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은사 일주문은 단칸 팔작지붕과 주상포, 주간포의 다포식 공포로 되어있다.
축부(軸部/ 기둥 부분)는 지리산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보조기둥형으로
2본의 주기둥과 4본의 보조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포(栱包)가 기둥과 처마 사이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옥수수 열매같기도하고 벌집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대웅전과 같은 큰 건물에서는 보다 웅장한 공포의 짜임을 볼 수가 있지만,
작은 건물인 일주문은 눈을 크게 뜨지 않아도 저절로 공포에 시선이 집중된다.
천은사(泉隱寺)는 원래 이름이 감로사(甘露寺)였는데
단유선사가 절을 중수할 무렵 절의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무서움에 떨게 하였다.
이에 한 스님이 용기를 내어 잡아 죽였으나 그 이후로는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라는 이름이 붙였다고 한다.
절 이름을 바꾸고 가람을 크게 중창했는데
그 후로 절에는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불상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던 이무기가 죽은 탓이라 하였다.
얼마 뒤 조선의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절에 들렀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자 이광사는 마치 물이 흘러 떨어질 듯한 필체로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썼다.
그리고 이 글씨를 현판으로 일주문에 걸면 다시는 화재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사람들은 의아해하면서도 그대로 따랐더니 신기하게도 이후로는 화재가 일지 않았다.
지금도 새벽녘 고요한 시간에는
일주문 현판 글씨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측면에도 공포를 가설하였다.
맞배지붕집이라면 측면에 풍판(風板)을 설치하기 때문에
측면에 있는 공포는 풍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그에 비하면 팔작지붕집 천은사 일주문은 4면의 공포를 숨김없이 드러내었다
천은사(주지 대진스님)는 최근에 산왕단을 새롭게 정비하고
4월3일 방장선원 산왕단에서 산신대재를 봉행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당나라 '임제선사'의 법어로,
‘내가 현재 처해있는 곳에서 주인이 되면 내가 서있는 모든 곳이 진실될 것이다‘라는 뜻.
아미타불에게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
중생의 깊은 믿음을 표현한 것이지만,
그 자체의 주문이 가진 공덕도 크다고 한다.
‘나무(南無)’는 산스크리트어 ‘나마스(Namas)’의 음역어이다.
3. 빨치산이 되다 ..... 제2권 129쪽
48년 3월인데도 눈보라가 휘몰아쳤고 먼 산봉우리마다 아직도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봉화불이 시들지 않고
삼천만 민중의 가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이 와중에 그녀는 시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최씨 집안의 종손을 낳았으나,
경찰들의 횡포에 시달려 본인 집에서 기거를 하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이 시작된다.
그녀는 아이를 들쳐 업고 숨어다니며 당의 지시에 따라 여기저기 연락원 노릇을 하고 다녔다.
남편은 어디에 가 있는지 얼굴 한번 볼 수가 없다.
48년 10월 23일, 그날도 드러나지 않은 조직원의 집에서 떠돌이생활을 하고 있던 그녀는
여수 14연대가 여수와 순천에 이어 구례까지 해방시켰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단걸음에 자기 마을로 돌아온다.
오랜만에 마을사람들이 잔칫날을 앞둔 어린아이들처럼 들떠 있었다.
가까운 곳에 피해 있던 시어른들도 근 여덟 달 만에 집에 돌아와 묵은 먼지를 털어내느라 정신이 없다.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좌익들도 모두 나와 인민위원회를 만든다, 사람을 뽑는다 난리였다.
군당에서 지시가 내려온다. 면 여맹위원장으로서 해방기간을 이용하여 마을의 부녀조직을 확대, 강화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좌익활동을 좋게 이야기하거나 동정하던 마을 아낙네들을 찾아다니며 조직원으로 포섭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실행에 옮길 틈도 없이 10월 27일 아침 토벌대가 올라온다는 긴급정보가 들어오고, 면당기관 사람들과 좌익에 협조했던
사람들 모두 허둥지둥 빈 몸으로 마을 뒷산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시커먼 연기가 푸른 하늘을 가리고 온 동네를 뒤덮었다.
여기저기에서 숨넘어가는 비명소리가 황금빛 들녘으로 울려퍼졌고, 곡식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흘째 되는 날, 토벌대가 나갔는지 동네가 조용해진다. 길에도 벌판에도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서너 시간을 걸어 지천리 외갓집에 들러 사흘을 묵고 난 그녀는, 붙잡는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손길을 뿌리치고 집을 나선다.
만약에 거기에 있다가 잡히면 외갓집까지 쑥대밭이 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샅샅이 뒤지며 선을 찾아 헤맸으나 선을 댈 수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온당리 변 영감 집을 찾았고,
변 영감의 안내로 그녀는 산에 오를 수 있었다. 고단한 생활이었지만, 그녀는 차츰 산생활과 조직생활에 익숙해가고 있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남편의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고 그녀 또한 묻지 않았다. 토벌대의 공격은 하루도 멈추지 않았고,
광의면당은 천은사골, 화엄사골, 문수골 등 주로 노고단 근처를 넘나들며 토벌대의 끈질긴 공격을 피해 다녔다.
그리고 토벌대가 물러간 밤에는 각 마을로 내려가 정보를 수집하거나 비밀조직을 만들어 보급투쟁을 하는 등
당 정비, 강화사업에 주력했다.
5. 우연한 만남 ..... 제2권 153쪽
49년 4월, 군당의 방침에 따라 조직과 격리되어 광의 출신 최 동무라는 임산부와 함께 천은사골에 있는 한 비트에서
숨어 지내던 중, 적의 습격을 받아 낯선 능선을 따라서 화엄사골에 있을 광의면당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둠을 더듬어 면당으로 가는 길에 이현상부대에 속해 있는 보급투쟁을 나온 빨치산 부대를 만났고,
거기에서 근 일 년 반 만에 남편 최윤호(최규복의 가명)를 만난다.
그러나 남편 최윤호는 그녀로부터 아이를 건네 받고 따가운 빰을 부비는 정도의 행동만 보이고 훌쩍 자기 부대 쪽으로 가버린다.
광의면당을 통해 군당에 복귀한 그녀는 군당책의 지시에 따라 다시 임산부 최 동무와 함께 마천골로 향하게 된다.
군당에 있으면 위험하고 현 상황에선 사업을 할 수도 없으니 조건이 좋아질 때까지 안전한 곳에서 대기하라는 것이었다.
14연대 출신으로 구례군당에 와 있던 어린 연락원을 따라 그녀는 최 동무와 꼬박 하루를 걸어 마천골에 있는
제기막(제기나 목기를 만들기 위해 지어놓은 통나무집)에 도착한다.
그러나 식량이 떨어진지도 한 달이 넘었지만 연락원은 오지 않아 들판의 나물을 뜯어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49년 6월 초순경, 뜻밖에도 군책 신오동이 새벽녘에 연락원도 없이 혼자 찾아와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며
당 사정이 좀 좋아졌으니 군당으로 같이 가자고 재촉함에 따라 피아골에 있는 군당에 도착한다.
군당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가운데 그곳에서 그녀는 다시 한번 남편을 만났고, 막내 시동생 규동도 만날 수 있었다.
작년 2.7 구국투쟁 후 서북청년단에게 집에서 떨려난 뒤로 처음 만나는 시동생이었는데,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따뜻한 쌀밥을 가져온 어린 시동생의 행동에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다음날 아침, 구례군당 당원확대회의가 시작되었다. 토지면책 정호영이 손을 들어 발언하기를,
인민의 선봉대로서 솔선수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군책 신오동 동무와 일부 지도층이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귀중한 동지들의 피로 얻은 식량이나 축내며 귀족과 다름없는 생활을 즐기고 있으며,
또한 여성 동무를 함부로 농락하고 있다고 비판을 하면서, 신오동의 명백한 반당행위를 규탄하자,
모두가 그의 발언에 동의하여 박수갈채를 보냈다. 참석자 전원의 비판에 신오동 이하 지도층은 일체의 과오를 인정했고,
수습대책위원회를 뽑은 뒤 긴 회의가 끝났다.
- 출처_빨치산의 딸_정지아 작가 -
정유재란 때는 화엄사 주지 설홍 대사가 300여 승군을 이끌고 구례 의병들과 함께
요충지인 석주관에서 왜군들과 격렬하게 싸웠다.
그러나 압도적인 왜군 군사력 앞에 승군들은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이후 화엄사와 천은사 승려들에 대한 왜군의 보복은 잔인했다.
화엄사와 천은사를 잿더미로 만들고 승려들을 학살했다.
지리산 골짜기 이곳저곳에 숨은 듯이 있던 작은 암자들까지 찾아가 불 질러 없애버렸다.
그만큼 화엄사와 천은사 승려들은 왜군들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던 것이다.
이때 소실된 암자터를 이용한 곳이 바로 천은사골 빨치산들의 아지트다
1998년에 푸른 눈의 '현각스님'이 100일 동안 수행을 하면서
지리 빨치산들의 영혼을 위로해 준 상선암 토굴
순천에서 거주하는 어느 처사께서 주말마다 와서 쉬었다 일욜에 간다고
혜주 스님께서 말씀 하신 흙집형태의 토굴!
양쪽에 호위하듯 줄지어 선 금강송의 맑은 기운이 온몸을 상쾌하게 흔들어댄다.
송림암 현판과 나란히 걸린 은월당(隱月堂)이란 편액이 하루의 여정을 뜻깊게 갈무리를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