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기 3주차] 아름답고 무용(舞踊)한 것
어릴 때 한국무용을 전공했다. 토요일에도 학교에 가던 초등학교 시절에 출석이 인정되는 결석을 하며 토요일에 무용대회에 나갔으니, 크면 자연히 무용수가 될 거라 생각했다. 학교를 마치면 집에 가방을 벗어두고 집 앞에 있는 무용학원에 가서 가야금을 배우고, 가야금 수업이 끝나면 무용 진도를 나갔다. 배웠던 동작을 복습하고 새로운 동작을 익히고, 그 다음 춤이 몸에 익을 때까지 음악에 맞춰 계속 연습하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장구춤, 부채춤, 소고춤, 북춤, 살풀이, 아리랑, 도라지타령, ... 할머니 원장님과 엄마 원장님, 두 모녀가 운영하는 무용학원에서 엄마 원장님께 여러 춤을 전수받았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학원 발표회와 대회에 나가기 위해 연습하던 시기에는 해가 질 무렵까지 학원에서 춤을 추고 의상을 맞추며 선생님의 불호령과 칭찬을 번갈아 들으며 버선이 새까매지도록 바닥을 쓸고 돌고 뛰었다. 대회에 나갔을 땐 하도 연습을 많이 해서 무대에서 몸은 연습한대로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눈은 새까만 관객석을 향해 동작에 맞춘 시선처리를 했으며, 귀로는 관객석에서 다른 학부모님들의 "많이 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작 나는 내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의식하지 못한 채 음악에 맞춰 저절로 움직이는 몸을 잔뜩 긴장한 상태로 느꼈을 뿐이다. 대회 순서를 정하는 제비뽑기를 하며 내 차례가 언제 올 지 초조해하는 마음, 어떤 번호가 나오든 그 번호에 맞게 격려해주신 원장선생님의 목소리, 매 대회마다 1등을 휩쓴 다른 학원 출신의 아이의 춤을 무대 뒤에서 지켜보는 일, 밝은 조명이 나를 가득 비추어 대기실보다 더 따뜻했던 무대의 느낌, 무대 바닥이 미끄러워 혹 넘어지기라도 할까봐 버선에 물을 묻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대회가 끝나고 작은 트로피와 상장을 받으면 엄마와 시내의 상패업체에 가서 조금 더 큰 사이즈로 트로피를 하나 더 제작해서, 원래 트로피는 학원에 전시하고 새로 맞춘 트로피는 학교에 가져가 아침 방송 시간에 시상했다. (나중에 원장님이 타지로 이사를 가시며 그 트로피도 함께 가져가셨는데, 두고두고 트로피 생각이 났다.) 초등 임용에 합격하고 가장 좋아하고 존경했던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께 전화드렸는데,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선생님은 나를 "그때 너 무용했던 아이 맞지?"라며 기억해주셨다. 기독사립학교라 아이들 사이에서도 묘하게 돈과 부모님의 직업, 사는 동네로 편이 나눠져 있었는데, 선생님은 어떤 댓가도 바라지 않으시고 그저 용기를 주시고 재능을 살려보라는 의미로 학교에서 열린 학예발표회 무대에서 단독으로 무용 공연을 하도록 순서를 마련해주셨다.
당시 일부 치맛바람이 극성인 학부모들 몇 분이 엄마에게 선생님께 얼마를 드려야 학교 무대에 설 수 있냐고 물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선생님께서 무대에 설 기회를 주셨다는 것을 담담하게 이야기한 엄마의 대답에 그 학부모의 딸이 무용학원에 등록하기도 했다. 학교 가는 게 싫었고 (막상 가면 잘 놀고 즐겁게 지냈지만) 어른들에 대한 불신이 많았던 어린 시절에, 용돈을 모아 빵집에서 맛있는 도넛을 사고 집에 있는 귤을 몰래 가져가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셨던 선생님. 교사가 되어 전화드린 이후 또 벌써 10년이 지났는데, 지금은 그 학교 교장선생님이 되셔서 교육청 메신저로 종종 성함을 검색해보며 아직 퇴직하지 않으셨음에 안도의 숨을 내쉰다. '박사 논문 나오면 들고 찾아뵈어야지' 라며 동기부여도 해보고, 나도 선생님처럼 조건 없이 공정하게 아이들을 대하겠다는 작은 다짐도 한다.
아무튼, 지금 생각해보니 집 앞에 있던 무용학원은 비교적 저렴한 수강료였으나 지금의 입시학원 보다도 더 전문적이고 고전 무용의 정수를 도제식으로 전수하던 보기 드문 국악원이었다. 요즘의 체계적인 입시무용과는 그 결이 다르지만, 무용과 예술을 대할 때의 엄격하고 진지한 자세와 춤의 본질을 배울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속셈학원이나 국영수 위주의 학원이 아닌 무용학원을 보내주신 엄마의 혜안에 지금도 많이 감사하고 있다. 나와 동갑이었던 원장선생님의 딸은 우리 집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나는 원장선생님께 무용을 배우는 재미난 일화들, 대부분 여학생들이라 그 사이에 일어난 시기와 다툼, 무용학원의 예쁜 언니를 보며 동경했던 기억 등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생각과 마음을 이루었다.
고전무용학원이었지만, 격일로 발레 선생님을 모셔와 발레 수업을 진행한 적도 있었다. 그 땐, 매일 무용학원에 가서 하루는 전통춤, 하루는 발레 이렇게 퐁당퐁당 수업을 하며 바깥 근육과 안 근육이 골고루 생길거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키나 좀 컸으면 좋겠다. 나는 이렇게 작은데..' 했지만, 그때 경험했던 발레 덕분인지 지금도 취미로 할 운동을 정할 때 '발레수업'부터 검색하게 된다. sns에 과도하게 광고를 하거나 몸에 대한 애정과 철학 없이 회원들을 돈벌이 상대로만 보는 일부 헬스, 필라테스 학원들을 몇 번 경험하고 나서는 더더욱 나와 맞는 운동은 무용이라고 생각하며 문화센터와 대학교 일반시민교육원에서 발레를 수강하고 있다. 거울을 마주하고 몸의 움직임, 자신의 얼굴을 평생 응시하고 다듬어온 선생님들에게서 느껴지는 단단한 내면이 좋다. 여럿이 함께 동작을 배우고 스트레칭을 하지만, 결국 거울 속 자신과 마주하며 각자의 페이스에 맞게 자신의 몸과 마음의 소리에 집중하는 시간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과정인 것 같아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하다. 말 그대로 아름답다.
왜 갑자기 무용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는가 하니, 원래는 좋아하는 무용비평가이자 작가의 책을 다시 읽고 서평을 쓰려고 서평의 서두를 어렸을 때의 경험으로 풀어내다보니 글이 길어져 서평이 아닌 무용에 대한 회고를 담은 에세이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이 나름 의미가 있고, 잊고 있던 시간들을 봉인 해제하는 것 같아 속이 뚫린다. 글쓰기 교실에서 글을 읽고 나면 100번의 박수를 받는 것이 참 좋은게, 행복한 기억이든 아팠던 순간이든 이렇게 글로 쓰고 박수를 받으면 그 때의 나를 마음껏 격려하고 끌어안아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쁘다.
최애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에서 극중 김희성(변요한 분)이 남긴 "내 원체 아름답고 무용(無用)한 것을 좋아하오" 대사가 퍽 마음에 들었다. 무용에 대한 글을 적다보니 '아름답고 무용하다'는 표현이 이 글을 정리해준다. 드라마에서는 쓸모가 없다는 뜻의 '무용(無用)'이었지만, 나의 어린 시절 무용에 대한 기억과 지금도 이어지는 무용수업은 '아름다운 춤과 그 춤을 추며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이 아름답다'는 의미로 귀결된다. 나를 발견하고 바쁜 일상에 치여 정작 들여다보지 못한 내 자신을 물끄러미 직시하는 일, 좀더 나아지는 몸동작과 정련되어 가는 내 모습을 보며 기뻐하는 이 모든 아름다운 일들을 평생 이어가고 싶은 소망을 담아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