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추억이 담긴 우리들의 그 노래
일주일 전 친한 고등학교 동창 8명으로 구성 된 모임에서 골프를 겸한 2박3일 초가을 여행을 충주 인등산 자락으로 떠난다기에 모든 일정은 참석하지 못하고 1박2일만 참석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모임에서는 봄, 가을 한 번씩 국내 여행을 해 오고 있었지만 저희 부부는 이런저런 ? 瑩ㅐ막?그간 거의 참석하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이 모임은 워낙 친한 친구들이라 평소 서울에서 평균 한 달에 한 번은 만나고 가족과도 자주 만나 여행에 빠진다 해서 우정이 얇아지거나 멀어질 리는 없는 모임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주 빠지다 보니 준비하는 친구들에게 미안하여 이번만은 꼭 참석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지난주 금요일부터 시작한 모임에 하루 늦게 토요일 아침 골프부터 합류하였습니다.
골프를 치고 숙소로 향하는 길에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의 무대인 박달재에 잠시 들렀습니다. 충북 제천시 백운면에 위치한 박달재는 생각보다 매우 정성을 들여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노래의 사연이 적힌 비석을 들여다보니 사연은 청승맞기 그지없었습니다.
“과거보러 가는 선비 박달이 박달재 부근을 지나다가 농가에서 하루 밤 묵게 되었는데 그만 그 집 딸 금봉이와 눈이 맞아 하룻밤 사랑을 나누었더랍니다. 물론 박달은 금봉이에게 과거 급제하면 내려와 결혼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과거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여자에 바람이 난 박달이 과거급제할리는 만무, 낙방을 하고 차마 볼 낯이 없어 금봉이에게 돌아오지 못하고 낙방거사 신세가 되고 말았는데, 금봉이는 이런 사정도 모르고 박달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박달이 떠나간 박달재를 매일 오르내리다 상사병에 걸려 세상을 뜨고 맙니다. 얼마 후 금봉을 찾아온 박달은 이 사연을 듣고 목을 놓아 울다가 박달재를 달려 올라가는 금봉의 환영을 보고 쫒아가 그만 천길 벼랑으로 떨어져 죽게 됩니다.”
결국 뒤집어 이야기하면 고시 공부하던 고시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하숙집 딸과 사랑을 나누는 바람에 고시에 낙방하고 둘 다 불행해졌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패배주의 사연을 반야월 선생님은 1950년 구성진 노래로 만들었고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우리 국민들 가슴을 달래주었습니다. 사실 세대가 차이나 우리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그저 옛날 노래라고 생각하지만 1950년대에 이 노래를 들은 저희 부모님 세대는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50년, 60년대의 어려웠던 시절, 한 많은 시절이 떠올라 다른 그 어떤 노래보다도 가슴이 메어질 것입니다. 노래는 세월과 함께 우리의 역사가 됩니다. 박달재를 뒤로하고 우리들은 인등산 자락에 있는 어느 기업 연수원에 짐을 풀었습니다. 이것저것 하는 사이에 시간은 벌써 저녁때가 되어 버렸습니다.
일행들은 모두 바삐 움직여 숙소 뒤편 야외 바비큐 장에 마련된 식탁에 저녁준비를 하였습니다. 고기와 해산물이 푸짐한 저녁이 준비되었고 각종 주류도 모두 준비되어 이제 아무런 부족함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저 먹기만 하면 될 순간.
누군가 저에게 가지고 오라고 한 포터블 음악 시스템을 가지고 왔냐고 외쳤습니다. 사실 친구들이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서로서로 준비물을 마련하였는데 저에게는 아무런 준비도 시키지 않고 오직 제가 가지고 있는 포터블 음악 시스템을 가지고 오라고만 하였습니다. 혹시 제가 잊어버릴까봐 메일에도 빨간 형광펜을 치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그 음악 시스템을 장치하고 아이패드를 연결하였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생전 처음해보는 DJ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DJ가 무엇인지 알까하는 생각도 드네요. DJ란 디스크자키의 줄임말로 ‘Disc(레코드)를 틀어주는 Jockey(기수)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 원래의 뜻입니다. 아무튼 이런 DJ가 되어 친구들이 원하는 음악을 모두 틀어 주었습니다. 요즘은 좋은 세상이라 제가 가입한 음악 사이트에서 원하는 곡 무엇이든 듣게 해줍니다.
1974년 고등학교를 들어가 3년을 같이 다니고 1977년 대학을 입학한 우리들은 같은 시대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공유한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지만 오늘만큼은 음악을 공유한다는 의미가 가장 절실히 와 닿습니다.
1974년 까까머리 고등학교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다니던 대일고등학교에 당시 최고 인기 있던 여가수 채은옥(당시 19세)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녀의 히트곡 ‘빗물’을 들고 말입니다. 그 당시 저희들은 그녀가 몇 살인지 알지 못하였지만 그녀는 저희들의 여신이었습니다. 그녀 옷자락에 붙어있던 그녀의 머리카락을 집은 어느 학생이 학교 내에서 스타가 되던 철없는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첫 곡으로 이 ‘빗물’을 틀었습니다. 친구들 사이에 환성이 터졌습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채은옥을 외치며 그날의 추억으로 젖어 들어갔습니다.
1976년 고3때 발표되어 우리들의 대학교 내내 어느 모임이나 함께 외쳐 불었던 노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이어지자 오십 중반의 신사들은 체면을 잊은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그 시절 그 노래는 우리들만의 추억거리가 있습니다. 누구는 선술집에서 들은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생각날 것이고 누구는 고고장(지금의 클럽)에서 들은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생각났을 것입니다.
고고장하니 ‘고팅’이라는 단어가 오랜만에 떠올랐습니다. 고고장에서 하는 미팅이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여러 곡을 들은 후 저는 1977년 전 세계를 디스코 열풍으로 몰아넣었던 존 트라볼타 주연의 토요일 밤의 열기의 주제곡 ‘Saturday night fever'를 틀었습니다. 모두 넘어갔습니다.
수많은 장르와 수많은 시대를 넘나들며 우리들의 젊은 날을 수놓았던 무수히 많은 곡들은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날 제일 많은 들은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그 노래 있잖아. 그 뭐더라. 가사가 이렇게 시작하잖아. 아 맞아. 그래 그것 한번 틀어봐. 와 죽인다.” 오십대나 우리들의 자녀들 나이인 이십대나 아무런 구분이 가지 않는 밤이었습니다.
저는 몰래 어느 친구의 캠퍼스 커플 추억이 담긴 윤형주의 ‘우리들의 이야기’를 틀어주었습니다. 그 노래의 노랫말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웃음 짓는 커다란 두 눈동자 긴 머리에 말없는 웃음이 라일락꽃 향기 흩날리던 날 교정에서 우리는 만났오.’ 그 ‘우리’는 남녀 캠퍼스 커플일수도 남자 친구들일수도 여자 친구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만나 수많은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곳에서 사랑이 싹트고 우정이 영글어 갔습니다. 윤형주는 이 노래를 만들며 30년 후를 이미 예견한 듯합니다.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밤 하늘에 별 만큼이나 수 많았던 우리의 이야기들, 바람같이 간다고 해도 언제라도 난 안 잊을테요.’
그렇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우리가 좇는 권력, 명예, 돈이라는 허상 속에 우리의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만든 수많은 이야기 속에 행복이 있고 그것을 같이 회상하며 이야기할 가족과 친구가 있으면 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깊어가는 이 가을 여러분의 역사와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여러분들만의 노래를 들으며 가을 밤 한번 즐겨보지 않으시렵니까? 지금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오빤 강남 스타일’도 20년, 30년 후쯤이면 여러분만의 추억과 함께 여러분의 역사가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2.9.24. 조근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