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그린 화가들>
외젠 들라크루아 ‘키오스 섬의 학살’
보도성 갖춘 전쟁화… '미술 저널리즘’ 시작되다
기자가 취재를 하듯 ‘그리스 키오스 섬의 학살’ 접근
낭만주의 대표작으로 전쟁을 통한 인간의 감정 묘사
당시엔 혹평을 받았지만 훗날 역사적 작품으로 호평
오늘 소개할 작품은 미술에 있어서의 보도성, 그 시작을 알리는 것이죠.
바로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1798~1863)의 ‘키오스 섬의 학살’입니다.
키오스섬의 학살, 1824, 유화, 419x354㎝, 출처=위키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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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그리스 키오스 섬 학살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들라크루아는 1822년 그리스 키오스 섬에서 벌어진 학살을 그렸습니다. 15세기 말부터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는 19세기 초 독립운동을 벌입니다. 문제는 그리스 전역을 지배하던 오스만튀르크의 무자비한 진압이었죠.
키오스 섬의 학살은 그 과정에서 벌어집니다. 1822년 오스만튀르크는 자유를 요구하는 그리스인들을 진압하면서 무고한 시민들을 살해했죠. 4월 11일 시작된 학살은 그해 여름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2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7만 명이 넘는 이들이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자유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던 유럽의 충격은 대단했습니다. 많은 지식인이 이 사건을 주목했지요. 여러분도 잘 아시는 영국의 유명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은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하기도 합니다.
목격자의 시각에서 사건에 집중
그렇다면 유럽의 지식인들은 왜 그리스 독립에 관심을 갖게 됐을까요? 바로 그리스가 유럽 문화의 고향이기 때문이죠. 들라크루아 역시 그리스를 지지하는 많은 유명 인사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키오스 섬의 학살을 그림으로 그렸죠. 그는 마치 기자가 취재를 하듯 이 사건에 집중했습니다.
글머리에 말한 ‘미술 저널리즘의 시작’이라는 말은 이 때문입니다. 키오스 섬의 학살 소식을 듣고 이를 그리기로 마음먹은 들라크루아는 상당한 양의 신문과 여행보도, 전기문을 탐독하기 시작합니다. 또 학살을 직접 지켜본 목격자를 만나 증언을 듣기도 했죠. 이 모든 과정은 훗날 그가 남긴 일기에 매우 자세히 기록돼 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이 그림을 연출자의 시각이 아닌 증인, 목격자의 시각에서 기록하려 했습니다. 지금의 보도와 매우 비슷한 대목이죠.
낭만주의 대표작으로 센세이션 일으켜
‘키오스 섬의 학살’은 저널리즘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화단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낭만주의는 질서와 규범에 입각해 선과 형태를 중시하는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미술입니다. 직관과 감성, 상상력을 발휘해 색채와 분위기를 중시하는 것이 낭만주의의 기본이죠.
또 그리스·로마의 역사, 신화를 주제로 한 신고전주의와 달리 낭만주의는 중세적이고 이국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죠. 이성적인 면을 강조하는 신고전주의와 감성을 내세운 낭만주의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419㎝×354㎝ 달하는 거대한 작품
‘키오스 섬의 학살’은 크기만 봐도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길이 419㎝, 너비 354㎝에 달하는 거대한 이 작품은 중간 지점이 생략된 채 전면의 인물들과 멀리 보이는 풍경만으로 구성된 매우 단순한 구도죠. 화면 오른쪽에 위치한 오스만튀르크군 기마병만이 학살의 주체로 등장하고 나머지는 모두 희생자로 구성했습니다. 희생자들의 힘없는 눈빛이 보이시나요? 이 학살이 그들에게 무엇을 빼앗아갔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회화의 학살’이라며 혹평
이 작품은 1824년 파리 살롱전시회에 출품됐습니다. 작품은 당시 낭만주의의 적수인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의 작품과 함께 전시돼 더 주목을 받았죠. 그러나 처음에는 반응이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 사건을 ‘위대한 그리스인의 해방 투쟁’으로 대하던 프랑스인의 정서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죠.
들라크루아는 이 작품을 ‘혁명’보다는 ‘재난’처럼 그렸습니다. 비평가들은 그의 객관적인 시선을 매우 불편해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의 거장이었던 앙투안 장 그로(Antoine-Jean Gros)는 “회화의 학살”이라고 혹평하기도 했습니다.
당사자 입장에서 접근…후세 높이 평가
그러나 ‘키오스섬의 학살’이 훗날 이렇게 높이 평가되는 것은 바로 당사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본 태도 때문일 겁니다. 어떤 목적이든 전쟁은 당사자에게 재난처럼 다가옵니다. 들라크루아는 전쟁을 통해 이뤄낸 결과보다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인간 군상의 감정을 충실히 묘사했습니다. 저널리즘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답게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 또한 놓치지 않고 말이죠. 객관적인 시각과 주관적인 감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 역사적인 작품이란 평가는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불과 300여 년, 보도성 갖춘 그림 개념 잡혀
앞서 저널리즘의 시작이 생각보다 오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죠? 전쟁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의 모습을 제대로 알린 ‘키오스 섬의 학살’이 나온 지 불과 30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말이죠. 들라크루아의 시도는 이후 후배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비로소 ‘보도성’을 갖춘 그림의 개념이 잡힌 것이죠. 그러고 보니 국방일보의 모토 역시 ‘국방의 참모습을 바르게 널리 알린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300년 전 들라크루아와 52년 역사의 국방일보도 어쩌면 시간과 공간을 넘어 같은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김윤애 문화역서울 284 주임연구원>
<클래식> 그 날 그 시간이 그리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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