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부산·울산·경남의 추억 사진박물관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아무 사진이나~! ☞ 서구 암남동주민센터(동회 or 동사무소),
용심 추천 2 조회 127 22.04.18 09:37 댓글 11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22.04.18 16:29

    첫댓글

  • 22.04.29 19:56

    http://k-artspace.or.kr/Down/ExhibitionImage/202012/135-1-1064(%EB%B6%80%EC%82%B0_%ED%95%98%EB%8B%A8,48).jpg

    '부산 하단'으로 되어있는데 '하단'은 아니겠죠?......

    임응식 40x50cm Pigment print 1940

  • 22.04.18 16:31

  • 22.04.29 19:59

    http://k-artspace.or.kr/Down/ExhibitionImage/202012/120-2-6-015(%EB%B6%80%EC%82%B0,50).jpg

    임응식 40x50cm Pigment print 1950

  • 작성자 22.04.29 21:41

    @{^..~} 의미 있는 사진 감사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저곳의 석재로 방파제와 해안을
    축조 하였고, 갯바위가 유독 많아 토박이 들은
    이곳을 “독골래미” or “똥골라미”로 불렀다,
    저곳이 부산지역 "사라호"태풍 최대의 피해 현장,
    당시에 해방과 6.25이후 피난민들이 등대입구에서
    암남동 송림공원 해변까지 저곳에 하나 둘 움막을 짖고,
    집단으로 거주한 관계로, 1959년 9월17일(음력:8월14일)
    태풍(사라호)으로 움막촌이 순식간에 파도에 의하여,
    한밤중에 바다로 쓸려 나가는 참담한 피해가 발생 하였다,
    당시의 태풍 피해로 사망·실종자 849명, 이재민 37만명.
    이후 절개지 밑에 부산해양고등학교,(1956년 3월에 개교하여
    1995년 폐교⇒ 현재, 등대대림 apt)의 부지가 폭 넓게 보입니다..

  • 22.04.19 11:06

    https://www.youtube.com/watch?v=3yKEZfq79YI

  • 작성자 22.04.19 16:20

    대단합니다, "용심"이 이 지역에서 태어나 군입대 전까지 살았고,
    충무동에서 직장생활과 개인사업을 2006년 서울로 이주 하기까지
    삶이 녹아있는 곳 입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네요,

  • 22.04.20 19:40

    이 지역에 1번 같은 사진이 남아 있다는 게
    다시 보고 또 보고 할 만큼 정말 대단합니다.

  • 작성자 22.04.21 09:57

    오랫만에 뵙겠습니다, 동안 무고 하셨는지요,
    "용심"이도 이 사진을 접하고 조작된 사진인가?
    1번 사진을 보고 의심이 들었는데 출처를 보고,
    어!진짜네,하고 믿었습니다.
    시기적으로 볼 때 도시의 인구증가로 남빈해수욕장의
    기능 상실로 대체지로 암남리마을의 해변과 송림공원을
    여름 휴양지로 개발하던 시기 인 것 같습니다.
    2번 사진의 전체적인 구도는 눈에는 선한데
    부분적으로는 좌측 건물만 기억 있고 학생들이 앉아있는
    난간만이 기억에 있습니다, 우측에 보이지는 않지만
    밑에서 올라오는 샛길이 있어, 다 올라와서 쉬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 22.04.21 11:52

    @용심
    일이 몰렸다가 느슨했다 합니다.
    저는 1번을 보는 순간 영선산을 생각했었습니다.
    주택들은 외국거류지 흔적일까 했지요.
    지금은 송도 쪽일 가능성이 훨씬 커 보입니다.

  • 작성자 22.04.21 18:35

    @ㅅㅁㅅㅁ72 1번 사진의 좌측에 조성한 뫼 자리가 "용심"이 살던 집 100m 아래
    오래전 부터 수산업과 조선업으로 번창한 이(李)씨 성을 가진
    속칭 이부자의 한옥 대저택의 주인이 었습니다,
    지금은 남부민중앙교회로 바뀌었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뫼 자리만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 위가 공동묘지 였습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