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6일(주)
* 시작 기도
주님...
마지막에 심판 받아 사라질 세상 나라 바벨론에서 사고파는 것들이 이렇습니다.
(계 18:13)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이요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들의 영혼들이라.
각종 음식들을 사고파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들의 영혼들까지 거래물품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지금 처한 현실입니다.
내적 치유나 심리 치료 등과 같은 것을 이용하여 우리의 상한 영혼을 치유한다고 하는데 사실 우리의 상한 영혼은 치유의 대상이 아니라 죽음의 대상임을 알지 못한 처사입니다.
(롬 6:6-7)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우리의 옛 사람, 옛 자아는 다시 살려서 쓰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이 달리신 그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때 의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종도 오늘 이 시간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오늘은 주일, 공동체로 모여서 함께 예배하오니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마다 성령의 충만함이 넘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벧후 3:10-18
제목 :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 나의 묵상
거짓 교사들이 하는 말처럼 주께서 더디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으심으로 사람들이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나 언제까지 기다리지는 않으신다.
주님은 어느 날 홀연히 오시는데 베드로 사도는 마치 도둑처럼 오신다고 하였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에는 하늘이 굉음을 내면서 사라지고, 또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물질들이 다 불에 타서 없어질 것이다.
이처럼 천지가 다 타서 없어질 텐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거룩하고 경건하며 주의 날을 사모하며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타 없어질 땅의 것에 치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의의 약속이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창세전의 세계요 만물 위의 세계이며 묵시의 세계이다.
이제는 더 이상 죄에 빠져 그 가운데 허우적거리면서 살지 말고 죄에서 떠나 흠 없이 주의 평강 가운데서 살아야 할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래 참으시며 기다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형제 바울도 그와 같이 썼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들에게 쓴 편지 중에도 이런 종말에 있을 일에 대하여 기록을 하였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일을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어떤 무식한 자들이나 혹은 죄를 짓는데 담대한 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그것을 해석하여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빠지게 하기도 한다.
이제 이 마지막 때에 이런 미혹에 빠지지 말고 강하고 굳건한 믿음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종말에 대하여 관심이 많다.
종말에는 정말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가?
그 때는 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날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즉 하늘과 땅이 어떻게 되는가?
그 날까지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나는 어떻게 되는가, 에 대한 궁금증 등 정말 초미의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 종말의 때를 준비하며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경우야 두 말 할 필요도 없지만,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조차 종말에 관해서는 관심이 있지만 그 종말을 준비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오직 한 가지 돈에 대한 관심이 지대할 뿐이다.
전 세계에서 최고 강대국이자 부자 나라인 미국조차 경제에 관한한 자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미국의 대통령에 나오는 후보자들을 비롯해서 거의 모든 나라의 대통령 후보들의 선거 공약이 경제문제 해결이다.
지난 우리나라 4.10 총선에서도 국회의원 후보들의 선거 공약의 최대 이슈는 바로 경제 문제였다.
물론 이 땅에서 먹고 사는 문제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과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면 우리 영혼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면서도 지금 당장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기에 그 순간이 지나면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오늘 본문처럼 하늘과 땅의 모든 물질들이 불에 타 없어지고 난리와 난리의 소문으로 어수선 한 것처럼 지금 당장 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분위기라야 움직인다.
사람들은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과 손에 잡히는 것들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안들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사안들에 대해서는 무지하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1980년대 이후, 한 때 시한부 종말론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적이 있었다.
특히 다미선교회 이장림씨가 극단적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워 사람들을 모으고 1992년 10월 28일날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하여 모든 일손을 멈추고 몇 날 며칠을 교회에 모여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기도 했었다.
이 일은 TV에서는 생중계를 하기도 하며 세간에 최대의 관심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런 일들로 인하여 믿는 자들 사이에서도 휴거라는 책이 유행이 되어 너도 나도 그 책을 사서 읽곤 하였다.
오늘 본문에서는 종말을 준비하며 그 날을 사모하면서 기다리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다미선교회나 극단적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모든 일상을 멈추고 집단적으로 모여서 그 날을 기다리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는 것을 사모하며 기다리라고 한다.
(11-12)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주의 날이 오기를 바라보고 사모하는 것은 일상을 멈추고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일상의 삶속에서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일하되 그 안에서 항상 주의 거룩함과 경건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맨 마지막에 멸망 받을 원수가 사망이라는 사실을 알고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외쳤던 것처럼, 우리 믿는 자들도 항상 종말을 염두에 두고,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사는 것이다.
마지막이기에 아무렇게나 방종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내 앞에 심판자 되신 주님이 계심을 인식하고 코람데오, 즉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고 줄곧 교회에서 살았으며 교회가 나의 놀이터였다.
교회를 떠나서는 나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나 역시 종말을 잘 알지 못하였다.
휴거 책도 사서 읽기도 하였고 그런데 관심도 있었지만, 잘 알지 못할 때는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고 읽으면 읽을수록 두렵고 무서운 마음이 앞섰다.
그러다가도 또 그런 종말에 대한 생각은 금세 잊혀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정욕대로 내 마음이 끄는 대로 끌려가는 그런 삶을 살아 왔다.
무엇보다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서도 종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마치 요한계시록은 이단들이나 주로 사용하는 성경처럼 그렇게 치부하면서 잘 보지도 않았고, 잘 가르치지도 않았다.
때로는 오늘 본문처럼 정말 무식하여 성도들에게 말씀을 잘못 가르치기도 하고 엉뚱하게 해석하여 터무니없이 가르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스도 중심이나 십자가 중심, 그리고 상황과 그 시대적 배경도 파악하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말씀을 끌어다가 자기중심적으로 이용하는 등, 말씀 도둑질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기도 하였다.
내가 보기에 좋은 말, 성도들이 듣기에 순한 말이 있으면 그 말씀을 이용하여 위로의 설교를 하곤 하였다.
그런 나는 정말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다.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여러 차례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얼마나 몸부림치며 부르짖었는지 모른다.
그것도 또한 말씀을 붙잡고 기도한다고 하면서 그 때도 말씀을 이용하는 악한 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심판하여 새롭게 세우고자 하시는데, 나는 그런 하나님의 뜻도 헤아리지 못하고 오직 상황만 해결하고자 말씀 붙들고 기도하며 부르짖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정말 목회의 흑암 가운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나에게 이 복음의 소식이 들려 왔다.
숨도 쉴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으나 이 복음을 듣고 난 후 나는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상황은 하나도 변한 게 없지만, 이 복음 안에서 평강을 얻게 되었고 포기하고 싶었던 목회가 정말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고의 선물임을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내 방식과 내 뜻대로 목회를 하였기에 끊임없이 흔들리고 헤맬 수밖에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역시 종말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종말을 현재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생활한다.
무엇보다 날마다 새벽을 깨우며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 속에서 창세전 그 나라의 영광을 보며 사는 것은 종말을 현재로 사는 자가 누리는 최고의 특권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이것이 바로 영생이기 때문이다.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종말에 되어질 상황적 두려움과 무서움이 아니라 심판주 되시는 주님 앞에 서야할 그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오늘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거룩하고 경건하게 사는 삶이다.
나아가 그 삶을 오늘 하루하루 말씀 묵상을 통하여 주님과 깊은 교제와 사귐을 갖는 것은 종말을 현재로 살아가는 최고의 방법이다.
그것이야 말로 내가 하나님 품속에 사는 것이요, 그 안에서 참된 평강을 누리는 것이다.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와 사귐을 가지면서 하루를 살면 죄에서 떠나 흠 없이 평강 가운데 살아지게 된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살도록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 영광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예전에는 종말을 생각하면 하늘과 땅이 불에 타 없어지고 난리가 날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무서워 떨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 안에서 사는 자가 되어 더 이상 그런 두려움이 아니라 주의 심판대 앞에 설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공포가 아니라 주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입니다.
종말을 현재로 사는 자의 모습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것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종말은 생각하기도 싫은 상황이었으나 이제는 바로 내 앞에 그 종말을 두고 사는 자와 같이 살아갑니다.
그것이야 말로 주 안에서 나를 통하여 나타내시는 주의 경건과 거룩함입니다.
나는 죽어 마땅하고 없어져야 할 존재이지만, 그 안에 주께서 계시기에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이제 온전히 나의 주인 되어 주셔서 나를 지배하시고, 내 삶을 주의 말씀의 능력으로 장악하여 주옵소서.
나를 주님께 드리나이다.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산 제물 되게 하소서.
고난 중이라도 기뻐할 것은 주의 평강이 내 안에 넘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