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전자계산학81년2월졸업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不狂不及 스크랩 [가요] 서른 즈음에(노래 20곡, 연주 4곡) - 김광석
김홍기 추천 0 조회 30 07.12.12 23: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서른 즈음에

 

01. 서른 즈음에 - 김광석 (네번째)

02. 서른 즈음에 - 강승원 (우리동네 사람들, 1집-우리동네 사람들)

03. 서른 즈음에 - 권진원 김광석 박학기 (김광석 Anthology : 다시 꽃씨되어)

04. 서른 즈음에 - 이은미 (Nostalgia)

05. 서른 즈음에 - MR 반주곡

06. 서른 즈음에 - 권진원 (김광석 추모공연)

07. 서른 즈음에 - 김동규 (3집 - My Favorits)

08. 서른 즈음에 - 김광석 (Collection : My Way 1964-1996)

09. 서른 즈음에 - 박학기 (가객 - 부치지 않은 편지)

10. 서른 즈음에 - 안형수 (하얀 연인들)

11. 서른 즈음에 - 이진석 (그리움 그 너머 시선)

12. 서른 즈음에 - JK 김동욱 (2.5집 - Remakes)

13. 서른 즈음에 - 오주리 (1집 - 오주리)

14. 서른 즈음에 - 김광석 (노래이야기 + 인생이야기)

15. 서른 즈음에 - 오카리나 연주

16. 서른 즈음에 - 싸이 (Remake & Mix 18번)

17. 서른 즈음에 - 김덕희 (그리움의 연가)

18. 서른 즈음에 - 이경운 (이경운의 통기타여행 4집)

19. 서른 즈음에 - 김승기 (김승기의 향수), YJ Family, 이다홍

20. 서른 즈음에 - 소리풍경

21. 서른 즈음에 - 레이지본 (3.5집 - Leave Behind Emotion)

22. 서른 즈음에 - 위일청 (리메이크 최신 발라드 5)

23. 서른 즈음에 - 강촌 포크 이야기 (강촌 포크 이야기)

24. 서른 즈음에 - 양진수 (까페 올인 3집)

25. Re : 서른 즈음에 - 명인 (우리가 있는 풍경)

26. Re : 서른 즈음에 - 명인 (Instrument, 우리가 있는 풍경)

 

() 안은 음반 제목입니다. 곡이 재생되는 순서는 김광석의 곡은 첫번째와 중간에 넣었고 두번째는 이 곡을 만든 강승원의 노래를 올려서 비교해서 들을 수 있게 했습니다. 명인이 부른 'Re : 서른 즈음에' 는 '서른 즈음에'의 답가형식의 곡 입니다. 노래 사이사이에 연주곡을 넣어서 역시 비교감상 하실 수 있습니다. 19번째 곡은 김승기, YJ Family, 이다홍 3명이 부른 곡을 따로 MP3를 구입하였으나 모두 같은 곡으로 판단되어 3명의 이름을 한 곡에 올렸습니다. 필요한 곡의 파일이 있으신 분은 쪽지나 전자우편으로 연락 바랍니다.

 

 

서른 즈음에

 

작사 : 강승원

작곡 : 강승원

 

또 하루 멀어져간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엔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순수하고 열정적인 20대를 마감하고 30대에 들어서게 되면 누구나 청춘의 상실에 고민하게 된다. 양희은이 단적으로 말한 '썩은 30대'를 맞아서 1964년생 김광석이 1994년의 앨범 <네번째>의 앨범 라이너노트에 털어놓은 고백은 리얼하고도 진지하다.

“내 나이 서른 둘. 스펀지처럼 푸석푸석해진 나의 세상맞이. 날 인정함으로 또 한발 내딛어 본다. 내 나이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있는 노래 '서른 즈음에'는 비록 강승원이 노랫말과 곡을 썼으나 30대가 된 김광석의 공허하고 불안한 가슴을 잘 담아낸 곡이다. '점점 더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하지만 그것은 좌절이나 삶에 수동적으로 젖어가는 타협이 아니라 현실 직시의 시작이다.

 

서른 즈음에 24곡 전곡듣기

 

 

Re : 서른즈음에

 

작사 : 명인(命人)

작곡 : 김성민

노래 : 명인(命人)

 

설레임보다는 이별이 익숙해진
어느새 서른 즈음에.
이룬 건 하나 없고 잃은 건 많은 나이
빌어먹을 서른 즈음에.

슬픔을 팔아야 장사가 되는 나이
거지같은 서른 즈음에.
더 이상 무엇에도 전부를 걸지 않을
빌어먹을 서른 즈음에.

지금도 그대는 희망을 노래하는가.
또 하루를 애타게 살아가는가.
때로는 지나간 추억에 기대서라도
때로는 못다 이룬 꿈에 기대서라도

하루를 견딘 만큼 나를 대견해하는
빌어먹을 서른 즈음에.

가야할 그 길을 끝까지 걸으려는
눈물겨운 서른 즈음에.

 

Re : 서른 즈음에 - 명인 (노래, 연주곡 이어듣기)

 

 

누구나 스스로의 나이에 대한 무게는 스스로 감당해 내며 지냅니다. 10대 때에는 거울처럼 지내지요. 자꾸 비추어 보고 흉내내고 선생님 부모님 또 친구들. 그러다 20대 때쯤 되면 뭔가 스스로를 찾기 위해 좌충우돌 부대끼면서 그러고 지냅니다.

 

가능성도 있고 나름대로 주관적이든 일반적이든 객관적이든 나름대로 기대도 있고 그렇게들 지내지요. 자신감은 있어서 일은 막 벌리는데 마무리를 못해서 다치기도 하고 아픔도 간직하게되고 그럽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유리처럼 지내지요. 자극이 오면 튕겨내 버리거나 스스로 깨져버리거나 그러면서 그 아픔 같은 것들이 자꾸 생겨나고, 또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면 더 아프기 싫어서 조금씩 비켜나가죠.

피해가고...

일정부분 포기하고...

일정부분 인정하고...

그러면서 지내다 보면 나이에 ㄴ 자 붙습니다.

서른이지요

 

뭐 그때쯤 되면 스스로 한계도 인정해야 되고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도 뭐 그렇게 재밌거나 신기하거나 그렇지도 못합니다.

 

뭐 그런 답답함이나 재미없음이나 그런것들이 그 즈음에 그 나이 즈음에 저 뿐만 아니라 또 후배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그렇고 비슷한 느낌들을 가지고 있더군요.

 

물러가겠습니다.

행복하십시오.

 

- 故 김광석 콘서트 '독백' 중에서

 

 

노래는 삶의 상처를 감싸주는 것

 

김동하(1995년 샘터 9월호)

 

일상에 쫓겨 바삐 살아가다 보면 가끔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마저 잊어버리곤 한다. 주어진 삶의 무게로 하루를 마무리할 때면 어둠과 함께 텅 빈 외로움이 찾아든다. 바로 이런 인정에 목마른 사람들을 향해 통기타와 하모니카로 인생을 조율하며 친근한 목소리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김광석(金光石, 32세, 마포구 서교동 398-2 원음빌딩 202호). 노래는 진실한 삶의 이야기라는 믿음으로 지난 ’84년부터 줄곧 관객들과의 만남을 가져온 그가 국내에서는 전례 없는 라이브 공연 1천회를 맞아 서울 동숭동 학전 소극장에서 기념 콘서트를 열었다.(8.1~8.31)

 

BBS ‘밤의 창가에서’ 녹음차 불교 방송국에 들른 그를 17층 로비에서 만났다.

 

“제가 좀 늦었죠?”

 

바로 이웃집 형을 생각게 하는 외모와 말투, 가슴에 범선이 그려진 흰 티셔츠를 입은 모습이 산뜻해 보였다. 

 

“우선 1천회 공연 기념 콘서트를 축하드립니다. 라이브 무대를 고집해 오신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사실 천(千)을 바라보고 노래하진 않았어요. 바둑을 둘 때처럼 결과에 집착하기보다는 한집 한집 만들어가는 데 정성을 다하듯 매번 공연에 전력투구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84년 민중노래 서클인 ‘노래를 찾는 사람들’로 공연 활동을 시작한 그는 ’88년 그룹 ‘동물원’을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라이브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거리에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등 호소력 짙은 그의 음악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면서 듣는 이에게 가슴을 휘어잡는 잔잔한 울림과 함께 조래가 끝난 뒤에도 뭔가를 생각게 하는 독특한 흡인력이 있다.

 

 

<마음이 닫힌 사람들의 비상구>

 

“김광석씨를 ‘노래하는 음유시인’으로 표현하곤 하는데요, 노래와 삶에 관한 철학이 있다면......”

 

“문명이 발달해 갈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있어요. 그 상처는 누군가 반드시 보듬어 안아야만 해요. 제 노래가 힘겨운 삶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비상구가 되었으면 해요.”

 

사람들에게 위안과 힘을 주려는 자신의 노래가 자칫 교과서적 충고나 교훈조로 흐르지는 않을까 항상 조심스럽다는 말도 덧붙였다.

 

“자유당 시절, 아버님께서 교원노조사건으로 교단을 떠나셔야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게 대학시절 민중음악을 선택하신 계기가 아닌지......”

 

“직업적인 계기는 아니었어요. 아버님께서는 항상 남들에게 피해주는 일은 하지 말고, 경우에 바르게 살아갈 것을 말씀하셨어요. 사회라는 체계는 보다 나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나 위로보다는 종종 피해를 입히더군요. 대학을 졸업할 무렵 이러한 현실이 제겐 맞지 않는다는 걸 느꼈죠. 사람들과 함께 따뜻함을 나누며 살아가려던 제겐 다행히도 음악이 있었습니다.”

 

’90년 6월 동갑내기 서해순 씨와 결혼, 다섯 살 난 딸 서연이를 두고 있는 김광석씨는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결혼하고 나서 4,5개월 동안 통장은 항상 ‘0’이었어요. 총각 시절엔 그저 내 한몸 버텨가면 그만이었는데 가장이 되어 아내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 하는 것 같아 몹시 괴롭더군요...... 아내는 직장생활로 가계를 꾸려나가면서 말없이 나를 밀어주더군요. 인정받는 것은 우선 아내로부터 시작된 것이지요.”

 

요즈음은 콘서트 외의 시간은 딸과 함께 놀아주는 시간을 가지려고 애쓴다. 서연이에겐 항상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맑은 향기 나누며 살자>

 

’94년 4집 앨범 출반 이후 김광석 씨의 30대 가수로서의 완숙미가 한껏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도 서른을 넘어설 무렵 심한 상실감에 빠지게 된 때가 있었다. 삶에 대한 기본적인 고민으로부터 허무가 몰려 왔다고......

 

“정말 견디기 힘들었어요. 20대의 가능성들은 대부분 좌절되고 30대의 한계를 분명 인정해야만 했었죠. ‘서른 즈음에’라는 곡은 그때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죠.”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하지만,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는 그는 생활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 다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일어나’를 힘차게 노래한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4집 앨범에 수록된 ‘맑고 향기롭게’라는 곡은 법정 스님이 함께 참여하셨다고 들었는데 가까이서 법정 스님을 대한 느낌은 어떠셨는지요?”

 

“저는 특별한 종교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법정 스님을 뵈면서 마음을 잘 닦으신 분은 절로 몸에서 향기가 베어 나옴을 느낄 수 있었어요. ‘가만히 옆에만 계셔도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구나’ 생각하니 앞뒤 가리지 않고 제 욕심만 앞세우는 요즘 사람들이 배워야 할 점이 많다는 걸 느꼈어요.”

 

노래의 참된 의미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역할이라고 그는 말한다. 일상의 조그마한 얘깃거리, 재밋거리가 모이면 그것이 바로 삶의 큰 힘이라고, 처음부터 너무 큰 의미만 좇다보면 마치 동화속의 ‘무지개를 찾아가는 소년’의 이야기처럼 허황될 것이라며 웃는다.

 

“사람들이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잘못된 사실에도 대충 익숙해져버리려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그런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한 번쯤 ‘아,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하고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 제 노래 인생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봅니다.”

 

 

가객 김광석

 

지운(IZM, 2001/05)

 

너무나도 젊은 서른 즈음에 생을 마감한 김광석은 TV없이 스타가 될 수 없었던 '90년대를, 1,000여 회를 상회하는 콘서트만으로 음악계를 제패한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그의 슬프면서도 맑은 음색에서 피어나는 삶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3~4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바로 사라지는 한 때의 가수들과 달리 사후에도 끊임없이 재조명되고 있으며, 그의 인기는 오히려 더 높아지고 있다. 이것은 철저한 자기관리와 음악에 대한 애정이 낳은 '90년대의 소중한 보석과도 같은 해답이다. 지금 이 땅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몸소 보여준 김광석의 자세에 관한 것인지도 모른다.

 

중학교 때는 현악반에서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 악보 보는 법 등을 배웠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합창단에서, 대학에 들어가서는 연합 동아리 <연합메아리>에서 기타를 두들기며 업소를 오가던 그는 김민기의 록 오페라 <개똥이> 음반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프로의 무대와 맞닿는다. 그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 동물원 등에서 활동하며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거리에서' 등의 히트곡을 남기며 이름을 널리 알리고 한시적으로 몸담았던 동물원을 나와 자신만의 색으로 음악을 조제하기 시작했다.

그의 풋풋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1집에서 우리는 '기다려줘'란 노래로 그의 이름을 알게 된다. 동물원의 박기영이 키보디스트로 참여한 1집은 그렇게 대중적인 성공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그가 만든 '너에게', '아스팔트 열기 속에서'와 같은 곡들이 김광석이란 가수의 미래에 희망을 갖게 했다. 그리고 이내 2집은 이것을 증명하는 증거물이 되었다.

 

그는 2집에서 한동준이 만들어 준 '사랑했지만'으로 긴 인기의 향연을 시작한다. 그리고 김형석의 '사랑이라는 이유로'와 그가 만든 '슬픈 노래'가 라디오를 휘어잡으며 2집의 롱런이 시작된다. 이 앨범에는 이 외에도 문대헌, 김창기, 박용준, 조규만 등의 작곡가들이 참여하여 완성도 높은 음반을 만들어 주고 있다.

2집과 같이 다양한 작곡가들이 참여한 3집에서도 '나의 노래'를 인구에 회자시킨 김광석은 <다시 부르기>란 이름으로 앨범을 내놓는다. 이 앨범은 과거에 그가 불렀던 노래들을 리메이크의 형식을 취해 다시 발표한 앨범으로 무엇보다도 성숙해진 해석력을 보여준 음반이다. 여기서 김현성의 '이등병의 편지'를 세상에 알린 그는 다음해 내 놓은 4집에서 '일어나', '너무 아픈 사랑이 아니었음을', '서른 즈음에' 등을 잇달아 히트시킨다.

자기 색깔을 제대로 내 보인 앨범으로, 음악적 궤도에 올라선 앨범으로, 가장 마음에 들어했다는 4집에는 본인의 곡이 4곡이나 들어 있고 노영심, 김창기 등이 작곡가로 참여했으며 김지하의 시에 황난주의 곡을 붙인 '회귀'가 수록되어 있다.

김광석은 그가 발표한 음반 중에서 중요한 앨범으로 기록되는 <다시 부르기 2>를 1995년 발표한다. 이 음반은 예전에 불렀던 곡들을 다시 부른 1집과 달리 그의 음악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뛰어난 포크 음악의 고전들을 위주로 실었다. 한대수의 '바람과 나', 양병집이 미국의 포크 그룹 피터 폴 앤 매리(Peter, Paul & Mary)의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을 리메이크한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이정선의 '그녀가 처음 울던 날', 김목경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등이 실린 이 음반은 신문기사로 처리한 앨범의 표지와 함께 김광석의 음악을 다시 부흥하게 했다.

 

하지만 군에서 장교로 복무하던 형이 그랬듯 그는 우리에게 갑작스런 비보를 전했다. 많은 사람들이 강력한 미련으로 마지막까지 붙잡는 삶의 집착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스스로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의 짧은 생각과 추측 속에 남겨둔 채.

하지만 그의 음악은 식을 줄 모르는 재평가와 재생산의 장을 열어 젖히고 있다. 백창우의 '부치지 않은 편지'를 타이틀로 한 그의 첫 번째 트리뷰트 앨범 <가객>이 1998년에 나왔고 2000년에는 박학기의 주도로 모인 가수들에 의해서 <Anthology>라는 트리뷰트 앨범이 발매되었다. 그전에 2000년 최다관객 기록을 수립한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는 '부치지 않은 편지'와 '이등병의 편지'가 다시 인기몰이를 했고 2001년에는 그의 미발표곡과 히트곡을 체코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입혀 다섯 번째라고 이름 붙인 앨범을, 함춘호, 조동익, 김형석, 박용준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들었다.

대부분의 가수들이 사후 그 동안에만 반짝하고 빛을 발하는 것과 달리 김광석은 더 이상 신곡을 발표할 수 없음에도 주기적으로 표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노래만을 부르다가 사라진 한 고인에 대한 넋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우리가 그의 작품을 제대로 기리는 것은 그와 같은 뮤지션이 다시 재창출되도록 우리의 환경을 조성하는 길이다. 그것이 못다 핀 그의 음악세계를 더욱 잊지 않게 하는 방법일 것이다.

 

 

솔로 데뷔뒤 모던포크 계승 절정기때 요절 슬픔 더해

김광석의 음악 여정

 

박준흠(대중음악평론가·광명음악밸리축제 예술감독)

 

1970년대에는 많은 ‘통기타 가수’들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그럴싸한 노랫말로 귀를 가렵게 하는 ‘팝 같은 가요’를 부를 뿐이었다. 시대를 아우르는 노래를 했던 이들 가운데 음악예술가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한대수, 김민기, 조동진, 정태춘 정도였다. 이 ‘모던포크’의 전통은 80년대엔 그룹 ‘따로 또 같이’로, 90년대에 고 김광석으로 이어졌다.

 

김광석은 음악활동 초기부터 뛰어난 음악인이거나 모던포크를 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1984년 김민기의 <개똥이> 음반에 참여했다. 이 때 만난 몇몇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참여해 공식 데뷔했다. 1988년 ‘동물원’ 1집에 실린 ‘거리에서’와 ‘동물원’ 2집에 실린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를 불러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동물원’은 김창기와 유준열의 노래로 빛을 발하는 밴드였고, 여기서 김광석은 노래 잘하는 가수였을 뿐이다. 그리고 솔로 데뷔 뒤 발표한 ‘너에게’가 담긴 1집(1989)이나, ‘사랑했지만’이 담긴 2집(1991)은 그리 평가할만한 음반은 아니었다.

 

 

변화의 시작점은 ‘나의 노래’라는 자기 고백이 담긴 3집(1992)부터였다. 정태춘·박은옥만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던 모던포크의 의미를 부활시킨 <다시 부르기 1>(1993)을 발표하고 나서 그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 스스로 “제 자리를 찾은 느낌인 만족스런 앨범”이라고 말했을 만큼 훌륭한 음반인 4집(1994)은 전체적으로 그 동안의 발라드 계열에서 포크 계열로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음반의 색깔은 이전과 달리 무거워 대중적인 인기는 크게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나이에 맞는 삶의 무게를 가진, 그리고 진지하게 삶을 바라보는” 노래들을 부르는 데 성공했다. 이 음반에는 진정한 싱어송라이터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어나’ 이외에도 ‘바람이 불어오는 곳’,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서른 즈음에’, ‘자유롭게’라는 명곡이 실렸다. 한영애, 장필순과 같이 예술적인 자의식과 노력으로 데뷔한 지 한참 뒤에야 훌륭한 싱어송라이터로 거듭 나는 흔치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유작인 <다시 부르기 2>(1995)는 한대수 이래 탄생한 모던포크의 계승자로서, 자신의 곡을 포함한 한국 모던포크의 명곡들을 추려서 다시 녹음한 것이다. 조동익밴드의 멋진 세션으로 리메이크곡들이 원곡들을 거의 전부 능가하는 흔치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대수의 ‘바람과 나’, 양병집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원곡은 밥 딜런의 ‘돈 싱크 투와이스, 이츠 올라잇’), 김의철의 ‘불행아’, 자신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등이 담긴 이 음반은 뛰어난 노랫말과 담백한 연주로 언제 들어도 실증나지 않는 한국 포크록의 명반이 됐다. 그가 숨진 뒤 헌정앨범 형식으로 <가객-김광석이 남기고 간 노래>(1996)가 발표됐다. 여기에는 미발표 곡인 ‘부치지 않은 편지 #1, 2’가 그의 절절한 목소리로 실려 있다. 당시 김광석은 작곡가 백창우와 함께 시를 대중가요로 만드는 <노래로 만나는 시>라는 앨범을 기획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첫 번째로 정호승 시에 백창우가 곡을 붙인 ‘부치지 않은 편지’를 녹음한 것이다.

 

그는 서른 셋에 이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음악적인 절정기를 맞고 있을 때 떠난 것이라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분명히 4집은 자신이 생각하는 새로운 음악의 시발점이었다. 그런데 이 시발점이 영원히 끝이 맺어지지 않을 종점이 되어버렸다는 것은 한국 포크록계의 커다란 손실이기도 하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