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쓰기
글이란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다. 글은 독자가 글쓴이와 소통하는 가교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글을 조직했는지가 곧 창작물의 깊이를 가늠하게 될 테니 말이다. 글쓴이가 독자와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많은 수단과 노력을 동원해야 한다. 세련되고 흥미로운 글쓰기는 독자를 흡인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글은 글쓴이의 인격이며 얼굴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글은 ‘한글맞춤법에 맞는 글쓰기’가 되어야 한다. ‘인터넷 포털서비스 다음’ 어학 사전은 한글맞춤법을 ‘1933년 조선어학회가 한글맞춤법 체계를 통일하여 작성한 안’이라 표기하였다. 이미 9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란 이후, 산업중흥기와 민주화라는 시대적 격랑을 헤쳐 왔다. 그런 속에서 한글맞춤법도 보완과 수정을 거듭해 왔음은 사실이다.
글을 쓰는 이들은 흔히 자기 스스로 ‘글쟁이’라고 말한다. 주로 칼럼니스트나 문학 동인들이 자기를 비하卑下하여 즐겨 쓰는 말인 줄 안다. 글쟁이는 우리 사회에서 지적 수준이 높은 지식층이다. 이들이 우리 사회의 문화를 주도해 왔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문화는 글쟁이들의 끊임없는 도전을 수용하며 발전하였다. 그때마다 새 옷으로 단장하고 변화하였다.
글쟁이는 말 그대로 글쓰기를 일삼는 사람이다. 글쟁이는 이로써 글쓰기의 기본을 지킬 명분이 더 분명해졌다. 따라서 글쟁이는 ‘우리말 맞춤법’에 맞는 글을 써야 한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지 못한 글들이 더러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는 분명 가르쳤고 배웠다. 문예사조文藝思潮와 개인의 문체나 개성이라는 의미로 변형⦁왜곡돼 온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교육 현장을 떠난 뒤, 자기 안에 갇혀 안주하고 있을 수도 있다. 변화의 물결을 외면했을 수도 있다. 가진 식견을 가지고 편안히 우려먹고 있었는지 모른다. 특히 문학인은 시대적 흐름에 민감해야 한다고 본다. 그 안에 독자를 흡인할 기회가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글쟁이는 지성의 최첨단에 서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분명한 것은, 새로운 지식을 다듬고 가꾸어, 독자에게 되돌려 줘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먼저, ‘논리적 모순이 없는 글’을 써야 한다. 나는 문장구성을 할 때는 육하원칙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나는(누가) 어제(언제) 놀이터에서(어디서) 손자와(무엇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왜) 놀았다. (어떻게)’ 이 문장은 이미 어떤 사건을 예고한다. 간결하면서 확실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문장이 함축하고 있는 무엇(?)을 묘사로 서술한다. 나는 한 문장에 한 가지 이상의 의미는 담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문단文段에서 첫 문장은 제시어로 의미를 둔다. 문단 종결문장은 첫 문장에 방점 찍기이다.
나는 작업할 때 한글 프로그램 파일(Hnc)을 크게 믿지 않았다. 「한컴오피스 2010」으로 문서를 작성하다 보면, 낱말 또는 문장이 ‘우리말 맞춤법’에 맞지 않으면 붉은 밑줄이 생긴다. 대부분 잘못된 띄어쓰기에 있다. 「한컴오피스 2016」을 내려받으려다 크게 낭패를 본 경험이 있다. 한국 문학 시대 제58호에 실린 나의 수필 「음지 인생」이 그것이다. 최신판 「한컴오피스 2020」이 출시됐다. 이 프로그램은 잘못 구성된 문장도 잡아낸다. 지금 한 달 체험판이 배포 중이다. 요즘 1년 변화는 과거 10년보다 더 빠르다. 나는 「한컴오피스 2020」을 쓰고 있다.
우리말 맞춤법에서 명시는 붙여 써야 맞다. 예를 들면 ‘산딸나무꽃’이 옳은 것이다. 나도 여기에 상당히 헷갈리고 했었다. ‘다음 어학 사전’과 ‘한컴 사전’을 동시에 열어놓고, 그 즉시 확인하고 있다. 한편의 글이 퇴고 단계에 이르면 부산대학교 정보컴퓨터공학부 인공지능연구실이 개발하고, (주) 나라인포테크(http://urimal.cs.pusan.ac.kr/urimal_new/)가 관리하는 ‘우리말 배움터’에 있는 「한국어 맞춤법/문법검사기」를 활용하였다. 이렇게 검사를 거쳤다고 해서 무조건 바꿀 일은 아니다. 글쓴이의 의도에 맞게 선별⦁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한국어 맞춤법프로그램과 글쓴이의 의도와는 분명,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장부호사용도 적절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특히 ‘ ’와 “ ”는 다르다. ‘ ’는 생각이고 “ ”는 대화이다. ‘ ’는 문장을 연결하여 쓰고, “ ”는 별도의 문장을 꾸려야 한다. “ ”를 쓸 때는 꼭 들여쓰기하고, “ ”가 끝나면 별도의 새 문장을 꾸려야 한다. 수필, 소설, 칼럼도 마찬가지다. 이 밖의 문장부호도 어떤 부호를 골라 써야 문장이 살아날지 고심해 볼 일이다.
문장은 짧을수록 좋다. 문장이 길면 의미가 희석되기에 십상이다. 독자는 문장이 길면 글쓴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 의미를 놓칠 수 있다. 나는 문장이 어쩔 수 없이 길어졌다면 문장 사이에 쉼표(,)를 찍는다. 나는 읽는 사람이 숨넘어가지 않게, 적당한 어미語尾에다 쉼표를 넣어 배려하고 있다. 문단文段 구성에도 넉 줄이나 오행이 적당하다고 본다.
문단을 구분하는 이유는 위 단락段落과 의미가 다르다는 뜻이다. 상황이나 배경, 공간, 시간이 바뀌었음에도, 이어 쓰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문단 구분 없이 문장이 길고 조밀하면 먼저 시각적으로 질린다. 글을 읽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다. 내가 대화체를 구사하는 이유는 첫째, 시각적으로 느슨한 느낌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 쓴다. 둘째, 의미의 전달이다. 대화체는 한 문장 안에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다. 따라서 사건 전개가 빨라지는 장점도 있다.
주제 의식을 선명히 한다. 내가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바로 주제다. 어떤 글이든 주제는 겉에 드러나지 않아야 좋다고 본다. 주제가 겉에 나오면 재미나 감동은 반감한다. 주제를 받쳐주는 예화는 사진을 찍듯이, 그림 그리듯이 묘사로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다. ‘글쓰기’가 주제라면 어떤 글감으로 주제를 또렷이 드러낼 수 있을지 구상단계에서 고심하게 된다.
글은 구상이 부실하면 그 글은 이미 실패에 가깝다. 구상에 공을 들일수록 구성은 쉬워진다. ‘글거리’(주제)를 부각하기 위해, 글감(소재)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눈에 들어오도록 이끌어가야 한다. 기⦁성⦁전⦁결 즉,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 ‘글거리’와 연관을 짓고 연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제는 삼천포(?)로 빠진다. 문단에서 첫 문장은 제시어다. 본문은 제시어를 풀어쓰고, 제시어를 강조하며 종결짓는다. 이것이 글을 꾸미는 핵심으로 알고 있다.
글쓴이는 글 끝을 알고 쓴다. 반대로 독자는 글 끝을 알면 흥미를 잃는다. 독자가 미궁으로 빠져들고 조바심 나도록 만들어야 한다. 글이 긴박할수록 독자는 긴장한다. 글감(소재)이 글거리(주제)를 선명하게 받쳐주자면, 끝까지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절정에서 환하게 결말을 보여준다. 나는 사건의 흐름을 긴박하게 이끌어가는 것이 글쟁이의 기술이 아닐까 생각한다.
글이 완성되면 숙성시킨다. 한 번에 마무리되는 글은 있을 수 없다. 한 줄 시도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여러 번의 합평을 거치는 것은 글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매우 유용하다. 내 글이 생후 첫 독자를 만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나는 합평이 혹독할수록 글의 완성도가 높아진다는 것을 안다. 합평은 글을 평하는 것이지 글쓴이를 평하는 것이 아니다. 합평에서 나온 말을 모두 수용할 필요도 없다. 특히 합평에 임하는 자세를 중요하게 보고 있다.
윤리에 반하는 글은 글쓴이에게 독약이다. 요즘 자기표절이 회자하고 있다. 자기표절이라는 말이 있기나 한지 의아했었다. 자기가 쓴 글을 인용하고 복사할 정도라면 글 쓸 의지를 잃었다고 본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글거리다. 자기 안에 갇힌 채, 과연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을까. 무슨 일이든 자기 안에 갇혀 새 꿈을 꿀 순 없다. 동기부여는 스스로 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글쟁이는 글로 경쟁해야 맞다. 나는 치열한 글쓰기만이 나 자신을 지탱해 준다고 믿고 있다. 내 글이 내 자존심을 뭉갠다면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다. 방법은 하나. 부단한 노력밖에 도리가 없다. 내 글은 나의 인격이고 내 얼굴이다. 글쟁이는 글로써 말한다. 나의 글은 분명히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질 수 있는 자유라면 마음껏 누려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