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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대구지방보훈청
더위가 물러가고 선선한 바람과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9월, 어느덧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청명한 하늘이 예쁜 요즘, 66년 전의 우리나라는 어땠을까요? 1950년 9월의 대한민국은 6․25전쟁으로 인해 끊임없는 전투가 이어졌는데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부동 전투, 마산 진동리 전투 등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오늘은 포항으로 진출하려는 북한군을 막은 ‘형산강 방어 전투’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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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형산강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형산강 방어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
형산강 방어 전투란 1950년 8월 11일부터 9월 23일까지 거의 한 달 동안 지속되었던 전투입니다. 8월 초 북한군은 동부전선의 청송지역으로 진출했었던 12사단은 방향을 바꿔 안동 동남쪽 산악지대를 이용하여 경주 방어의 요충인 기계를 점령하면서 우리는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또한, 북한군은 형산강 도하작전을 위해서 5사단, 12사단, 유격부대인 766부대를 작전에 투입시켰는데요. 북한군 제 766부대는 영덕에서 안강지구를 향해 서남쪽으로 진출하고 있었고, 동해안에서는 북한군 제 5사단이 영덕에서 해안지대를 따라 계속 남진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동해안에서 북한군을 힘껏 막아오던 국군 제 3사단은 영덕 지역에서 남쪽 10km 지점인 장사동 일대로 전진하여 북한군 제 5사단과 맞서게 됩니다. 하지만, 8월 11일 04:00경 북한군의 일부 병력들이 포항에 침입함에 따라 포항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후퇴를 거듭하고 있는 상황에서 포항만큼은 탈환해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던 만큼, 국군은 3개 독립부대를 투입해 북한군 12사단이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도록 새로운 전투를 시작합니다.
이 전투는 바로 형산강에서 이루어지게 되는데요, 당시 포항 형산강 남쪽은 영일군과 구룡반도로 이어지기 때문에 경주를 노리는 북한군의 작전이 한결 쉬워지는 이점이 있었습니다. 인근에 있는 영일 비행장을 차지한다면 북한군이 우리 국군의 공군 출격을 저지하는 점이 있기 때문에 형산강 지역은 전략요충지로 포항 공방전의 최대 격전지로 떠오른 것이죠.
포항을 사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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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강 도하작전 1단계의 주공인 제 23연대는 9월 14~15일 밤에 전투 정찰대를 침투시켰으나 실패하였고, 16일에는 야간 도하 또한 무위로 끝이 났습니다. 제 23연대는 다음날에도 작전을 계속 이어갔는데요. 오전 10시, 제 1제파가 가슴까지 차는 강을 건너던 중 북한군의 화망에 걸려 많은 사상자가 속출해 공격을 중단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제 23연대장은 소규모의 특공대를 편성하였고, 본격적인 도하 공격을 펼칠 작전을 세웠고,뒤이어 제 22연대와 제 26연대 역시 특공대를 편성하였습니다. 제 3사단의 3개의 연대는 이 특공대를 ‘결사대’라 불렀습니다.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이 결사대에는 여러 장병들이 앞다투어 자원하여 불굴의 투지를 보여주기도 했죠.
그 중 당시 제 3사단 22연대 1대대 소속 분대장 연제근 상사는 9월 17일 새벽 4시, 12명의 특공대를 이끌고 도하 돌격을 감행하였습니다. 도하 도중 연제근 상사는 기관총 유탄에 어깨를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으나, 끝까지 전진하여 수류탄 3발로 적의 기관총 진지를 파괴한 뒤 적탄에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이 후 22연대는 형산강을 넘었고 연제근 상사와 12명의 목숨을 건 형산강 도하 통로 개척은 아군의 성공적인 도하작전의 도화선이 됐고, 포항 탈환과 북진의 발판이 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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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제근 이등 상사 / 출처 : 국가보훈처
그 후 9월 18일, 제 23연대의 제 1제파인 제 1대대 결사대가 공격을 시작했고, 이정수 소위는 효자역 부근의 제방을 점령하였으며, 제 1제파가 아군 전폭기의 엄호하에 도하하자 곧 교두보를 설치하였습니다. 제 22연대도 역시 도하공격을 개시하여 제 23연대의 교두보 우측을 확보하였습니다.
또한, 제 26연대는 형산교를 사이에 끼고 적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제 22연대 결사대가 대안에 진출한 상황을 확인하고 준비된 어선과 급조한 뗏목을 이용하여 도하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제 3대대 결사대는 형산교를 건너 대안의 일각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고 교두보를 설치하였는데요. 북한군의 저항과 화력이 강력한 상황이었던 만큼, 교두보를 모두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19일에서야 형산강을 도하하였고, 다음날 20일 제 3사단이 마침내 포항을 점령하면서 승리를 거머쥐게 됩니다.
형산강 방어 전투는 이 땅을 지키기 위해, 포항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국군의 희생과 그들의 용기가 있었기에 성공한 전투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9월, 포항 형산강을 지켜낸 호국영웅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 희생을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1950년 한여름에 벌어진 형상강 전투네요
네 그랬지요.
몰랐던 사실 알고갑니다
감사합니다.
다부동 전투만 알았는데 형산강에도 전투가 있었네요^*^
그러게요.
낙동강 방어선과 포항의 탈환과 사수작전....![~](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자세히 소개해주셨네요
형산강 사수 전투에는 연제근 상사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네요
포항도 요새
지역이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