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大韓民國, The Republic of Korea)
수도는 서울이다. 한국(韓國:Korea)이라고도 불린다. 한국이라는 명칭은 남·북한을 통틀어 말하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좁은 의미에서는 대한민국을 가리킨다. 한국을 가리키는 외국어 코리아(Corea, Korea)는 고려 또는 고구려에 대한 중국측 호칭인 고려가 유럽에 전해지면서 표기되기 시작했다.
그밖에도 예로부터 동국·진국(震國)·진역(震域)·해동(海東)·청구(靑丘) 등으로 알려졌고, 관습적으로 나라꽃으로 여겨온 무궁화와 관련하여 근화지역(槿花地域) 또는 근역이라 부르기도 했다.
민족은 대부분이 한민족이며 한국어를 사용한다. 통화는 원을 사용한다.
영토는 아시아 대륙과 일본 열도 사이에 있어 대륙의 중국으로부터 각종 문물을 일찍 받아들여 그것을 독자적으로 키워왔으며, 한편으로 일본에 대륙의 문물을 전수하여 동아시아 문화권의 일익을 담당했다. 그리고 이러한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해 대륙과 바다 양쪽으로부터 도전과 압력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19세기말에는 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를 발판으로 각각 아시아 대륙과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고, 1910년 일본은 한일합방의 형식으로 한반도를 강점했다.
-1919.3.1 3·1독립만세운동 이후 중국의 상하이 등지에서 임시정부가 출현해 일제강점기 동안 지속적으로 저항하며 독립을 위한 투쟁을 했다.
-1945.8.15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였으며, 해방 후 다시 외세에 의해 북위 38°선을 경계로 국토가 분단되었다.
-1948.8.15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에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하고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한반도 전체를 통괄함을 선포했다. 그러나 곧 1950년 6·25전쟁의 동족상쟁을 경험하기도 했다. 1953년 휴전 이후에는 실질적인 통치영역이 휴전선 이남으로 한정되었다.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동중국해를 향해 남쪽으로 뻗은 한반도에 위치하며,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북한과 대치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특히 북방 외교와 바다에 임해 있는 반도적 특성을 잘 살린 조선·중화학 등의 공업입지, 수산·해운업 진흥, 국제 무역항의 개발과 이용 등에 국토의 위치와 지리적 환경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경위도상의 위치는 극동이 경상북도 울릉군의 독도로 동경 131° 52′, 극서가 전라남도 신안군의 소흑산도로 동경 125° 04′, 극북이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송현진으로 북위 38° 27′, 극남이 제주도 남제주군 마라도로 북위 33° 06′이다.
한국의 영토는 9만 9,221㎢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아이슬란드·불가리아·포르투갈·리베리아·쿠바·과테말라·온두라스 등과 면적이 비슷하다. 세계 여러 나라와 비교할 때 남한의 면적만도 그렇게 좁지만은 않다.
영해의 범위는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해안으로부터 12해리를 적용시키고 있다. 섬이 많은 서해와 남해에서는 가장 바깥 섬에서 12해리까지의 바다를 영해로 삼고 있다. 울릉도와 독도에서는 이들 섬의 해안으로부터 12해리, 대한해협에서는 가장 바깥 섬에서 3해리의 수역이 영해로 설정되어 있다. 한편 영해 바깥 대륙붕의 광구설정에서는 서해의 경우 동경 124°를 기준선으로 채택하고 있다.
지질과 지형
지질
지질적 기반은 시생대(始生代)로 소급되는 편마암·편마암류의 변성퇴적암과 이들 지층을 관입한 화강편마암류로 이루어졌다.
이들 변성암은 국토의 40% 이상에 걸쳐 분포하고, 화강암이 국토의 약 30%를 덮고 있다. 화강암류는 대부분 중생대(中生代) 중기와 말기에 관입한 것이다. 퇴적암은 고생대(古生代)초에 퇴적된 조선누층군, 고생대말부터 중생대초에 걸쳐 퇴적된 평양누층군, 중생대말에 퇴적된 경상누층군이 주를 이루며 신생대 지층은 국지적으로만 분포한다.
고생대 이래의 퇴적암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20%이다. 지질구조는 암석의 지역적 분포에 따라 경기·소백산 등의 육괴(陸塊)와 옥천·경상 등의 퇴적분지(堆積盆地) 또는 지향사(地向斜)로 크게 구분된다. 육괴는 고생대 이전부터 계속 육지로 남아 있어 지질적으로 지반이 극히 안정하며, 퇴적분지는 고생대 이후 지반의 융기와 침강이 반복되어 바다나 호소로 변했을 때 퇴적암이 두껍게 쌓인 부분이다.
지하자원의 매장과 관련이 깊은 퇴적암층으로는 조선누층군과 평안누층군이 중요하다.
조선누층군은 옥천지향사대를 중심으로 퇴적된 지층으로서 주로 두꺼운 석회암층으로 이루어졌으며, 강원도 동남부와 이에 인접한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에 분포한다. 삼척·동해·단양·영월·문경 등지의 시멘트 공업은 조선누층군의 석회암을 배경으로 발달했고, 석회동굴의 대부분도 그러하다. 평안누층군은 조선누층군과 거의 같은 지역에 분포하나 분포면적이 협소한데, 삼척·정선·영월·문경 등지의 탄전을 포함하고 있다. 삼척·정선·영월 지방에서 전라북도의 이리지방에 걸쳐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발달된 옥천지향사에서는 조선누층군과 평안누층군으로 이루어진 북동부와 변성 정도가 낮은 시대 미상의 퇴적암으로 이루어진 남서부가 구분된다.
중생대 중기에는 분포면적이 아주 협소한 대동누층군이 쌓였고 충남탄전의 석탄이 이에 매장되어 있다. 대동누층군이 쌓인 후 한반도는 격렬한 단층·습곡 작용을 곁들인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을 받았으며, 화강암의 대부분도 이때 관입하였다. 경상남도·경상북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상분지는 중생대 말기에 거대한 호소였으며, 이곳에 육성층(陸成層)으로서 경상누층군이 쌓였다.
신생대 제3기층은 포항·동해·서귀포 등지에 소규모로 분포한다. 제3기말에서 제4기에 걸친 기간에는 화산활동이 비교적 활발하여 제주도·울릉도·철원 등지에 화산지형이 형성되었다.
산지
국토의 약 70%가 산지이지만 해발 1,000m 이상의 산지는 극히 한정되어 있다.
높은 산지는 동쪽에 치우쳐 분포한다. 그러므로 동해사면은 좁고 급한 반면에 서해사면은 넓고 완만하여 동서 단면이 비대칭적이다. 비대칭적 단면의 경동지형(傾動地形)은 제3기 중엽 이후 지반이 동해 쪽에 치우쳐 융기함으로써 형성된 것이며, 융기 이전에 평탄했던 지형적 유물은 고위평탄면(高位平坦面)으로 곳곳에 남아 있다. 대관령 일대에 펼쳐지는 해발 800m 내외의 고원은 고위평탄면으로 고랭지농업과 목축에 이용되고 있다.
한반도 서부에는 저위평탄면(低位平坦面)이라고 불리는 낮은 구릉지가 넓게 발달되어 있다. 서부지방은 원래 융기량이 적어서 노년기지형에 해당하는 저위평탄면이 빨리 나타나게 되었다.
태백산맥은 한반도의 경동운동으로 형성된 산맥이기 때문에 높고 맥이 뚜렷하다. 소백산맥도 높고 맥이 뚜렷하여 융기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태백산맥에서 남서방향으로 뻗어나간 광주산맥과 차령산맥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비대칭적 경동지형에 주로 지질구조선을 따라 하곡이 파이고 하곡들 사이에 산지가 남음으로써 나타나게 된 2차적인 산맥이다.
따라서 이 산맥들은 서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며, 전반적으로 맥이 불분명하다. 산맥은 교통에 큰 불편을 주며, 산맥 양쪽 지방은 고개 또는 영(嶺)을 통해 이어진다. 영서지방과 영동지방을 잇는 태백산맥의 대관령·한계령·진부령·미시령, 중부지방 또는 호남지방과 영남지방을 잇는 소백산맥의 죽령·이화령·추풍령·육십령 등은 중요한 영들이다.
하천과 평야
한국의 주요평야는 일반적으로 큰 하천 하류에 발달되어 있으며, 하천과 평야의 관계가 매우 긴밀하다.
큰 하천은 서해와 남해로 유입하며, 과거에는 수운(水運)에 널리 이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국토종합개발과 관련된 용수원(用水源)으로 중요하다. 한국 하천들은 여름철의 집중호우로 연간유량의 약 60% 이상이 홍수로 유출되며, 갈수기에는 유량이 크게 줄어들어 유황(流況)이 불안정하다. 하천의 유황은 다목적 댐의 건설로 다소 안정시킬 수 있다. 소양강 댐, 충주 댐 등의 대용량 다목적 댐을 갖춘 한강의 유황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안정되었고, 물의 이용량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심한 집중호우가 내릴 때는 홍수피해를 면하지 못한다.
김포평야·평택평야·논산평야·김제평야·나주평야·김해평야 등 큰 하천 하류의 평야에서는 하천이 토사를 운반해 쌓아 놓은 충적지(沖積地)가 핵심부를 이루고 있다.
충적지는 비옥하고 지면이 평평하여 오늘날은 수리시설이 잘 갖추어져 거의 논으로 이용된다. 집중호우시에 침수피해가 크게 발생하는 곳이 바로 충적지이다. 1920년대부터 일제에 의하여 하천가에 대규모의 둑이 쌓여지고 수리시설이 갖추어지기 이전 한국의 평야는 대부분 수해와 한해(旱害)가 심하여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충적지는 큰 하천의 중상류 지방에도 발달되어 있으나 골짜기를 따라 좁게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평야지대의 충적지 주변에는 기복이 작은 구릉지가 펼쳐지기도 한다. 이러한 곳은 논·밭·과수원·임야 등 토지이용이 매우 다양하며, 충적지와는 토질이 다르고 과거에는 대부분 삼림으로 덮여 있었다. 한편 춘천·원주·충주·대구 등은 하천 중상류의 넓은 침식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산지로 둘러싸인 침식분지는 화강암의 차별침식으로 형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해안선이 국토면적에 비해 매우 길다.
서해안과 남해안은 만·반도·섬이 많아 해안선의 출입이 극히 심하지만 동해안은 비교적 단조롭다. 이러한 차이는 한반도의 지반운동으로 인해 생겨난 것으로 일반적으로 융기해안은 단조로운 반면에 침강해안은 복잡하다. 지반이 침강하면 산지는 반도나 섬으로 남고, 골짜기는 만으로 변한다.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이 끝나는 남서해안은 해안선이 특히 복잡하여 리아스식 해안(Ria Coast)의 세계적인 보기로 꼽힌다.
동해안은 깨끗하고 시원한 사빈(砂濱)이 많이 발달되어 이들 사빈은 해수욕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사빈의 뒤에는 경포·청초호·영랑호·화진포 같은 석호도 나타난다. 동해안의 사빈들은 동해사면을 흘러내리는 하천들로부터 모래를 충분히 공급받아 안정되어 있다. 서해안은 해안선이 복잡하여 사빈이 발달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사빈이 파랑에 의하여 형성되는 지형이므로 주로 태안반도나 안면도에서와 같이 바다로 돌출된 해안에 나타나는데, 이러한 곳은 하천이 유입되지 않아 모래의 공급이 부족하여 서해안의 해수욕장들은 모두 축대를 쌓아 사빈의 침식을 막고 있다.
남해안은 섬이 많아 사빈의 발달이 서해안보다 빈약하다. 해수욕장으로 이용되는 사빈은 거제도·남해도·달산도 같은 섬에 거의 한정되어 있다. 서해안과 남해안은 조차(潮差)가 커서 사빈 대신 개펄 또는 간석지의 발달이 탁월하다. 특히 서해안은 조차가 세계적인 데다가 해안선이 복잡하여 파랑의 작용이 활발하지 않고 하천들이 홍수시에 대량의 토사를 운반하여 개펄이 발달하기에 알맞다.
조차가 큰 해안에서는 하천의 토사가 하구에 집중적으로 쌓이지 못하고 조류(潮流)에 의하여 바다로 제거된다. 하천의 토사 중 모래와 같은 조립물질은 하구 가까이에 쌓여 사질(砂質) 간석지를 형성하고 점토와 같은 미립물질은 조류에 의해 멀리 운반되면서 수면이 잔잔한 만에 쌓여 점토질 간석지를 이루어 놓는다. 개펄의 발달은 한강·임진강·예성강 등의 큰 하천들이 유입하는 경기만이 가장 탁월하다.
기후
기온
한국은 반도국이지만 중위도의 대륙동안에 위치하여 겨울과 여름의 기온차, 즉 한서의 차가 심하다.
겨울에는 시베리아 고기압으로부터 한파(寒波)가 내습할 때 기온이 전국적으로 0℃ 이하로 내려가며, 지역에 따라서는 -15~-20℃까지 떨어져 그 추위가 한대지방의 혹한과 다름없다. 반면에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한여름에는 1일최고기온이 30℃를 웃도는 열대기온의 날이 지역에 따라 오랫동안 나타난다. 최난월(最暖月)은 전국적으로 8월이다. 한서의 차가 큰 대륙성기후 지역에서는 7월이 최난월인 것이 보통이지만 한국에서는 이때가 장마철이기 때문에 기온상승이 억제된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7월과 8월의 기온차는 1℃ 내외에 불과하다. 장마가 끝나고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8월에는 일조량이 급격히 증가하여 더위가 절정에 이른다. 8월평균기온은 전국적으로 24~26℃로 올라간다. 그러나 1일최고기온 30℃ 이상의 고온일수(高溫日數)는 지역차가 상당하여 남부내륙지방이 40일 이상이고 강원도의 산간지방이 20일 내외이다.
최한월(最寒月)인 1월평균기온은 서귀포가 5.4℃, 홍천이 -6.1℃로서 기온차가 상당히 벌어진다. 1일평균기온 0℃ 이하의 일수는 남해안지방이 30일 이하, 강원도의 산간지방이 70일 내외이다. 한편 동일한 위도상에서는 동해안이 서해안보다 높은데, 1월평균기온이 인천은 -3.1℃인 반면에 강릉은 -0.4℃이다.
강수
연강수량이 800~1,500㎜로서 한국은 세계적으로 습윤지역에 속한다.
산지가 많아 저기압이 통과할 때라도 전선성강수에 지형성강수가 결부되는 것이 보통이어서 강수량의 분포가 상당히 복잡하게 나타난다. 섬진강유역을 중심한 남해안의 산간지방이 1,400~1,500㎜의 최다우지(最多雨地)이고 북한강 중상류지방은 1,200~1,300㎜로 제2의 다우지이다. 대구를 중심한 영남내륙지방은 800~900㎜의 소우지(小雨地)로서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으로 둘러싸여 비가 적게 내린다.
강수는 여름에 집중되며, 6~8월의 3개월간의 강수량은 연강수량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특히 장마철인 7월의 강수량은 연강수량의 약 30%에 이른다. 장마는 북태평양 고기압의 확장과 더불어 북상하는 장마전선이 몰고 온다. 장마전선은 남해안지방에서는 6월 하순에 걸치기 시작하여 7월 중순에는 서울지방에 도달한다. 겨울철은 건계로 12~2월의 강수량은 연강수량의 10% 정도이다. 북서계절풍은 한랭건조하나 서해 해상을 통과할 때 습기를 많이 공급받으면 폭설을 몰고 온다.
연강수량은 해에 따라 변동이 심하다. 연강수량이 1,364.8㎜인 서울의 경우 1949년에는 633.7㎜가 내린 반면에, 1940년에는 2,135㎜가 내려 그 차가 무려 1,500㎜에 이른다. 강수량의 변동은 여름 강수에 의하여 좌우되며, 강수량이 적은 해는 한해(旱害), 그것이 많은 해는 수해가 일어난다. 한해는 넓은 지역에 걸쳐 발생하기 때문에 수리시설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그로 인한 피해가 수해보다 심각했다.
옛 문헌에 의하면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말까지 심한 가뭄이 300회 이상 발생했다. 예로부터 수리시설의 확충에 힘을 기울여온 일이나 서양보다 150년 앞서 측우기를 만든 것 등은 심한 강수량의 변동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계절
한국의 기후는 사계의 변화가 뚜렷하다.
중위도의 아시아 대륙 동안, 북태평양 서쪽 연변에 위치하기 때문에 주변지역에서 형성되는 기단(氣團)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기단은 계절의 특색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겨울에는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 부근에 찬 공기가 쌓여 정체성 고기압인 시베리아 고기압 또는 시베리아 기단이 발달하여 한랭한 북서계절풍이 불어온다. 시베리아 고기압은 주기적으로 성쇠를 반복하여 위세를 떨칠 때는 한파가 내습하여 전국적으로 날씨가 맑아지고 기온이 떨어지며, 위축될 때는 기온이 올라가고 이동성저기압이 통과하여 날씨가 궂어진다.
시베리아 고기압의 성쇠는 대략 1주일을 주기로 반복되며, 이로 인해 삼한사온(三寒四溫)현상이 나타난다. 해가 길어지면서 봄이 시작되면, 시베리아 기단은 쇠약해지고 이동성고기압인 양쯔 강 고기압이 한국을 자주 지나가 날씨가 화창해지고, 그뒤를 따라 이동성저기압이 통과할 때는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내린다. 그리고 3월 하순에 접어들면 남쪽에서부터 진달래와 개나리가 피기 시작하여 북쪽으로 올라가는데, 남북간에 약 15일의 차이가 나타난다.
봄에는 중국의 화북지방에서 황사(黃砂)가 불어와서 대기가 매우 혼탁해지며, 가뭄이 계속되어 산불이 자주 일어난다.
태양고도가 점점 높아지면 저위도로 물러났던 북태평양 고기압이 북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해오며, 오호츠크 해 기단과 북태평양 기단 사이에 형성되는 장마전선이 상륙하면 장마철로 접어들고, 7월 중순경에 장마전선이 북한지방으로 올라가면 고온다습한 북태평양 기단의 지배하에 들어가 1일최고기온이 30℃를 넘는 삼복더위가 계속된다.
한여름은 비가 적지만 태풍이 내습하여 더위가 식혀지기도 한다. 태풍은 주로 7~9월에 내습한다. 한국은 대부분 태풍의 진로에서 약간 벗어나며, 강력한 폭풍우를 수반한 태풍은 남부지방에 2년에 1회, 중부지방에 4년에 1회 정도 내습한다. 가을은 9월에 접어들어 시베리아 기단이 발달하기 시작하고 이로부터 떨어져나오는 이동성고기압이 자주 통과하여 맑은 날이 많다. 가을에는 대기가 투명하여 하늘이 높아 보이며 풍부한 일조량은 농작물의 결실에 좋다.
늦가을에는 서리가 내린다. 평균 초상일(初霜日)은 서울지방이 10월 중순, 남해안지방이 11월 중순경으로 남북간에 약 1개월의 차이가 나타난다.
식생과 동물
식생
식물은 대부분이 만주·시베리아·일본열도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인데, 관속식물(管束植物)이 약 4,200종에 이른다.
충청북도의 괴산·음성 지방에 자생하는 미선나무는 세계에 1속 1종밖에 없는 한국의 고유식물로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식생(植生)은 목본식물의 식물상(植物相)을 중심으로 난대림·온대림·한대림으로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다. 난대림(暖帶林)은 연평균기온 14℃ 이상의 남해안지방과 제주도·흑산도 등지에 발달되어 있으며, 동백나무·종가시나무·북가시나무·녹나무·후박나무·구실잣밤나무·모밀잣밤나무 등의 상록활엽수와 실거리나무·팽나무·봄보리나무 등의 난지성 낙엽활엽수가 자란다.
온대림(溫帶林)은 고산과 남해안지방을 제외한 전역에 분포하며, 연평균기온이 13~14℃인 태안반도-영일만을 잇는 선을 경계로 하여 온대 북부와 온대 남부로 구분된다. 온대 남부는 단풍나무·신갈나무·갈참나무·서나무·팽나무 등의 낙엽활엽수, 온대 중부는 연평균기온이 10~13℃인 장산곶-영흥만 이남의 지역으로서 단풍나무·졸참나무·박달나무·신나무·서나무·밤나무 등의 낙엽활엽수가 우세하게 자라며, 온대 북부는 굴참나무·떡갈나무·박달나무·단풍나무·자작나무 등의 낙엽활엽수와 잣나무·전나무·잎갈나무·분비나무 등의 침엽수가 혼생한다.
소나무는 전국 어디에나 분포하는 가장 보편적인 수종이다. 한대림은 한라산·지리산·설악산 등의 고산에 국지적으로 분포하며, 전나무·주목나무·구상나무·잣나무·자작나무 등이 주요수종이다.
식생의 수직적 분포는 한라산(1,950m)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도에서는 대략 해발 500~600m까지를 난대림 또는 상록활엽수림대, 해발 1,500m까지를 온대림 또는 낙엽활엽수림대, 그 이상의 정상부를 한대림 또는 침엽수림대로 구분할 수 있으며, 해발 1,800m 이상의 산정부에는 털진달래·암매·눈향나무·시로미 같은 아고산대(亞高山帶)의 식물이 분포한다.
온대림과 한대림 간의 경계는 지리산 1,350m, 태백산 1,300m, 설악산 1,060m, 금강산 1,200m, 낭림산 1,050m, 백두산 900m로서 북쪽으로 갈수록 낮아진다.
동물
신생대 제4기의 플라이스토세에는 빙기와 간빙기가 반복됨에 따라 범세계적으로 해면(海面)이 100m 이상 여러 번 오르내렸는데, 해면이 낮았을 때는 황해가 육지로 드러나는 한편 중국의 황허·양쯔 강과 황해로 유입하는 한반도의 여러 하천들은 하나의 수계(水系)를 이루었고, 일본의 규슈[九州]와 혼슈[本州]도 아시아 대륙과 이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육상동물과 담수어류는 중국 및 일본의 그것들과 공통되는 것들이 대부분이며, 한국 특산종이 적다. 조류(鳥類)의 경우 중국과 공통된 것이 약 90%에 이르며, 한국 특산종은 울도방울새·뿔종다리·붉은배동고비·울도오색딱다구리·제주도오색딱다구리·크낙새·참수리·들꿩 등 소수의 아종(亞種)뿐이다.
포유동물은 7개목에 속하는 22개과의 105개종 또는 아종으로 나뉘며, 박쥐목·쥐목·식육목이 75개종 또는 아종을 차지한다.
조류는 18개목 65개과 420여 종 또는 아종이 있는데, 참새목·도요목·기러기목·매목이 316개종 또는 아종을 차지하며, 48개종이 텃새이고 266개종이 철새이다. 철새 중에서 112개종은 겨울새, 64개종은 여름새, 90개종은 봄·가을의 나그네새이다. 크낙새는 희귀종의 텃새로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파충류로는 민물에 사는 거북목의 남생이와 자라가 있고, 뱀목에는 도마뱀류의 3개과 9개종 또는 아종과 뱀류의 3개과 15개종 또는 아종이 있으며, 양서류로는 6개과 17개종 또는 아종이 있는데 개구리목이 5개과 14개종을 차지하고 있다.
어류는 23개목 173개과 872개종 또는 아종이 알려졌다. 이중에서 담수어류는 약 150개종으로서 잉어와 가물치가 큰 것들이고, 한강의 황쏘가리와 금강의 어름치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곤충은 약 5,000종이 있는데, 나비목이 약 1,350개종을 차지하여 가장 많고, 딱정벌레목의 장수하늘소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유일한 곤충으로 몸길이가 12㎝에 이르는 것도 있다.
민족
민족
국민은 거의 모두가 한민족(韓民族) 또는 한족(韓族)이라는 하나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한민족이 모두 단군(檀君)의 자손이라고 믿는 것은 한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고조선(古朝鮮)의 첫 임금인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보는 〈단군신화〉에서 연유한다. 그것은 천제(天帝)인 환인(桓因)의 서자 환웅(桓雄)의 아들인 단군이 BC 2333년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을 개국했다는 건국신화이다.
그러나 전세계 인류 중에서 한민족이 차지하는 위치와 민족의 계통분류 및 그들의 이동역사에 따르면 한민족의 형성시기는 훨씬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체적 형질의 특징으로 볼 때, 세계의 3대인종인 황색 몽골 인종(Mongloid), 백색 코카서스 인종(Coca-soid), 흑색 니그로 인종(Negroid) 중에서 한민족은 몽골 인종에 속한다. 한민족은 피부 색깔뿐만 아니라 곧은 머리카락과 짧은 얼굴에 광대뼈가 나오고 눈꺼풀이 겹쳐져 있으며, 둔부에 몽골 반점이 있는 등 몽골 인종의 공통된 신체적 형질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
몽골 인종은 그들의 집단이동과 지역분포에 따라 서로 다른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신체적 형질과 생활양식에 차이가 생겨서 고시베리아족(Paleo-Siberians)과 신시베리아족(Neo-Siberians)으로 구분된다. 그중에서 한민족은 신시베리아족에 속하며, 언어의 특성에 따른 알타이어족(Altaic language family)과 우랄어족(Uralic language family) 중에서 한민족의 언어는 터키족·몽골족·퉁구스족의 언어와 더불어 알타이어족에 속한다.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민족들은 제4빙하기의 후기구석기시대까지 시베리아의 예니세이(Yenisei) 강과 알타이 산 기슭에 살고 있었다. 그후 기온이 상승하여 빙하가 녹으면서 후기구석기시대 및 신석기시대 때 시베리아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했다. 터키족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북쪽까지, 몽골족은 지금의 외몽골을 거쳐 중국의 장성 및 만주 북쪽까지, 퉁구스족은 흑룡강 유역까지, 그리고 한민족은 중국 동북부인 만주 서남부의 랴오닝[遼寧] 지방을 거쳐 한반도 남부까지 이동하여 하나의 단일 민족으로서 초기 농경시대에 정착생활을 시작했다.
이와 같은 한민족의 형성 및 이동 과정에서 발전된 문화는 지금까지 남아 있어 후기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철기시대의 고고학적 유물과 유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역사상 고대의 중국문헌에 나타나는 숙신(肅愼)·조선(朝鮮)·한(韓)·예(濊)·맥(貊)·동이(東夷) 등의 여러 민족들은 그 전부 또는 일부가 우리 한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특히 랴오닝 지방의 한민족은 북부의 초원지대에서 목축을 하는 한편 남부의 평야지대에서 농경을 주로 하면서 농경·목축 문화를 발전시켰고, 한반도 남부까지 내려온 한민족은 자연환경의 조건에 따라 목축을 버리고 농경에만 집중하면서 독특한 청동기문화를 발전시켰다.
이처럼 오늘의 중국 랴오닝 지방과 한반도에서 농경과 청동기문화를 발전시킨 한민족이 하나의 단일 민족으로서 부족연맹체의 족장사회를 통합하여 고대국가를 성립시킨 것이 바로 고조선(古朝鮮)이다. 그 이후 국가가 나누어져서 몇 개의 새로운 독립국가로 분열되었다가 다시 통합되는 역사적 과정은 매우 복잡했지만 민족은 하나의 단일민족으로서 한민족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언어
민족의 동질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언어이다.
우리 한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질은 그들이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는 한국어와 그 언어를 표현하는 문자, 즉 '한글'이다. 현재 남한과 북한은 물론 전세계의 각 지역에 거주하는 한민족의 해외 동포들은 거의 모두가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글을 쓰고 있다. 한국어가 전세계의 언어 가운데서 차지하는 위치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전세계의 3,000여 개 언어 중에서 언어사용인구의 규모로 볼 때 20위 안에 들 정도로 큰 언어라고 평가되고 있다.
또 한국어는 동아시아에서 중국어 및 일본어와 함께 3대 문명어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어와 중국어 사이에는 우리말에 한자 어휘가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유사성이 거의 없다. 한국어와 일본어 간에도 약간의 유사성이 보이기는 하지만 많은 차이가 있다.
한국어는 계통적으로 오히려 터키어·몽골어·퉁구스어를 포함하는 알타이어족과 더 가까운 친족관계를 가지고 있다.
알타이어족은 구조에 있어서 교착어(膠着語)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전치사를 쓰지 않고 후치사인 조사를 쓰며, 성과 수를 표시하는 일정한 규칙이 없고, 모음조화의 현상이 뚜렷하며, 품사의 배열에 있어 동사가 마지막에 오는데 그러한 특성들을 한국어도 많이 가지고 있다.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들 중에서도 한국어는 특히 퉁구스어와 가장 가까운 친족관계에 있다.
한국어가 퉁구스어와 특별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퉁구스어를 사용하는 퉁구스·만주 여러 민족들이 흑룡강 유역을 비롯한 만주지방에 살았다는 지리적 인접성 때문이 아니라 언어의 음운체계(音韻體系)·문법체계·어휘에 있어서 유사성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퉁구스어는 일반적으로 퉁구스만주어 또는 만주퉁구스어라고도 불리며 그 분포 지역은 시베리아 동부, 사할린, 중국의 동북부 만주지역, 신장웨이우얼[新彊維吾爾] 자치구, 몽골 인민공화국의 일부지역 등 광범위하게 걸쳐 있으나 그 언어사용인구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며, 전체를 포함하여 1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금(金)나라를 세우고 한국의 북쪽 땅을 자주 침범했던 여진족(女眞族)의 언어도 퉁구스계의 언어이며, 만주어는 청(淸)나라의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알타이어족 특히 퉁구스만주어와 공통되는 한국어의 구조적 특질은 음운체계와 문법체계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음운체계에서 볼 때 한 단어 안에서 모음들이 동화현상을 일으키는 모음조화가 뚜렷하고, 단어의 첫머리에 오는 자음에 제약이 있는 것은 두 언어의 공통된 특질이다.
즉 한국어는 이미 15세기에 '아, , 오'와 '어, 으, 우' 등 두 계열의 대립이 뚜렷한 모음조화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으며, 단어의 첫머리에 2개 이상의 자음이 허용되지 않았고, '마'와 같은 유음(流音)이 단어의 첫머리에 오는 것을 기피했다. 문법체계에 있어서는 앞에서 알타이어족의 특성으로 지적한 바와 같은 교착어의 특성을 한국어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 때부터 이미 확립된 것으로 알려진 한국어의 경어법(敬語法)은 알타이어족의 다른 언어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구조적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어휘에 있어서도 한국어에는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특수한 어휘가 많다.
한국어는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대의 한국어는 고조선을 비롯하여 부여·고구려·옥저·예 등 북쪽 갈래의 부여계(夫餘系) 언어와 진한·변한·마한을 포함한 삼한의 남쪽 갈래인 한계(韓系) 언어로 크게 나누어진다.
이 2갈래의 언어는 원래 근원이 같은 공동의 조상이 되는 조어(祖語)에서 나왔으나 오랫동안 격리되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분화하는 과정을 겪게 됨에 따라서 차이가 생긴 것으로 풀이된다. 그 조어가 바로 부여·한 공통어(夫餘韓共通語)인데 이것이 오늘날 한국어의 역사를 추적해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단계의 것으로 생각된다. 북쪽 갈래의 부여계 언어는 뒤에 고구려어로 이어지고, 남쪽 갈래의 한계 언어는 신라와 백제의 언어로 이어진다. 이 단계까지는 한국어의 고유 문자를 가지지 못하고 표의문자(表意文字)인 중국의 한자를 빌려 표음문자(表音文字)와 같이 이용한 이두(吏讀) 문자를 만들어 썼다.
이러한 예를 우리는 신라 때의 향가(鄕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하나의 공동 조어에서 분화된 2갈래의 언어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계기로 다시 하나의 언어로 통일되어 당시의 도읍이었던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방언이 통일된 신라의 표준어가 되었다. 그뒤 고려의 건국에 따라 새로운 도읍 개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방언이 고려의 표준어로 바뀌었으며, 그것은 조선에도 그대로 이어져 고려의 중앙어가 오늘의 한국어 모습으로 굳게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어가 하나의 통일된 언어일지라도 지역에 따른 변이(變異), 즉 방언이 다양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제주도는 육지와 멀리 떨어져서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주도 방언에는 육지의 방언과는 다른 옛 말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각 도의 방언이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그중에서 함경도 방언과 경상도 방언이 특히 유사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고려시대 이후 경상도 사람들이 함경도로 많이 이주한 역사적 사실이 반영된 것으로 짐작된다.
또 각 지역의 방언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제주도 방언을 제외하고는 한국어의 방언들이 일상적인 회화에 소통되지 않는 것은 거의 없다. 조선시대 초기에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로 한국어는 한글이라는 고유한 문자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국어는 소리와 문자가 변화를 겪어 몇 개의 글자와 사성(四聲)을 나타내는 방점(예컨대 ㆆ, ㅸ, △, ㆁ, ㆍ 등)이 없어졌고, 한일합병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어와 한글을 쓰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한편 한국인에게 일본어를 강제로 쓰게 하는 등 언어의 수난을 겪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남한과 북한이 정치적으로 갈라져서 언어의 이질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해방 직후에는 일제강점기의 언어탄압정책의 영향으로 한동안 일본어의 잔재가 우리말에 남아 있었고, 남한에서는 급격한 산업화와 근대화의 물결에 따라 새로운 문물·제도·과학기술의 도입과 더불어 영어를 비롯한 서구의 외래어가 분별없이 들어와 한국어와 혼용되는 경향이 있으며, 북한에서는 러시아와 중국어의 영향 및 북한 자체의 언어정책에 따라 분단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언어가 이질화되어가고 있다.
우리 민족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때그때의 환경과 생활형편에 적합한 종교적 신앙과 의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주위의 다른 민족들과 접촉하는 가운데 그들로부터 새로운 외래 종교를 받아들여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종교사상에 맞도록 그것들을 변용시켜왔다. 오늘날 한국에는 국교(國敎)가 없고,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정부통계에 따르면 한국에는 각종 교단(敎團)의 수가 255개이고(2001), 교당(敎堂)의 수는 4만 9,935개이다(1999). 또 1999년에 실시한 인구 및 주택 센서스 조사결과에 의하면 신도의 수는 종교인구 대비로 볼 때 불교(23.1%), 개신교(19.66%), 천주교(6.62%)로 나타났다.
종교적 신앙과 의례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볼 때 우리 민족의 고대 원시신앙은 고조선의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천신(天神)을 믿고 산천과 조상의 영혼을 숭배하며 무속(巫俗)을 행하는 것이었다.
단군신화의 환인은 천제였으며 고대 한민족의 신앙 대상이었다. 단군도 인간으로 화신하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사상 때문에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I天)은 모두 한 해의 농사를 마치고 천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의(祭儀)에는 집단적인 가무와 음주가 행해졌는데, 당시의 사람들은 그러한 의례를 통하여 신과 인간과 자연 사이에 질서와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었다. 또 고대 한국인의 원시신앙은 지금까지도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무속과 거의 일관된 사고의 구조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무속의 원형으로 생각되고 있다.
삼국이 정립된 뒤에는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고 도교를 받아들여 태학과 국학을 세우고 태학박사·오경박사·의(醫)·역(易) 박사제도를 두어 귀족 자제들에게 유교의 경전을 가르쳤다.
특히 신라에서는 유교·불교·도교의 원리를 바탕으로 풍류도의 단체정신이 매우 강한 화랑도(花郞徒)의 청소년 집단을 만들어 교육·군사·사교 단체의 기능을 강화하는 동시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삼국통일에 크게 이바지했다. 통일신라는 사찰·불상·탑 등의 찬란한 불교문화를 이룩하여 그 유물이 지금까지 전해져서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것들이 많다. 불교의 교세는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거란·여진·몽고의 침입에 대한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성격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불교가 국교로서 더욱 보호되고 장려되었다.
〈팔만대장경〉의 조판은 그러한 호국불교의 염원에서 착수된 것이며, 인쇄술의 발달을 자극하여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에서는 유교와 한문학의 교양을 지닌 사람을 등용하기 위한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승려에게 출세의 길을 마련해주기 위해 승과(僧科)라는 국가시험제도를 두었고, 사원에 토지와 노비를 급여하고 면세와 면역의 특전을 베풀어 사원경제가 팽창했으며, 승려들은 귀족의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또 신라 말기에 중국에서 들어온 풍수지리(風水地理)사상이 크게 유행했다.
이것은 지리도참설이라고도 하는데, 귀족들의 생활원리에 침투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과거제도에 지리과(地理科)가 생기기도 했다.
조선왕조는 처음부터 유교를 국가의 지배적인 통치이념으로 삼아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의 원리에 따라 문물제도를 갖추었다. 중앙에는 성균관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향교와 서원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제사를 행했다. 유교는 종교적 신앙과 윤리적 실천의 2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유교의 종교적 신앙과 의례는 천지의 교사(郊社)에 대한 제사와 조상의 조묘(祖廟)에 대한 제사 및 성현들의 문묘(文廟)에 대한 제사로 집약되었다. 이러한 제사 의례는 형식을 매우 중요시했다. 삼강오륜과 같은 유교의 윤리적 실천 강령을 행동과 생활의 규범으로 삼고 실행에 옮긴 것은 주로 양반의 상류계층이고, 평민인 일반 민중들은 오랜 전통의 관행에 따라 천신을 비롯하여 산천과 조상의 영혼을 숭배하고 무속을 행했다. 유학자들은 옥황상제·칠성·염라대왕·사해용신·신당 등을 신봉하는 도교적 소격서(昭格署)의 혁파를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민간에서는 물론이고 왕실에서조차도 도교의 신봉이 여전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관념적·형식적인 주자학(朱子學)에 반대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실사구시(實事求是)·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는 실학파가 나오고, 서양의 천주교도 온갖 박해와 순교 끝에 수용되었다. 이어서 그리스도교 여러 교파의 개신교들이 들어와 한국인의 종교적 신앙뿐만 아니라 서양교육과 의술을 전파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한국의 천주교 전래는 중국 북경의 예수회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간접적인 전파가 이루어졌으나, 17세기초부터 들어온 한역서학서를 통해 서학을 연구하는 가운데 천주교 신앙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입국하면서 천주교의 전파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개신교도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K. F. A. 귀츨라프, A. 윌리엄슨, R. J. 토머스 등에 의해 성서의 번역과 배포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1885년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의 전복음셔언〉을 가지고 H. G. 언더우드와 H. G. 아펜젤러가 입국하면서 각 교파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본격적으로 교육·의료 사업과 농촌운동을 실시하고, 조선의 봉건사회를 개화시키며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의 초기 천주교와 개신교는 조선사회 전통과의 이질감 때문에 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일제강점기 때 기독교회와 천주교의 반일성과 애국성, 그리고 조선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는 선교사들을 통하여 민족교회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되었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성장과 함께 교파가 분열되고,이에 반한 소종파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곧 교회일치연합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적·정치적 변화에 접하게 되면서 상실된 자아확인과 정신적인 피난처를 위한 종교적 동기가 강하게 작용하여 한국 기독교는 놀랄 만한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이러한 교회의 양적 성장은 그 내적 순수성과 도덕적 차원, 신의(神意)를 토대로 한 사회정의실현의 주체적 원동력이라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일부 교회와 교인들의 기복적 신앙, 반지성적 무아상태의 신앙, 교회의 상업화·기업화·대중화, 일부 교역자의 부패 등이 부조리로 지적되었다.
이밖에도 정치적 불안정과 사회적 혼란이 고조되었던 조선시대 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현실생활의 불안과 위기의식을 극복하고 새로운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정감록(鄭鑑錄)과 십승지(十勝地) 기타 후천개벽사상들이 민간에 침투하여 여러 계통의 신흥종교 교단들이 형성되었다.
한국의 신흥종교는 계통으로 볼 때 동양의 유교·불교·도교 계통과 서양의 그리스도교 계통에서 파생된 것과 단군계를 비롯하여 동학계·무속숭신계·증산계·봉남계 등 한국에서 발생한 것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계통이 국내·외, 동·서양의 어느 것이든지 간에 한국의 신흥종교들은 한국에서 새로운 이념이 첨가되었거나 기존의 교리를 고치고 바꾸어 새로운 내용의 것으로 변용된 것들이다. 이러한 신흥종교들은 일부 기성종교들의 진부한 신앙을 지양하고 신도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는 동시에 민족정기를 북돋아주는 기능을 가지기도 하지만, 말세의 구제와 이상세계의 개벽을 내세워 혹세무민하고 사회를 더욱 어지럽게 하는 역기능도 가지고 있다.
총체적으로 볼 때 한국의 종교는 역사상 왕조의 교체와 더불어 새로운 지배이념으로 등장해왔고, 이에 따라 서로 다른 종교들 사이에 알력과 갈등이 계속되었으며, 외래의 종교라도 한국에서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무속과 여러 종교사상들이 습합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인구와 취락
남한의 총인구는 4,700만 8,000명이다(2000.7.1 기준).
이는 1990년 센서스 결과에 비해 1.95% 증가한 수치이다. 인구의 자연증가율은 1960년의 3%에서 점차 낮아져, 1970년에는 2% 수준이던 것이 1990년에는 1.5%, 그리고 2000년에는 0.9%로 떨어졌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1세대 정도 계속되어, 2030년경총인구는 7,858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통계청, 1999). 출생률의 저하는 주로 출산력의 감소에 기인한다. 여자 1명이 가임기간 동안에 낳는 자녀 수의 평균치인 합계출산율은 1960년에 6.0명이었던 것이, 그후 급격히 감소하여 1984년부터는 대체출산력(여자 1명당 2 자녀) 수준 이하로 떨어졌다.
1998년 1.5명, 2000년 1.47명으로 선진국의 합계출산율보다 낮다. 사망률은 1960년에 1.21%였던 것이 점차 낮아져 1990년에는 0.58%, 2000년 0.52%로 떨어졌다. 앞으로 노인 인구가 많아지면서 사망률은 다소 높아질 것으로 보이는데, 통계청의 추계로는 2021년에 0.97%까지 올라갈 전망이다. 평균수명은 2000년 현재 남자 72.0세, 여자 79.5세이며, 2020년에는 남자 77세, 여자 84세로 늘어날 전망이다. 1989년부터 실시된 전국민 의료보험 제도와 의료기술의 발달 덕분에 평균수명은 기록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인구의 성별·연령별 구조를 보면, 인구 피라미드의 유형이 피라미드형에서 항아리형으로 변모되고 있음이 확연하다.
이는 인구의 발전단계가 제2단계인 다산소사의 급증형을 지나 소산감사의 증가형인 제3단계를 거치고 있으며, 머지 않아 소산소사의 제4단계 정체형에 이를 것임을 예측하게 한다. 그리하여 전술한 바와 같이 1세대 후인 2020년경에는 전형적인 서구형의 인구구조를 갖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인구의 연령별 구조에는 해방 전후와 6·25전쟁의 인구손실 및 출산율 저하, 그리고 뒤이은 베이비붐이 현저하게 영향을 미쳤고, 이들 시기에 출생한 인구의 자녀 세대의 인구구조에까지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연령별 인구구조의 변동 추이를 보면, 1970년대를 기점으로 유년층(0~14세)의 비율이 낮아지는 반면, 경제활동 연령층(15~64세)의 비율은 상승하고 있다.
1960년에 총인구의 42.3%였던 유년층 인구 구성비는 1970년에는 42.5%로 미증했다. 그러나 이는 1980년에는 34.0%로 감소했고, 1990년에는 다시 25.8%로, 그리고 2000년에는 21.7%로 격감했다. 또 경제활동 연령층은 1960년에 54.8%, 1970년에 54.4%였던 것이, 1980년에는 62.2%, 1990년에는 다시 69.2%로 늘어났고, 2000년에는 71.2%로 늘어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뚜렷한 현상은 노년층(65세 이상)의 구성비가 현격하게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1960년에 2.9%에 불과했던 노년층의 구성비는 1970년에 3.1%로, 1980년에는 3.8%로, 그리고 1990년에는 5.0%, 2000년에는 7.1%로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변화의 추이, 즉 유년층의 감소와 경제활동연령층의 미증 및 노년층의 급증 추세는 출생률의 감소와 평균수명의 증가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2020년경까지 앞으로 적어도 1세대 동안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 말은 한국 사회가 노령화 사회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경제활동인구에 대한 유년인구와 노년인구의 부양비를 보더라도, 1960년에 각각 77.3%와 5.3%였던 것이 1990년에는 33.7%와 7.2%로 변했다. 그리고 2021년에 이르면, 유년인구의 부양비는 22.2%로 줄어드는 대신 노년인구의 그것은 18.4%로 크게 늘어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인구구조의 변화가 노령화 추세를 지속하게 되면, 갖가지 사회문제가 이제까지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나타나게 된다. 가령 학령인구가 초·중·고등교육으로 가면서 차례로 줄어들어 교육의 양적 기회확충이라는 지금까지의 교육 부문의 주요과제는 앞으로는 질적 기회의 제고라는 새로운 과제로 대두될 것이다.
또 그동안 덮어두었거나 형식적인 겉치레에 그쳤던 노인복지의 문제가 사회보장에 관한 정책의 가장 중요한 논점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 예상된다.
당장은 크게 눈에 띄지 않으나 점차 심각성을 더해가는 문제로는 남녀 인구구성의 불균형을 지적할 수 있다. 결혼적령인구(남자 25~29세, 여자 20~24세)의 성비를 보면, 1960년에 78.6이었던 것이 1990년에는 104.7로 무려 26.1이나 높아지고 있다. 이는 신생아의 출생성비를 비교해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1990년의 0~4세 인구의 성비는 113.1이나 되고 있다. 이는 출산력 저하현상과 전통적 남아선호 의식이 맞물려서 작용한 결과로 최근에는 출산 전 태아 성판별이 용이해지면서 더욱 심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비의 불균형은 앞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적잖은 문제를 야기시킬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출산행태는, 그간의 가족계획 만능의 정책에 덮혀 제대로 논의되지도 않은 채 사회적으로 정당화되어왔지만, 윤리적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산업별 인구구조의 변화는 그간의 한국의 경제발전과정을 잘 반영한다.
산업별 인구구성비의 변화를 보면, 1960년에 1차산업 66.6%, 2차산업 8.5%, 3차산업 24.0%였던 것이 1970년에는 각각 50.5%, 14.3%, 35.2%, 1980년에는 34.0%, 22.6%, 43.4%로 변했다. 즉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는 1차산업 인구가 급감하는 대신 2차산업 인구가 두드러지게 증가했다. 이것이 1990년에는 1차산업 18.3%, 2차산업 27.3%, 3차산업 54.4%로 변하여, 산업화가 성숙단계에 접어들면서 1차산업의 비중은 계속 감소하는 대신 3차산업의 비중이 커짐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당분간 더 지속되어 점차 선진국형에 접근하게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인구의 국외 이동은 조선시대 말기부터 시작되었는데, 초기에는 간도 및 연해주 지방으로 상당한 이민이 있었고, 20세기초에는 하와이로 가는 계약이민까지 있었다. 그후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강제 또는 반강제적으로 많은 인구가 해외로 떠나갔다. 8·15해방 직전까지 만주와 중국에 약 220만 명, 소련의 연해주, 사할린, 중앙아시아 등지에 약 30만 명, 일본에 약 200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었다.
지금도 중국에 약 150만 명, 일본에 약 60만 명, 소련에 약 30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다. 1962년 해외이주법이 제정된 이후 현대적 의미의 이민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세계 여러 나라에 100만 명에 가까운 교민이 진출해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타운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8·15해방과 6·25전쟁은 유례없는 인구의 대이동을 초래했다.
해방 직후에는 북한에서 약 180만 명의 인구가 월남했고, 일본·중국 등 해외에서 약 160만 명의 동포가 귀국하여, 모두 350만 명에 가까운 인구의 사회적 증가가 이루어졌다. 또 6·25전쟁중에 다시 100만 명 이상의 피난민이 월남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인구의 대이입은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는데, 특히 대부분의 이입인구가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지역에 정착하여 도시문제를 더욱 가중시켰다.
한국의 인구밀도는 1910년에 약 60명/㎢이었으나 1935년에 100명/㎢을 넘어섰다.
남한의 인구밀도는 1949년에 200명을, 1967년에는 300명을 넘어섰고, 1990년 432명, 2000년 476명으로 세계 3위의 고밀도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구가 국토에 균등하게 분포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인구분포를 설명하기 위해 매우 단순하면서도 유용하게 사용되어온 모델은 신의주와 포항을 잇는 선을 긋고 그 대각선을 기준으로 하여 한반도를 동북부와 서남부의 2부분으로 가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주로 지형적인 조건에 따라 인구가 희박한 고원 및 산악지역과 조밀한 하천분지 및 평야지역을 대비시킨 것으로, 농경사회에서의 식량생산과 취락 발달의 관계를 토대로 인구의 분포를 설명한 것이다. 이 모델의 설명은 오늘날에도 기본적으로 틀리지 않다. 그러나 8·15해방과 6·25전쟁, 그리고 무엇보다도 1960년대 이후의 급속한 산업화·도시화와 그에 수반된 인구이동의 결과, 인구의 분포는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8·15해방 당시 14.5%에 지나지 않았던 한국의 도시화율은 1960년에는 35.8%, 1970년에는 49.8%로 늘어났다.
이어 1980년에는 57.2%로 늘어나 도시 거주인구의 수가 총인구의 절반을 넘어섰으며, 1990년 79.4%, 1996년 87.1%로 늘어나 사실상 도시 사회로의 개편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행정구역의 변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8·15해방 당시의 부(府:지금의 시에 해당하는 행정구역)로는 경성(서울)·인천·개성·대전·전주·군산·광주·목포·대구·부산·마산·진주·해주·평양·진남포·신의주·함흥·원산·청진·나진·성진의 21개 도시로, 그 중 12개(개성 포함)가 남한에, 그리고 9개가 북한에 있었다.
1996년 현재 남한에는 서울특별시와 부산·대구·인천·광주·대전의 5개 광역시 및 72개 시를 합쳐 모두 77개의 시가 있다. 그에 비해 8·15해방 당시 134개였던 군은 1995년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군과 시가 통합되면서 93개로 줄어들었다. 그간의 도시화는 이처럼 도시의 수가 늘어나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기존의 도시, 특히 대도시를 향한 인구의 집중에 의해 선도되었다.
대도시의 성장은 기반 산업의 발달과 고용기회의 창출에 의해서라기보다 이농인구의 집중에 의해 이루어짐으로써 전형적인 제3세계의 도시화 과정을 거쳤다.
2000년 현재 우리나라의 6대도시 인구는 2,123만 명에 이른다. 이들 도시의 인구는 1980~85년 사이의 5년간에 17.6%, 그리고 1985~90년의 5년 동안에는 12.7%가 증가함으로써, 같은 기간 동안 나머지 9개 도와 시의 인구증가율 1.2%와 3.3%를 각각 크게 웃돌고 있다.
그러나 대도시의 인구증가를 지배적으로 주도한 것은 서울과 수도권의 인구 증가이다.
서울을 향한 인구와 기능의 과도한 집중은 한국의 국토구조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크고 어려운 문제이자 한국 공간정책의 기본적인 과제이다. 2000년 현재 수도권의 인구는 총인구의 절반에 달하며, 그 중 서울의 인구가 985만 3,972명, 인천의 인구가 246만 6,338명, 경기도 인구는 928만 13명(외국인 포함)에 달한다. 8·15해방 당시 인구 90만 명에 불과했던 서울의 인구는 1960년에 240만 명에 이르렀고, 2000년 현재 1,000만 명에 가까운 거대도시가 되었다.
대체로 1970년을 기점으로 총인구에 대한 도시거주인구의 비율이 절반에 이르게 되었고, 이때부터 서울의 인구는 500만 명을 넘어섰다. 이제 서울은 거대도시의 과대·과밀 문제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고, 국가의 지역정책 기조에도 서울의 인구분산이 주요과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로 공공기관의 지방이전, 공업입지의 분산, 서울 시내 대학 입학정원의 증원 억제 및 지방 쪽에서의 상응한 투자촉진 및 육성책이 행해졌다.
그러나 정치권력과 경제력이라는 힘의 분산을 동반하지 않는 인구와 산업입지의 분산책은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서울로의 집중은 날로 가속화되어갔고, 이 무렵부터 서울의 교외화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즉 서울의 인구증가율 자체는 다소 완화되기 시작하지만, 주변의 인천·수원·안양·의정부 등 위성도시들이 급성장하게 되고, 성남·부천·과천·광명·안산·구리·고양·시흥·군포·의왕·하남·일산·분당·평촌·산본 등이 모두 1970~90년대 이후 새로 시로 승격하거나 신도시로 건설되어 사실상 서울의 거대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서울의 성장과 수도권의 거대도시화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급속히 이루어졌다.
그것은 한국의 도시화 자체가 산업화와 함께 급속히 진전되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도 서울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점하는 지배적 위치가 공간적 집중을 가속화시켰다는 데에서 보다 직접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서울은 조선시대 이래 600년 동안 한국의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의 중심지였으며,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계획에 있어서도 불균형개발전략의 선두에서 혜택을 받은 개발거점이었다. 정치·경제 부문에서의 의사결정권의 집중은 필연적으로 사회 전부문에 걸쳐 기능의 공간적 집중을 불러왔다.
지방자치가 실시되고 있지만, 서울은 정치적 권력의 전부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도 기업체본사 분포, 총매출액, 금융여신, 대학생수, 연구인력, 연구개발비, 투자총액 등의 전국대비 비율로 볼 때 상당히 높은 비율을 차지하여 한국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이른바 한국 국토의 독과점적 공간구조는 서울의 종주도시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들의 이러한 급속한 도시화는 도시산업의 발달이 성숙되지 못한 데다 도시 기반시설이 미비한 상태에서 장기 도시계획의 수립을 앞질러 진행되었고, 따라서 실업·빈곤·교통혼잡·주택부족·환경오염·범죄증가 등 각종 도시문제를 유발하고 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도시들의 급성장과 부산·대구·광주·대전 등 지방 대도시들의 부상, 그리고 포항·울산·마산·창원·여천·구미 등 동남권 신흥 공업도시들의 비약적 성장에 비해 나머지 지역의 중소도시들은 미미한 성장을 보이거나 정체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시의 수가 배가되기는 했으나, 전술한 수도권의 위성도시들 및 동남권의 신흥공업도시들을 제외하면, 동해·태백·나주와 같이 인접도시의 행정구역 병합에 의해 인구수를 채운 도시들, 삼척·제천·문경과 같은 광산 도시들, 송정·영천·김해·경산·밀양과 같이 지방 대도시의 외연적 팽창에 힘입은 인접 위성도시들, 그리고 아산·보령·서귀포 등 관광도시들이 그 대부분을 차지했다. 농어촌지역의 중심지로는 영주·정읍·남원·공주·상주·서산·김제 등 소수의 전통적 행정중심지들이 약간의 인구증가와 주변 행정구역의 편입으로 가까스로 시로 승격했을 뿐이다.
도시화는 농촌지역의 인구유출을 초래했다.
1970년대 중반을 고비로 한국의 농촌지역 인구는 절대감소하고 있다. 1960년 농가인구는 1,424만 2,000명으로 총인구의 56.9%였으나 1980년에는 1,082만 7,000명으로 총인구의 28.4%를 차지했으며, 그 이후 계속 감소하여 1990년666만 1,000명으로 총인구의 15.5%, 2000년 403만 2,000명으로8.7%에 불과하게 되었다. 수도권과 남동임해공업지역 및 제주도를 제외한 전지역에서, 심지어 농촌생활권의 핵심적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읍까지도 대부분 인구의 절대감소를 겪고 있다.
농촌 인구의 절대감소는 농촌 인구압의 완화 및 농가당 경지규모의 확대라는 긍정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크고 심각한 몇 가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지나치게 빨리 진행된 데에서 야기된 부작용이기는 하나, 그러한 결과가 도시와 농촌의 양쪽 모두에 부담을 지우는 쪽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단순한 인구이동 차원의 문제를 넘어서고 있다. 즉 대도시 쪽에는 고용과 기반시설의 측면에서 수용능력을 넘어 인구가 집중하는 데에서 과대·과밀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고, 농어촌지역에는 젊고 교육받은 인구의 선택적 유출로 발전잠재력 자체가 황폐화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특히 경제활동 연령층의 급속한 유출은 농촌인구의 노쇠화를 재촉했고, 그결과 농어촌지역의 사회경제적 활력은 급격히 떨어지게 되었다. 이는 지역의 수요밀도를 전반적으로 낮추게 되어, 정치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선거 기반과 교육, 대중교통을 비롯한 공적·사적 서비스의 입지기반을 약화시키고 마침내 그 질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버스 노선이 축소·폐쇄되고, 학교가 분교로 전락한뒤 곧 폐교되며, 마을마다 빈집이 늘어가는 등 사회적 휴경지가 증가하고 있다. 말하자면 '인구유출 → 생활환경 악화 → 인구유출의 악순환'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농어촌의 발전을 이끌어갈 젊고 의욕적인 인구집단이 결여되어 있어, 새로운 기술의 혁신을 스스로 이룩하거나 받아들일 잠재력도 고갈된 형편이다. 여기에다 최근 우루과이라운드로 상징되는 농수산물 시장의 개방추세는 전통적 농업의 생존기반마저 위협하고 있어, 사실상 한국의 농어촌 지역은 정상적 생활공간으로서의 존립 자체까지 위협받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70년대 이후 새마을운동이 농어촌 소득증대와 생활환경개선에 이바지했고, 지금은 농어촌구조개선이라는 이름 아래 농어촌정주권개발사업 등이 추진되고 있으나, 투자의 규모로 보아 대세를 바꾸어놓을 수준이 되지는 못한다.
지역간·도농간 격차를 해소하고, 균형된 발전을 이룩할 새로운 공간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은 한국의 지역정책이 당면한 최대의 과제이다. 한편으로 대도시의 과대·과밀 문제를 해소하고, 다른 한편으로 농어촌지역에 현대사회를 능동적으로 수용할 새로운 취락체계를 창출해내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양자는 사실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서로 현상을 달리하는 같은 문제이기도 하다.
경제
개요
한국경제는 지난 30~40년 동안 크게 성장했다.
1962년 이후 GNP가 해마다 실질적으로 평균 8% 이상 성장하여 1968년 1만 6,530억 원, 1978년 24만 630억 원, 1988년 131만 3,710억 원, 1996년 386만 6,404억 원이 되었다. 이로써 유량(流量:flow)으로서의 GNP와 상당 수준에 달할 지하경제만으로는 한국경제가 고소득국에 크게 뒤지지 않게 되었다.
1인당 GNP도 경제개발계획을 시작한 1962년에는 87달러에 불과했으나, 1970년 252달러, 1980년 1,592달러, 1990년에는 5,569달러, 1997년 1만 550달러로 비약적인 증가를 보였다.
물론 저량(貯量:stock)으로서 부(富)는 아직도 선진국경제와 차이가 많다. 우리의 소득이 아무리 빨리 증가해도 선진국들이 작게는 100년에서 크게는 300년간 축적한 부를 단기간에 따라잡기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경제는 질적으로도 단순한 농업 중심의 국가에서 신흥공업국가가 되었는데, 산업구조면으로 볼 때 1970년만 해도 GNP의 26.5%를 차지했던 농림어업은 공업화와 더불어 계속 감소하여 1990년 9.1%, 2000년 4.7%에 불과했다.
한편 제조업은 1970년의 21.1%에서 꾸준히 증가하여 1988년에 32.5%로 높아졌다. 그러나 노사분규·임금상승 등으로 경쟁력이 약화되고 서비스 산업이 확대되어 1990년에는 29.2%로 약간 낮아졌다가 2000년에는 31.3%로 다시 올라갔다.
소득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저축률도 높아져 1970년에는 18.0%에 머물던 국내총저축률이 1980년에는 23.1%로 오르고 1990년에는 35.3%가 되었다. 그러나 1997년33.4%로 낮아지면서 2000년 32.3%, 2001년 29.4%로 계속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표6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80년대 중반까지는 국내저축으로 경제성장을 위한 소요자본 조달이 어려워 외자를 투자재원으로 사용했으나 1986년부터는 저축이 투자를 초과하게 되어 남는 재원을 해외에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다시 국내저축으로는 투자재원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해외자본으로 부족분을 충당하고 있다.
한국은 선진국이 과거 200~300년간에 걸쳐 이룬 성장을 20~30년간에 이루었다는 의미에서 압축적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경제를 막론하고 경제성장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하는데, 이 4가지 조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결여되어 있다면 성장은 그만큼 어려워진다.
첫째, 경제를 성장시키려는 의지, 둘째, 기술과 지식의 축적, 셋째, 일반 국민의 왕성한 저축성향과 기업의 충분한 투자의욕, 넷째, 새로운 기술과 경영방법을 개발함으로써 이윤을 얻고, 그 과정에서 국민의 소득을 증가시키고 국민경제를 성장시키는 기업가의 정신자세가 건전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 30여 년 간 한국의 경제성장이 크게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곧 위의 4가지 조건이 대체로 골고루 구비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밖에 한국의 경제성장에 동력을 제공한 또 하나의 요인은 유리한 국제환경이다.
1960년대에는 UN이 설정한 '개발의 10년대' 때문에 선진국 시장이 많이 개방되어 덕을 보았고, 1970년대에는 오일 쇼크 이후 중동에 쌓인 오일 머니가 국제금융시장으로 흘러들어가서 이것을 우리가 빌려 쓸 수 있었으며, 1980년대에는 '3저현상'이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객관적 조건과 요인이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해도 사회구성원 간의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경제성장은 이룰 수 없다.
지난날 한국의 경제성장과정에서 정부는 기본 전략을 세워 이를 집행했고, 기업가는 여러 가지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도 자본과 노동을 동원하여 생산을 조직했으며, 노동자는 일하려는 강한 욕구, 규율,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잠재력을 보여주며 쉬지 않고 일했다.
이들의 협력이 없었거나 또 이들 가운데 어느 한 쪽이라도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면 한국의 경제 성장은 훨씬 지연되었을 것이다. 물론 시행착오와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부는 사회의 모든 부문을 통제했으며 각종 낭비와 왜곡을 초래하기도 했다. 최고 엘리트가 성장목표를 설정하고 전문기술관료공무원들이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창안하는 가운데 이들이 펼친 성장의 시나리오가 1970년대의 과잉·중복된 중화학공업 투자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의 대외지향적 성장전략은 적절한 것이었으며, 자동차·조선·전자 부문 등에 대한 투자 역시 1970년대에는 과잉으로 보이기도 했으나 다행히도 1980년대에는 수출의 기반이 되어 국제수지 흑자달성에 기여했다.
기업은 정부의 세제·금융 특혜 속에서 성장했고 비생산적인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린 것도 사실이나 경험도 없는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어 성장을 가속화하고 이 과정에서 고용을 창출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성장 과정에서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노동자였다. 노동자들은 아직도 산업사회의 직업윤리를 확립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악조건 속에서도 마치 일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열심히 일했다. 정부나 기업이 여러 가지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급속히 성장한 것은 바로 이들의 부지런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과소비 등으로 미루어볼 때 경제를 성장시키려는 의지가 반감되었고, 자체기술을 개발하지 못한 상황에서 선진국들의 기술보호정책으로 기술도입이 어렵고, 기업의 투자의욕도 저하되었다. 또한 고급인력은 과잉공급 되고 있지만 고급노동력이 부족하며 임금은 점점 올라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단순 기업경영이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국제환경도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세계질서의 재편과정에서 구서독 경제의 초점이 구동독 및 동구로 향하고, 미국은 아직도 만성적 적자에 허덕이고 있으며 일본도 금융긴축을 행하고 있어 국제금융시장이 우리에게 크게 불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자유무역의 새로운 국제경제질서를 창출하려는 노력(예를 들어 우르과이라운드)은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며, 더 나아가 국제경제의 불확실성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면 과거에 급속한 성장을 가능케 했던 요인은 마모되고 있는 반면 새로운 성장요인은 배양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과거 성장의 과실이 분배되는 과정에서 소외된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 빈곤감에 허덕이고 있다.
소득분배에 대해서는 국내에서의 실증적 연구가 제한적인 데다가 그나마 존재하는 연구결과들은 당사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입수가능한 통계자료가 안고 있는 양적·질적 결함 때문에 분배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한 토대로 사용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을 전제로 할 때 계수상으로 나타난 분배상황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거나 한국 자체의 시계열 분석상으로 볼 때 각각 상대적으로 양호하거나 또는 최소한 크게 악화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한국의 가구소득 분포상태는 1980년대에 들어서 불평등의 정도가 점차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득분배구조에 대한 강한 불만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이유는 첫째, 공식통계에 잡힌 소득과 실제 소득과의 차이가 클 뿐만 아니라 고소득층일수록 공식통계에 잡히지 않은 소득이 큰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소득분배에 관한 통계숫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실제로 돈 잘 버는 자영업자들이나 자산가들의 소득을 포착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소득분배에 관한 여러 연구들의 분석결과는 실제의 분배상태보다 좋게 나타났다고 본다. 둘째, 경제성장 과정에서 근로자들이 감수해온 장시간 노동과 빈번히 발생하는 산업재해를 감안할 때 상당히 높은 임금소득도 근로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불평등한 것이다. 상대적 빈곤감의 확산은 경제주체들 간의 협력체제를 허물어뜨리고 있다. 사실 지난날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경제구성원 간의 협력체제는 매우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난날의 협력체제는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정부의 물리적 강제력과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의해 뒷받침된 '강요된 협력체제'였지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 일련의 민주화 과정을 통해 강압적 국가장치가 소멸된 현재 상황에서 사회 구성원들에게 과거와 같은 협력체제를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강요된 협력체제를 '자발적 협력체제'로 전환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한국경제의 과제이다. 자발적 협력체제는 절대적·상대적 빈곤감을 해소하고 경제적 형평을 달성할 때에 가능하다.
그러므로 경제적 형평의 달성은 한국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필요조건이다. 한편 경제적 형평의 달성은 과거에 압축적 성장과정에서 배태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19세기 서구의 성장은 갈등을 흡수하는 점진적 과정을 밟은 데 비해 한국에서는 성장과정에서 누적된 욕구와 불만이 압축되어 나타났다. 따라서 이 문제들은 압축성장과정에서 갈등구조를 심화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정부와 기업이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자세로서 적극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문제는 매우 복잡하여 용이한 대책을 세우기가 쉽지 않다.
과거에는 성장·안정 등 목표가 비교적 단순했고, 금융·재정·무역·노동·산업 등의 각 부문별로 직접적인 통제수단이 많았다. 그러나 현재는 목표가 복잡·다기해졌을 뿐 아니라 직접 통제수단은 거의 사라진 가운데 간접 통제수단은 미개발상태에 있다. 또한 과거 권위주의시대에는 군을 배경으로 한 지배 엘리트와 법학이나 경제학의 배경을 가진 전문기술관료의 분업이 매우 빠르게 이루어져 국민의 합의를 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현재는 국민의 합의도 도출해야 한다.
금융
한국금융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한국의 금융시장은 제 기능을 발휘해왔는가', 보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의 금융시장이 과거 저축동원의 극대화나 금융자금의 효율적 배분에 기여했는가'의 문제이다. 지난 20~30년간 한국에서 금융시장을 매개로 하여 동원된 저축은 대단히 많았지만 그 저축이 금융시장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또한 거시경제의 높은 성장률을 볼 때 금융이 투자자금의 효율적 배분에 실패했다고 속단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 투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금융기관이 개개의 프로젝트 심사분석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둘째, '한국의 금융제도는 한국경제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에 충분한가' 그리고 '현재 금융기관이 자생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현재 금융기관, 특히 은행은 크게 부실한 상태에 있다. 예를 들면 1989년 어떤 은행의 손익계산서를 살펴보면 수입이자 8,126억 원에 지불이자가 7,158억 원(이것은 한국은행 차입금에 대해 시장이자율보다 훨씬 낮은 이자를 지불하도록 보조를 받은 결과임)으로 순금리 수익이 968억 원에 불과하다. 여기서 대손상각 314억 원을 빼면 대손상각 후 순금리 수익은 654억 원이다. 그런데 월급 704억 원, 퇴직금 등 급여 251억 원, 경비(판공비·정보비·업무추진비 등) 594억 원 등 인건비적 성격을 띠는 비용이 1,549억 원이나 된다.
이것은 자금의 운용으로 이익을 창출하는 은행이 이자수입으로부터 인건비의 절반도 뽑아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수입수수료, 유가증권 매매익, 신탁보수, 보증료 등의 수입으로 당기순이익 217억 원은 올리고 있으나 외국과 비교해볼 때 수익상황이 너무 나쁘다. 다른 은행도 거의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부실대출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1988년말 현재 전체 은행의 부실대출 규모는 총대출의 약 6.5%, 비정상대출 규모는 약 23%에 해당한다(1989년말에는 많이 개선되었으나 아직도 그 규모가 큼). 따라서 부실대출에 대한 대책으로는 ① 자율경영으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다.
② 공채를 발행하여 부실채권을 해결한다. ③ 수신이자율을 고정시키고 대출이자율을 자유화시킴으로써 은행수지를 개선시킨다. ④ 한국은행의 특별융자를 제공한다. ⑤ 채무기업의 주식과 부실채권을 교환한다. 위와 같은 대책을 마련할 수 있으나 현재 최선의 것이 어느 것인지는 계속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부실채권을 해결해준다 하더라도 은행이 정상화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아직도 금융환경이 금융자금의 효율적 배분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금융환경 개선을 위해서는 정부가 은행경영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납득할 만한 규칙을 만들어놓고 이를 잘 지키도록 감시만 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금융자율화의 요체인 대출과정에서의 은행의 자율성이 확립될 것이다. 또한 진정한 자율화를 위해서는 경제의 실물부문 더 나아가서는 정치·사회가 자율화되어야 한다.
셋째, '한국경제가 국제화하고 또 세계금융시장이 통합되는 추세 속에서 한국의 금융시장은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금융의 국제화는 막기 어려운 추세이나 국내 금융기관들이 국제화에 대한 준비를 착실히 한 후 문을 열도록 해야 한다. 현재 한국의 금융시장은 대출시장에서 외국 금융기관의 비중이 너무 크다.
그러나 외국 금융기관의 수익률이 국내 금융기관보다 높다고 무조건 비난하기보다는 국내 금융기관의 자율성을 제고하여 국내 금융기관의 수익성을 높이도록 해야 한다.
재정
한국의 장기발전목표는 민주국가와 복지국가의 건설로 요약할 수 있다.
이와 같은 2가지 발전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재정측면에서의 주요 정책과제는 한편으로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서 재정의 사회개발기능을 강화하는 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국가건설을 위해서, 의회예산주의와 조세법률주의의 확립을 통해 재정민주주의를 정립하고, 지방자치제도의 정착을 위해 지방재정의 기능을 강화하는 일이다.
한국의 재정은 1960, 1970년대의 경제성장추진을 위한 적극적인 산업투자지원, 1980년대 전반에는 안정적 성장을 위해 긴축정책을 통한 인플레 요인 억제의 역할을 주로 담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국민복지증진과 형평제고 등을 위한 재정의 사회개발기능이 소홀히 됨으로써 여러 가지 불균형이 초래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민주화 추진에 의한 정치적·사회적 변화와 함께 경제여건의 개선을 계기로 재정의 사회개발기능이 점차적으로 강화되는 재정기능의 정상화가 시급한 과제로 등장했다.
한편 재정민주주의의 첫번째 과제인 '의회 없이 예산 없다'는 의회예산주의는 매년 국회에서 심의되는 예산이 전체공공부문예산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으로써 유명무실화된 실정이다. 재정민주주의의 또다른 근간인 '법률 없이 조세 없다'는 조세법률주의도 각종 성금·기부금·공과금 등 개인과 기업이 부담하는 준조세와 지하경제에서의 뇌물수수 등 불법거래행위로 말미암아 크게 퇴색되어왔다.
따라서 앞으로 올바른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재정측면에서의 민주주의원칙이 우선적으로 확립되어야 한다. 지방재정기능을 강화하는 일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지방자치제의 정착,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지역경제의 활성화와 균형발전뿐만 아니라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을 위해서도 긴요하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지방자치제가 확산되고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지방재정제도의 확충 및 건실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지방단체가 재정적인 자립기반이 취약하여 지방예산의 상당부분을 중앙정부로부터의 재정지원에 의존하게 되면 지방단체의 행정적 독립성이 유지되기 어렵고 이것은 결국 건실한 지방자치제의 정착을 어렵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향후 장기발전목표로서 민주국가와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재정운영의 기본방향이 조정되어야 하며, 또한 다방면에 걸쳐 재정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관련하여 재정과 금융 간의 유기적 관련성을 살펴보자. 과거 성장제일주의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재정규모를 초과하는 경제개발재원을 금융부문에 대한 직접적 통제를 통해 조달했다.
이것은 각종 특별회계 기금과 개발금융기관·은행(특수은행·시중은행 포함)을 연결하는 복잡한 자금통로를 형성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정부의 지배하에 있으면서도 국회의 예산·결산 심의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정부의 금융부문에 대한 직접적 통제는 금융부문의 건전한 발전을 저해하여 자금의 흐름을 왜곡함으로써 막대한 규모의 사금융시장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과거에 재정이 비민주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정부의 성장제일주의에 따른 경제전반에 걸친 직접적 통제에 그 원인이 있으며, 정부의 금융부문 지배는 이것의 현상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 전반에 걸친 민주화 요구에 따른 재정민주주의의 확립은 동시에 금융의 민주화, 금융의 정상화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복지재정의 확충에 따라 각종 연금기금·사회보장기금의 역할이 확대될 전망이고 보면 재정과 금융의 유기적 관련성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농업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한국의 농업을 위기상황으로 진단하고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모순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 즉 1인당 경지면적이 세계적으로 최하위수준에 있으면서도 오늘날 상당한 농경지가 유휴화되고 있다. 또한 식량자급률은 매년 저하되어 40% 이하의 수준에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생산 농작물은 과잉생산과 가격하락으로 농가는 물론 정부까지도 농정수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편 농작물의 가격하락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발표나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농축산물이 물가상승의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공식적인 발표에 의하면 도시근로자 가구와 농가구의 연간소득에 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기회만 있으면 농업을 포기하고 농촌을 떠나려 하고 있다. 도시와 농촌 간의 소득 및 생활격차는 196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현상이며, 그 주요 원인으로는 농촌지역에 대한 정부의 투자가 상대적으로 미흡했던 점과 농업이 갖는 구조적인 특성이 지적되고 있다.
다른 한편 전반적인 식량자급률의 저하나 국내농산물의 과잉생산, 소작농지의 증대, 그리고 농촌노동력의 부족 등은 1970년대 중반 이후에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이는 경제정책의 기조전환과 국내 농산물에 대한 소비구조의 변화와 크게 관련을 맺고 있다. 즉 1970년대 후반 정부정책의 기조가 개방화로 전환됨에 따라 농산물에 대한 정부수매가의 인상이 억제되고 부족농산물의 도입을 확대하여 국내 농산물가격을 안정시킨다는 '개방농정'이 등장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농업은 자원이용구조를 조정하면서 급속히 상업농 생산체제로 전환했으며, 이는 결국 '농업-농민-농촌'의 삼위일체 체제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론적으로 1970년대말부터 1980년대에 걸쳐 나타난 농업의 근본원인은 농업외적인 부문의 변화에 농업부문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에 대한 정책적 대응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농업의 여건은 더욱 불리해질 전망이다. 농축산물의 수입개방화는 더욱 확대되어 농업소득원이 점차 줄어들게 되고, 농업노동력의 고령화로 혁신적인 경영개선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또한 농업부문에 대한 환경오염의 규제가 점차 증대되고 있다. 이러한 여건변화에 대해 한국농업이 장기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는 효율적인 생산체계를 확립하여 부가가치가 높은 고품질의 농산물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농민 1인당 농경지 소유면적을 3정보로 제한하고 있는 농지소유제도를 완화하여 대규모 영농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과제는 농축산물의 수입개방 시기를 최대한 늦춤으로써 국내 농민이 새로운 여건에 적응할 시간을 확보해주는 것과 구조조정 기간중 불가피하게 수입되는 농산물로 인하여 피해를 입게 될 농가에 대한 직·간접의 보상이다.
비교우위론은 교역국 간의 비교우위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생산요소의 상대적 부존비율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생산기술이 정적이고 외생적으로 주어져 있는 경우에 타당하다. 기술 자체가 동적으로 변화하고 내생적으로 다른 생산요소와 상호 작용한다는 것을 인식할 때 새로운 기술의 출현에 의한 기술의 발전을 기업가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이를 산업화(신제품의 생산, 신공정의 도입 등)하는 과정이 곧 경제발전과정이라는 세계경제의 역사적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동태적 비교우위론을 바탕으로 임금수준과 기술수준을 두 축으로 하여 선진국·중진국·후진 국 간의 국제분업구조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즉 선진국은 높은 기술수준을 필요로 하는 제품에서, 중진국은 선진국보다 낮은 임금과 후진국보다 높은 기술을 바탕으로 경쟁력을 갖는 제품에서, 후진국은 주로 값싼 임금을 경쟁력의 기초로 삼는 제품에서 산업특화한다. 이때 1986년 이후의 한국과 같이 중진국의 임금수준이 크게 상승하게 되면 중진국의 비교우위 영역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높은 임금상승에 의한 산업의 국제경쟁력 약화는 구조적으로 임금보다는 기술요소의 역할이 더욱 중요한 산업으로의 산업구조조정을 통해 극복되어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산업간 특화에서는 기술집약적인 산업을 지향해야 하며, 제품차별화 측면에서는 고급품을, 수직적 특하의 측면에서는 부품산업을 추구해야 한다.
거시적 기술지표와 기술분야별·산업별 기술수준 측면에서 자세히 검토해보면 한국의 기술수준은 전반적으로 선진국에 뒤떨어져 있으며, 그중에서도 모든 생산제품의 필수기술인 생산기본기술이나 생산현장기술은 특히 취약하다. 이는 한국의 산업기술이 자체개발보다는 선진국에서 이미 성숙기에 이른 기술을 소화·흡수하는 과정에서 축적되어왔다는 데 기인한다.
한국은 1980년대 후반기에 들어와 임금상승 외에도 정치민주화, 시장개방, 국제기술보호주의 심화 등과 같은 기술활동에 큰 영향을 주는 환경변화를 경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업의 기술적 강화를 통한 국제적 비교우위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기술활동에 필요한 환경을 조성해야 하며, 이것은 정부의 책임이다. 이러한 환경을 조성할 때 정부가 사용할 수 있는 정책수단은 유인(incentive)과 규제(penalties) 체제의 확립, 그리고 기술관계전문기관(specialized technological agent)의 설립으로 대별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경제의 가장 핵심적인 선결과제는 기술력강화에 있으며, 이에 필요한 환경을 조성하는 기본적인 책임은 정부에 있는데,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슘페터의 자본주의 경제발전관을 재음미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대부분의 생산은 민간기업에 의해 이루어지며,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기업가의 혁신에 있고, 이에 대해서는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슘페터는 혁신을 수행하는 기업가에게 신용을 공여하는 은행의 역할을 고찰하는 과정에서, 은행은 기업으로 하여금 성장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투자자금을 신용창조를 통하여 싼 비용으로 풍부하게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할 뿐 아니라 기업의 투자내용을 심사하고 기업가에게 조언을 제공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와 같이 은행이 기업투자에 대하여 심사를 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가 그 운영의 경제성을 확보하기 위해 마련한 하나의 제도적 장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 한국의 성장과정은 슘페터가 상정한 바와는 상당한 거리를 지니는 것이었다. 물론 기업가들의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정부가 자본을 동원하여 그것을 성장의 전략부문에 집중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경제구조가 단순하고 경제규모가 왜소한 상황에서는 민간에 비해 풍부한 정보와 인적 자원을 보유한 정부의 직접적인 자원배분결정이 보다 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면서 경제문제의 소재가 자원의 동원에서 자원의 효율적 이용으로 바뀌게 되며, 경제구조의 파악이 힘들어지고 그에 비례하여 계획의 어려움이 증대된다. 이는 정부개입에 의한 자원배분의 비효율적 개연성이 높아짐을 의미하며, 사실상 한국경제는 이러한 문제를 심각하게 경험했다. 즉 기업은 스스로 혁신을 추구하기보다는 정부의 특혜적 자원을 획득하는 데 급급했으며, 자금의 흐름이 왜곡된 상황에서 비생산적 투기에 의한 불로소득 획득의 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그나마 규모가 큰 기업은 큰 손실을 보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국민부담에 의해 이를 보전해주는 '위험의 사회화' 현상이 만연된 분위기에서는 투자의 효율성을 기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는 민간기업이 불확실성을 감수하면서 각고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기술혁신에 뛰어들 유인이 발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국내외 여건의 급변에 대응하기 위한 산업구조조정의 시점에 서 있는 한국경제로서는 직접적인 기술정책의 개선도 중요하지만, 전체적으로 기술혁신을 저해하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즉 정부는 산업정책의 기조설정으로 자금배분에 간접적·유도적 방식으로 개입해야 하며, 기업은 정부에 대해 '특혜는 주되 개입은 말라'는 식의 모순을 불식해야만 할 것이다.
정치사
한국은 1945년, 35년간의 일본식민통치로부터 해방이 되었으나, 해방후 우리의 정치는 국제적 냉전구조구조에 의해 틀이 만들어져 있었다. 냉전구조는 한국인의 선택과는 관계없이 분단과 전쟁의 고통을 한국인에 강요했다. 해방 직후 북위 38°선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을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점령지배함으로써 민족과 국토가 양분되었다. 그 후 3년동안 점령국인 미·소의 대립과 남과 북의 지도자들간의 반목과 불화로 통일정부의 수립이 무산되었고, 남과 북에 별도의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다. 분단이 확정되면서 38°선 이남지역에 국제연합(UN)의 결의에 의해 1948.5.10 제헌의회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동년 5월 31일에 처음으로 개원한 제헌의회는 7월 17일에 새공화국의 헌법을 제정했다. 1948.8.15 새공화국의 헌법에 근거하여 새 정부의 수립이 선포됨으로써 해방후 3년간의 미군정이 종식되었고 대한민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이후 한국의 정치사는 다음 6개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제1공화국(1948~60), ② 제2공화국(1960~61), ③ 1961년의 5·16군사정변에 이은 제3공화국(1963~72), ④ 유신체제로 일컬어지는 제4공화국(1972~79), ⑤ 제5공화국(1980~87), ⑥ 제6공화국(1988~1993).
제1공화국
1948년에 수립된 제1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이승만선출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끌었던 제1공화국은 제한적 민주주의 또는 준경쟁적 권위주의(quasi-competitive authoritarianism)로 특징지워진다. 이승만이 주도했던 1950년대의 한국정치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선거가 주기적으로 실시되었다는 것이다. 1948년의 제헌의회 의원 선거 2년후에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된 이래 4년마다 어김없이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으며 1952년 최초로 대통령 직선이 이루어진 후 4년마다 대통령선거와 지방의회선거도 주기적으로 실시되었다. 특히 1952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도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가 실시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집권을 계속 보장하는 방향으로 헌법개정을 강행함으로써 경쟁의 공정성, 경쟁 결과의 불확실성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요건을 침해했다. 1952년의 발췌개헌과 1954년의 사사오입개헌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경쟁결과의 불확실성을 뒤집고 경쟁결과의 사전적(ex ante) 확실성을 추구하려는 시도로서 그후 반세기동안의 헌정사를 얼룩지게한 출발점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에 의해 1952년에 재선되었고 1954년 사사오입개헌을 통하여 1956년 또다시 4년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주의라는 편협한 이데올로기적 틀내에 정치를 묶어 놓았고 조봉암의 진보당을 비롯한 모든 진보세력과 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여기에 더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정권은 신국가보안법제정, 〈경향신문〉 폐간, 지방자치단체장 직선제 폐지등과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적 규범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폭거를 자행함으로써 정당성의 위기를 맞게되었다. 정당성의 위기는 1958년부터 시작된 경제침체와 상승작용을 일으킴으로써 이승만 정권에 대한 지지는 추락했고, 마침내 1960년 3·15부정선거와 독재에 항의하는 4.19혁명으로으로 정권이 붕괴되고 제1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제2공화국
4·19혁명 이후 허정이 이끄는 과도내각을 거쳐 수립된 제2공화국은 최초의 명실상부한 자유민주주의체제였다. 그러나 제2공화국은 단명했다. 4·19이후 정권을 인계받은 세력은 제도권 보수야당인 민주당이었다. 그런데 민주당은 사사오입개헌파동이후 자유당 정권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이념과 지지기반의 차이를 넘어서 결성된 우산정당(umbrella party)이었다. 자유당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지고 난 뒤 민주당을 구성했던 분파들은 적대적인 경쟁자의 관계로 돌아섰으며 그 결과 권력을 인계받은 장면 정권은 약체정권을 면할 수 없었다. 내각책임제하에서 총리로 선출된 장면이 이끄는 민주당 정부는 민주적인 방법으로 경제발전과 사회개혁을 시도했으나 격렬한 정치·사회의 변동기에 분출한 국민적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지기반의 취약성으로 인해 장면 정권은 진보와 보수중 어느 세력도 만족시켜 줄 수 없었다. 과거와의 단절을 주장하는 급진 개혁세력들은 부정선거, 권력남용, 부정축재자처벌에서 정부가 너무 미온적이라 비난했고, 한편 혁신세력의 상승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위험시하던 반공우익세력은 혁신세력에 대한 제재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장면 정권을 공격했다. 장면 정부는 좌우의 협공을 받다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과 그의 지지자들이 일으킨 5.16군사정변에 의해 붕괴되었고, 제2공화국은 수립 9개월 만에 사망했다.
제3공화국
1961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조직해 2년간의 군부 직접 통치를 거친 뒤 형식적 민주주의로 복귀했다. 박정희와 쿠데타 주도세력들은 군부의 직접 통치의 계속을 희망했으나, 미국과 시민들의 압력에 못이겨 마지 못해 형식적인 자유민주주의체제로 복귀했다. 쿠데타 주도세력들은 1962년 12월 강력한 대통령과 약한 단원제 국회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국민투표에 의해 통과시켰다. 박정희는 정권의 이양과 관련해 몇 차례의 의사번복을 거친 끝에 1963.1.1자로 민간인의 정치활동이 다시 시작되었고, 5·16세력은 군부에 대한 지지정당으로 조직된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으로, 반대세력은 민정당(民政黨) 등으로 결집되었다. 1963.10.15에 실시된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후보 박정희(朴正熙)는 민정당의 후보 윤보선을 가까스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11월 26일에 실시된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공화당은 제1당이 되었다. 민정당과 민주당 등은 원내에서 삼민회(三民會)라는 교섭단체를 만들어 이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제3공화정이 1963.12.17 출범하였다.
이와같이 쿠데타 이후 2년여에 걸친 군부직접통치를 끝내고 박정희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에 복귀했지만, 박정희가 지향한 것은 민주적 정치질서의 창출이 아니라 강력한 권위주의적 질서를 토대로 근대화의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것이었다. 산업화의 정치가 전개되면서 경제주의와 행정주의가 정치의 자율성을 억압했다. '선성장, 후분배'의 구호아래 정치는 산업화를 지원하는 종속적 지위로 격하되었다. 제3공화국하에서 정당이 복구되고 국민의 대표가 의사당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지만 국민의 생활을 설계하는 자들은 국민에 의해서 선출되지 않은 관료들이었다. 갈수록 정당, 이익집단, 결사체가 이끌어가는 정치의 영역이 줄어든 반면, 행정의 영역은 늘어만 갔다. 제3공화국하에서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와 보안사와 같은 정권안보기구를 수립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이승만 정권에 비해 월등한 물리적 강제력과 정보통제력을 갖고 있었으나, 주기적 선거, 반대당의 허용, 상당한 언론의 자유, 노조의 허용과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외피는 제한적으로 유지했다. 1960년대의 경제개발의 성공으로 박정희 정권은 민주주의의 틀 내에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1967년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으나 헌법의 임기제한에 의해 3선 출마가 불가능해지자 1969년 야당과 학생들은 물론 공화당내의 김종필 지지세력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1971년의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3번째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71년의 2회의 선거는 박정희가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내에서 정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71년의 선거에서 야당의 후보인 김대중은 박정희의 경제개발모델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고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또한 뒤이어 치러진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은 당내분열과 관권선거라는 불리한 여건하에서도 대도시지역을 석권해 89석을 획득함으로써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113석에 근접하게 되었으며 또 다른 개헌시도를 저지할 수 있는 의석수를 확보하게 되었다.
1971년 선거이후 노동자, 빈민, 지식인의 저항이 분출했고 박정희 정권은 선거를 통한 권력유지방식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을 폐기하는 유신체제의 수립작업에 들어갔다. 박정희 대통령은 3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1971년 12월 불안한 안보정세를 이유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 무렵 미국과 중국 간의 화해, 중국·일본 간의 국교정상화 등 정세변화에 따라 남북대화가 열리게 되었으며 1972년 7월 4일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간의 관계개선을 상징하는 '남북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안보위기에 대처하고 통일에 대비해 국력을 집중한다는 명분으로 1972년 10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여 헌정을 중단시킨 후 11월 계엄령하에서 실시된 국민투표를 통해 이른바 '유신헌법'을 공표했다.
제4공화국
유신체제는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독재와 영구집권을 위해 만들어진 극도로 억압적인 권위주의 체제였다. 유신체제하에서 박정희는 국민적 동의에 기초해서 권력을 위임받고 행사하려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자신을 행정, 입법·사법 3부위에 군림하는 초헌법적인 독재자로 부상시켰다. 유신체제하에서 대의정치와 정당정치는 황혼을 맞이했다. 유신체제에서 국회의원의 임기는 6년으로 그 가운데 2/3는 1구 2의석의 중선거구에서 선출하고 1/3은 대통령의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도록 했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 박정희는 1/3에 달하는 유신정우회 의원을 확보하게 되었고 자연히 여당인 공화당에의 의존은 줄어들게 되었다. 강한 여당은 강한 야당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야당과의 권력경쟁 자체가 소멸된 상황하에서 집권 여당은 할 일이 없어졌다. 유신체제하에서 여당도 야당도 아닌 박정희의 친위 보안부대인 중앙정보부, 경호실, 보안사령부 등이 국민의 여론을 수집하고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시민사회는 해체를 강요당했다. 노동자들은 병영식으로 통제되었고 농민들은 새마을 운동의 일원으로 편성되었으며,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적 통제도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운동을 멈출 수 없었다. 비민주적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야당은 물론 원외 재야인사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나갔고 이에 대해 정부는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발동으로 대처했으나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투쟁은 확대되어 갔다.
민심이 민주공화당 정권을 떠나버린 결과로 마침내 1978년 12월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보다도 더 많은 표를 획득하는 이변이 일어났고(신민당 32.8%, 민주공화당 31.7%), 이에 고무된 신민당은 김영삼을 새 총재로 선출하여 유신체제에 대한 공격을 가중시켰고, 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의 의원직을 박탈했다. 그 결과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의 시위소요사태인 부마사태가 일어났고 부마사태의 진압을 위해 부산과 마산지역에 계엄령이 발동된 가운데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했다. 박정희의 피살 직후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유신헌법에 의해 국무총리 최규하를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나 유신체제는 사실상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끝나고 말았다.
유신정권의 붕괴는 권위주의 독재의 제도화에 실패한데서 기인한다. 박정희는 자신이 물러난 뒤에도 유신정권을 계속 유지 시킬수 있는 이데올로기와 제도화된 정치조직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권력은 박정희와 근위병조직인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경호실로 집중되었고 제도화된 정치조직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강권조직을 핵심으로하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위기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강경일변도로 밀고 나가는 '권력경화증'에 걸려 있었다. 결국 유신정권은 비제도화된 집정관적(praetorian) 권위주의 정권이었고 유신의 창업자인 박정희가 피살됨으로써 자동적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박정희의 피살과 함께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였는데, 권력의 중추는 12월 12일 사실상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全斗煥) 중심의 신군부로 넘어갔다. 신군부는 곧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열어 국무총리 최규하(崔圭夏)를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제5공화국
박정희가 이끄는 유신체제는 무너졌으나 전두환을 중심으로하는 신군부세력이 광주대학살이라는 유혈극을 벌인 끝에 권력을 찬탈하고 또 다른 억압적인 권위주의체제를 부활시켰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12.12사태로 군부를 장악했고 이들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전국확대 조치를 발동해 모든 정당과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정치지도자들을 체포함으로써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기대와 욕구를 좌절시켰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5·17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에 반대하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함으로써 사실상의 권력을 장악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게엄령하에서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켰고, 새헌법에 의거해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당선된 전두환이 1981년 3월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유혈극을 치르고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은 역대 권위주의 정권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태생적인 정통성의 결함에 시달려야했다. 전두환 정권은 유신헌법을 부분적으로 수정하고 7년 단임제의 채택을 통하여 정권의 정당성을 높히려 했으나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으로부터 거부당했다. 전두환 정권은 1984년 이후 학원자율화조치, 정치인 해금조치 등의 유화정치를 실시했으나, 이는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높히기 보다는 오히려 전두환정권에 반대하는 야당, 재야인사, 시민운동세력, 학생들로 하여금 민주화를 위한 정치적 동원을 조직하는 공간을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두환 정권은 1985년 2·12 총선을 통해 패권적 집권여당과 다수의 군소야당으로 구성된 다당제구조를 공고히하려했다. 그러나 2·12 선거에서 사회운동세력들이 해금된 보수야당 정치인들의 조직인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중심으로 결성된 신한민주당의 선거운동을 적극 지원한 결과 신당바람이 일어났다. 2·12 총선결과 신한민주당이 67석을 획득했고 '충성스런 야당'인 민한당은 35석밖에 얻지 못했다. 2·12 총선은 권력의 소재지의 변경을 가져오지는 못했으나 민의의 소재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밝혀주었다. 그 결과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되었고 신한민주당은 사실상 해체된 민한당을 흡수함으로써 민주화를 추진할 수 있는 강력한 대안세력으로 등장했다.
2·12 총선 이후 신한민주당이라는 강력한 조직적 반대세력이 제도정치권에 등장함으로써 전두환 정권은 일방적으로 정국을 이끌어 나갈 수 없게되었다. 신한민주당은 전두환 정권을 개헌을 위한 협상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압력을 가했으나 여전히 국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집권여당인 민정당과 전두환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신한민주당은 2·12 총선 1주년이 되는 1986년 2월 12일에 '일천만 개헌추진운동'이라는 이름하에 직접 거리로 나가 대중을 동원했다. 신한민주당과 사회운동세력간의 연합에 의한 대중동원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마침내 전두환 정권은 1986년 4월 30일 개헌협상테이블을 여는데 양보했다. 그후 1년동안 개헌논의가 진행되었으나 신민당의 대통령직선제와 정부여당의 내각책임제는 접점이 없이 평행선을 달리게 되었고 1986년 7월 30일 발족한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는 단 한차례의 공식회의도 열지 못했다. 여야간의 개헌협상이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학생들과 사회운동세력의 거리 시위는 격화되었다. 혼란의 와중에서 정권은 제도권 야당을 분열시키려는 공작에 나섰다. 1986년 12월 24일 명목상의 신민당 총재인 이민우는 7개항의 자유화조치가 선행되면 민정당의 내각제개헌안을 고려해보겠다는 소위 "이민우 구상"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야당의 실질적 두 지도자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여당에 협조적인 이민우 구상에 동조하는 당내분파를 숙청하기 위해 66명의 의원을 이끌고 신민당을 탈당하여 김영삼을 총재로 하는 통일민주당이라는 신당을 창당했다. 직선제 개헌에 대한 양김씨의 일관된 자세는 제도권 야당의 기회주의를 의심해왔던 사회운동세력들의 야당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데 기여했다. 이민우 구상의 좌초로 전두환 정권은 더 이상 협상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개헌을 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1987년 4월 13일 야당과의 개헌협상을 마감하고 현행 헌법 방식에 의해 대통령직을 후임자에게 승계하겠다는 4·13 호헌선언을 했다.
4.13 호헌조치가 발표되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의 물결이 거리를 휩쓸었다. 이러는 와중에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조작, 은폐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국민적 저항운동이 형성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이제까지 방관자적 자세를 보여왔던 중산층들이 민주화를 위한 시위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다. 제도권 야당과 사회운동세력들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라는 전국적 규모의 민주화 연합조직을 결성했고, 국민운동본부는 1987년 6월 10일 12·12사태의 주역중의 한명인 노태우의 집권 민정당의 대통령후보지명일에 맞추어 전국적 규모의 시위를 조직했다. 소위 '6월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6월민주화운동은 야당, 사회운동세력, 학생, 중산층을 포함하는 최대 민주화연합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시위는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 경찰력만으로 진압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해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연합의 핵심적 요구를 수용하는 정치적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7년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후보는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민주화연합세력의 요구를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사태의 극적인 전환을 가져왔고 신민당의 두 지도자는 정권의 즉각적인 퇴진을 수반하지 않는 6·29선언을 받아들임으로써 한국 민주화를 위한 대타협이 이루어졌다.
1987년 6·29선언으로 대타협이 이루어지게 됨에 따라 거리의 정치는 자연히 개헌과 선거정치로 이동했다. 여야간의 일련의 협상을 거친 후 대통령직선제를 핵심으로 하는 새 헌법이 마련되었고 국민투표를 거쳐 채택되었다. 선거국면이 전개되면서 민주화의 두 주역인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이 일어났다. 민주화를 이루어 내기 위해서 양김씨는 그들사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협력했다. 그런데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난 뒤 그들은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했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경쟁이다. 그러므로 독재에 대항하기 위해 뭉쳤던 세력들이 민주화 이후 서로 다른 이익을 대표하기 위해 경쟁한다는 것은 너무도 '민주적'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갈라서기'가 너무 빨리 왔다.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완결되기도 전에 민주화를 주도하던 세력들은 두 대통령후보(김영삼, 김대중)를 중심으로 나뉘어졌고 그 결과 구권위주의세력이 지원하는 후보인 노태우에게 선거승리를 안겨 주었다. 김대중, 김영삼 두 후보가 단일화되지 않고서는 정부와 집권당의 지원이라는 엄청난 이점을 안고 있는 노태우후보를 이길 수 있는 확률이 희박했다. 더구나 집권세력에 의해서 지역주의가 동원됨으로써 두 야당후보 지지표의 지역적 고착화를 가져와 권위주의를 반대하는 대다수의 표를 어느 한 후보에 집중시키지 못했다. 이에 더하여 사회운동세력까지 양김을 따라서 분열함으로써 구권위주의세력의 후보를 당선시키는데 기여했다.
제6공화국
노태우 정부가 등장한 후 1988.4.26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결과는 구권위주의 세력들이 승리를 선언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대통령선거에서 두 야당후보의 표를 분산시키기 위해 조성한 지역주의는 국회의원 총선에서도 표의 지역적 고착화 현상으로 나타나 의회에서 안정적 다수를 꾀하던 집권여당이 1950년대 이래 최초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총선 직후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은 재빨리 3당공조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여소야대의 권력구조가 등장했다. 세 야당의 느슨한 연합이 의회를 장악함으로써 구권위주의 세력이 민주화의 의제와 속도를 일방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정치지형이 형성되었다.
의회를 장악한 세 야당은 노태우 정권에 5공비리를 파헤치고 군부권위주의의 잔재를 청산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노태우 정권 역시 5공을 청산하라는 야당과 국민으로부터의 압력을 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5공세력을 정권의 핵심으로부터 축출하기 위한 기회로 이용하려는 전략적 계산을 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가 성공리에 치러진 후, 야당은 국정조사권을 활용해 5공화국의 비리와 의혹을 파헤치는 조사에 착수했고 10월에는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에 관한 청문회를 열었다. 5공청산을 위한 청문회 정국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측근과 친인척의 축출과 사법처리를 거쳐 전두환 전 대통령이 5공비리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 국민 사과를 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했다.
5공청산을 위한 청문회는 신생 민주주의의 제도화에 역행하는 민중주의의 정치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학생들은 거리에서의 시위를 통해, 노동자들은 파업을 통해, 이익집단들은 집단행동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함으로써 제도권 정치가 거리의 정치에 압도당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은 거리로부터의 요구를 제도권에서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거리의 장외정치세력을 장내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구권위주의체제와의 연속성 위에서 태어난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거리의 의회'의 확산은 보수세력의 적대적 반응을 불러일으켜 신생 민주주의를 불안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에 더하여 1989년의 동구와 러시아의 사회주의 몰락과 3저현상의 소멸로 인한 한국경제의 국제경쟁력 약화가 노태우 정권에게 보수회귀를 위한 구실을 제공했다.
1989년의 공안정국의 조성에서부터 출발하여 1990년초 3당합당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적 조치를 통해 노태우 정권은 수세기를 마무리하고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반격에 나섰다. 1990년 1월 22일 민정당의 노태우 총재,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가 3당합당에 합의함으로써 민주자유당(민자당)이 탄생했다. 3당합당으로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에서 벗어나 의회 내에서 안정적 지지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으나, 3당합당은 여소야대하에서 추진되어오던 민주화 개혁의 종식을 가져왔다. 먼저 지방자치의 실시가 기초자치의회 선거로 축소되고 지방자치의 핵심인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여론과 야당의 끈질긴 요구에도 불구하고 차기 정권으로 연기되었다. 6공화국 초기에는 경제력 집중억제시책, 금융실명제 준비, 토지공개념 관련 법안 추진 등의 경제민주화를 위한 개혁시도가 있었으나 3당합당 이후 경제민주화 개혁을 추진하던 세력들이 퇴장을 강요당했고 여소야대 시기에 추진되어왔던 경제개혁은 무산되거나 유명무실해져 버렸다. 조직노동자들에 대한 공세도 강화되었다. 3당합당 이후 취해진 노태우 정권의 대노동자공세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노협)와 같은 변혁지향적인 민주노조운동의 불법화, 무노동무임금원칙의 엄격한 적용, 총액임금제와 같은 임금가이드라인의 부활 등으로 나타났다.
3당합당은 지역주의를 더욱 심화시켰다. 3당합당은 호남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평민당을 배제한 반호남의 정치연합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3당합당은 한국 국민을 지역에 근거한 '2개의 국민'(two nations), 즉 호남 대 비호남으로 갈라놓았다. 3당합당이 의도한 2개의 국민전략은 선거정치에서 그 힘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991년 지방의회의원 선거에서 평민당은 부산, 대구, 경남, 경북, 충북, 제주에서 단 한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다. 그후 평민당과 3당합당에 동참하지 않은 통일민주당 의원들이 결성한 민주당과의 합당으로 민주당이라는 통합 야당이 출현했으나 1992년의 총선에서도 지역주의적 투표행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1992년의 총선은 같은 해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의 전초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92년 3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특기할 사실은 정주영이라는 한국의 최대 재벌총수가 이끄는 통일국민당의 돌풍이었다. 창당 후 불과 2개월 만에 치러진 총선에서 국민당은 유효득표수의 18%를 얻어 31석을 당선시키는 이변을 창출했고 정주영은 이에 고무되어 차기 대통령을 꿈꾸게 되었다. 총선이 끝난 후 정국의 초점은 자연히 연말의 대통령 선거로 모아지게 되었다. 민자당 후보의 결정과정에서 당내 소수파의 수장인 김영삼은 다수파를 누르고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다. 이는 노태우 대통령의 독특한 수동적 리더십에 힘입은 바 크다. 노태우 대통령은 후계자 선출과정에 직접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집권여당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민주적 과정을 통한 대통령 후보의 선출을 가능하게 했으며, 집권여당인 민자당을 탈당하고 야당의 중립적 선거관리내각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선거 이후의 정통성 시비를 제거하여 평화적 정권이양에 기여했다. 1992년의 대선에서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는 42.0%를 얻어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33.8%)와 국민당의 정주영 후보(16.3%)를 누르고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김영삼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한국 민주화의 진전을 의미했다. 김영삼 정부의 등장은 1960년대 이래 처음으로 한국 민주화를 이끌었던 민간인 지도자가 선거를 통해 권력을 계승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김영삼 정부는 자신을 '문민정부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역사적 의미를 규정했다. 김영삼 문민정부의 첫째가는 역사적 과제는 군부권위주의의 해체작업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김영삼 정부가 구권위주의세력의 지지를 받아서 출범했기 때문에 김영삼 정부가 개혁보다는 현상유지를 꾀할 것이라고 우려했으나 김영삼 정부는 예상을 뒤엎고 구권위주의를 청산하기 위한 개혁에 나섰다. 먼저 구권위주의 정권의 핵을 이루고 있었던 군부 엘리트들을 숙청했고, 군부 내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려오던 하나회와 같은 정치군인 집단들을 해체했으며,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를 재확립했다. 안기부에 대한 국회의 통제가 제도적으로 마련되었으며,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이 금지되고 활동영역을 군 내부로 한정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다음으로 김영삼 정부는 공직자 재산공개를 통해 관료와 정치인의 사정에 나섰으며 1993년 6월 '공직자윤리법'을 제정해 공직자 재산공개와 등록을 제도화했다. 또한 정치자금법 개정과 금융실명제의 단안을 내림으로써 권력과 금력간의 유착관계를 근본적으로 단절하고 깨끗한 정치의 실현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이와 함께 1995년 6월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의 단체장과 지방의회의원을 동시에 선출하는 4대 지방선거를 실시함으로써 중앙정치에서 시작된 민주화를 지방으로 확산시켰다.
김영삼 정부의 전광석화 같은 개혁조치에 기득권 세력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로 개혁으로 인한 가시적인 과실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가운데 기득권 세력들은 개혁에 대한 저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개혁정치에 대한 불만은 1995년의 지방선거에서 표출되었다. 이러한 개혁정치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김영삼 정부는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에 나섰다. 1995년 12월 19일 자민련을 제외한 여야 대다수 의원들의 찬성으로 5·18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역사바로세우기는 법적 뒷받침을 얻게 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에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12·12, 5·18 관련자들을 처벌함으로써 세계 민주화 역사에 기록될 업적을 남겼다.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된 지역에서 군부권위주의정권의 과거를 단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은 예상을 뒤엎고 군부권위주의 정권의 과거를 단죄함으로써 집권 후반기에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1996년의 최대의 정치행사인 총선에서 승리의 초석을 쌓았다.
1997년의 대통령 선거는 1987년 달성한 민주화 10년을 자축하고 21세기 한국의 진로를 선택하는 잔치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선택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한국 민주주의는 중대한 시련에 부딪쳤다. 1996년까지만 하더라도 낙관적 분위기가 한국을 지배하고 있었으나 1997년 선거의 해가 시작되면서부터 한국형 발전모델의 문제점이 연속적으로 노출되었다. 1996년말에 날치기로 통과된 노동법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화이트칼라와 민주화 시민운동의 동참을 불러일으키면서 1987년 이래 처음으로 민주화 사회운동세력과 노동운동세력 간의 확장된 연합을 형성시켰고 최대한으로 확장된 저항연합은 김영삼 정권으로 하여금 유연적 노동시장을 마련하려던 개혁조치를 후퇴하도록 강요했다. 노동법파동은 불길한 조짐이었다. 노동법 파동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한보사태와 김현철파동이 연이어 터졌다. 한보사태와 김현철 파동은 한국 자본주의가 아직도 투명성과 절차적 공정성을 갖추지 못하고 정치인, 기업인, 금융인 간의 3각유착관계의 네트워크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선거의 해에 터져나온 내부적 문제들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김영삼 정부는 한국의 발전모델에 대한 근본적인 수술을 단행하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한보사태에 이어 진로, 대농, 기아와 같은 재벌의 부도가 연이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부는 '부도유예협약'이라는 형태로 문제를 봉합하기에 급급했다.
결국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경고신호는 외부로부터 올 수밖에 없었다. 타이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인도네시아를 거쳐 한국에 상륙했을 때, 세계 자본가들이 한국 금융의 건전성을 시험하자 한국 자본주의의 취약성은 백일하에 드러났고 마침내 국가부도까지 몰리게 된 경제위기가 발발했다. 국가부도의 벼랑에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지원을 받는 대가로 IMF 관리체제를 수용하는 형태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으나 한국형 발전모델에 대한 한국인들의 자존심과 신뢰는 산산히 부수어져 버렸다.
위기와 함께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이제 1997년의 대선은 민주화 10년을 자축하는 축제가 아니라 IMF 관리체제를 초래한 국난의 극복으로 초점이 이동했다. 말하자면 누가 이 국난을 초래했으며 이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은 무엇인가였다. 위기적 상황에서의 선택의 결과는 먼저 김대중 정부로의 정권교체였다. 정부수립 50년 만에 처음으로 평화적인 선거를 통해 이루어진 정권교체는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위기상황에서 여에서 야로 정권교체를 선택함으로써 한국인들은 정권의 실패를 표로써 심판할 수 있는 주권자로서의 능력을 과시했다. 또한 위기상황에서 평화적인 선거를 치러냄으로써 한국인들은 외부적 상황의 변동에 관계없이 민주주의가 '우리 동네의 유일한 게임'이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했다. 말하자면 1997년의 선거는 한국 민주주의가 전환의 과정을 마감하고 공고화 과정에 진입하기 위한 결정적 문턱을 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둘째로 1997년의 선택은 이제까지 이데올로기적으로, 지역적으로 배제된 세력에게 민주화를 위한 국민통합을 위임한 선택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스스로를 '국민의 정부'라고 규정함으로써 지역통합, 사회통합, 민족통합을 바라는 국민의 요구에 화답했다. 셋째로, 김대중 정부는 냉전의 해체와 경제의 세계화라는 세계사적인 대전환기에 민주주의, 시장경제, 세계주의로의 3중적 전환을 이루어내야 한다는 사명을 부여받고 있었다. 이에 호응하여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새 정부의 국정의 기본 이념이라고 선언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국민의 정부에게 1998년은 위기관리의 해였다. 위기하의 한국경제를 IMF와의 협조하에 정상으로 되돌려놓는 것이 1998년에 김대중 정부에 맡겨진 첫번째 과제였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하기 전부터 한국경제를 좌지우지했던 5대 재벌그룹 총수들과 시장경제 원리에 맞는 방향으로 기업지배구조를 개혁한다는 협약을 맺었다. 그리고 노동자의 협력 없이는 경제위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김대중 정부는 노·사·정위원회를 구성했다. 뒤이어 당면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민주적 시장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기업, 금융, 노동, 공공의 4대 부문에서 포괄적인 경제구조개혁이 실시되었다.
김대중 정부의 외환위기 관리노력과 4대 부문 구조조정의 결과로 한국은 외환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김대중 정부의 노력과 국민들의 위기의식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경제위기는 진정되었으나 한국의 정치는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아직도 한국정치는 위기에 처한 경제를 소생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한국경제의 재도약에 짐이 되고 있다. 고비용 저효율정치를 개혁하기 위한 제도개혁은 지지부진한 가운데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있는 지역갈등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정치개혁이 앞으로 김대중 정부에게 맡겨진 최대 과제임을 시사해 준다.
가족과 사회보장정책
미시적인 수준에서 가족과 관련된 한국사회의 특성을 일별하고, 사회정책의 특징을 개관하기로 한다.
가족과 사회정책을 동시에 취급하는 이유는 과거 공업화와 도시화가 일어나기 전, 사회적 분화가 저급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가족의 기능이 다원성을 유지했고, 그 속에는 여러 형태의 사회보장도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가족이 노인과 장애자 등 불리한 여건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했고, 친족집단이 일종의 사회보장기구 구실을 수행했다. 그러나 근대화의 여파로 사회적 분업이 확대되는 한편, 가족의 성격 자체가 바뀌게 됨으로써 가정이 사회보장을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사회보장은 사회정책의 차원에서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총가구수는 1960년에 430만 가구 정도였으나 1985년에는 거의 1,000만을 육박하는 957만 가구로 증가했으며, 1995년에는 약 1,296만 가구에 이르렀다.
가족의 외형적인 구성뿐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특성에도 변화가 오고 있다는 증거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과거에는 가부장제도 아래 남성 중심의 위계서열적 권위주의가 가족 내의 인간관계를 지배했으나, 점차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민주적인 생활양식과 관행이 일반화되면서 가족 내에서도 친자간·부부간·형제간에 상당히 평등하고 민주적인 인간관계가 확산되고, 남녀 성별에 의하여 차등화되었던 가사도 남녀가 공동으로 수행하는 유형이 젊은 세대로 갈수록 보편화되고 있다.
한국 가족의 또 하나의 특성은 가족주의이다.
특히 핵가족을 중심으로, 드물지만 때로는 친족집단을 중심으로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면 혈연과 가족 관계를 축으로 하는 폐쇄적인 집단이기주의가 형성되고 타집단이나 개인의 당연한 권리 같은 것은 쉽사리 묵살할 수 있는 성향을 조성한다. 과거에는 폭넓은 친족집단을 주축으로 하는 가족주의가 공동체적 유대를 지키는 기둥이 되었으나, 개방적인 현대사회에서는 사회 전반 또는 지역공동체의 포괄적인 발전에 역기능을 하는 측면을 안고 있다.
사회가 분화하고 제도가 다양해짐에 따라 가족의 사회적 기능도 인구의 재생산, 자녀의 양육과 초기 사회화, 정서적 안정의 유지, 소비경제와 여가 및 오락의 관리 등으로 축소되고 종교, 정치, 교육, 생산적 경제, 사회통제, 복지와
이러한 맥락에서 사회보장이라는 측면의 사회정책이 문제로 등장한다.
한국의 전통사회에서는 가족과 친족의 사회복지 및 보장 기능이 당연시되었으므로 특별한 재해나 전란에 의한 난민을 구호하는 제도 외에는 뚜렷한 사회보장정책이 없었다. 일제강점기 말기(1944)에 제정하여 해방 후 미군정하에서 승계되었던 '조선구호령'이 식민지시대의 사회보장제도를 규정하는 법으로서 이 또한 주로 빈민을 구호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미군정의 구빈사업 역시 이재민과 빈곤층에 대한 구호 위주의 소극적인 것이었다.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공포된 구헌법에는 제19조에 '노령·질병 등의 근로능력이 없는 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규정만 두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사회보장정책이 실효를 거둘 수 있는 기틀은 마련하지 못한 채, 전란을 겪고 외국 원조에 의존하며 생존하던 중 1960년대초부터 비로소 사회보장에 관한 법제화를 시도하고자 보건사회부에 사회보장심의위원회를 설치하고 사회경제적 발전단계에 걸맞게 제도 도입을 연구하여 법제화를 시작했고, 1963년에는 포괄적인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사회보장정책은 대략 3가지 분야로 나누어진다.
첫째, 국가와 개인, 고용주와 피용자가 안정된 생계와 건강한 생활에 필요한 자원을 연대적으로 적립하고 혜택을 공유하는 사회보험제도, 둘째, 무능력자, 군경 및 기타 국가 유공자, 이재민 등에게 국가가 재정과 의료 보호를 제공하는 공적부조사업, 셋째, 어린이와 노약자·여성·장애자 등에게 각종 도움을 제공하는 사회복지 서비스이다. 이 가운데 어느 분야든 한국의 사회보장제도가 전개되어온 양상은 처음에는 특수 부문에 대한 보험·보호 등을 위주로 한정된 범위에서 실시하다가 사회경제적 발전이 진전됨에 따라 자원의 확충도 고려하여 점차 혜택의 종류와 범위를 넓혀가는 방식으로 진전시켜왔다는 것이 특징이다.
분야별로 개략적인 것에 대해서 살펴본다.
이 가운데 공무원연금법 적용 대상자수는 1960년에 23만 7,476명이던 것이 1970년에 41만 5,393명, 1980년에 96만 4,812명으로 절정을 이루었다가 1990년 현재 84만 3,262명, 1996년에는 97만 1,000명으로 다시 증가 추세에 있다. 사립학교교원연금법에 해당하는 교직원수도 1975년에 4만 명 정도이던 것이 1980년에 8만 9,493명으로 늘어나서 1990년에는 15만 3,922명, 그리고 1996년에는 19만 2,000명을 기록하고 있다.
국민연금제도는 공무원·교원·군인 등을 제외한 18세 이상 60세 미만의 국민을 대상으로 하며, 1996년 현재 가입자는 742만 6,000명이다.
한편 의료보험제도는 근로자를 중심으로 한 직장보험에서 출발하여 지역보험조합, 직종별 단체들의 직종조합, 그리고 공무원·사립학교교직원·군인가족·연금수급자를 대상으로 한 공교(公敎)의료보험공단 등 집단별로 보험자를 구성하고 각 보험자별 독립채산방식에 의해 자체 운영하는 다보험자체계로 운영되었으나, 2000년 7월 1일부터 집단별 보험자가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 통합되면서 통합의료보험체계로 변경되었다.
의료보험 적용 인구는 1977년에 320만 명이었으나, 1980년에는 911만 3,000명으로 대폭 증가했고, 1990년 4,017만 6,000명, 1999년에는 4,517만 3,000명에 이른다. 여기에는 물론 공적부조사업에 속하는 의료보호 대상자는 제외되었다. 이렇게 볼 때 의료보험 대상자는 총인구 대비 96.4%(1999)이고, 의료보호까지 합치면 거의 전국민이 의료보장의 혜택을 받고 있다.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전되면서 산업재해도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실시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시행 첫해인 1964년에 64개 사업체 8만 2,000명 정도의 근로자가 적용 대상이었는데, 1970년에 이르러 5,583개 사업체의 약 78만 명, 1975년에는 2만 1,369개 사업체의 160만 3,454명, 1986년에는 7만 865개 사업체의 474만 9,342명, 그리고 1990년에는 12만 9,687개 사업체의 근로자 754만 2,752명에게 적용되었다.
업종별로는 역시 제조업이 으뜸이고 이어 건설업·운수업·창고업·통신업·광업 기타의 순으로 많은 사업체와 근로자들이 가입하고 있다.
공적부조사업 부문에서는 1961년에 제정한 생활보호법을 시작으로 군사원호보상법(1961 제정), 재해구호법(1962), 자활지도사업에 관한 임시조치법(1968), 의료보호법(1971), 국가유공자 등 특별법(1962), 기타 재해구조로 인한 의사상자 구호법 등이 제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생활보호는 거택보호·자활보호 및 시설보호의 형태로 구분하는데, 1966년에 대상자가 약 330만 명이었고 이는 총인구의 11.5%에 이르렀다.
1970년대 전반에는 150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고 그 비율도 5% 미만이었는데, 1970년대 후반에 증가했다가 1990년에 220만 명(5.2%), 1996년에는 150만 6,000명(3.3%) 수준으로 감소했다. 의료보호 대상자는 1977년에 200만 명 가량으로 총인구에 대한 비율은 5.8%였는데, 1980년대초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1986년에 439만 명 정도에 10.6%로 정점을 이루었다가, 다시 1990년 393만 명(9.9%), 1996년에는 174만 명(3.8%)으로 떨어지고 있다.
사회복지 서비스 부문에서는 1970년에 전반적인 사회복지사업법을 만들었고, 1973년에는 모자보건법, 1981년에는 아동복지법·심신장애자복지법·노인복지법을 제정했다.
이 방면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종래 복지시설은 주로 전쟁고아·부랑아 등을 중심으로 운영했으나, 경제사정이 호전되고 사회가 달라짐에 따라 사회복지시설 수용 대상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모자보호와 부녀자 직업보호 및 아동복지시설은 수가 줄어들고 수용 인원도 감소하는 데 반해서 노인과 장애자를 위한 시설과 수용자가 늘어나고 있다.
앞으로 생활수준이 더욱 향상되고 생활양식과 가치관이 더욱 산업사회화되며 물질사회화의 물결에 휩싸여 변화가 계속 진행됨으로써 가족의 사회복지적 기능은 점차 줄어들고, 국가에 의한 보장이 강화되는 추세에 있다.
그러므로 이를 위한 재원의 확보, 수혜 범위의 확대와 공정성의 신장, 전달체계의 합리화와 사후 관리 효율화 등의 정책적인 과제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족의 사회적 구실에 관련하여 지금과 같이 핵가족화하는 상황에 비추어 가족 성원들이 각자 개인화하고 공동체적 관심과 상호부조의 정서를 상실해가는 현재의 경향을 방치해도 좋을지, 전사회적으로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끝으로, 근대화의 결과로 한국사회가 얼마나 질적으로 개선되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대체로 근대화는 경제적 풍요를 가져왔고 물질사회화를 초래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의 질적인 측면을 두고 볼 때 부정적인 변화도 놓칠 수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간단한 몇 가지 자료를 살펴보면 인명에 관련하여 교통사고 발생 건수와 인원 및 사망자수는 지난 40여 년 사이에 각각 24.4배, 19.2배 및 3.1배가 늘었고, 산업재해 발생 건수는 1990년까지 2.5배로 증가했다가 그후 감소하는 추세이지만, 그로 인한 사망자수는 15.3배나 된다.
환경오염도 대개 악화되는 경향인데, 1990년대의 적극적인 환경정책 시행으로 그나마 대기오염 시설을 줄이고 있다. 사회생활 면에서는 먼저 이혼율이 비록 미미하지만 계속 증가하는 추세이고, 비행학생수도 20년 전에 비해 5.5배, 범죄 발생 건수도 약 3배로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대화가 한국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준 반면 부정적인 결과도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며, 특히 1997년의 금융위기는 이러한 근대화의 음지가 전사회적으로 노출된 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
개요
한국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고, 이미 1,000여 년 전에 10t이 넘는 종(鐘)을 주조했으며, 철갑선인 거북선을 건조했을 뿐만 아니라 장영실(蔣英實)과 같은 위대한 발명가를 배출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기 극단적인 쇄국정치로 소위 산업혁명의 산물인 기계문명을 접할 기회가 극히 제한되었고, 35년 동안의 일제강점기에는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현대적 과학기술에 관심이 모아지기 시작한 것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면서였다. 물리학·화학·생물학 등의 이학사학위 취득자가 각 분야당 5~10명 내외였고, 이들 가운데 일부가 대학 교수로 등용되어 과학교육이 시작되었으나 1950년에 일어난 6·25전쟁으로 다수의 학생과 교수, 교사, 교육시설, 교육재료 등을 잃었다.
전쟁 뒤 복구가 진전되었고, 교육환경이 점차 회복되긴 했으나 1962년부터 시작된 5개년사회발전계획안에 체계적인 과학기술진흥정책이 비로소 포함되었다.
경제발전은 과학기술의 진흥 없이는 이룩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5개년계획이 갱신될 때마다 과학기술관련 연구시설, 연구지원시설, 금융 및 세제의 조정, 이공계 인력양성 등의 의욕적인 사업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무역수지가 다시 적자로 들어섰다. 특히 무역개방압력과 기술보호장벽강화 등 국제적인 요인과 연구역량의 취약성 혹은 임금상승 등과 같은 국내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제조업의 경쟁력이 일시에 둔화되었다. 1990년대 후반 외환관리의 부실로 인하여 1997년 IMF의 금융구제를 받게 되며 연구투자는 감소했다.
과학기술진흥체제
1967년 과학기술진흥법이 제정되었고, 동시에 정부조직 내에 과학기술처가 신설되었다.
또한 과학 연구의 주체가 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1967)가 설립된 데 이어 1971년에는 과학인력 양성을 위한 한국과학원(KAIS)이 설립되었다. 1975년 한국표준연구소 등 정부출연연구소가 설립되었고, 1977년 한국과학재단이 발족되면서 주로 대학교수들에게 연구비가 지원되기 시작했다. 특히 1974년부터 조성된 대덕연구단지 내에 정부출연연구소들이 점차 자리잡게 되었고, 다수의 민간연구소들이 이 단지 내에 이주하거나 혹은 신설되었다.
특히 1981년 KIST와 KAIS가 통합되어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되었으나 1989년 학사부는 다시 연구사업을 수행하는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와 교육기관인 KAIST(한국과학기술원)로 분리되었고 1995년에 광주에 새로 대학원과정인 광주과학기술원(K-JIST)이 설립되었다. 1990년 정부는 대학에 탁월성연구집단 조성을 목표로 하여 우수연구센터(SRC/ERC)사업에 착수했다.
그간 20여 개의 SRC와 28개의 ERC를 선정해 집중적인 연구비 지원을 하고 있다.
1989년 발족한 한시적인 '과학기술자문회의'가 1991년 헌법에 근거해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로 개편되어 대통령을 자문하고 있다. 또한 1998년에는 '과학기술 혁신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그에 근거하여 대통령이 의장이 되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구성했다.
또 종전에 과학기술부 등 관련부처에 속했던 과학기술 관련 정부출연연구소를 연구자율성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기초기술, 산업기술 그리고 공공기술연구회의 3분야로 묶어서 국무총리실 산하에 두기로 하였다. 이 같은 새로운 체제가 실효를 거둘 때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연구역량은 크게 신장될 것이다.
(내용 추가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