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의 전망 중 가장 믿지 못할 것으로는 대개 주가와 선거가 꼽힌다. 그만큼 기대와 관심이 높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전쟁 예측도 못믿을 것 중의 하나다. 고려해야 할 변수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후 관심을 모은 전투 장면 중 하나는 드넓은 초원을 무대로 한 러-서방 최신 탱크전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탱크전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됐다. 특히 전후 유럽 최강의 독일제 레오파드-2와 중동의 사막지대를 지배한 미국의 에이브럼스 전차(탱크) vs 러시아의 T 시리즈(T-90, T-72 등) 전차 간의 대격돌이다.
이라크 사막지대를 장악한 미국의 애이브럼스 전차/사진출처:위키피디아
여기에 영국산 챌린저-2이 가세하면, 마치 컴퓨터 게임속에서 세계 최강을 가리는 '탱크 배틀'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됐다. 러시아(구소련)제 탱크와 서방 측 탱크가 맞붙은 것은 2000년대 초 이라크 전쟁이 마지막이었다..
우크라이나가 제공받은 서방측 주력 탱크는 독일제 레오파드 시리즈다. 레오파드-1과 레오파드-2A4, 레오파드-2A6다. 물량은 세자리수로 추정된다. 레오파드 시리즈는 제 2차세계대전 당시 최강으로 불렸던 티거(Tiger), 판터(Panther)의 뒤를 잇는 전차다. 단기간에 레오파드 탱크의 운용법을 익힌 우크라이나 기갑병들의 숙련도 정도가 약점으로 지적됐을 뿐이다. 아무리 장비가 좋아도 운영자가 미숙하면 효능은 반감될 수 밖에 없다.
◇ 빗나간 러시아 vs 서방 탱크 '배틀'
하지만, '탱크 배틀'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본격적인 '드론(무인기) 전쟁'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교전 2년 2개월을 넘긴 현재,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확인된 것만으로도 수천대의 전차가 파괴됐다. 기대했던 '탱크전'으로 파괴된 경우는 드물고, 상당수가 드론의 습격(일부는 대전차 미사일)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20일 "지난 두 달 사이 우크라이나군이 보유한 미국제 M1 에이브럼스 전차 31대 중 5대가 파괴됐다"는 미 일간지 뉴욕타임스(NYT) 보도를 소개했다. NYT는 미국 고위 당국자를 인용, "에이브럼스 전차는 작년 가을 우크라이나군에 인도돼 올해 초에야 본격적으로 전투에 투입됐는데, 벌써부터 파괴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며 "21세기 전투에 탱크가 설 자리가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21세기 전투에서 탱크가 설 자리가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한 미 뉴욕타임스 2024년 2월 20일자 기사/캡처
사실, 지난해 가을 우크라이나군 반격 작전에서 선두에 선 독일제 레오파드 전차도 러시아군이 설치한 지뢰밭과 대전차 참호, '용의이빨'로 알려진 대전차 장애물 등 3중, 4중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러시아군의 드론, 대전차 미사일, 드론 공격으로 불타는 레오파트 전차의 영상은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러시아군은 최근 노획한 레오파트 전차를 분해하고, 수리하는 영상도 공개했다.
레오파드 전차도 러시아와의 탱크전에서 패한 것은 아니었다. 지뢰밭에 갇혀 허둥대다 드론 공격을 받거나 포격, 대전차 미사일에 당했다고 한다.
러시아군 전차 전문가가 노획한 독일제 레오파드 전차를 분해, 수리하는 방면/현지 매체 영상 캡처
미국 싱크탱크 허드슨 연구소의 캔 카사포글루 연구원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현대전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전제한 뒤, "전차는 원래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대전차 로켓이나 전차 포 등 직사(直射) 화기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량돼 왔는데, 자폭 드론의 등장으로 상대적으로 취약한 전차 윗부분과 후방 엔진룸 등을 보호하는 일이 시급해졌다"고 지적했다. 로켓추진유탄(RPG)나 폭발성형관통자(EFP) 등을 매단 자폭 드론이 공중에서 탱크의 취약 부분을 집중 타격하니, 속수무책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500달러 정도의 자폭 드론 2, 3대가 1천만 달러의 에이브럼스 전차를 파괴한다면, 그 가성비는 탁월하다. 값비싼 탱크로서는 재밍(전파교란)외에 딱히 드론을 막아낼 수단이 마땅찮다는 게 가장 큰 고민. 방어용 철판을 완전히 뒤집어쓴 '거북이'형 전차는 물론이고, 취약 부분에 집중적으로 드론 방어용 철망을 치는 등 보기에도 딱한 전차들이 우크라이나 전선과 팔레스타인 가자 전투에서 속속 등장하는 판이다.
철판을 완전히 뒤집어 쓰거나(위) 주요 부분에 드론 방어용 철망을 설치한 전차/사진출처:텔레그램, 영상 캡처
오스트리나 군사 분석가이자 군교관인 마르쿠스 레이스너 대령은 "러시아군은 재래식 무기로 탱크를 공격한 뒤 드론을 보내 마무리한다"며 "그렇다고 해도 일정한 영토를 점령하려면 탱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앞으로는 '무인 탱크'(군사 로봇) 등의 개발로 인해 주요 전투가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처럼 변할 것으로 내다봤다.
◇ 러시아 드론 공격에 나가떨어지는 미국의 '에이브럼스 전차'
미국 전차의 자존심인 '에이브럼스'가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파괴된 것으로 알려진 건 3월 초다.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아브데예프카(아우디우카) 인근 전선에서 2월 초에 처음 목격됐으니, 한 달도 채 지나기도 전에 전투의 제물이 된 셈이다.
에이브럼스는 이라크 전쟁에서 위용을 떨치던 모습 그대로 우크라이나 제47 기계화 여단에 배속됐다고 한다. 지난해 9월 중순 처음으로 10대가 우크라이나에 인도됐으며, 지금까지 30여대의 에이브럼스가 우크라이나에 들어왔다. 운용은 나토(NATO) 회원국에서 집중 훈련을 받은 200여명 기갑병들이 소속된 제47 기계화 여단이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라크 '사막 지상전'의 영웅 에이브럼스는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진흙 땅에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 경제 잡지 포브스는 에이브럼스의 엔진 흡입 필터가 강력하긴 하지만, 먼지와 찌꺼기들이 엔진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하루 두 번씩 청소해야 한다고 전했다.
스트라나.ua와 MKru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지난 3월 5일 아브데예프카 근처에서 드론 공격으로 에이브럼스를 쓰러뜨렸다고 주장했다. 제15근위자동화소총여단 소속의 드론 운영 병사들(호출 부호 콜로브라트·Коловрат와 라스베트·Рассвет)은 "FPV 드론 '우쁘리'(Упырь, 악귀라는 뜻)로 에이브럼스 포탑 아래 후미를 때려 멈춰세운 뒤 두 번째 드론으로 전차를 무력화했다"고 주장했다. 이 병사는 "우크라이나군은 '무적의 탱크'를 타고 간다는 자신감에 넓은 개활지에서 매우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면서 "그를 쓰러뜨리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국의 에이브럼스 전차가 불타는 장면/현지 매체 영상 캡처
이 전투에서 우크라이나군은 에이브럼스 등 전차 2대와 미국의 브래들리 장갑차 등 장갑전투 차량 6대, 보병전투차량 3대, 차량 13대, D-30 곡사포 2대를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의 FPV 드론 '삐라냐'(Пиранья)를 개발한 심비르 디자인 뷰로(Симбирскоe конструкторскоe бюро·СКБ, 영어로는 SKB) 대표는 "파괴된 에이브럼스의 두번째 탱크는 '삐라냐 드론'에 당했다"며 불타는 에이브럼스 영상을 첨부했다. '우쁘리'와 '삐라냐' 드론은 소련제 탄약(Заряд (боеприпаса) советский, ПГ-7В, 영어로는 PG-7V)을 장착한 다고 러시아 일간지 이즈베스티야는 전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군은 에이브럼스의 손실을 확인하지 않았다. 스트라나.ua는 에이브럼스의 파괴는 영상으로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에 미국 전차가 한꺼번에 전투에 투입됐다가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세번째 에이브럼스는 러시아 전차 T-72BZ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알려졌다.
◇ 천하무적 명성에 금이 간 에이브럼스 탱크
일주일여가 지난 뒤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3월 15일 에이브럼스 파괴를 확인했다. 이 잡지는 첫번째 에이브럼스는 2월 혹은 그 이전에 드론 폭발로 방폭문(防爆門)이 열렸고, 내부 탄약고에 불이 붙어 완전히 파괴됐다고 밝혔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에이브럼스는 3월 러시아 '코넷' 대전차 미사일에 맞았는데, 첫 번째 미사일이 방탄을 뚫었고, 두 번째 미사일이 에이브럼스 내부를 파괴했다는 것. 또하나의 에이브럼스는 아브데예프카 근처 베르디치에서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았다고 했다.
에이브럼스의 파괴는 제조사는 물론, 미국 전차의 명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러시아 군사정치분석국의 알렉산드르 미하일로프 국장은 일간지 이즈베스티야와의 인터뷰에서 "이미지 손실이 크다"며 "우크라이나군이 사용하는 러시아제 T-72 탱크가 불탔을 때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스코트 버넷트 전 미국 군사 정보 장교는 "에이브럼스의 시장 가치가 하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얼 라스무센 미 중령은 "비록 구형모델인 에이브럼스 M1A1가 우크라이나에 인도됐지만, 장갑의 두께가 더 두꺼운 신형 에이브럼스도 독일의 레오파드-2 전차의 운명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에이브럼스 장갑의 비밀이 러시아군의 손에 넘어갈 것을 우려해 첨단 장갑 설비를 제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탱크잡는 러시아 '우쁘리' 드론 조립 장면/사진출처:Topwar.ru
에이브럼스를 파괴한 러시아 FPV 드론 '우쁘리'와 '삐라냐'는 거의 같은 종류의 드론이라고 러시아 군사 전문가인 빅토르 리토프킨 전 대령이 주장했다. 그는 "두 드론이 드론 마니아에 의해 거의 수작업으로 만들어졌으며, 가장 큰 장점은 저렴한 생산 비용"이라고 밝혔다.
◇ 러시아 전자전 장비에 맥 못추는 서방 무기들
서방의 전차들이 맥없이 쓰러지자 스페인 일간지 엘파소는 22일 우크라이나 정보 소식통을 인용, "러시아가 제공권을 장악하면서 독일 레오파드 전차의 효용성은 '제로(0)'로 떨어졌고, 에이브럼스 전차도 단거리 대공 방어력이 부족해 러시아 드론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있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로 이전된 레오파드-2 전차 중 3분의 1이 이미 파괴되었으며, 나머지도 작동하지 않는다고 했다. 미 브래들리 장갑차도 눈과 비에 약해 겨우 몇달을 버틸 정도라고 엘파소는 전했다. 또 이전에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병력 손실이 1대 3이었으나 이제는 거의 비슷해졌다고 덧붙였다.
우크라이나 전자전 전문가이자 항공정찰지원 센터 책임자인 마리아 베를린스카야는 "서방 무기 시스템이 현장에서 러시아 전자전에 의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밝히지는 않겠지만, 여기에 도착한 어떤 포탄은 제대로 날아가지도 못했고, 특정 미사일은 러시아 전자전 시스템에 의해 무력화됐다"며 "러시아는 세계 최고의 전자전 시스템을 보유한 국가중 하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