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은 늘 쥐 죽은 듯 고요하다. 더욱이 미술관 문을 열기까지 30분 정도 남겨두고 근무 자리에 도착하는 날이면 말을 걸어 나를 속세로 끌어내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나와 렘브란트, 나와 보티첼리, 나와 실제로 거의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라 믿어질 만큼 강렬한 환영들뿐이다. 메트의 옛 거장 전시관이 마을이라면 주민은 거의 9천 명에 달한다(몇 년이 흐른 후 전시실 하나 하나를 섭렵하면서 모두 세어본 결과 정확히는 8496명이었다. 전시관을 크게 확장한 다음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숫자가 되었지만 여기에는 배경에 나오는 아기 천사, 투우장의 관객, 개미 크기의 곤돌라 사공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어떻게 그런 것들까지 모두 셀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면 그건 나에게 얼마나 시간이 많았는지를 실감하지 못해서다). 주민들은 596점의 그림 속에 살고 있는데 우연히도 거의 그 숫자에 맞먹는 햇수 이전에 붓으로 창조된 사람들이다.
가장 나이가 많은 주민은 1230년대에 태어난 성모 마리아와 그녀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성모와 성자Maclonua and Chill), 중세 이탈리아의 화가 베를린기에로의 작품으로 알려진 단 두 점 중 하나. 고대 철학자의 복식을 하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특징적이다-옮긴이)이고, 가장 젊은 주민은 프란시스코 데 고야rancisco de Com가 1820년에 탄생시킨 초상화 속 인물이다. 그 이후의 그림들은 여기서 훌쩍 떨어진 미술관 남쪽 끝에 산다. 거기는 현대 세계가 꾸준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전시관이다. 대외적으로는 기계의 힘, 자본주의나 독일, 이탈리아 같은 이름의 민족 국가가 등장하고, 예술계 내부에서는 사진과 튜브에 든 기성품 물감이 등장한다.
옛 거장 전시관에 사는 주민들의 공통점은 이 모든 것 이전에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이쪽 주민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도사린 위험이 발을 들이지 못하게 밤이면 성문을 닫는 중세도시에 사는 장인들, 실크 스타킹 차림에 누구누구 부인을 알현하기 위해 애를 끓이는 궁정의 신사들이다. 혹은 신앙심이 두터운 수도사, 앞장서서 제국의 위대함을 선전하는 사람들, 막 형성되기 시작한 중산층이 고용할 수 있는 비싸지 않은 초상화 화가들이다.
그들이 누구였든 간에 현대인들로서는 상상력을 극한까지 펼쳐야 닿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건 모두 같다. 옛 거장 중 우리 시대와 가장 근접한 시대에 살았던 고야만 해도 적어도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성인이 되기까지 살아남은 건 그중 한 명뿐이었다.
전시관을 거닐다 보면 낯설고 먼 땅의 여행자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옆구리를 찌르는 동반자도 없이 혼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도시를 돌아다녀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놀랍도록 몰입하게 되는 경험인지 알 것이다. 가로등, 작은 물웅덩이, 다리, 교회, 1층에 난 창문으로 슬쩍 들여다보이는 광경들에 자신이 녹아서 스며드는 느낌 말이다. 살아 숨 쉬는 듯한 이국적인 디테일은 물론이고 심지어 날개를 퍼덕이는 평범한 비둘기마저 이상하리만치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거리를 걷는다. 어딘가 시적이다. 조심스럽게 미끄러지듯 거리를 누비면 마법은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일을 시작하고 처음 몇 주는 뇌가 반쯤 작동하지 않은 듯했다. 정말 그 정도로 몰두가 됐기 때문이다. 모든 그림이 '짠' 하고 커튼을 열어 안을 보여주는 건물 1층의 창문들처럼 보였다.
보통 한 전시실에는 네 면의 벽에 걸쳐 열 개에서 스무 개 정도의 금테를 두른 '창문'이 나 있다. 어느 창문은 돌벽을 단숨에 뚫고 바깥으로 이어져서 굽이치는 언덕과 요동치는 바다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다른 창문은 창틀에 턱을 받치고 들여다보라는 듯 집 안의 광경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혹은 고개를 들면 빤히 쳐다보는 낯선 사람과 눈이 마주치게 되는 창문들도 있다. 그들은 코를 유리에 박다시피 하고 이쪽을 바라본다(그 창문에 유리가 있다면 말이다. 이 그림들에는 대부분 유리 한 장도 덮여 있지 않다).
그렇게 조용하던 어느 날 아침, 눈을 비벼 남아 있는 졸음을 좋으며 고개를 들었는데 바로 눈앞에 <스페인 왕녀 마리아 테레사Marta Teresa. Infanta of Spain>(훗날 프랑스 루이 14세의 왕비가 된 마리아 테레사 왕녀를 그린 초상화. 스페인의 궁정화가로 활동했으며 대작 <시녀들las Meninas>로 유명한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Veliorquez의 작품 – 옮긴이)가 있었다. 작품을 보는 순간 나는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는 허리를 깊이 굽혀 절을 하고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이젤을 세운 다음 마법을 부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녀의 총명함을 바로 눈앞으로 가져와 보여주는 마법 말이다. 정말 독특한 얼굴이다. 마리아 테레사는 열네 살이라는 나이에 비해서는 어려 보였지만 나이보다 성숙한 눈을 가졌다. 예쁘거나 활발한 편은 아니다.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고, 무엇을 보여주지도 감추지도 않은 모습이지만 꽤 솔직하고 침착해 보인다. 자신의 이상한 삶에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그것을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후퇴나 양보에 익숙하지 않은 모습.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듯 그녀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어쩔 때는 허수아비로서의 내 역할을 더 뚜렷이 의식하게 되기도 한다. 허수아비라는 단어는 아다가 쓴 것인데 조금 더 근사하게 말하면 왕실 근위병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을 시작한 다음 주, 나는 처음으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ner의 그림이 있는 곳에 배치됐다. 현재 서른네 점밖에 남아 있지 않은 귀중한 그의 작품들 중 어이없게도 메트가 다섯 점이나 소장하고 있다. 그 사실을 아는 나는 허리를 좀 더 곧게 편다. 이른 아침이지만 영국, 일본, 미국 중서부 등에서 온 관광객 및 명이 그림에 경의를 표하러 왔기 때문이다. 포니테일을 한 예쁘장한 젊은 엄마가 1665년경에 그려진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초상화 <젊은 여성 습작 study of a Young Woman), 요하네스 베르메이르의 대표작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The Girl with a Pearl Earring)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같은 테마의 작품으로 작가 특유의 구도와 명암 처리 기법을 볼 수 있다-옮긴이) 앞에 선다. 헤이그에 있는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같은 테마의 더 유명한 그림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굳이 설명해서 그녀를 실망시킬 이유는 없다.
모두가 규칙을 잘 지키고 있다. 내 시선이 페르메이르가 즐겨 그렸던 조용한 집안 풍경으로 가서 멈춘다. 뺨을 손으로 받치고 졸고 있는 하녀(<잠든 하녀 Maid Asleep>, 잠든 인물을 둘러싼 일상 속의 물건들이 정적인 분위기를 이루고, 실내로 들어오는 빛의 자연스러운 표현이 절묘한 작품-옮긴이)가 보이고, 그 뒤로는 잘 정돈되고 텅 빈 듯한 집 안의 모습이 모든 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작가 특유의 빛을 받으며 펼쳐진다. 그림을 보다가 페르메이르가 포착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는 깜짝 놀랐다. 가끔 친숙한 환경 그 자체에 장대함과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하는데 그가 바로 그 느낌을 정확히 포착한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형 톰의 병실에서 끊임없이 들었던 느낌이었고, 쥐 죽은 듯 고요한 메트의 아침이면 떠올리게 되는 바로 그 느낌이기도 했다.
일을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난 후, 배치된 팀이 어디인지 듣기 위해 대장의 자리로 향하는데 나답지 않게 마음이 초조했다. 오늘은 괜스레 베네치아 전시실에 매치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다가 대장 책상에 당당한 포즈로 앉아서 진짜 대장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희망 사항을 이야기하자 그녀는 별로 홈미 없는 이야기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둥 마는 둥 한다. 지지직거리는 라디오 소리, 철컹거리는 열쇠 소리와 함께 신 대장이 나타난다. 경험이 많아 정비과의 베테랑으로 통하는 40세의 그는 우리 과 소속의 수많은 가이아나게 미국인들 중 하나다. 싱 대장은 아트 핸들러들이 일할 구역에 관람객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차단봉을 세워줄 사람이 있는지 물었고, 아다가 지원했다.
덕분에 그녀는 배치될 구역을 선택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과장님." 그녀가 말한다. "3팀 두 번째 조를 맡을게요." 그리고 장시 후 덧붙인다. "그리고 여기 브릴리 씨가 3팀 세 번째 조를 맡으면 되겠네요.“
아다는 B구역 소속의 나머지 열네 명 중 누가 우리 팀으로 올지 알게 될 때까지 남아 있자고 고집을 부린다. 결국 나와 함께 일을 시작한 열여덟 명의 신입 중 두 명이 우리 팀에 배치되었다. 허드슨 밸리 출신의 블레이크는 내 또래로, 곱슬머리에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다. 내 나이의 곱절은 되는 테렌스는 쾌활하고 떠들썩한 성격으로 가이아나 출신의 이민자다(경비원의 출신 국가를 추측할 때 가이아나, 알바니아, 러시아 중 하나를 찍으면 적중할 확률이 높다. 다른 카리브해 연안국들과 구소련 국가들이 그 뒤를 따른다). 나와 테렌스는 만나자마자 친구가 됐다(사실 그와 친구가 되지 않는 사람이 더 드물긴 하다). 하지만 교육 기간이 끝나고 그는 중세 예술품을 전문으로 전시하는, 맨해튼 북쪽에 위치한, 메트의 분관인 클로이스터스에 배치되었다. 오늘은 오버타임 근무를 하느라 이쪽으로 온 것이다. 나는 블레이크와 약간의 거리를 유지해왔는데,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내가 혼자만의 시간이 소중하다고 여기고, 비슷한 또래의 친구를 만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넷은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눴다. 동료들이 얼마나 수월한 대화 상대인지 깨닫고 살짝 감명을 받는다. 하지만 각자 자기 자리를 찾아 네 방향으로 흩어지고 나자 마침내 완벽한 고독으로 충만한 하루를 시작하며 짐을 벗듯 가벼운 마음이 된다.
베네치아는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해 보일 정도의 도시였다. 파도가 철썩이는 118개의 섬을 연결해서 만든 이 도시는 한때 세상에서 가장 밝고 가장 선명한 색을 자랑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군청색, 이집트에서 온 청록색, 스페인에서 온 적색, 심지어 베네치아라는 이름도 '바닷물처럼 푸른'이라는 뜻의 라틴어 ‘베네투스 venetus’에서 파생한 것이다. 16세기 베네치아의 가장 위대한 화가는 '티션'Titian'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다. 마치 물웅덩이와 적포도주를 섞어서 색을 빚어내기라도 하듯 그는 자신이 그려내는 광경을 장미빛으로 감쌌다. 나는 그의 명작 <비너스와 아도니스Venus and Adonis>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설화 속 한 장면을 표현한 그림 – 옮긴이)에 다가간다. 이 작품은 너무나 아름다운 침묵의 시와도 같아서 앞에 선 내 기분까지 거기에 함몰되어버린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인간 아도니스에게 절박하게 매달리는 아마빛 금발의 비너스와 여신의 품을 거부하고 위험 가득한 속세로 돌아가려는 자신만만한 젊은이 아도니스. 둘 중 누가 더 아름다운지 고를 수가 없다. 나도 티션이 본고대의 시를 읽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결국 어떻게 끝나는지 알고 있다. 아도니스는 죽고 비너스는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빠져 그의 흐르는 피에서 붉은 아네모네 꽃이 피어나도록 한다. 아네모네라는 이름은 '바람에서 태어나다'라는 뜻이다.
아직 관람객이 없는 시간,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전시실 안을 걷다가 티션의 또 다른 작품을 발견한다. <비너스와 아도니스>보다 훨씬 작고 덜 알려진 작품이다. 티션이 젊었을 때 그린 <남자의 초상Portrait of Man>이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애를 써서 수정을 많이 하거나 공을 들인 흔적 없이 너무도 능숙한 솜씨로 완성한 작품이라 마치 햇빛이 어른거리는 연못에 우연히 비친 얼굴처럼 보인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긴 머리에 턱수염을 길렀지만, 그것들이 그의 천사 같은 얼굴을 가리지는 못한다. 온화하고, 생기 넘치고, 젊음으로 가득한 얼굴이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있으면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자신도 모르는 듯하다. 표면적으로는 그가 장갑을 벗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지만 단지 짧은 찰나를 보는 것 같지가 않다. 그림 안의 시간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기보다 흘러들어 고인 느낌이다. 과거와 미래가 생명력 넘치는 현재에 휩싸인 듯이 젊은이는 가차 없는 시간의 화살을 피할 수 있기라도 하는 듯하다.
이 초상화의 묘한 특징을 어느 정도는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티션은 반투명 유약을 겹겹이 발라서 빛이 끊임없이 새로운 느낌으로 흐르고, 반사되고, 굴절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작품이 내 안에 불러일으키는 감각을 피할 수는 없다. 그림은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부드럽게 생명으로 가득 차서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듯하다. 살아 숨 쉬는 기억, 살아 숨 쉬는 마법, 살아 숨 쉬는 예술... 뭐라 불러도 좋지만 그 자체로 완전하고, 밝고,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고, 퇴색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인간의 영혼이 그랬으면 하는 바로 그 상태 말이다.
내 라커의 맨 위 선반에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톰의 사진들이 든 해진 봉투가 놓여 있다. 그 스냅 사진들과 이 그림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고 나는 왜 그런지 이해하기 위해 여러 사진을 머릿속에서 떠올려본다. 결혼식 날 턱시도를 입은 사진 속 톰은 덩치가 크고, 건장하고, 소년처럼 행복한 표정이다. 박사 학위 수여식에서는 암 때문에 수척해진 몸에, 벗겨진 머리를 헐렁한 박사모로 가리며 약간 수줍고 자랑스러운 표정이다. 히커리로드의 빨강 벽돌집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찍은 스냅 사진들도 많다. 낙엽 더미 위에서 뛰고, 생일 케이크를 먹고, 침대 위에서 씨름을 하는 모습들, 포착된 그 모든 순간과 수많은 기억은 낡아진 사진들처럼 시간 속으로 사라져버릴 듯 위태롭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합친 총합은 그보다 훨씬 큰 것, 바로 톰에 관한 기억을 만들어내서 눈을 감으면 언제라도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된다. 그 기억은 티션의 초상화와 매우 비슷하다. 밝고,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고 퇴색하지 않는 이미지 말이다.
오늘의 첫 방문객이 도착한다. 나는 경비원이 서 있기에 좋은 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는다. 그러면서 미술관에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느끼고 싶은 것을 느낄 수 있음을 깨닫는다.
“맙소사! 여기도 예수 그림이잖아!”
가장 기억에 남는 불평 중 하나는 일을 시작한 지 몇 주 되지 않았을 때 듣게 되었다. 옛 거장 전시관 안에서도 가장 오래된 그림들을 소장한 전시실들이 있는 복도를 순찰하다가 들은 말이었다. 전시관 중앙에 나란히 난 두 개의 널찍한 복도를 따라 한쪽에는 이탈리아, 다른 한쪽에는 플랑드르와 네덜란드의 후기 고딕, 르네상스 초기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망치로 두드려 얇게 편 금박을 입힌 배경에 특수 도구를 써서 새겨 넣은 후광, 잔금이 간 유리처럼 크레이징이 잔뜩 보이는 표면 등으로 구현한, 기원후 1세기 갈릴리에 살던 한 남자에게 집착하는 이 그림들은 그냥 나이만 많은 게 아니라 보기에도 느끼기에도 오래된 것들이었다. B구역에만 210명의 예수가 산다.
관람객의 불만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어도 예수의 그림을 정말 좋아한다. 이 전시실을 거닐다보면 우울하지만 유난히 내밀한 가족 앨범을 보는 느낌이 든다. 그중 아기 시절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이 있다. 경배, 성가족, 성모와 아기 예수를 담은 그림들 말이다. 물론 젊은이의 삶이 변화를 맞는 순간들을 포착한 그림들도 있다. 침례, 황야의 예수가 그 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난의 여러 장면을 담은 그림들이 보인다. ‘수난’이라 번역되는 영어 단어 ‘Passion’은 원래 ‘고통을 받다, 견디다, 참아내다’라는 의미다. 예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통, 종교적 자학,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수탄, 피에타 등이 있다. 옛 거장들은 자신이 가진 재능과 에너지를 전부 쏟아, 한 사람의 짧고 힘든 삶을 통해 모든 경의와 두려움을 묘사한 것 같다.
그런데 이 전시실을 다시 지나가다가 이렇게 포착된 예수의 삶 중에서 그가 설교를 하고 다니던 시기, 다시 말해 ‘그의 말 자체가 주역이 되었던 시기’는 거의 모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그의 설교인 산상수훈 Sermon on the Mountain을 묘사한 그림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교훈을 담은 우화를 그리려는 노력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옛 거장들은 예수의 삶에서 가장 반향이 큰 부분은 그의 인생이 시작된 지점과 끝난 지점이라고 확신했음에 틀림없다. 게다가 부활, 승천, 왕좌에 앉은 그리스도와 같이 초인간적인 존재로서의 그리스도를 묘사한 그림들보다 인간의 육신을 가졌을 때의 모습을 묘사한 장면들이 대여섯 배는 많았다. 그가 고통을 받고 있는 그림에서는 머리 뒤의 후광이 아니라면 그가 인간 이상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도 힘들 정도다.
메트에 소장된 작품들 중 가장 슬픈 그림은 베르나르도 다디Bernardo Daddi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The Crucifixion>일 것이다.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 보면 엄청나게 슬픈 광경이지만 유난스럽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그리스도의 몸은 위엄을 잃지는 않았지만 축 늘어져 있다. 온화한 우아함이 우러나오는 분위기로 보아그는 용감하게 고통에 맞섰던 듯하다. 마리아와 요한은 생각에 잠겨 땅에 앉아 있다. 두 사람은 무엇보다도 지쳐 보인다. 미친듯 흘러간 하루가 끝나고, 남은 건 죽음뿐이다. 죽음이라는 그 단도직입적인 사실, 불가해한 수수께끼, 거대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최종적 단호함만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다.
작품들을 지켜보는 일을 하는 나는 이 작품을 본래의 의도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14세기 화가는 언젠가 예술품 비평가라는 직업이나 미술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교과서가 등장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르나르도 다디에게 그림은 고통스럽지만 꼭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생각을 돕는 도구였을 것이다. 나는 예수의 그림들에서 새롭거나 미묘한 뉘앙스를 찾는 데 관심이 없다. 내가 이해한 건 다디는 고통 그 자체를 그렸다는 점이다. 그의 그림은 고통에 관한 것이다. 고통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말문을 막히게 하는 엄청난 고통의 무게를 느끼기 위해 그림을 본다. 그렇지 않다면 그림의 정수를 보지 못한 것이다.
많은 경우 위대한 예술품은 뻔한 사실을 우리에게 되새기게 하려는 듯하다. ‘이것이 현실이다’라고 말하는 게 전부다. 나도 지금 이 순간에는 고통이 주는 실제적 두려움을 다디의 위대한 작품만큼이나 뚜렷하게 이해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내 그 사실을 잊고 만다. 점점 그 명확함을 잃어가는 것이다. 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보듯 우리는 그 현실을 다시 직면해야 한다.(35-51쪽)
눈으로나 마음으로나 이 그림을 완전히 흡수하고 감상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기에 나는 그것이 보여주는 세상의 충만함을 흡수하려고 노력하면서 더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나만의 방식을 갖추게 됐다. 우선 작품에서 교과서를 쓰는 사람들이 솔깃해할 만한 대단한 특이점을 곧바로 찾아내고 싶은 유혹을 떨쳐낸다. 뚜렷한 특징들을 찾는 데 정신을 팔면 작품의 나머지 대부분을 무시하기 십상이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가 그린 초상화가 아름다운 까닭은 그의 천재성을 반영한 특징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색채와 형태, 인물의 얼굴, 물결처럼 굽실거리는 머리카락 등이 아름답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다양하고 매력적인 세상의 속성들이 훌륭한 표현 수단 안에 모아졌기 때문이다. 어느 예술과의 만남에서든 첫 단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저 지켜봐야 한다. 자신의 눈에게 작품의 모든 것을 흡수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건 좋다’, ‘이건 나쁘다’ 또는 ;이건 가, 나, 다를 의미하는 바로크 시대 그림이다‘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상적으로는 처음 1분 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해선 안 된다. 예술이 우리에게 힘을 발휘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114—115)
출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패트릭 브링리, 웅진지식하우스,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