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의 전화... 그리고, 만남
비석의 비 머리 부분을 동종(銅鐘)의 고리, 즉 종뉴(鐘紐)와 비슷하게 만든 비석들이 있다. 이런 형태에 대한 정확한 명칭은 없지만 일각에서는 용뉴형 개석(龍鈕形 蓋石)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가 파악하기로는 전국에 10기가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묘비(墓碑. 신도비 포함)이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묘비가 아닌 것이 경북 김천시에 있는 김학성거사비다.
이 비석은 우리 카페에 ‘애타는마음’님이 2018년에 올려서 알게 되었다. 김천시 남면에 있는 농남중학교 자리에 새로 짓고 있는 율빛유치원 공사장에 있는 비석이었다. 이수(비 머리) 부분은 용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할 정도로 퇴행되었고, 다른 비석들과는 달리 고리의 구멍 부분도 조그맣다. 그래도 이렇게 비 머리에 구멍이 뚫린 비석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김천을 답사하게 된다면 꼭 찾아보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당시 유치원 건립공사 중이었기 때문에 이 비석이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물론 현장에 가서 확인을 해보면 되겠지만 멀리서 가는 답사이기에 조금이라도 더 확실한 위치를 알고 가고 싶었다.
직지사를 비롯한 김천답사가 결정되자마자 김천시청에 전화를 걸었다. 김천시청 홈페이지는 문화재 담당 직원 찾기가 조금 어려웠다. 전화를 넘겨받은 직원에게 이 비석에 대해 문의했으나 알지 못했다. 직원은 비지정문화재 관리 대상 목록을 확인한 뒤 전화를 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조금 후에 전화가 왔지만 해당 비석은 소재 파악은 안 되는 것은 물론 아예 목록에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남면 행정복지센터에 문의해 보라고 한다.
별 기대 없이 남면 센터에 전화를 했지만 역시 예상했던 대로이다. 전화를 받은 직원은 본인이 센터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직원인데 이 비석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고 한다.
그래도 비석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면, 비록 유치원이 들어섰다 하더라도 그 경내에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유치원에 전화를 걸어봤다. 전화를 받은 직원은 단호하게 그런 비석이 없다고 한다. 직원이 그런 비석에 관심이 있을 리 없으니 처음에는 원장 선생님과 통화를 시도해 보려고 했었는데, 너무나 단호하게 이야기를 하니 전화를 바꿔 달라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럼 모르는 채 유치원에 가봐야 하나? 이렇게 생각하다 문화원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문화원이라면 또 혹시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김천문화원에 전화를 걸었다. 직원은 본인은 알지 못하니 국장님께 여쭤보겠다고 말하더니 한참 뒤에 전화를 해왔다. 국장님도 그 비석은 알지 못하는데, 김천시 향토사연구회에서 비석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향토사연구회 이00 회장님의 연락처를 알려줬다.
회장님과 통화가 이뤄졌다. 회장님은 몇 년 전에 경기도에 사는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세 차례 율빛유치원에 다녀왔지만 비석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더 찾아보겠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아, 일단 이 비석은 쉽게 만날 수 없겠구나.
그런데 퇴근길에 회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 전화를 받은 뒤 다시 유치원에 찾아갔고, 경내 한쪽 언덕 위에 있는 비석을 찾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비석의 규격과 비를 세운 연도 등을 조사하여 알려주셨다. 이 지면을 빌려 이회장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회장님은 도리어 비석을 발견할 계기를 주어 고맙다고 하시면서 김천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하라고 하셨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린다.
김학성거사비는 김천 답사 첫날 마지막 답사처가 되었다. 유치원 정문 앞에서 내부를 살펴본다. 보내주신 사진을 통해 녹색 철책 바로 옆, 언덕 위라는 것을 알고서 둘러보니 멀리 비석이 보인다.
유치원 건물 향 우측 언덕 위에 ‘현감 홍우용 거사비’와 함께 세워져 있다. 이 넓은 터에 유치원을 만들면서 -아마도 원래 이 자리에 있었을- 비석을 너무 푸대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귀퉁이에 변변한 땅도 마련하지 않고 비석을 세웠다.
울타리에서 비석까지 거리가 너무 짧아 전체를 한 장의 사진에 담기조차 어렵다.
아무튼 비 머리에는 구멍이 뚫려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비 머리를 이루는 물체는 용인지 아닌지 알기 어렵다. 몸통의 표현으로 봐서는 용을 닮은 것 같지만 머리조차 찾기가 어렵다.
단지 다섯 번의 전화만으로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으니 그리 어려웠던 것도 아닐 수 있지만 아무튼 이 비석은 내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원래의 자리가 어디였는지 내가 확인할 능력은 없지만, 지금의 자리에서라도 조금 더 나은 환경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2022년 9월]
첫댓글 끝내 보셨으니 얼마나 후련하셨을까요^^
철종 때 관찰사 했던 이인데 곳곳에 비석을 남겼다면 내력은 아름답지 않겠네요.
용뉴형 개석의 마지막 모습으로서 의의는 있겠습니다.
선과님 말씀이 많은 선정비를 남겼다 하더군요. 다 그랬던 시대이긴 했지만요.
전화를 진화로 내맘대로 읽어놓고 상상의 나래를...ㅋㅋㅋ
시나브로님은 그 과정이 힘드셨겠지만
읽는자는 흥미롭네요ㅋ
고생하셨습니다
사실 현장에서 고생한 것은 없으니 고생이랄 것도 없지요. 감사합니다 ~~
어떻게든 찾아내시는 시나브로님의 불굴의 정신..배워야겠습니다..잘 읽었습니다.^^
불굴의 정신까지는 아니고요 ㅋ 향토사연구회장님의 적극적인 확인 덕을 봤습니다^^
시나브로님의 이런 노력 덕분에 뒤를 따르는 저희가 편히 답사를 한답니다. 진짜진짜 감사해요.^^
이 비석을 굳이 찾아가실 분이야 얼마나 되겠습니까. 단지 제 답사 여정의 한 장면을 잊지 않고 싶어서 기록해 두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ㅋ ㅋ
'용뉴 어떻고...' 용어는 제게 넘 어렵구요,
용 두 마리가 입 맞춤하는 모습이네요.
비석 이수와 귀부의 부조상은 제 관심 대상인데 이 부조는 패스 함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