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방술(方術)/배옥주
툭하면 다래끼가 난다 어린 내 발바닥을 꺼낸 당신은 부적을 쓰듯 한자 한자 주술을 써내려간다
천평(天平)이거나 지평(地平)이거나, 라스코벽화 같다 수렵꾼이 던진 창이 검은 들소떼 눈동자를 비
켜간 다음날 더욱 붉어진 열꽃은 곪은 울음의 출구를 봉인하고 있다 당신의 주술이 빗나갈 때마다
나는 오지 않는 미래를 걸어 잠근다
성당 불빛이 울려 퍼지는 늦여름 속눈썹 하나를 돌멩이 밑에 숨긴다 뒷마당의 무화과는 농익어가
고, 창밖으로 팔을 내밀어 나는 푸른 그늘 위에 천평이나 지평을 갈기는 새떼를 쫒아낸다 꽃의 방술
(方術)을 외우며 오래 골목을 지켜보는 밤 하필 동생이 툭, 종소리를 걷어차고 지나간다 그때, 까마귀
한 마리가 캄캄한 그믐을 물고 내 안으로 날아온다
등굣길 세찬 소나기가 장화 속으로 뛰어든다 나는 얼룩말처럼 달리기 시작한다 일기장에 또박또박
옮겨 쓴 동생의 다래끼가 흙탕물에 얼룩진 가방 속에서 뒤죽박죽 헝클어진다 다래끼처럼 툭하면 짓무
르는 가계 집나간 엄마를 부르는 비방(祕方)은 늘 빗나가지만, 다래끼가 나면 당신은 어김없이 내 발바
닥에 천평이거나 지평을 새겨 넣는다 하늘과 땅이 평평해진다면 당신이 그린 불립문자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저기, 천평과 지평의 주술에 방황하는 젊은 아버지가 청정(淸淨) 속으로 돌아간다
평화 슈퍼/배옥주
너는 번지점프를 좋아하고 난 바이킹을 싫어한다 취향의 높낮이는 엇비슷하고 수변공원을 삼킨 안개의 등고선은 비슷하다 홀로 남겨진 소파에 읽지 않은 신문을 깐다 아프간 난민소년이 도끼난동을 부리고 위대한 신은 사살된다 유통기한이 남지 않은 우유가 쏟아진다 식어가는 라면에 찬밥을 말 때, 곰팡이 핀 밥알을 숟가락으로 눌러버리는 역사적인 순간은 자주 오지 않는다 너는 조르주 바타유를 따라가고 나는 샤워기를 틀어놓고 편지를 읽는다 젖은 심장을 닦으면 소진되지 않는 몽상이 흘러내린다 상한 복숭아는 식탁으로 스며들고 졸음버스가 들이받은 앞차는 터널 속으로 사라진다 하늘로부터 붉은 눈물은 쏟아지지 않는다 너와 함께 묻어준 고슴도치 ‘나무’는 환생을 거듭하고 네가 흥얼거리던 락발라드엔 잊기 좋은 여름밤이 넘쳐난다 알뜰코너에 진열된 오늘의 유통기한은 어제까지다 집은 멀고 평화슈퍼는 닫혀 있다
비밀 정원/배옥주
정신과 의사 와이는 정원을 뒤집어쓰고 있다. 그가 머리를 긁적일 때마다 나는 그의 성(城)으로 들어간다. 쟈스민 꽃이 피고 날개 꺾인 새 한 마리가 마들렌을 쪼아 먹는다. 아스파라거스 향이 기억을 재생한다 탁자에서 찻잔이 굴러 떨어진다. 정원 끝에서 물푸레나무가 걸어온다. 생각이 무성해진 내가 나를 잃어버린다.
피아노 뚜껑으로 손가락을 내리친다 말문이 부러진다. 잘린 손가락들이 연주하는 클레멘티 3악장. 창밖 공원에서 비보이는 낙엽처럼 굴러다닌다 우클렐레 소리가 한 마디 짧은 손가락을 두드리고 첫 마디로 돌아간다. 오늘의 거리공연은 오래전 사라진 초록뱀 이야기. 헝클어진 정원을 쓸어 올리며 의사 와이는 처방전을 휘갈긴다. 도무지 읽을 수 없는 저녁이 창가를 서성인다.
쑥대밭 연대기/배옥주
움찔, 벌어진 쑥대 사이로 흙이 된 여자들이 딸려나온다
칼 대신 볼펜을 쑥 찔러 넣는 밭둑
둘러앉은 산그늘을 헤집고 소설초고 같은 서사가 늘어난다
줄담배를 피우며 육두문자를 찍어내는 할머니
찡 박힌 하이힐로 죽은 아버지를 내리치는 큰언니
고탄력스타킹을 벗어 샤랄라 제 목을 조르는 셋째언니
그냥 지나갈 걸 그랬어
대체 쑥은 언제 캔담?
허리를 두드리곤 다시 엎드리는 아지랑이가
구시렁구시렁 한 바닥씩 써내려가는 봄날
칼 대신 볼펜으로 쑥대밭 연대기를 캐낸다
노을은 중저음 시간을 건너간다/배옥주
성문이 열릴 때마다 물결이 마모되는 소리가 난다
후두는 언제부터 완고한 장벽을 쌓아두었나
이렇게 두툼한 굳은살은 처음 본다고
붉은 성대를 들여다보던 의사는 안경을 추켜올린다
한때
이것은 연명하던 목구멍
혓바닥과 경구개 사이
가래에 뭉친 맹독의 시간
크흠, 큼, 끌어올린 중저음 마디들은
허공에 걸어둔다
어떤 날의 소프라노는
바람이 던진 그물에 포획되고
더 이상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목구멍에는
결절된 물무늬가 출렁인다
실어증을 내려놓고
노을은 중음(中陰)의 시간을 건너간다
[ 배옥주 시인 약력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ostfiles15.naver.net%2F20130117_62%2Fsoftpoet_1358383254469skaa8_JPEG%2Fboj.jpg%3Ftype%3Dw3)
배옥주 시인
*1962년 부산 출생
*2008년『서정시학』으로 등단
*시집『오후위 지퍼들』,『The 빨강』과 공저『김명순에게 신영성의 길을 묻다』등
*부경대학교에서 문학박사 , 부경대학교 교수
*『시와문학』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