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1936년 8월9일,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은 메인스타디움과 42.195㎞ 연도 변에 경기진행요원만 1천3백 여명에 1백만이 넘는 인파가 경기를 지켜본 가장 화려한 마라톤 경기 중 하나였다. 한발의 피스톨 총성과 함께 27개국 56명이 경기장을 빠져 나갈 때 손기정은 32번째, 남승룡은 49번째였다. 그러나 이 대회 마라톤코스의 승부처로 꼽혔던 28㎞ 지점의 비스마르크 언덕을 넘으면서 한국의 손기정은 제10회 LA올림픽에서 우승, 대회 2연패 를 노리던 선두 자발라(아르헨티나)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손기정은 10만관중이 운집한 메인스타디움 연변의 2㎞가 넘는 인간터널을 홀로 독주했다. 2시간29분19초, 올림픽 신기록으로 손기정은 결승선을 통과했다. 2분 뒤 영국의 하퍼가 결승선을 통과했고 곧바로 한국의 남승룡이 3위(2시간31분42초)로 골인했다. 지옥의 레이스로 불리는 마라톤경기에서 한국인의 기상을 드높인 쾌거였다. |
그로부터 꼭 10년 뒤 해방의 감격 속에 민족의 단결과 정기를 높이기 위해 처음으로 마라톤대회가 조선일보사에 의해 창설됐다. 바로 제1회 조선일보 단축마라톤대회다. 이 대회는 이듬해엔 [손기정 세계제패기념 제1회 조선일보마라톤대회]로 격상되면서, 반세기 동안 한국마라톤을 이끌어 왔다. 해방의 감격이 반도를 뒤흔든 45년말 베를린올림픽 우승자 손기정씨를 비롯한 권태하, 김은배, 남승룡 등 일제하에서 한국마라톤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한국마라톤재건을 위한 [조선마라손보급회]를 창설했다. 조선일보사는 [조선마라손보급회]와 함께 마라톤 보급과 선수양성을 위해 발벗고 나서, 첫 노력의 결실로 46년 10월27일 제1회 조선일보 단축마라톤대회를 치르게 됐다. 해방직후부터 여기저기 난립한 각종 단체들이 저마다 정치성 체육대회를 잇달아 개최하기도 했지만, 제1회 조선일보 단축마라톤대회는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일제하에서도 세계정상에 우뚝 섰던 한국인의 패기와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치러진 첫 마라톤 대회였다. ![]() 광화문 태평로의 조선일보사 앞에서 우이동을 왕복하는 코스에서 열린 이 대회엔 45명의 건각들이 출전, 본사 뒤뜰에서 손기정씨를 통해 코스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정각 2시에 출발, 군정청 앞과 동소문을 거쳐 우이동을 돌아 본사 앞에 골인했다. 대회 우승은 당시 한양공업대학 코치이면서 [아틀란틱구락부] 소속 마라토너 였던 서윤복씨가 1시간29분24초로 차지했다. 당시 전국민 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민족지도자 이승만과 김구는 대회 우승컵을 기증해 조선일보마라톤대회에 대한 온 민족의 관심을 그대로 반영했다. 이듬해 조선일보사는 제1회 단축마라톤 대회를 제1회 손기정 세계제패기념 조선일보마라톤대회로 격상시켰다. [철각역주의 제전]이었던 제1회 대회는 47년 8월 9일, 11년 전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한 바로 그날, 출발시각도 똑같은 오후 3시 태평로 본사 앞에서 오류동에 이르는 마라톤 풀 코스에서 치러졌다. 폭우가 쏟아지는 악천후 속에서 벌어진 첫 대회엔 50명의 마라토너가 출전, 당시 고려대생이던 홍종오 선수가 2시간57분20초로 우승테이프를 끊으면서 조선일보마라톤은 한국마라톤의 산실로 튼튼한 요람을 틀었다. 이후 작년까지 근 50년 동안 조선일보마라톤은 6.25전쟁의 참화가 닥친 시기 등을 제외하곤 쉬지 않고 한국마라톤의 기록갱신과 새로운 선수발굴에 앞장서 왔다. 특히 볼거리가 별로 없었던 시절 라디오를 통해 중계되는 조선일보 마라톤대회는 온 국민의 귀를 사로잡은 최고의 스포츠행사였다. ![]() 조선일보마라톤대회는 또 해방이후 지금까지 숱한 기록을 갱신해 오면서 셀 수없을 정도로 많은 스타들을 배출해 냈다. 조선 일보마라톤대회의 첫 결실은 서윤복 선수의 47년 보스턴마라톤 우승으로 나타났다. 46년10월, 조선일보마라톤대회에서 우승했던 서윤복 선수는 이듬해 해방후 한국스포츠의 첫 해외원정이었던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2시간25분39초의 대회신기록으로 우승했다 . 마라톤 전통과 권위의 상징처럼 비쳐진 보스턴마라톤의 제패는 해방의 혼란속에서 갈피를 못잡던 많은 국민에게 10여년전 일제하에서 손기정선수가 전해준 것과 같은 희망과 용기를 다시한번 심어줬다. |
이후 조선일보마라톤에서 배출된 스타들은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 보스턴마라톤 등 국제대회에서 유감없이 기량을 토해냈다. 58년 동경아시안게임과 90년 북경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낸 이창훈씨와 김원탁씨도 조선일보대회 출신. 이씨는 57년 11회 대회 때 실시한 20㎞ 단축마라톤에서 우승, 국가대표로 발탁된 뒤 다음해 아시아를 제패했다. 85년 39회 대회 우승자인 김원탁 선수는 90년 아시안 게임 정상에 서면서 한국 마라톤의 붐을 조성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현재 세계 톱마라토너인 김재룡, 김완기, 이봉주 등도 조선일보대회와 함께 성장한 선수들. 김완기는 91년 춘천코스에서 치러 진 45회 대회에서 2시간11분2초의 기록으로 한국신기록을 수립, 황영조의 올림픽우승으로 이어지는 한국 마라톤 기록단축의 기폭 제 역할을 했다. |
![]() |
또 87년 41회 대회 우승자인 김재룡은 93년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2시간9분30초의 호기록으로 2위에 입상한 것을 비롯, 세계선수권에서도 4위를 차지, 한국의 역대 세계육상선수권사상 최고의 성적을 일궈내는 마라톤한국의 위세를 만방에 떨쳤다. 93년 호놀롤루 마라톤에서 우승했던 이봉주는 94년 대회에서 2시간9분59초의 대회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이밖에 역대 최다우승자(3회) 조재형씨(45·경기도청 감독)와 대회 2연패를 했던 유재성씨(제일제당 코치) 등은 현재 마라톤 명 조련사로 후배들을 키우고 있다. |
![]() |
조선일보마라톤대회는 수많은 스타와 기록만을 양상 해온 게 아니다. 끊임없이 선수와 국민들에게 [마라톤정신]까지도 수혈해 왔다. 손기정, 서윤복 선수 등 세계 톱랭커들을 배출해온 한국마라톤은 60∼70년대를 거치면서 깊은 잠에 빠졌었다. 세계기록 이 2시간10분대에 진입 했을 때 한국기록은 2시간20∼30분대를 오락가락하면서 선수와 지도자들은 [정신]까지도 타락해 갔다. 42. 195㎞ 1백리 길에서 벌이지는 모든 행위는 스포츠맨십에 투철한 정정당당한 승부여야 함에도, 기록보다는 순위에만 집착하면서 한국마라톤의 질적 수준을 계속 저하시켰던 것이다. 82년 제36회 조선일보마라톤대회는 한국 마라톤사에 잠자는 마라톤정신을 일깨우면서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대회로 기억되고 있다. 창동에서 의정부를 돌아 창동으로 귀환하는 42.195㎞ 마라톤 풀 코스에서 벌어진 대회에서 무더기 기록박탈이 벌어지면서 여자부 경기에선 13살짜리 여중생이 대회우승을 차지하는 이변이 연출됐다. 기록이야 어쨌든 1등만 하고 보자는 선수와 지도자들 의 안일한 생각이 한국마라톤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시점에서 조선일보사는 육상연맹과 합의, 부정을 저지른 모든 선수의 기록 박탈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당시 남자부 1위로 골인한 선수는 정만화-채홍락선수. 골인지점을 1백여m 앞두고 둘은 박자를 맞춰 나란히 레이스를 펼쳐 공동1위로 테이프를 끊었다(2시간21분8초). 20분대돌파를 목메어 기다리는 온 국민의 열망은 뒷전으로 한 채 담합 1위를 노린 치졸한 행위를 벌인 것이다. 이 대회에서 남자 3명, 여자 2명의 기록이 취소됐다. 한국마라톤의 치부에 칼 을 들이댄 이날 징계를 발표한 후, 손기정씨는 빗속에 처연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나라를 잃은 몸으로 세계를 제패했소. 헌데 당신들은 조국을 찾고도 더 좋은 기록은 못 내고 불미스런 행동을 합니까. 주최측이 돈을 벌자고 이 대회를 치르는 겁니까. 기록을 갱신해서 국민의 여망에 보답하라는 것입니다.] 한국마라톤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다시 한번 세계로 웅비하라는 사자후였다 |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마라톤은 다시 세계무대를 향한 힘찬 시동을 걸었다. 이듬해 대회에서 20분대를 돌파한 뒤, 85년 17분, 86년 15분, 87년 14분, 88년 13분대에 진입하는 기록갱신 행진이 이어졌다. 91년 새로 마련된 춘천코스에서 벌어진 대회에선 김완기가 11분대의 한국기록을 토하면서, 한국마라톤은 바르셀로나올림픽과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제패로 이어지는 국제대회 개가 와 함께 2시간8분9초의 한국최고기록수립까지 승승장구하는 대전환점이 됐다. 조선일보 마라톤은 95년10월28일, [조선일보 춘천국제마라톤]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한국마라톤이 세계로 미래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국내선수만의 경쟁으론 한계가 있다는 판단으로 세계 유수의 마라토너들이 춘천으로 집결했다. 당시의 세계기록 보유자였던 딘사모를 포함하여 세계의 건각이 참가해 국내 마라톤발전에 기여했다 | |
96년 일반참가자에게 문호개방 |
![]() |
96년 춘천마라톤은 또 다르게 탈바꿈한다. 마라톤 발전과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일반 마라톤 애호가들도 정상급 선수들과 함께 달릴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했다. 이해는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를 겸해 개최되었으며 이해 일반참가자로 참가한 구정미(당시 39세)가 등록선수들을 제치고 3시간55분54초로 5위로 골인, 상금 1백만원을 차지해 화제를 모았다. 춘천시도 국제마라톤의 도시로 위상을 정립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춘천 마라톤에서 좋은 기록을 내도록 하기 위 해 종합운동장에서 17㎞ 지점에 있는 오르막 10도의 급경사길 80여m를 8억 여원을 들여 5도 정도로 깎아 내렸다. |
국내최초로 기록칩과 페이스메이커 도입 | |
97년부터 일반인의 참가자가 4천명에 육박했다. 국제대회를 겸해 열린 대회에서 모제스 타누이가 2시간 9분 01초로 대회기록을 수립했다. 한국의 김이용이 2시간 9분 21초로 2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여자부 권은주 선수가 2시간 26분 12초로 한국최고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96년 일반인에게 문호를 연 이후 참가자들이 참가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98년 4,157명, 99년 12,667명, 2000년에는 16,025여명이 참가하여 대회는 성장을 지속한다. 98년 국내최초로 전자기록계측 시스템을 도입하여 마라톤 과학화를 도모했으며 99년에는 아마추어 동호인들의 안전한 완주를 위해 페이스메이커와 레이스패트롤 시스템을 최초로 소개하기도 했다. 마라톤 동호인의 증가와 함께 조선일보는 풀 뿌리마라톤의 저변확대에도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대회 전후에만 운영하던 홈페이지를 상설화하여 각종 마라톤정보를 제공했으며 마라톤캠프개최, 각종 대회를 공동주최하거나 후원하여 풀 뿌리마라톤의 요람으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춘천마라톤은 엘리트 선수들의 기록향상과 등용문의 역할을 다하면서 국민건강증진을 위해 일반인들의 축제의 장으로 승화시켜 갈 것이다. |
![]() |
첫댓글 4월 30일 중대 발표? 월달 민주공원 4.19의거 탑(원래 용두산공원에 있었슴) 앞에서 하면 안되겠니? 글구 금연 그거 믿어도 되겠니?
오케이!!! 갑장이 증인서라잉.
바리!!! 담주 월달참가 접수!!!
포수 형님 대단한 결심에 힘 입빠이!! 윤포수형님 힘.!!!
감사!!!
포수형님 대단한 의지에 힘찬 박수를 먼저 보내드립니다. 포수형님 힘~!!!
캄사!!!
윤포수^^님의 3.3달성과 금연의지가 꼭 이뤄지시길 기원하며~ 윤포수^^님!힘!
캼샤!!!
금연성공하면 막걸리 한말내께요....
그라마 막걸리 언제 낼껀데??? 내 춘마까지 금연할낀데
왜 가만있는 송암을 걸구 자빠지나? 윤포수의 3.3을기원 하면서....아참 살생부에서 나는 알제.
흐흐흐흐...
살생부 명단에 3.3 밑으로는 몽조리. 허걱, 요즘 기록이 뒷걸음질인 나도... 총 안말라카믄 열시미 해야 쓰겄지라잉. 윤포수님 힘!!!!!!
열시미형님 30분만 접어주모 잡겠는데잉.
내가 30분 접어주면 안되겠니?^^
포스형님 따라다니면 썹포 성공할수 있을까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