통은
제① 원인인
'무명(無明)'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무지(無智)가 없는 곳
[① ~ ⑫의 모든 실체를 아는_明]에서는
업력과 인상도 있을 수 없으니,
윤회고(輪廻苦)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즉, 해탈에 이르는
해탈문이 환멸문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역관(逆觀):
⑫노사(老死)에서 출발 →
①무명(無明)의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으로
추리적 사색의 방향이며,
수행(참구)의 방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이연기설의 '역관(逆觀)'의 내용은,
석존이 스스로 깨달아 가신 내용,
즉'직관순수자증내용
(直觀純粹自證內容)의
방법(방향)이라 할 것입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참구하기를)_
⑫ 죽음이란 무엇인가 ? -!- 태어났기 때문에 '노·병·사'를
하게되는 것이다._
⑪ 태어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 -!-
무언가 태어나고자 하는
힘(의지)가 있어서 태어나는 것이다._
⑩ 그 의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 -!-
그 어떤 집착에서 생기는 것이다._
⑨ 이 집착은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 -!-
이러한 집착은 대상에 대한 갈
애가 있기 때문이다._
⑧ 그러면 갈애는 왜 일어 나는가 ? -!-
축척된 경험에서 일어난다._
⑦ 이러한 경험은 왜, 어떻게 가능 한가 ? -!-
감각적 경험은 대상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은 감각기관과
대상의 접촉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_
⑥ 접촉이란 ? 또 어떻게 일어나는가 ? -!-
접촉은 대상에 대한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 (육근)과 이에 뒤따르는 마음
(내적 감각기관: 육처)에
의해 일어난다._
⑤ 그러면 이러한 것들은 또 어디에
의존하여 일어나는가 ? -!- 태내의 심적(정신적),
육체적 유기체에 의존한다._
④ 그러면 이것들은 또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 -!- 모태적 유기체는
이전의 그 어떤 원초적인 의식으로부터 일어난다._
③ 이러한 원초적 의식은 어떻게 생겼는가 ? -!- 원초적 의식은,
과거 경험의 잔재(果)로 생겨난 것이다._
② 이것은 -!- 업력(行: 축척되고 집착된)에
기인한다. 그리고 -!-
_① 이것들은 -!- 무명(무지)에서
출발한 것이다. 라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법칙을 확철히 깨달으신 것입니다.
위 ①~⑫까지를 다르게
(공부입장에서 이해를 위해 풀어서)
보면_<과거생에 관련>: ① 무명 · ② 행_
<현재생에 관련>: ③ 식 · ④ 명색 ·
⑤ 육처 · ⑥ 촉 · ⑦ 수 · ⑧ 애 · ⑨ 취 · ⑩ 유
_<내來생에 관련>: ⑪ 생 · ⑫ 노사 _의
내용으로 풀이(이해) 할 수 있다.
※즉, 우리 중생들의 고통은
제① 원인인 '무명(無明)'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무지(無智)가 없는 곳[① ~ ⑫의
모든 실체를 아는_明]에서는
업력과 인상도 있을 수 없으니,
윤회고(輪廻苦)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삼법인(三法印) 등의
모든 가르침은
이 연기설(12연기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됩니다.
따라서 연기(緣起)의 도리(道理)를
바르게 알아
지혜의 세계가 열리면
여래(진리: 明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석존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삼계(三界)에 있는 것은
오직 일심(一心) 뿐인데,
여래가 이것을 분별하여
열 두가지 라 하였으나,
모두 一心에 의지하여
이렇게 세운 것이다."
-<十地品. 第6現前地> 연기(緣起)의 설명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진리란 개념적으로 이해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
현실 속 진리(相依相關性)에 들어가
진리의 한 부분이 되어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열반이나 해탈의 의미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여시아문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라자그리하 칼란다카 대나무 동산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인연법(因緣法)과
연생법(緣生法)을 말하리라.
어떤 것을 인연법이라 말하느가.
이른 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것이니,
곧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인연하여 식(識)이 있으며,
식(識)을 인연하여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을 인연하여 육입(六入)이 있고,
육입을 인연하여 닿음(觸)이 있고,
닿음을 인연하여 느김(受)이 있고,
느낌을 인연하여 애착(愛)이 있고,
애착을 인연하여 취함(取)이 있고,
취함을 인연하여 존재(有)가 있고,
존재를 인연하여 태어남(生)이 있고,
태어남을 인연하여 늙음(老) 죽음(死)
그리고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모이는 것이다. 어떤 것을 연생법
[緣生法:인연을 무생(無生)의 입장에서
설한 법]이라 하는가.
이른 바 무명과 행은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거나
세상에 나오시지 않거나
이 법은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머무름이요,
법의 세계로서
그것이 여래가 스스로 깨닫고 알아
올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사람들을 위해
연설하시어 열어 보이시고
나타내어 드날리신 바이니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나아가서는 태어남을 인연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거나
세상에 나오시지 않으시거나,
이 법은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머무름이요,
법의 세계로서
여래가 스스로 깨닫고 알아
올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사람들을 위해 연설하시어
열어 보이시고 나타내어
드날리시는 바이니,
'태어남을 인연하기 때문에
늙음 · 병 · 죽음 · 근심 · 슬픔
· 번민 · 괴로움이 있다'
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법은
법의 머무름(法住) ·
법의 공함(法空) ·
법의 한결 같음(法如) ·
법의 그러함(法爾)이다.
법은 한결 같음(如)을
떠나지 않고
법은 한결같음과
다르지 않으며,
분명하고 진실하여
뒤바뀜이 없이 연기(緣起)를
그대로 따르나니
이것을 연생법이라 한다.
곧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 ·
닿음 · 느낌 · 애착 · 취함 · 존재 ·
남과 늙음 · 병 · 죽음 · 근심 ·
슬픔 · 번민 · 괴로움이니
이것을 연생법 (緣生法)이라 한다.
많이 들은 거룩한 제자는
이 인연법과
연생법을 바르게 알고
잘 보아 과거를 구하여
'내 과거 세상은 있었던가
혹은 없었던가.
내 과거 세상은 어떤 종류였던가.
내 과거 세상은 어떠하였던가'라고
말하지 않고,
미래를 구하여
'내 미래 세상은 있을 것인가.
혹은 없을 것인가.
어떤 종류일까.어떠할까라고 마음으로
의심하지 않으며,이것은 어떤 종류인가.
어떻게 이것이 있는가.장래를 위해
누가 마침내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중생은 어디에서 왔는가.
여기서 사라지면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마음으로 망설이지도 않는다.
만일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범속한 견해를 일으키어
얽매이며,
이른 바 나라는 견해를 말하고
중생이라는 견해를 말하여
얽매이며,
수명(壽命)이라는 견해를 말하여
얽매이며,
꺼리고 싫어하며
즐겁다는 견해를 말하여
얽매이면,
그 때에 거룩한 제자는
그 모든 것을 다 끊고 다 알아,
그 근본을 끊기를
타라나무 줄기를 끊는 것과
같이 하여
미래 세상에 있어서
나지 않는 법(不生法)을 이룬다.
이것을
[많이 들은 거룩한 제자가
인연법과 연생법에 대하여
실답게 바로 알아 잘 보고
잘 깨닫고 잘 들어가는 것]
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 잡아함경 권 12, 인연경(因緣經)
*무명
인간의 괴로움 또는 근본 번뇌를 의미하는 불교교리.
무명은 무지를 뜻하는 것으로,
불교의 여러 경전에서 갖가지
심오한 해설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일체 사물에 대한 도리를
밝게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거나
진리에 대한 무지로 통용되고 있다.
인간 생사의 근원을 밝히는
12연기(緣起)의 첫머리에 나오는
무명은 ‘나’가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요
‘나’를 범부이게끔 하는 근원이며,
모든 번뇌의 근본이요
일체 악업(惡業)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 ≪본업경 本業經≫에서는
“무명은 일체법(一切法)을
밝게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고,
≪대승의장 大乘義章≫에서는
“진리를 요달하지 못하는 것을
무명이라고 한다.
무명은 어리석고 어두운 마음이다.
그 본체에는 지혜도 밝음도 없다.”
고 하였다.
≪구사론≫에서는
“무명의 모습은 사제(四諦)와
삼보(三寶) 및 업(業)의
원인과 결과를 모르는 데 있다.”고 하였으며,
≪유식론 唯識論≫에서는
“무명은 모든 사물과 이치에 대하여
미혹되고 어리석은 것을 본성으로 삼고,
능히 지혜를 결박하여
일체를 잡되고 물들게 하는 것으로서
그 업을 삼는다.” 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채택하고 있는 것은
≪기신론 起信論≫에서의
무명에 대한 해설이다.
≪기신론≫에서는
무명을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법계(法界)의 참 이치에 어둡게 된
최초의 한 생각을
근본 무명(根本無明)이라 하고,
그 근본 무명으로 말미암아
가늘게 또는 거칠게 일어나는
모든 허망한 생각들을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고 하였다.
무명은
불교의 기본 교리로서
불교가 여러 부파(部派)로 나누어진 뒤에도
인간의 괴로움을 설명하는
근본 교설로 채택되었고,
2종 무명·
5종 무명·
15종 무명 등으로
무명을 세분하여 해석하였다.
그러나 석가모니 당시부터
무명은 원래 실체가 없는 것으로
설명되었고,
선종에서는 독자적인 개체로서가 아니라
세계의 본성을 뜻하는
법성(法性)과의 일체로 파악되었다.
무명 법성 일체설 에서 볼 때
법성과 무명은
마치 얼음과 물의 관계와 같다.
무명이라는 얼음의 본성은 원래가 물이다.
얼음이라고 하지만
물의 성품을 벗어 버리지 못한다.
사람의 심성은 본래 얼음이 아니나
법성의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된 것일 뿐,
어느덧 홀연히 생겨난 무명은
곧 근본 깨달음인
본각(本覺)의 법성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무명법성일체설은
우리 나라 선종에서도
뿌리를 내려 무심선(無心禪)을
정립하기에 이르렀고,
번뇌와 고통을 피하려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생활하라는
실천적 규범을 낳기도 하였다.
신라의 원효(元曉)는
≪대승기신론소≫에서
일심(一心)을 설명하면서,
일심 이외에 별다른 법이 없으나
무명으로 말미암아 일심을 미하게 되어
갖가지 번뇌를 일으키고
육도(六道)를 윤회하게 된다고 하였다.
원효는 이 무명을
잠재적인 충동력이라고 보았다.
곧 이 충동력 때문에
어리석은 마음이 동요하게 되지만,
무명 자체는 아직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라고 하였다.
즉, 무명은 일심을 동요하게 하는
원초적인 힘으로 파악하였고,
이 무명의 충동력이
계속해서 일심의 바다에
물결을 일으키게 될 때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무명은
모든 고통스러운 결과의
가장 원초적인 원인이 되며,
이 무명을 없앨 때
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참고문헌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원효)
『원효사상』-세계관-(이기영, 홍법원, 1967)
집필자 김선근"
*아함경/니까야/청정도론에서도
명확하게 나와 있듯이
해탈의 문이
바로 空입니다.
空 그 자체에는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다하는 것도 역시 없기 때문에,
이 空은 모든 것을 벗어난 해탈의 문인 것이죠.
하지만 중생은 반대로 해탈을 해석합니다.
뭔 실체가 있어서
그게 영원한 기쁨인 해탈을 얻는다.....
라고여기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은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완전히 거꾸로 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세속의 종교나 철학이나,
세속의 도 닦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천영필
손바닥이 마주 쳐야 박수가 되듯
혼자로서는 짝소리를 내지 못한다
인연생기로 완성되고 흘러가는 것이다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항상 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는다.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능히 이 인연을 말해서
모든 희론을 없애니
모든 설법자 중 제일이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드립니다.”
(不生 亦不滅 不常 亦不斷 不一 亦
不異 不來 亦不去 能說是因緣
善滅諸戱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오온개공
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따라서 제법이 공하니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도 없고
더럽혀지는 것도 깨끗해지는 것도 없고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 또한 없다
나라고 할 만 한 다섯 덩어리 오온도 없고
내 몸이랄 것도 내 감각이랄 만한
**육입도 육처도 없으니
연기에 들지 않으면 해탈이다
ㅎ ㅎㅎ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불교사상 가운데, 언어를 가장 비판하면서도언어를 잘 활용해 깨달음에 이르게 한 학파(종파)가 중국의 선[선종]과 인도의 중관사상[불교]이다.
선과 중관에서 언어의 기능은 이중적이다.
선과 중관에 의하면 언어를 통해 깨달음[열반]을 획득할 수도 있고,
고통[윤회]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하여 개념을 형성하며
모든 판단을 한다.
한 마디로 인간은 언어를 통해 일체를 분별하는 것이다.
인간은 분별을 통해 옳고 그름을 따지며
좋고 나쁨을 구별하고
아름다움과 추함을 논하는 등
일체의 사유 판단을 한다.
선과 중관에서는 이러한 일체의 사유 판단, 즉 분별을 모든 고통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분별하는 마음 [분별심]을 여윌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는 분별심의 주체가 언어라면,
고통의 뿌리가 되는 언어를 제거해야 한다. 다시 말해 모든 괴로움을 소멸시킨 열반,
즉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분별심을 조장하는 언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이다.
이 글은 이와 같은 언어의 이중성을 철저하게 파악하였던
선과 중관에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언어를
어떻게 방편적으로 활용하는지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선과 중관은 언어를 깨달음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방편으로 활용하지만,
그 방법은 서로 다르다.
선과 중관 모두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는 언어(개념, 분별심)의 해체를 목표로 하지만,
중관은 사구부정(四句否定)과
희론적멸(戱論寂滅),
그리고 선은 선문답(禪問答)과
언어도단(言語道斷)을 통해
언어를 해체함으로써
분별심을 타파한다.
중관의 사구부정은
인간이 논할 수 있는
사유의 모든 형식체계를
네 가지 범주(catuṣkoṭi)로 나누어,
이 모두가 성립할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무분별지를 획득하고자 하는 체계이다.
그 결과 대립과 분별을 초월함으로써
공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른바 희론적멸로써
열반적정을 성취하는 것이다.
선불교는 언어를 사용하여
언어의 길을 끊어버림으로써 분
별의식을 끊고, 분별의식이 끊어짐으로써
본래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도단은 언어로부터의 해탈이며,
언어로부터의 해탈은
분별의식 혹은 관념[개념]으로부터의
해탈이다.
선과 중관에서 언어의 기능은
고통(윤회)과 깨달음(열반)의 두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언어의 최고 기능과 한계를 끝까지
몰아 부친 그 결과
선과 중관은 인간의 모든 고통과 평안의 근거가 언어에 있음을 간파하여
언어의 역기능을 제거하고
순기능을 최대한 살리고자 하였다.
따라서 선과 중관의 수행은
신체적인 측면보다는 인
식론적 전환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선과 중관에서의 깨달음이란 언어를 통해 인식론적인 비약 또는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선(禪)이고 공(空)이다.
Among Buddhist ideologies, the schools that criticize language the most anduse language to lead to enlightenment are the Chinese Zen and the Indian Mādhyamika. Language has dualfunctions Zen and Mādhyamika. You either attain enlightenment through language or fall into the abyss of pain[samsara].Humans form concepts and makeall judgments through Language. In a word, humans identify everythingthrough language. Men make all kindsof judgments, such as right and wrong,by distinguishing between good and bad,and by discussing beauty and ugly things. Humans form concepts and make all judgments through language. The Zen and Mādhyamika use language as an indispensable means of enlightenment, but the methods are different. Both Zen and Mādhyamika aim to dismantle the language(concept, discernment) that is the cause of all suffering. By Mādhyamika breaks through discrimination by deconstructing language through catuṣkoṭi and extinction of prapañca, and Zen through Zen's question and answer and unspeakable. The catuṣkoṭi negation of Mādhyamika divides all the formal systems of human arguable into four categories, and attempts to attain enlightenment by denying them all. As a result, Śūnyatā is obtained by transcending
opposition and discrimination. To achieve so-called Nirvana by the extinction of prapañca. Zen Buddhism uses language to cut off the path
of language, thereby breaking the consciousness
of discernment, and seeing the original mind by breaking the consciousness of discernment. Therefore, unspeakable is liberation from language,
and liberation from language is liberation
from discernment or idea [concept].In Zen and Mādhyamika, the function of language
has both aspects: suffering (reincarnation) and
enlightenment (nirvana). As a result of pushing the highest
function and limit of language to the end, Zen and Mādhyamika understood that the basis of all human suffering and peace lies in language, so they tried to eliminate
the dysfunction of language and maximize its good function.
Therefore, in the practice of Zen and Mādhyamika, the epistemological transformation is more important than
the physical aspect. In that sense, enlightenment in Zen and Mādhyamika
means an epistemologicalleap or experience through language.That is Zen and Śūnya.
공한 본질의 이치에서
일어나는 연기현상이 있을 때
이는 가(假)가 된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임시로 있는 거짓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공(空)과 가(假)가 서로 분리되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기하면서 공한 것이고
공하면서 연기하는 것이므로
공이 곧 가고
가가 곧 공이 되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색불이공 (色不異空) 공불이색 (空不異色)이란 말처럼
공이 가이고 가가 공이면서
더 나아가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면서
공이고 가인 것을 중도(中道)라 하는 것이다. 또 중도에 의해서 보면 삼제(三諦)가 원융하다는 삼제원융설이 나오기도 했다.
용수는 먼저 <중론> 초품에서
팔불중도(八不中道)를 말한다.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항상 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는다.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능히 이 인연을 말해서모든 희론을 없애니 모든 설법자 중 제일이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드립니다.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去 能說是因緣善滅諸戱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여덟 가지 부정(八不)을 통해 그릇된 유(有)의 견해를 척파한 이 말은
<중론>의 근본 대의라 할 수 있는 내용이다.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이근(耳根)+이식(耳識)이 이처(耳處)이고,
비근+비식이 비처이고,
설근+설식이 설처이고,
신근+신식이 신처이고,
의근+의식이 의처였습니다.
기능이 파괴된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은 육입의 ‘처(處)’를 구성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거나 감촉하거나 법을 인식하는 것은 대상을 감각하는 것이므로, 감각하려면 주관과 객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안이비설신의’는 감각주관이 되어 육내입처라 하고,
‘색성향미촉법’은 객관이 되어 육외입처라고 했습니다.
결국 육입이 있다(일어났다)는 것은
‘안이비설신의’로 ‘색성향미촉법’을 감각했다는 말과 통했습니다.
그러면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라는 출산된 식(識)이 일어나고,
‘안처+색처+안식’이 화합하면 (눈으로 색을 보면 이 셋이 동시에 일어남)촉(觸)이라 했습니다.
두 번째 독화살을
맞지 마라
천영필
*고통에서 벗어나라
아무 생각 말고 벗어라'
나는 왜 이리 고통스러울까' 하면서,
'고통'에 다시 '고통'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석가모니는'두 번째 독화살'이라고 비유했다.
예를 들면,
12연기를 통해서
'지식과 욕망이 생성되고 사라지는 원리'를
이해 [覺] 한다면,
'삶이 고통스럽다고
진리를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
즉, '명확한 진리를 찾아다니 것'이
또 다른 고통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통찰했기 때문에
'두 번째 독화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 불교 이야기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고타마 붓다는 이 현실세계는 모두 고(苦)라고 하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의 현실인식에서 출발하여, 고(苦)의 원인이 인간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자기모순에 있다고 하였다. 일체개고의 현실인식은 현실 또는 존재(existence)그 자체에 고(苦)라고 하는 고정된 성질 또는 실체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며또한 고(苦)의 원인이 현실 또는 존재 그 자체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즉,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시시각각 흘러가고 변화하고 있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없는데(제행무상)인간은 항상 불변을 바라고, 또 모든 것은 무엇 하나 고정적 실체인 것은 없는데도(제법무아) 그것을 실체라고 고집하려 하는 데 에고(苦)의 원인이 있다고 고타마 붓다는 말하였다. 따라서 올바른 지혜(반야 · 보리)를 통해서, 이러한 자기모순에 빠진자기 자신을 반성하며 욕망을 버리고 집착에서 벗어날 때야말로 아무것에도 어지럽혀지지 않은 이상적인 涅槃寂靜의 경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바로 삼법인 또는 사법인이라는 교의 속에서 나타나는
불교의 기본적 입장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일체개고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무애자재의 지혜로
구경열반천영필수많은 학문도, 언어 수사도,종교적 지식 틀에도걸림이 없는 자유자재 하는 삶,평상심 만이 바로 지금 여기서
열반에 이른다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반야심경에서는무애자재의 인물로관자재보살을 등장시켜서,무애자재에 이르는 길을다음과 같이 설명한다.도일체고액“걸림 없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조견오온개공우리의 몸과 정신작용이공(空)한 것임을 밝혀야 한다.시제법공상 불생불멸공의 이치를 터득하면죽음에 대한 공포도 사라지고,불구부정삶에 대한 우아함과 추함의 분별도 사라지며,불증불감재산 등의 많고 적음에 개의치 않게 된다.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뿐만 아니라 수많은 학문과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종교적 지식의 틀에도 매이지 않게 되고,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늘 깨어 있어 자유로울 수 있다.고심무가애 무가애이 지혜의 경지가 되면 마음에는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두려움도 없으며, 눈앞의 경계를거꾸로 잘못 판단할 일도 없어서,구경열반마침내 항상 평화로[평상심] 울 수 있게 된다.”무애자재는이론과 현실의 충돌이 전혀 없는 경지이고, 정신적으로는언제나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다.이 무애자재는시작과 과정과 결과가모두 명쾌하고 좋은 상황으로 전개되는최고의 삶이다.송강스님 / 개화사 주지[불교신문 2496호/ 1월28일자]"
부처임을 믿고, 안타까움으로 의심하라
창덕昌德
화두를 든다고 하는데, 여기서든다는 의미는 마음속에 명확하게들어오려 챙기는 것이다.마음속에 들어가 끝까지 살펴라
내 자신이 본래 성불해 있다는 믿음으로
안타까운 마음 내어
철저히 '화두' 의심
화두를 드는데 이세 가지 조건 중 어느 하나만 빠져도
화두에 몰입할 수 없다.
내가 본래 부처님을 확고하게
믿고,거기서 멀어져 있는 나 자신에 대한억울한 마음과 화두에 대한 빈틈없는의심이 있을 때
화두는 저 내면 밑바닥부터사무치게 된다.
노자(도덕경) 1장.도(道)말로 도를 논하면진짜 도가 아니다말로 이름 붙이면진짜 이름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름이 없을 때천지가 시작되었고이름을 붙이니만물의 어머니가 되었다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무명 천지지시 유명 만물지모그러니 본마음이라야그 오묘함을 보게 되고욕심으로 보면그 껍데기만 보게 된다故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고상무욕 이관기묘 상유욕 이관기요오묘함과 껍데기는한 곳에서 나와 이름이 다를 뿐그 한 곳을 현(玄)이라 한다현묘하고 또 현묘한 그곳이모든 오묘함의 문이다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차양자 동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출처: 한글본 노자강의, 손기원 강설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 도라고 해도 항상 같은 상황의 도가 아닌 것이며, 이름이라 하더라도 항상 같은 느낌의 이름일 수가 없는 것이다.2019. 11. 27.
월인천강지곡-보시 ㆍ 효도 ㅡ성불
성불(成佛)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교만심, 재물욕, 색욕 등을 버리게 하여 불법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석가모니의 설법 내용이 서술되었다. 그리고 삽화가 있어 석가모니와 여러 부처가 설법으로 중생을 가난, 죽음, 이산 등의 각종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 모습을 표현하였다. 이어 성불의 방법으로 보시와 효도가 제시되었고, 석가모니가 비록 열반했지만 그의 가르침은 항상 이 세상에 머무르고 있음을 서술하였다. 이와 같이 『월인천강지곡』에서는 불교의 위대함, 불교 교화를 통한 갈등의 해소, 불사의 필요성과 타당성, 도덕적 윤리 등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특히 성불의 방법으로 효행이 매우 강조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Heart Sutra)
觀自在菩薩
行深 般若波羅蜜多 時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Avalokita Bodhisattva]이
오묘한 반야바라밀다
[the Perfection of Wisdom]를
닦으실 때
오온
[He looked down from on high
and saw but five skandhas which,
in their own being, were empty
몸과 마음의 욕망이 모두 비어 있음을 비추어 보시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의 바다를 건너셨느니라.
Homage to the Perfection of Wisdom,
the lovely, the Holy! Avalokita Bodhisattva was moving in the deep course of the wisdom
which has gone beyond. He looked down from on high and saw but five skandhas which,
in their own being, were empty.
--------------------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Sariputra]여,
삼라만상은 빈 것이며
공한 그 모습이 삼라만상이니,
수상행식
감정이나 생각 욕망 의식
[The same is true of
감정feelings,
생각perceptions,
욕망impulses
and consciousness ] 등
마음의 작용도 또한 빈 것이니라.
-"Here, O Sariputra, Form is Emptiness,
Emptiness is Form; Form does not differ from Emptiness,
Emptiness does not differ from Form;whatever is Empty, that is Form,
whatever is Form that is Empty. The same is true of feelings,
perceptions, impulses and consciousness.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Sariputra] 여,
이 모든 비어 있는 모습[dharmas]에는
나고, 없어지는 것[no beginning,no end]도 없으며
더러웁거나, 깨끗함[imperfect nor perfect]도 없으며
늘어나거나, 줄어 듬[deficient nor complete]도 없느니라.
O Sariputra, all dharmas are marked with
Emptiness, they have
no beginning and no end,they are neither imperfect nor perfect,
neither deficient nor complete.
--------------------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그러므로 비어있는 세계에는
[in emptiness]
이렇다 할 실체도 없고
[no form]
감정도 생각도 욕망도 의식도 없고,
[no feeling, no perception, no concepts, no knowledg],
감각의 주체인 안이비설신의도 없으며
[No eye, no ear, no nose, no tongue, no body, no mind],
빛깔이나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의 관념도 없으며그러한 것들의 모든 상대 또한 없느니라
[no forms, no sounds, no smells, no tastes, no touchables or no objects of the mind].
그러므로 미혹된 어리석음도 없고
[no mind consciousness element]
어리석음을 벗어나는 것도 없으며,
[extinction of ignorance,]
늙고 죽음도 없으며,
[no decay and death]
끝내 늙고 죽음을 벗어나는 것도 없나니
[no extinction of decay and death]
-Therefore, O Sariputra, in emptiness there is
no form, no feeling, no perception, no name,no concepts, no knowledge. No eye, no ear,
no nose, no tongue, no body, no mind;no forms, no sounds, smells, tastes, touchables
or objects of the mind, no sight organ,no hearing organ and so forth to no
mind consciousness element; no ignorance
orextinction of ignorance or extinction
of ignorance, no decay and death,
no extinction of decay and death.
--------------------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타 依般若波羅蜜多
故 心無가無 가애고
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괴로움도 없고
[no suffering ]
괴로움의 원인도 없고
[no origination]
괴로움을 없애는 일도 없으며
no stopping,
팔정도의 길도 없느니라.
no path,지혜가 따로 있을 수 없으며
no cognition,
아무런 얻음과
no attainment, nor anything to attain.
잃을 것이 없으므로
There is nothing to accomplish
모든 보살은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닦아가나니
[ and so Bodhisattvas can rely on the
Perfection of Wisdom]마음에 걸림이 없고
without trouble.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Being without trouble,]
두려움이 없어
[they are not afraid]
잘못된 망상을 떠나
[ having overcome anything ]
upsetting
마침내 열반에 이르느니라.
[they attain Nirvana]
There is no suffering, no origination,
no stopping, no path, no cognition,
no attainment, nor anything to attain. There is nothing to accomplish and
so Bodhisattvas can rely on the
Perfection of Wisdom without trouble. Being without trouble, they are not afraid, having overcome anything
upsetting, they attain Nirv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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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 得阿多羅三막三菩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All Buddhas who appear in the three periods, ]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because they have relied on the Perfection
of Wisdom.]
최고의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으니
[fully Awake to the utmost, right and perfect
enlightenment]
All Buddhas who appear in the three periods,
fully Awake to the utmost, right and perfect
enlightenment because they have relied on the Perfection
of Wis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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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이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진언이고, 가장 밝은 진언이고,
가장 뛰어난 진언이며, 비길데 없는 진언이니, 능히 모든 괴로움을 없애고
참으로 진실하여 허망함이 없느니라.
Therefore, one should know the Perfection
of Wisdom is the great mantra, is the unequaled
mantra, the destroyer of su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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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說 般若波羅蜜多 呪 卽說呪曰,
이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하노라.
Because of this Truth, listen to the man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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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있다 있다 모두 있다 지금 바로 여기 모두 있다 앗싸아 만만세
Gate, Gate, Paragate, Para Samgate Bohisvaha
Gone, Gone, Gone beyond, Gone utterly beyond
Oh, what an Awakening!.
있다 있다 실천 수행이 있다
천영필
만번 무명의 깨달음[무明智]도
실천 수행이 따르지 않으면
한번 깨달음의 수행 [行佛] 만 못하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갓데 갓데 바라갓데 바라상갓데 보디 스바하
갓데 갓데 바라갓데 바라상갓데 보디 스바하
갓데 갓데 바라갓데 바라상갓데 보디 스바하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다, 앗싸~ 아~, 만세, 만세, 만만세!
실천궁행( 實踐窮行)
행불 (行佛)
공법 중도법
연기법
사성제
팔정도
반야심경(Heart Sutra)
The Maha Prajns Paramita Hridaya Sutra
Avalokitesvara Bodhisattva
when practicing deeply the Prajna Paramita Perceives that all five skandhas are empty and is saved from all suffering and distress Sariputra, Form does not differ from Emptiness, Emptiness does not differ from Form. That which is Form is emptiness, that which is emptiness form. The same is true of feelings, perceptions, impulses and consciousness. Sariputra, all dharmas are marked with Emptiness, they do not appear or disappear, are not tainted or pure, do not increase or decrease. Therefore, in emptiness no form, no feelings, perceptions, impulses, consciousness. No eyes, no ears, no nose, no tongue, no body, no mind; no color, no sound, no smell, no taste, no touch, no object of mind, no realm of eyes... and so forth until no realm of mind consciousness. No ignorance and also no extinction of it... and so forth until no old age and death and also no extinction of them. No suffering, no origination, no stopping, no path, no cognition, also no attainment with nothing to attain. The Bodhisattvas depends on Prajna Paramita and the mind is no hindrance; without any hindrance no fears exist. Far apart from every perverted view one dwells in Nirvana. In the three worlds all Buddhas depend on Prajna Paramita and attain A nuttara Samyak Sambodhi. Therefore know that Prajna Paramita is the great transcendent mantra, is the great bright mantra,is the utmost mantra, is the supreme mantra which is
able to relieve all suffering and is true, not false. So proclain the Prajna Paramita mantra, proclaim the mantra which says: gate gate paragate para samgate bodhi svaha gate gate paragate para samgate bodhi svaha gate gate paragate parasam gate bodhi svaha
화계사 English Class
짧은 만남, 긴 이별, 단지 스쳐 갈 뿐!
창덕昌德
안심하고 안심하라괴로워 할 거 아니다인연생, 인연멸 할 뿐!인연이 流轉되어,
무명 ㆍ 행(行)ㆍ식(識)이ㆍ명색(名色)ㆍ육입(六入)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 취(取)ㆍ유(有)ㆍ생(生)ㆍ노사*우비고뇌(老死憂悲苦惱)뿐!만남 후 이별, 마음이 아려도시절인연이려니會者正離, 愛別離苦려니환영이려니 꿈이려니 해야지어쩌 것어여?
구부득구려니
원증회고려니
지혜와 자비로 수행실천上求菩堤 下化衆生천영필보살도[실천 수행 목표]를 가는 이自利利他를 근기로,위로는 보리를 구하고아래로는 중생을지혜와 자비로교화한다.自他不二의 마음이보리살타로 이끈다지금까지의聲聞, 緣覺에서탈피하여지금부터 보리살타로새롭게 수행하자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위로 보리를 추구하고아래로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으로,보살의 수행 목표를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측면으로 표현한 불교교리.대승불교의 흥기와 더불어불교의 이상적 수행자상 역시변모되었다. 대승불교도들은기존의 불교 수행자를성문(聲聞) 및 연각(緣覺)으로지칭하고,자신들을 보살로칭하였다.보살은,범어로는 bodhi-sattva이고팔리어로는 bodhi-satta이며,이를 한역해서보리살타(菩提薩埵)라고 한다.이 중 보리는지혜, 깨달음, 도(道) 등을 의미하고,살타는 중생을 뜻한다.그리고 보리살타를 줄여보살이라고 한다.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은바로 이 보살 수행자가발심해서 수행하는목적을 상(上) · 하(下)라는방향성에 근거하여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즉 보살은 위로는불교의 지혜인 보리를 추구하고,아래로는 고통 받는 다양한 중생을교화하는 것을 수행의 목적으로삼는다는 것이다.이 두 가지는 불교에서 말하는두 가지 이익,곧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에각각 대응된다.대승불교에서는성문 · 연각 · 보살을 삼승(三乘),곧 불교를 수행하는세 부류의 수행자로 보았는데,이 가운데 성문 · 연각을이승(二乘)으로 칭한다.반면 보살은 앞의 두 부류와결정적으로 다른 수행자로 분류되는데,그 이유는 바로 하화중생에 있다.앞의 두 부류가자신의 깨달음만을 추구하는 반면,보살은 깨달음과 더불어중생을 교화하는 일을 함께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위로 보리를 추구하기 위해서필요한 덕목은 지혜이고,아래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필요한 덕목은자비이다.성문 · 연각은지혜 하나만 갖춘 반면,보살은지혜와 자비의두 가지를모두 갖춘 이를 가리킨다.대승불교에서는이런 점에 의거하여성문 · 연각보다보살을더욱 훌륭한 수행자로간주한다.문구의 측면에서 보면,동아시아에서상구보리하화중생이라는 표현이정형화된 것은9세기 이후로 보인다.그 이전의 한문 불전에서는이와 관련하여뜻은 같지만 표현이조금씩 다른 문구들이다양하게 나타난다.우리나라 불교는대부분 대승불교를 표방해왔다.따라서 대승불교의이상적인 수행자상인보살이 매우 중시되었고,보살의 수행 목표인상구보리하화중생역시 우리나라의 불교도들에게필수적인 것이 되었다.신라의 원효는『기신론소(起信論疏)』에서『대승기신론』을지은 대의가보살의 두 가지 목표인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벗어나지 않는다고평했을 만큼이 두 가지 목표는중요성을 가진다.두 가지 가운데 특히하화중생은불교가사회의 대중 속에서실현되어야 함을강조함으로써불교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유도하는 계기를제공해주었다.
배워서 남 주자
천영필지혜와 자비로수행실천 하는보살도를 걷자*성문을 하고*연각을 하고만족에 그치지 말고보시바라밀상이 머무름 없는 그 마음으로무주상보시로복을 짓자아는 만큼 전하고가진 대로 베풀자배우고 남주자실천궁행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성문불경을 듣는다곧 수행실천덕목을배운 자* 연각연기법을 깨달음곧 12연기법을 깨달아윤회전생을 끊고 해탈하는득을 얻은 자깨침에 감사하고수행실천덕목을체득한 자
마하반야바라밀
천영필마하반야바라밀 (摩訶般若波羅蜜)성문 (聲聞) 연각 (緣覺 )사성제 (四聖蹄) 고집멸도 ( 苦集滅道)팔정도 (八正道) 수행실천덕목무주상보시( 無住相菩施 )자리이타 (自利利他 )자타불이로 (自他不二)아는 만큼 전 (傳 )하고가진 만큼 나누는 선업 (善業)과복 (福 )을 지읍시다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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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설법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이 경은
계(戒)ㆍ정(定)ㆍ혜(慧) 삼학과
4성제,
12인연 등의 불교의 근본교리로
설해져 있다.
반야심경천 영필행복한가요?걸식을 하고 살아도행복의 정수를 지킨고타마붓다태평양 같은인생 고해(苦海)를건너는 길[道]을제시하고안내하시는팔만사천 말씀 중부처 어머니 같은반야심경 [聲聞]듣나니내가 나서 죽을 때까지끌고 다니는이내 몸뚱이[五蘊]을관찰해보니헛깨비요 환영이라밥 먹는 식충이요술 먹는 술고래요운동하는 머신이요배설하는 분뇨처리기더라한 생각 바꾸니손가락으로 봉창 구멍내기 보다쉬운 게 깨달음[緣覺]이 더라인생은 나그네길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그저 이 한 몸뚱이 끌고바람 부는 대로물결치는 대로인연이 다 하면 흩어지고인연이 되면 맺어지는인연생기(因緣生起)라그림자처럼물거품처럼박수 소리처럼분명히 있는 것처럼 보이나사실은 무상(無常)하다
*이 몸은 고기와 피로 덮여 있고뼈로 쌓아올린 하나의 성곽.그 안에 교만과 비방늙음과 죽음이 함께 머무르고 있구나.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로다나라고 생각하는 이 몸뚱이[身]사실은 이 세상에선 무아 (無我)로다이 몸뚱이가 나라는이 한 생각[一心]에서고통이며 번뇌로다무명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무주상보시수행실천덕목을아는 만큼 전하고가진 만큼 나누는선업과 더불어받는 복이 아니라복을 짓습니다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법구경 루빠난다에게 한 설법
수행실천덕목 으로
내 인생, 내가 주인으로
隨處作主 立處皆眞천영필내 인생, 내 삶이내 작품[隨處作主]이라고확신해야내가 고칠 수 있다.부처님 작품이거나신의 작품이라고 한다면,나는 감히 고칠 수 없을 것이다.다만 할 수 있는 것은고쳐달라고 구걸 하는 것 뿐!하지만 내 작품이므로내가 고칠 수 있다.고정된 실체로서의‘나’는 없기 때문에어떠한 ‘나’도만들 수 있고,텅 비었기 때문에무엇으로 든 채울 수 있다.항상 천변만화 [無常]하는내가 있는바로 지금 여기가 다 진리[立處皆眞] 이다.결국 성품은 디지털식으로단박에
메타버스 기상 현실 세계로보아[覺]야 하며,몸과 마음은 아날로그로반야바라밀다 [수행방식] 로꾸준히 실천궁행해야 한다.
무애자재의 지혜로
구경열반천영필수많은 학문도,
언어 수사도,종교적 지식 틀에도걸림이 없는 자유자재 하는 삶,평상심만이 바로 지금 여기서
열반에 든다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반야심경에서는무애자재의 인물로관자재보살을 등장시켜서,무애자재에 이르는 길을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도일체고액“걸림 없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조견오온개공우리의 몸과 정신작용이공(空)한 것임을 밝혀야 한다.시제법공상 불생불멸공의 이치를 터득하면죽음[생사]에 대한 공포도 사라지고,불구부정삶에 대한 우아함과 추함[귀천]의 분별도 사라지며,불증불감재산 등의 많고 적음[빈부]에 개의치 않게 된다.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뿐만 아니라 수많은 학문과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종교적 지식의 틀에도 매이지 않게 되고,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늘 깨어 있어 자유로울 수 있다.고심무가애 무가애이 지혜의 경지가 되면 마음에는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두려움도 없으며, 눈앞의 경계를거꾸로 잘못 판단할 일도 없어서,구경열반마침내 항상 평화[평상심]로 올 수 있게 된다.”무애자재는이론과 현실의 충돌이 전혀 없는 경지이고, 정신적으로는언제나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를 뜻합니다.이 무애자재는시작과 과정과 결과가모두 명쾌하고 좋은 상황으로 전개되는최고의 삶을 가리킵니다.송강스님 / 개화사 주지[불교신문 2496호/ 1월28일자]
8자를 고쳐야지
천영필
팔자 고칠 일이 벌어졌다
끝도 없이 이어 8자로 써지는
삶에 이골이 났다
남 탓 남 탓하다가 이
리 저리 팔려 다니는
내 꼬락서니
모든 걸 내 안에서
원인을 찾아보니
근본의 문제는
남이 아닌
내가 바로 문제로다
내가 주인인데
뭐가 문제인가?
십중팔구의 팔이
적잖긴 하지만
내가 맘대로
할 수 없는 건
내게 아니다
주어진 팔자로
이리 저리 팔려 사느니
적극적으로 온전한
내 것으로 살아보자
8자를 세우는 일 그만하고
발로 한번 걷어차서 넘겨보자
무한대( ∞ )가 되지 않는 가?
이제는 나의 역량을 무한대( ∞ )로
발휘해 보는 거다
만세! 만세! 만만세!
내가 주인 되니
어찌 이리 좋을 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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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
생년 월 일 시
사주를 말한다
10간 12지에 따라
도출 된다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10간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12지
육갑에서는
갑자 *갑인 *갑진 *갑오* 갑신* 갑술
이와 같이 하나씩 점프하여
조합 한다
戒ㆍ定ㆍ慧
선업과 선정으로 자명한 지혜를천영필장어ㆍ정업ㆍ정명ㆍ선업으로 복 짓고정정진ㆍ정념ㆍ정정ㆍ선정으로 물결 일듯
일어나는 산란함을 고요하게 하여정견ㆍ정사유ㆍ지혜로 우수고뇌가 다해[진]불성을 깨닫는다정어ㆍ정업ㆍ정명ㆍ계율(戒律)에 의해 악업(惡業), 나쁜 짓을 방지하고,정정진 ㆍ정념ㆍ정정ㆍ선정(禪定)에 의해
산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정견ㆍ정사ㆍ지혜(智慧)에 의해 번뇌를 끊고 본성을 깨닫는다.불도(佛道) 수행(修行)을 성취코자 하면 계(戒)와 정(定)과 혜(慧), 삼학(三學)을 겸해서 닦아야한다
그릇ㆍ물ㆍ달의 비유다계(戒)의 그릇이 온당해야선정(禪定)의 물 <산란한 마음>이 담기고,선정의 물이 맑고 고요해야지혜(智慧)의 달 <*빠라미따>이 나타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바라밀다
바라밀(婆羅蜜) 또는 바라밀다(波羅蜜多)는 산스크리트어 빠라미따(पारमिता pāramitā)를음에 따라 번역한 것으로,완전한 상태 · 구극(究極)의 상태 · 최고의 상태를 뜻한다.
<번야심경>
산스크리트어 본
:번역 연구
옴. 존경스러운 거룩한 반야바라밀다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관자재보살께서는 심원한 반야바라밀행을 하시며 조견(照見)하셨다. 오온들과 그들의 자성이 공(空)함을 보았다.
여기 사리불이여,
색은 공이며, 공이야 말로 색이며,
색은 공과 다르지 않으며, 색인 것이 바로 공이며, 공인 것이 바로 색이다.
수 상 행 식 도 이와 같다.
여기 사리불이여,
모든 법들은 공상(空相)이며,
생기(生起)하지도 않고
소멸(消滅)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감소도 없고 증가도 없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공(空)에는
색(色)이 없고
수(受)가 없고
상(想)이 없고
행(行)이 없고
식(識)이 없으며
안 이 비 설 신 의(眼 耳 鼻 舌 身 意)도 없으며,
색 성 향 미 촉 법 (色 聲香 味 觸 法)도 없으며,
안계 (眼界)도 없으며
내지
의식계 (意識界)도 없으며,
무명 (無明)도 없으며,
무명(無明)의 소멸도 없으며
내지
노사 (老死)도 없으며
노사 (老死)의 소멸도 없으며,
지혜도 없으며,
얻음도 없으며
얻지 못함도 없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얻어야 할 바가 없으므로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의존해서
마음의 장애가 없이 머문다.
마음의 장애가 없는 까닭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전도 (顚倒)를 뛰어 넘어
구경 (究竟)에는 열반을 얻는다.
삼세(三世)에 머물고 있는
모든 부처님들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존해서
무상(無上)의 정등각(正等覺)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알아야한다
반야바라밀다는
위대한 진언(眞言)이며,
무상(無上)의 진언(眞言)이며,
견줄 수 없는 진언이며
모든 괴로움을 제거하는 것이니,
진실로 잘못된 점이 없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에 관해서 설해진 진언은
다음과 같다.
가서 가서 피안으로 가서 피안으로
완전히 갔을 때에 깨달음이여!
쓰바하(축복의 소리)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다심경은 끝났다.
나는 나를 벗 한다
천영필
나[吾]는 친구가 많지만
제일 좋은 친구[友]는
바로 지금 여기 나[我] 말이다
예전의 나도 아니고
미래의 나도 아닌
바로 지금 여기의 나 말이다
여전의 내가 무얼 할 껄
후회하는 내가 아니라
내일의 태양 아래 웃음지리란
무얼 바라는 내가 아닌
충만과 행복과 열반의 나 말이다
사경 기도를 하면 함께 하고
책을 읽으면 함께 듣고 호응하면서
취음을 하면 함께 즐기며
노래하면 듣고 받아치며 말이다
*오우아거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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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1741~1793 영조~정조대)
사가 시인, 규장각 검서관,궁내출판 편집인,
실사구시 지향 작가로
문체반정에 곤혹을 치름
고독
천영필
*천상천하유아독존
세상이 따로 있고 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내 안에 세상이 있는 거다
내가 곧 세상이요 내가 전부요
내가 없는 세상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렇게 통찰할 때 중도요
자등명, 법등명으로 존재 합니다
세상의 중심에 나를 두고 통찰해야
사성제가 팔정도가 수련 됩니다
이게 *中道論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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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가 니까야』, 『맛지마 니까야』 등
초기 경전에 의하면,
붓다는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나자마자
북쪽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나서
곧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다.
이것이 마지막 태어남이다.
다시 태어남은 없다.”
(DN14경, MN123경).
또 한역 『장아함경(長阿含經)』을 보면
붓다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은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천상천하 유아위존 요도중생 생로병사
[天上天下 唯我爲尊 要度衆生 生老病死]”
(대정장 T1, 4중).
이는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내가 존귀하다.
요컨대 나는 중생들을 생로병사에서 건질 것이다.’
라는 뜻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라는 말은
인도 부파 중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문헌과 현장(玄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도 나온다.
이는 앞의 초기 경전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부처의 이 탄생게는
선종의 공안의 하나로 정착되었으며,
고려시대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의
『선문염송(禪門拈頌)』에는
두 번째 공안으로 제시되어 있다. 선문염송 2칙
세존주행(世尊周行)은 다음과 같다.
“세존께서 태어나셨을 때 일곱 걸음 두루 걷고서
사방을 둘러본 후,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할 뿐이다.’
“부처님의 자화자찬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며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참뜻을 설명했다. “모든 생명 각자가 스스로 존귀하다는 것을 깨우치라는 경책”이라며 “질투심과 열등감에 시달리며 스스로를 업신여기는 이들에게 전하는 격려”라고 말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당당함과 여유로움은, 훗날 중국 당나라 임제의현(臨濟義玄) 선사에 의해 무위진인(無位眞人)이란 개념으로 변주됐다. ‘자리 없는 참사람’이란 ‘자리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 또는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사람’이란 의미다. 신분과 환경에 개의치 않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으면 무위진인인 셈이다.물론 ‘내가 존재 한다’는 건 기쁨보다 슬픔일 경우가 훨씬 더 많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우뚝 서 있다’라는 건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져 있는 조건, 곧 절대적인 고독이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으며 대신 죽어줄 수 없다. 혼자서 이끌어가야 하는 인생은 필연적으로 외롭고 고되며 혼란스럽다. 누군가 나의 아픔을 위로해줄 순 있어도 대속해주지는 못한다. 독존(獨尊)을 꿈꿀수록 독존(獨存)의 현실만 뚜렷해진다. 이웃과 마음을 나눈다지만 몸에 소속된 마음은 응당 각자의 몸을 위해 복무하게 마련이다.부처님은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비극성을 뼈저리게 느끼던 분이다.
“부처님이 돌아가시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 살아가야 하느냐”
는 수제자 아난의 탄식에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믿으라”
고 다독였다. 원래 부처님이 실제로 사용하던 언어인 빨리어 경전에는 등(燈)이 아니라 섬(島)으로 쓰였다고 전한다.
요컨대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는 한 개의 섬이며, 섬에 등불을 밝히고 그 불빛에 따라 자신의 길을 슬기롭고 강인하게 헤쳐가야 하는 숙명을 갖는다. 힘들고 괴롭다면, 그만큼 인생의 무게를 열심히 버텨내고 있다는 증거다. 더러워서 못 살겠다는 삶도, 그 더러움의 크기만큼 참된 것이다.
고(苦)
천영필
고통[苦]이 나를 잡고 있는(苦執) 게
<내가 고통 속에 있는게>아니라
내가 *고통[苦]을 잡고 있는 것[我執]
<내 속에 고통을 품고 있는 것> 이다
놓아버려라
품지마라
내려 놓아라 [放下着]
방출해 버려라
그러면 저절로 해방 [自由] 되리라
바로 지금 여기서 解脫하리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고집멸도 사성제(四聖諦)
이는 불교의 네 가지 높은 깨우침이란 뜻이다.
1. 고 (苦). 인간의 현실적 존재는 곧 괴로움이다. 고(苦)에는 사람이 겪는 생고(生苦)와 노고(老苦)병고(病苦) 사고(死苦)의 괴로움
생로병사의
4고(四苦)와, 미워하는 것을 만나야 하는
원증회고(怨憎會苦) 의 괴로움과 사랑하는 것과 헤어져야 하는
애별리고(愛別離苦) 의 괴로움과 구하는 바를 다 얻지 못하는
구부득고(求不得苦) 의 괴로움과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에 집착하는 육체적인 본능에 의한
오음성고(五陰盛苦)의 괴로움인4고 (四苦)가 있다.
2. 집(集). 탐욕과 욕망과 갈애와 열망이 결합하여 일어나는 괴로움의 원인인 집착을 말한다.
3. 멸(滅). 번뇌와 고통이 모두 없어진 해탈 및 열반의 경지 즉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고 생사를 초월하여 불생불멸의 진리를 체득한 경지를 말한다.
4. 도(道).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을 말하며,이는 곧 종교의 생명이며 실천수행 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道의 구체적인 항목으로는 깨달음에 이르는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길 즉 8정도(八正道)가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8정도(八正道)
“지혜로운 사람은 ‘올바른 집중’을 실천
”정념(正念),
즉 올바르게 마음을 챙기고 알아차리는 수행은
다른 곳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이는 깨달음으로 가는
직접적 길이며
이 보다 더 중요한 실천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성제와 연기법을 터득함으로써
정견을 확립하여
지혜로워진 사람은
정정(正定),
즉 올바른 삼매 즉
올바른 집중을 실천한다.
초기불교의 실천을 집대성한
<청정도론>에서는
이를 실천하고 성취하는 방법을
40가지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팔정도 수행하면 탐 진 치 극복 가능 개인뿐 아니라
세계의 행복과 연결 올바른 집중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관능적 욕구, 악의, 무기력, 근심, 불안 및
회의적 의심 등을 버림으로써
즐거움과 행복의 감정을 유지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일체의 지적인 활동을 그침으로써
‘마음의 평정한 집중 (心一境性)’을
유지한다.
즐거움과 행복의 감정 역시 그대로이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활동적 감각과 즐거움의 느낌을
그침으로써,
행복감이 마음의 평정한 집중과
더불어 남는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행복과 불행, 즐거움과 슬픔 등
모든 감정을 그침으로써
오로지 순수한 평정과 깨달음만 남는다.
올바른 집중이란
한 곳에 온전하게 몰입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을 지속하는
실천을 의미 한다.
한편, 올바른 집중의 의의는
이것이 불교적 실천의 핵심,
즉 바르게 보기의 힘이 된다는 점이며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올바른 집중의 연장선
그 끝에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깨달음 이후
첫 제자들에게 베푼
첫 설법이 팔정도였고,
입멸직전
마지막 제자 수밧다 (Subhadda)에게 설한
내용도 팔정도이다.
붓다는 이 팔정도만이
우리를 온전한 행복으로 인도한다고
하신다.
어떠한 중요한 길이 있어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여 …
출가 수행자의 목적을 이루게 되었는가?
이른바 여덟 가지 올바른 길이 그것이다.
여덟 가지 바른 길이란,
바르게 보기,
마음 가지기,
말하기,
행동하기,
생활하기,
노력하기,
마음 챙기기,
집중하기이니,
이것이 ‘완전한 행복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길이다.
나는 이것으로써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여 …
출가 수행자의 목적을 이루어
완전한 행복(涅槃)에 이르렀느니라.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이 처럼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상적 가르침의 요점이
연기법에 있다면
실천적 가르침의 요점은
팔정도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붓다의 제자이고자 한다면
팔정도를 정확하게
이해하여 간직하고,
삶의 모든 순간에서
실천하는 것이 필수다.
불자는
팔정도를 실천 수행함으로써
일체 고통의 원인인
탐 진 치 삼독(三毒)을 극복하고
완전한 행복인 열반을 성취 한다.
한편, 팔정도의 실천은
개인의 행복뿐만 아니라
세계의 행복과도 무관하지 않다.
팔정도 중에서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은
‘윤리적 실천(戒)’에 속하고,
바른 노력.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집중은
‘마음집중의 실천(定)’에 속하며,
바른 견해. 바른 생각은
통찰의 실천(慧)에 속한다.
이 가운데서 윤리적 실천은
나의 행복뿐만 아니라
타자의 행복,
즉 세상의 행복을 지향한다.
따라서 팔정도는
나와 남이 함께 행복으로 가는
완전한 길인 것이다.
윤영해/
동국대 불교문화대학 불교학과 교수
[불교신문 2355호/ 8월29일자]
맺는 말
結語일독하여 주심에 감사 한다아울러 무지한 졸시를 들어 주시고격려를 이끼지 않으신독자 여러분과특히 용인시낭송예술협회 가족 여러분께도감사의 인사 드린다이 책이 나오기까지 애쓰신출판사에도 축복 한다昌德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