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전 주 목요일 방장님과 함께 돌아본 대구근대건물탐방기 입니다. 이 글은 제가 기고하고 있는 컬럼리스트에도 있습니다.
근대건축물 많은 대구를 돌아보다 < 문화 < 칼럼/에세이 < 기사본문 - 더칼럼니스트 (thecolumnist.kr)
근대건축물의 대구를 돌아보다.
직업이 건축설계라 한국전통 건축에 관심을 가지고 답사를 많이 다녔지만 큰 도시 중에 관심을 주지 않은 곳이 많다. 인천, 대전, 광주, 부산, 군산, 목포, 대구가 그렇다. 이들 도시는 오래된 건축문화재로서 주목할 만한 것이 없고, 일반 문화재도 시립박물관에 소장된 것 외에는 거의 없다. 그러니 건너 뛸 수밖에 없었다.
이런 도시들의 역사적 공통점은 조선말이나 일제강점기 때 급격히 성장했다는 것이다. 부산, 인천, 대전, 광주, 군산이 그런 도시다. 부산, 인천, 목포, 군산은 개항을 계기로 성장했고, 대전과 광주는 일제강점기에 군사 교통 행정 중심이 되어 성장한 도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우리나라 전통건축물은 거의 없고 근대건축물만 남아있다.
그러나 한옥에서 현재 우리 건축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근대건축물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10여 년 전부터 예전에는 관심두지 않던 근대 성장도시의 근대건축물을 돌아보고 있다.
최근 찾아본 대구는 수구의 상징으로 각인돼 있는 도시다. 그러나 과거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남로당이 주도한 대구 10월사건(1946년)으로 잘 알려진 좌파의 본향이다.
조선공산당 선산군당 총책이었던 박정희의 형 박상희도 이때 체포돼 총살형을 당했다. 대구가 좌파 본향이었다는 것이 부끄러웠을까. 대구시 홈페이지 연혁 란에는 대구 10월 사건에 대한 내용이 없다. 이런 내용까지 알리는 것이 진정한 역사기록이 아닐까.
경상도라는 지명은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나온 지명이라는 건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 임진란 전까지만 해도 경상도 상주는 경상우도를 담당하고, 경주는 경상좌도를 담당했다. 그러나 임진란 이후인 1601년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대구는 명실상부한 경상도의 핵심도시가 됐다.
그러므로 개항이후 외국인들이 경상도 쪽으로 진출하려 할 때 주목한 중심도시는 당연히 관찰사가 있었던 대구였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대구에는 부산보다 근대에 지어진 건물이 많다.
대구는 1981년 달성군의 월배읍, 칠곡군의 칠곡읍, 경산군의 안심읍 등을 편입하여 직할시가 됐고, 1995년에는 달성군을 편입하여 광역시가 됐으나 사실상의 대구는 경상감영이 있고 읍성이었던 중구와 중구 주변이 역사적으로 진정한 대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대구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근대 건물이 모두 현재 중구에 몰려있다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경상감영 근처에 자리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기 때문에 건물을 모두 감영근처에 지은 것이다.
지금도 감영(監營) 터가 감영공원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감영은 우리가 상상하는 규모 이상이었다. 여러 건물로 가득했지만 현재는 당시 감영의 정청이었던 선화당(宣化堂·보물)과 감사의 생활공간이었던 징청각(澄淸閣·유형문화재)만 남았다.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정청(政廳)을 ‘선화당(宣化堂)’이라고 한다. ‘선화’는 ‘임금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한다(宣上德而化下民)’는 글에서 따온 말이다. 선화당과 징청각은 1965년까지 경북도청으로 사용됐기에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현재 조선시대 관아건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 관청이나 학교 부지로 이용되면서 그 자리에 있던 관아건물이 다 헐렸기 때문이다. 선화당처럼 관청 건물일부로 바뀌어서 살아남은 것은 아주 운이 좋았던 경우다.
관아 건물은 모두 읍성 내에 있었다. 경상감영도 마찬가지다. 대구읍성은 임진란 전까지는 토성이었다가 임진란 이후 돌로 쌓았다. 일제 강점기에 읍성 대부분이 헐렸는데 헐린 곳은 대부분 도로가 됐고, 대구읍성이 그랬다.
대구읍성은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박중양(1872~1959)이 일본인들과 결탁해서 헐었다.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된 골수친일파인 박중양은 상업의 근거지인 대구 성내로 진출하려는 일본인 요청을 받아들여 중앙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06년 철거를 강행했다.
그 후 일본인이 성내로 적극적으로 진출하면서 성내에 살던 토박이들은 성 밖으로 밀려나갔다. 일본인들은 곧장 상권을 장악했고, 과거 객사 앞 종로 부근에 있었던 대구 약령시장도 현재 위치로 밀려났다.
대구 읍성의 흔적은 도로이름으로 남아있다. 남원성이 헐린 곳 역시 남문로, 동문로, 서문로 등으로 남은 것처럼 대구도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란 이름으로 남았다. 이 네 도로로 둘러싸인 부분이 예전 대구 읍성 안이었다. 읍성 안 지역은 성내동이란 이름을 남겼다.
현재 중구는 과거 읍성이었던 면적에 비해 10배 이상 늘어났지만, 일제강점기에 중구는 도심이었다. 그렇다 보니 근대에 지어진 건물은 모두 중구에 모여 있다. 강경시장, 평양시장과 함께 조선시대 삼대 시장이라고 불렸다는 전통시장인 서문시장도 중구에 속한다.
중구에는 보물로 지정된 경상감영 건물인 선화당, 유형문화재 2호 징청각이 있고, 근대에 지어진 건물로 사적으로 지정된 계산동성당(1902년), 옛 대구의학전문학교 본관(1933년), 옛 도립대구병원(1928년)이 있다.
종교관련 건물은 모두 가톨릭과 연관이 있는 건물이다. 유형문화재인 선교사 스윗즈 주택(1910년경), 선교사 챔니스 주택(1910년경), 선교사 블레어 주택(1910년경), 성모당(1918년), 샬트르 성바오로수녀원 성당(1927년), 계성학교 아담스관(1908년), 맥퍼슨관(1913년), 핸더슨관(1931년), 문화재자료인 성 유스티노신학교(1914년), 샬트르 성바오르수녀원 코미넷관(1915년) 등이 있다.
기타 건물로는 유형문화재인 남산초등학교강당(1936년), 옛 대구상업학교본관(1923년), 한국산업은행대구지점(1932년), 등록문화재인 옛 대구사범학교 본관과 강당(1923년, 1925년), 대구화교협회(1929년), 옛 교남 YMCA 회관(1914년), 삼덕초등학교 옛 관사(1939년), 동인초등학교 강당(1937년 경)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근대건물 중 일식건물인 삼덕초등학교 구 관사와 한국산업은행대구지점을 제외하면 모두 벽돌건물이다. 벽돌건물이 많은 것은 계산동 성당 때문이 아닌가 추측한다. 계산동 성당은 설계는 명동성당을 건축하고 전주 전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맡았고, 벽돌공사는 청나라 기술자가 했다.
계산동 성당은 1902년 지금 규모보다 작게 준공됐으나 1918년 증축돼 현재 모습이 됐다. 계산동 성당 이후 1920년 초까지 지어진 건물은 모두 가톨릭에서 지은 건물로서 벽돌을 재료로 썼다. 가톨릭교회가 짓는 건물을 통해 벽돌제작 기술이 축적되고 조적공들이 길러져 이후 대부분의 건물이 벽돌로 지어졌다.
감영건물인 선화청과 징청각은 따로 기회가 되면 설명하기로 하고 앞서 소개한 근대 건물 중에서 인상에 남는 두 건물을 소개한다.
첫 번째 소개할 건물은 현재 대구근대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는 옛 산업은행 대구지점 건물이다. 1932년 일본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지어진 것인데, 20세기 초반에 유행했던 아르데코 양식의 건물이다.
건물 곳곳에 보이는 디테일 하나하나에서 장인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진다. 특히 요새는 사라진 테라조를 활용한 공예적 기예가 덤뿍 담겨있다. 외장재로 타일을 썼는데 지금은 공사비 때문에 생각할 수 없는 디자이너 주문제작품이 사용됐다.
돌도 섬세하게 다뤄졌다. 요새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장인 정신이 엿보인다. 건축 전공자로서 오랜만에 기능공을 넘어서 장인 경지에 오른 사람의 정성을 느낄 수 있는 건물을 봤다는 것만으로도 땀흘려 가며 대구답사를 한 보람을 느낀다.
두 번째 소개할 건물은 선교사 스윗즈 주택이다. 이 주택은 한・양옥 절충식이다. 건물은 양옥이고 지붕은 한옥스타일인데도 잘 어울린다. 한때 지붕이 함석으로 변경됐는데 다시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양옥이라 해서 반드시 서양식 지붕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 집이 보여준다.
문득 왜 기와지붕을 올리기로 결정했을까 궁금했다. 물론 전북 익산의 나바위 성당처럼 한옥지붕을 한 경우가 있긴 하다. 그러나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주택은 처음 본다. 시스템이 다른 것을 결합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주택의 경우는 서로 다른 구조가 만나는 지점에서 하자가 많이 발생한다.
더욱이 스윗즈 주택은 평면이 복잡하다. 이런 평면을 양식지붕으로 설계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기와지붕이라니 놀랍다. 우진각, 맛배 지붕, 눈썹지붕 등 지붕형태도 다양하다. 이런 시도를 한 건축 설계자와 장인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대구감영 선화당
감영 징청각
경상 감영 모형
근대 역사 문화관 측면
선교사 스윗즈 주택
첫댓글
저도
즐거웠습니다
선교사의 집 개방되면 다시 오십시오
"건축 전공자로써 오랜만에 기능공을 넘어서 장인경지에 오른 사람의 정신을 느낄 수 있는 건물을 봤다는 것 만으로도 땀 흘려가며 대구답사를 한 보람을 느낀다"는 최성호님의 글을 보고서야 대구근대역사관이 상당한 가치를 지닌 건물임을 비로소 인식하게 됩니다. 은행건물에서 전시관으로 용도변경해야 했던 숨겨진 여러 스토리중 하나가 외장재 타일이었는 데, 이 점을 정확하게 언급하신 것을 보고 역시 건축 전공자의 눈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대구근대역사관에 대한 순수 건축적 측면에서의 가치와 의미에 대하여 최성호님의 설명을 한 번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