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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자료실 스크랩 호남지방 기독교 선교기지 형성과 확장에 관한 연구
바울로 추천 0 조회 62 15.02.15 06: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호남지방 기독교 선교기지 형성과 확장에 관한 연구

 

송 현 숙*

 

1. 머리말                       3. 선교지구 조직 및 지리적 확장

2. 호남 선교기지의 형성            (1) 선교루트 : 해안접근과 육로

  (1) 남장로교 선교사의 입국과     (2) 선교지구의 조직 및 지리적

    선교권역의 구분               확장

  (2) 전도여행                 4. 맺음말  

  (3) 선교기지의 지역 특성      

 

 

1. 머리말

 

조선의 개방에 따른 개신교의 수용은 개신교를 소개하러 온 미국 선교사들의 문화까지도 수용하게 되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그들의 문화를 한국에 심고 가르쳤던 사람들이었다. 우연적이든 필연적이든 간에 결과적으로 선교사들과 함께 미국의 문화는 한국에 소개침투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선교사들이 그들의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형성했던 선교기지(mission station)1)가 미국 문화의 중심지로서 기능을 했으며 이곳을 거점으로 주변지역으로 그들의 종교문화는 전파되었다. 그 당시 치외법권의 최대 수혜자였던 선교사들이 내륙지역까지 들어가 상주하면서 그들의 종교를 전파하여 교구를 조직하고 교세를 확장해 갈 수 있었던 것도 선교의 거점이 되었던 선교기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교기지의 형성과정은 종교영토의 확보와 영토내의 주민들의 개종을 의미하는 것으로 종교전파를 볼 수 있는 연구로 인식하였다.

개신교 전파 또는 선교와 관련된 주제의 연구는 1960년대 이후부터 연구되어 왔다. 종교간의 신도와 분포 실태, 그리고 변화의 추세를 분석하거나 종교가 미치는 영향을 살펴봄으로서 지역간 종교인구의 분포 차이를 유발하는 요인과 종교성을 밝히는 연구들이 있고 개신교를 사회문화민족운동으로 간주하고 선교사와 신도의 활동을 중심으로 성격과 정책을 분석하여 해석하고자 하는 연구들도 있다. 또 선교사들의 자료를 통해 선교활동과 선교사들의 선교정책 또는 전략의 배경을 살펴보고 성격과 문제점을 지적하는 연구들도 있다. 또 특정 지역의 종교분포, 확산, 종교경관, 종교취락 등을 분석하여 종교와 인간, 그리고 환경이 상호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밝히고자 하는 연구들과 교회사의 지방적교파적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지역 연구도 있지만 연구성과는 상대적으로 적다

세계의 주요 종교는 기원지로부터 팽창과 이전 확산의 유형으로 종교인구의 분포를 변화시키면서 널리 전파되었다. 팽창확산의 경우에는 개종자들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이전확산의 경우에는 종교지도자들 혹은 선교사들을 새로운 지역으로 보냄으로서 선교사들의 노력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2) 이전확산의 결과로 종교가 도입된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이전과 팽창확산의 복합적인 작용에 의해 전파가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다.

본 논문은 미국 남장로교의 호남지방 전파도 이전확산의 한 유형으로 보고 전파 중심지인 선교기지 형성과 지역적 확장을 살펴 어떻게 종교전파가 이루어지는지를 보고자 한다.

본 연구는 문헌연구와 현지답사를 토대로 하였다. 주요문헌은 호남지방 교회사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교회사 관계문헌, 종교관계 연구논문, 수진의 연구물 등을 이용하였다. 특히 김수진의 연구물3)은 선교사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내용을 연대적으로 잘 정리하고 있어 호남교회 형성에 미친 선교사들의 행적과 영향을 명료하게 살필 수 있는 자료였다. 이와 함께 선교사들의 행적을 추적하여 전파중심지와 선교루트를 밝히는 데는 18921927년까지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보고 기록인 Annual Report4)와 《대한예수교장로회사기》5)를 고찰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현지답사를 하여 초기 전파중심지와 선교사들의 이동로를 지도화하고 설명하였다. 선교루트와 교구 조직 및 지역적 확장과정은 선교사일지 및 보고서와 남장로교 총회 발간 회의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이를 지도화하였다.

그러나 이 글은 선교활동과 관련되는 역사적인 자료를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남장로교 전파의 중심부인 선교기지의 형성과정을 이해하여 전파경로를 보는 데 논의를 한정하는 제한된 글이 될 것이다.

연구대상지역인 호남지방6)은 한반도의 남서부에 위치해 중앙인 서울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중앙과의 문화적인 접촉이 불리한 위치에 있는 지역이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선교기지를 설립할 당시 호남지방은 행정구역이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로 나뉘었고 남원과 나주에 있던 관찰부는 폐지되었으나 광주는 목으로 승격하여 초대 관찰사 윤응렬이 부임해 있었다. 정치사회적으로는 개방을 시작하였고 역사적으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극동지역을 빠른 속도로 변화시키고 조선도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 조선 사회는 헤이그 밀사사건,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춘생문 사건,’ 단발령과 고종의 퇴위, 군대해산과 정미7조약 등 행정권이 박탈당하고 의병운동이 전개되는 사회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회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선교활동이 영향을 받고 있었지만 선교활동의 진전 과정 자체가 방해를 받은 것은 아니어서 선교사들은 지방여행을 통해 선교지를 탐색하고 개종자를 가르치고 조선인 전도 조사들의 활동도 감독하면서 기독교 관계 소책자들을 한글로 옮기고 있었다.7)

 

 

2. 호남 선교기지의 형성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남장로교를 호남지방에 전파했다. 선교사들은 선교활동의 중심이 될 선교기지를 우선 선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각 촌락으로 남장로교를 전파하며 교구를 조직하였다. 선교거점이 된 선교기지의 입지선정은 선교사들이 즉흥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상황적 필요성이 작용하여 선정된 것으로 보이는데, 호남지방의 선교기지는 전라도의 자연적 관문으로 비교적 안정적이며 접근이 용이한 지역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 관문을 통해 선교사들은 전라도 전 지역에 있는 모든 계층의 조선인들과 접촉하면서 종교를 전파하고자 한 것이었다. 전주군산목포광주순천 등 호남지방 선교기지는 선교사들의 상황적 필요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지역들이었다. 인구 규모가 크고 시장과 관공서가 있어 생활의 편익을 도모할 수 있는 행정중심지와 우편, 공급물자, 의료지원 등 수송에서 주변지역의 결절지가 되는 교통의 요지들은 선교의 대상이 되는 사람과 선교의 매개체였던 학교의료지원 등 이동이 요구되는 상황적 필요성을 갖추고 있는 지역들인 것이다. 따라서 선교기지의 입지 조건으로 선교사들은 인구와 교통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음을8) 알 수 있다. 또 기후 등 지리적 영향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호남지방의 선교기지는 예배당, 주택, 학교와 기숙사, 진료소 또는 병원, 정원, 다용도 건물, 접근이 좋은 도로 등으로 구성되어 가시적인 문화 경관을 보여주며 주변의 마을 경관과도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선교기지를 구성하는 건물의 양식은 조선인들의 건물양식과는 다르고 조선인들의 삶의 방식이 서구적인 미국 선교사들의 삶의 방식과 대치되면서 선교기지는 선교사들에게는 이방 속의 은신처이자 안식처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문화의 전파 통로로 기능을 하고 있다.

 

(1) 남장로교 선교사의 입국과 선교권역의 구분

 

조선은 미국 해외선교지 개척에서 미국인들의 주목을 받았던 지역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선교사들의 기록을 보면 “조선 알리기”9)에 노력하고 있기 때문인데 선교사들의 조선 알리기 활동은 선교보고와 조선에 대한 오해와 선입견을 바로잡는 것 외에 조선에 대한 미국인의 흥미를 끌고자 하는 것이었다. 조선이 미국의 해외 선교지로 눈에 띈 것은 조선의 지정학적 위치가 중국과 일본 사이에 놓여 있고 당시 미국의 해외선교지 개척에서 돌발적인 상황10)이 발생하면서 우연히 조선이 관심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11)

호남지방의 선교를 담당했던 미국 남장로교 선교 역시 조선 알리기의 한 방편이 되었던 선교부흥운동 집회를 통해 미국의 신학생을 상대로 조선을 알리게 되었고 조선 선교를 지원한 신학생들이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하면서 호남지방의 남장로교 선교는 시작되었다.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미국 남장로교의 조선선교 배경에는 1891년 신학교 동맹 총회 모임이 있었던 테네시주의 내쉬빌(Nashville)에서 조선 선교를 시작한 언더우드 선교사와 미국 유학생 윤치호의 조선 알리기에서 비롯되었다. 선교사 언더우드와 윤치호의 “설득력 있고 감동적인” 조선 소개는 맥코믹(McComick) 신학교와 유니온(Union, Richmond) 신학교 소속의 신학생들에게 조선 선교에 대한 동기로 작용했고 조선 선교의 자원자들을 이끌어내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순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남장로교 선교사 변요한(John Fairman Preston)은 언더우드를 “남장로교회 한국 선교의 아버지”로 불렀다.12)

1892 8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7명은 미국을 떠나 일본을 경유해 인천항을 통해 조선에 입국하였다. 최의덕(Lewis Boyd Tate), 이눌서(Willam Davis Reynolds), 전위렴(William McCleery Junkin), 전위렴의 부인 메리(Mary Leyburn Junkin), 최의덕의 여동생 메티양(Mattie Samuel Tate), 데이비스양(Lennie Davis), 배유지(Eugene Bell) 7명은 남장로교의 ‘7인의 선발대’로 부르며 초기 호남지방의 선교기지를 건설한 선교사들이다. 이들 선발대는 동시에 조선에 들어오지는 못했다. 전위렴 선교사는 후두염이 걸려 치료를 위해 미국에 남게 되었고 이때 전위렴의 부인 메리와 이눌서 등도 함께 머물다가 늦게 출발하였다. 그래서 데이비스 양과 최의덕 남매, 배유지 등 4명이 먼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였다. 데이비스를 제외한 3명의 선교사는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하선했고 데이비스양만 1892년 10월 18 제물포에 도착함으로써 남장로교 선교사 7인의 선발대 중 최초의 조선 입국자가 되었는데 이 때 워싱톤 한국공사관 서기관이었던 이자윤의 부인과 동행입국하였다. 요코하마에서 다시 만난 6명의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북장로교 일본 선교사였던 햅번(Hepburn)으로부터 언더우드가 쓴 조선문법책과 사전을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1892년 11월 3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서울로 입성하였다. 이때 인천에서 이들을 맞아준 선교사는 북장로교 선교사 마펫(Samuel A. Moffett), 이길함(Graham Lee), 빈톤(Clement C.  Vinton) 등이었고 이들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서울 서대문 독일공사관 사택을 구입해 사택의 이름을 “딕시”(Dixie)라 하고 이곳에서 조선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며 약 1년간을 지냈다.13)

1888년 조선 정부의 금교(禁敎) 조치가 완화되자 선교사들은 선교거점 확보를 위한 지방 전도여행을 하였고 선교활동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선교거점의 확보과정에서 서로 다른 문화신학적 배경을 지닌 선교사들이 협력과 공존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선교사간의 협의도 활발해졌는데 주로 선교구역의 조정과 조선 정부가톨릭과의 갈등, 그리고 교폐 등과 관련된 문제였다.14) 특히 초기에 입국한 상당수의 선교사들은 외국의 공관주재와 선교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일본을 경유해 제물포를 거쳐 서울 및 대도시로 들어왔다. 따라서 서울 및 대도시는 미국뿐만 아니라 캐나다호주영국독일 등에서 건너 온 선교사들의 집합장소였다. 이에 따라 선교사들은 선교구역의 중복에서 비롯되는 선교의 비효율성과 불필요한 경쟁을 막기 위해 구역조정이 필요했다.15) 이 필요성에 의해 선교사들은 선교권역16)을 구분한 선교지도를 제작하였다. 1894년 전라도를 중심으로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앞세운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였고 결과적으로 내정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지방행정체계도 변화되어 1896 23부제를 폐지하고 경기도강원도황해도와 함경도평안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 등을 남북도로 나누어 13도제로 행정구역이 구분되어 있었다.17) 이런 시기에 조선의 장로회는 장로교연합선교공의회18)를 통해 1893년을 시작으로 하여 일제의 강점이 노골화되는 시점인 1910년경에 선교권역을 구분하였다.19)

1893년 충청남도(부여서천장항강경논산대전금산)전라도제주도 등은 남장로교 선교권역으로, 1898년 함경도는 캐나다장로교 선교권역으로, 1909년 경상남도는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 선교권역으로, 평안도와 경상북도경기도(수원광주용인안성오산평택)와 충청도(천안조치원공주진천음성괴산청주청원보은옥천영동) 등은 북장로교 선교권역으로 하였다. 이에 따라 공주 이남지역과 제주도호남지방은 남장로교의 선교권역으로 정해졌다. 선교사들의 선교권역 설정에 영향을 준 것은 선교사들의 환경지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기후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여 선교사들이 자라난 자연환경과 유사한 지역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초기 남장로교 입국 선교사의 출신지인 버지니아주조지아주는 경제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주한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지역이고 전형적인 농업지역이며 기후도 온난하다. 가을에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따뜻한 봄에 호남지역을 답사하면서 목포를 이태리의 시실리에 비유하고 기후가 캐롤리나와 아주 흡사하며 곡물과 가축이 풍성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20) 또 남장로교 본부가 있는 애틀란타는 영산강 유역의 평야지대인 나주처럼 평야지대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며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인 목포와 같은 위도에 있어 기후 등 자연환경이 유사한 점이 있다. 마찬가지로 캐나다장로교 선교구역이었던 함경남도의 기후도 캐나다 선교사들의 본부가 있는 곳과 기후 및 토양이 유사하다. 그리고 호주 선교사들 역시 호주의 환경과 흡사한 경상남도를 선교구역으로 하고 있다. 기후는 종교의 확산에 영향을 주는데 독일 지리학자 카쉐(Kashe)에 의하면 기후에 따라 종교에 대한 관심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한다. 종교의 형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종교의 발생지가 사막저습지고산지대 등의 자연환경을 지닌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내륙지역보다는 해안지역에서 종교에 대한 관심이 높게 나타나는데 이는 해안지역의 생존기반이 기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종교적 행사로 표현되는 환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21) 또한 자연환경과의 직접적 접촉과 경험에 의해 습득된 기후환경의 인식은 장소에 대한 이미지, 거주지의 차별화 등 인간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는 부정적 혹은 긍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것22)으로 보고 있다. 환경지각에 의한 영향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막의 오아시스,” 혹은 “언덕 위 도시,” 그리고 “축소된 미국”23) 등은 선교사들의 환경인식과 인식환경에 의한 반응인 행동환경을 입증하는 예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초기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보다 친숙한 기후,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는 호남지방을 선교권역으로 결정했을 것으로 본다.         

(2) 전도여행

 

이 당시 외국인들이 조선을 여행하기 위해서는 호조(護照) 발급을 요청해야 했다. 또한 개항장으로부터 100리 이내까지만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 외의 지역을 여행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조선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호남지방 선교를 담당했던 초기 남장로교 선교사들도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강화와 공주 등을 여행하며 조선의 풍물을 익히고 개별적인 접촉세례식신앙공동체 조직과 선교거점의 확보 등을 위해서 지방전도여행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지방전도여행24)은 선교사들의 언어 선생과 선교사들을 돕는 조사, 짐꾼, 마부 등이 동행하였다. 선교사들의 지방전도여행 기간은 보통 1030일이었고 숙박의 편의를 위해 한옥을 빌렸다. 그들이 임대한 한옥은 전도의 집회소 또는 예배당으로 사용되었고 이후에는 선교사의 주거지이자 동시에 선교기지로 발전되어갔다. 지방전도여행은 지방에 선교활동을 침투시키고 지역간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한 답사였다

호남 땅을 가장 먼저 답사한 선교사는 경상남도를 선교권역으로 하고 있는 호주장로교 선교사 데이비스(J. Henry Davis) 1889년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도중에 충청도를 거쳐 섬진강 유역로를 경유해 하동으로 넘어갔다. 그 후 1893 2월 호남지방을 선교권역으로 정한 남장로교 선교사 이눌서와 그의 비서 정해원이 군산을 통해 전주를 답사하였고 가을에는 최의덕전위렴 선교사가 2주간 동안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유생들로부터 야유와 배척을 받으며 호남지방을 전도여행하였다.

1894년 이눌서 선교사와 최초의 의료 선교사였던 드루(A. D. Drew, 柳大模) 선교사가 3 27일 인천에서 배를 타고 군산에 도착하여 임피전주김제영광함평무안우수영(해남)순천좌수영(여수) 등 서남 연안로를 따라 호남지방의 서남부 해안지방을 전도여행 하였다. 당시 서교금압(西敎禁壓)이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전도여행은 어려웠고 호기심으로 몰려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여행이었지만 호남을 중심으로 발생한 동학운동의 여파로 호남지방의 서부지역만을 답사한 후 상경하였다.

서남 연안로를 따라 전도여행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기독교의 해외 선교지 개척루트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은 주로 접근이 용이한 해안과 수로를 따라 선교거점을 확보해 나갔다. 켈리포니아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선교단도 이러한 교통로를 따라 진출하였고25) 아프리카 경우도 해안접경지역이나 하천변에 우선 교두보를 확보한 후 내륙으로 선교루트를 개척하고 있다.26)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제작한 선교지

 

 

【그림 1】전도여행로와 순회구역

 

도에도 수로와 지역간 거리, 행정구역의 지리적 경계만이 표시되고 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무엇을 중요시하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예로 볼 수 있으며 특히 수로변이나 해안을 선호하고 있는 것은 적대자의 위협으로부터 신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비상 탈출구로 해안이나 수로가 이용되었기 때문이다.27)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군산에서 전주 선교기지를 들려 남서 연안로를 향해 이동하지만 서남 연안로와 내륙로의 갈림길인 화호에서 연안로로 이동하지 않는 것은 연안로에 인접한 동학의 발생지 고부와 동학세력의 집결지인 김제부안을 피하고 사림양반들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태인도 피하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내륙로로 우회한 후 정읍에서 남서 연안로인 고창으로 이동하여 해안가의 곰소와 줄포를 답사하고 연안로를 따라 목포해남진도완도강진보성고흥순천까지 이동하고 있다. 이후 호남지방의 군산목포순천 등 지리적 위치가 수륙교통의 요지에 남장로교 전파 중심지인 선교기지가 형성되었다

선교사들이 서남 연안로를 따라 전도여행을 여수에서 마친 후 다시 여수에서 섬진강 유역로를 따라 동부 산간 지역을 통해 전주로 가지 않은 것도 동학의 영향으로 풀이된다. 1894년 전라북도 고부에서 동학이 발생하여 전주성이 동학의 세력권에 놓이고 호남지방 전 지역에 영향을 미쳐 전라도 향촌사회는 격동을 겪고 있었다.28) 이 때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동학운동의 여파로 사회적인 인심이 불안했고 이는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에도 제약을 주는 요인이 되어 남장로교 첫 선교기지였던 전주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이 잠시 중단되었다.29)

동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지역은 영광나주장성담양 등 영산강 유역의 내륙지방과 장흥강진보성해남 등 서남해안 연안지역 그리고 곡성구례순천광양승주낙안 등 섬진강 유역 등 토지를 기반으로 농업집약경제가 중심인 내륙지역이었으며 호남지방 토호세력의 기반을 이루는 집성촌의 동족촌락이 많으나 지형적으로 고립된 오지여서 상대적으로 동학의 세력은 약했으나 선교사의 접근은 불리한 곳이었다. 따라서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전도여행을 비교적 접근이 쉽고 안전한 서남 연안로와 동학의 영향권을 벗어난 지역을 중심으로 답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선교기지의 지역 특성

 

전주 : 최초의 선교기지

전주는 호남 제일의 행정중심지로 만경평야와 노령산맥의 산지가 만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또 군산김제정주남원진안 등으로의 교통이 편리하며 서울까지 160마일이고 남서쪽 군산까지는 36마일, 그리고 남서쪽 목포까지는 110마일 되는 거리에 있다. 1893년경 호남지방의 최초 선교기지가 형성되었던 전주는 초기 천주교 전파지로 가톨릭의 세력이 우세한 지역이었다. 또 전주는 철저한 보수세력의 양반과 유생들의 활동이 왕성했던 지역일 뿐만 아니라 향시가 열릴 만큼 상업활동도 활발했던 곳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전주와 인접한 고부에서 발생하여 동학농민군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던 곳이며 예수교를 강하게 배척했던 지역이었다.

예수교를 배척하게 된 배경에는 전주와 근접한 금산군 진산(금산)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양반가의 장손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했는데 장손이 모친의 위패를 태우고 참배를 거부하여 전주 남문 밖으로 끌려와 칼에 목이 베이는 참수형을 당한 사실이 있었다.

이 사건은 조선왕조의 발생지 전주 양반과 유생들의 이념인 유교에 대한 도전이자 위협이었기 때문에 사건 이후 양반과 유생들은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선교사들의 활동을 거부하며 배척하였으나 농민과 부녀자 그리고 아이들은 선교사들을 구경하기 위해 선교사들의 숙박소로 모여들어 집 울타리가 뜯어져 대문빗장이 망가질 정도로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하였다.

 

【그림 2】미국 남장로교의 전파경로

 

 

이것은 초기 호남기지가 형성되었던 전주에서 어떤 사회적 계층이 남장로교를 수용했는가를 시사하는 것으로 상민, 부녀자, 아이들과 같이 유교적 사회에서 천대받고 무시되어 온 사회계층이 선교의 대상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초기 개종한 신도들도 사회경제적으로 하층민이었고 선교사들을 도왔던 조사와 전도부인 역시 유교적 조선에서 혜택받지 못한 유교체제와 이념적 연결고리가 강하지 못했던 계층30)이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선교기지를 마련하기 전에 전주에 내려와 지역을 2주 동안 답사한 후 1894년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제2차 연례회의에서 전주 선교기지 개설을 결정하여 최의덕 남매 선교사를 전주에 보내기로 하였다. 선교사의 비서이자 어학 선생이었던 정해원을 시켜 양반들이 주로 살던 전주성안을 피해 성문 밖의 변두리였던 은송리의 초가 한 채를 26불에 매입토록 했다. 따라서 선교사의 주거지로 매입한 은송리의 초가는 호남지방의 첫 선교기지가 되었다. 그러나 최의덕 남매 선교사는 전주가 동학군의 영향하에 놓이자 전주선교기지를 두고 서울로 상경함으로 잠시 동안 전주 선교기지는 공백을 갖게 되었다.

 

나주 : 영산강 유역의 집성촌

1896년 선교사들의 연례회에서 전남의 선교거점으로 영산강이 흐르는 나주를 선교기지로 결정하고 있다. 육로가 발달하지 않았던 전근대시기에, 많은 산물을 신속하고 안전하게 운송하기 위해서 내륙의 수운이 이용되었는데 영산강은 해상활동이 활발한 시기에 서남해안의 중요한 수운이었다. 나주 인근에는 조창이던 영산창이 있어 이곳으로 모은 세곡을 영산강을 경유해 중앙으로 운송하였다. 최근까지도 영산강 수로를 통해서 선박들이 영산포까지 내왕하였으나 1981년 영산강 하구언을 축조하면서 영산강은 수로의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다. 나주는 영산강을 낀 넓은 평야지대를 형성하면서 영산강 수로를 따라 선박이 출입하여 당시의 교통수단 배로 접근이 용이한 지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남지방 행정중심지로 서해 관문인 목포와 무안나주영암 등의 내륙지역을 연결하고 있었다.

선교사의 눈에 비친 나주는 풍요로운 농촌이었고 호남지방의 중심지로서의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31) 나주는 영산포에서 30마일 떨어진 거리였고 육로로는 1일이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나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선교사는 배유지(Eugene Bell)와 하위렴(William B. Harrison)이었다. 배유지는 1896년 어학선생 변창연을 통해 나주성내에 집 한 채를 구입해 선교기지를 마련했다. 그러나 나주는 보수성이 강하고 유교적 양반들이 사는 집성촌의 동족촌락이 많은 지역이었다. 초기 선교활동의 성공은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과 선교사와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유교적 성격이 강한 동족 촌락의 주민들은 이미 선교사들이 전하는 종교가 무엇인가를 분명하지는 않지만 알고 있었으나 이것을 믿지도 않고 수용하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반대를 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민들의 반응에 대해 선교사들은 종교에 대한 오해와 그릇된 편견 때문에 나주성안에서의 선교사들의 활동을 저지하고 방해하며 생명까지도 위협을 한다고 보았다. 이 같은 나주 주민들의 반응은 기존의 유교적 질서 속에서 특혜와 혜택을 누리던 양반집단의 인식체계로 설명할 수 있다. 유교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자신들의 계급이익을 정당화하던 사람들은 기득권을 보유하고자 하는 태도를 갖게 되고 유교적인 체제가 위기에 봉착할 경우 어떻게 해서라도 유교를 재확인하고 긍정하는 동시에 그것을 손상시키거나 위협하는 가치들에 대해서는 엄격한 통제와 제재를 가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32) 결국 선교사들은 유교적 성격이 강한 동족촌락33) 주민들의 거센 거부와 위협 때문에 나주를 선교거점으로 정하고자 했던 계획을 수정하여 대안지역으로 목포를 선교거점으로 결정하였다.

1898년 겨울 제6차 선교사 연례모임에서 선교사들은 나주는 내륙에 있는 도시이고 서양인들과의 접촉을 꺼리며 무엇보다도 선교사들에 대한 편견이 극복되어야 할 지역으로 인정하면서 선교사 인력의 부족 등의 이유로 나주의 선교기지 건설을 철회하였다.34) 지리적으로 나주가 목포로부터 30마일의 거리에 있으며 영산강에 의해 연계되는 지역임을 감안 할 때 나주 선교기지의 철회는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목포 : 다도해와 육지의 관문

서부의 해안을 연결하고 있는 목포에는 1898년 선교기지가 마련되었다. 목포는 군산과 좌수영(여수), 부산과 제물포를 연결하는 기선들이 정박을 했던 영산강 입구에 있었던 포구였다. 목포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로 주위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고지대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며 곶들에 의해 보호를 받는 지형이어서 방어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는 지역이다. 그리고 내륙지역까지 항해가 가능한 강을 끼고 있으면서 바다로부터의 접근이 쉽고 전라도와 충청도상도의 자연적 관문에 해당되는 지역이었다.

목포는 해상과 육지를 연결하는 관문으로 1897년 목포의 개항도 교통상의 위치가 고려된 것이었다. 목포는 해상으로 나가는 지점인 동시에 육지에 연결되는 관문으로 블라디보스토크와 나가사키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다. 목포의 지정학적 위치는 서양인들의 큰 관심을 받아 극동지역의 가장 중요한 요지로 주목되었다. 러시아 신문인 St. James' Gazette 지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가장 적정한 종점으로 목포를 거론하면서 “한국의 Gibraltar”로 지칭하였다. 또 목포는 청일전쟁의 격전지였던 곳이다. 또한 목포는 유달산 기슭에 자리한 작은 포구로 몽탄강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강은 영산강과 연결되어 호남지방의 가장 비옥한 농업지대를 가로지르고 있으며 수로를 따라 내륙의 곡창지대인 광주나주무안영암까지 연결되었고 인구밀도가 높은 나주광주영암, 그리고 순천 등의 내륙도시와 해로를 따라 부산까지는 하루거리에 있는 곳이다. 그러나 목포는 여전히 작은 촌락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선교기지의 설치를 서두르지는 않았다. 1897년 진남포와 함께 무역항으로 개항이후 목포는 일본과의 교역에 동참하면서 크게 번성하였고 도서를 연결하는 거점이 되었다. 개항 이후 교통상의 중요성은 철도의 부설로 이어지면서 목포는 발전을 시작하였다. 1897년 민비의 장례식이 진행될 때 목포는 무역항으로 빠른 성장이 되고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인구가 증가하면서 땅 값이 큰 폭으로 오르고 있었다. 특히 약 1,000명의 일본인들이 이민해 오면서 새로운 취락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2년 전의 목포는 황량한 바위산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논에 둘러싸여 있는 30호 가량의 작은 촌락에 불과했지만 개항 이후 건물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작은 읍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선교사들은 기록하고 있다.35) 선교사들은 목포를 물자공급의 기지로 보고 이 필요성에 의해 선교기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서울과 나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선교사 벨(Eugene Bell)은 목포 유달산에서 떨어진 초분터를 선교기지로 확보하였다. 이 초분터는 밀물 때는 바닷물이 들어와 목포부두와는 떨어진 작은 섬과 같다가 물이 빠지면 목포항구와 이어지는 육계도로 초분터36)로 이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지질적으로 이곳에서 식수를 구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벨의 서신에 의하면 청국인 기술자를 고용해 우물을 팠지만 물을 얻지 못해 일본 공사관에서 식수를 얻어 마시거나 일본에서 광천수를 수입해 마시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목포는 1897년 가을에 자유무역항이 되면서 외국인들의 주거지인 조계지가 형성되었고 이곳은 신변의 안전을 보호받을 수 있었던 치외법권지역이었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적대자들로부터 돌팔매를 당하고 동학잔당에 의해서도 괴롭힘을 당하는37) 등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목포의 선교기지 개설을 긍정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미 전주와 나주에 선교기지를 두고 선교사들은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선교 인력이 충원되지 않았고 선교활동의 힘은 약했기 때문에 사실상 선교기지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물자공급의 기지로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목포를 나주 선교기지의 대체지역으로 받아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년 후인 1901년 벨 선교사 부인이 심장마비에 의한 사망과 러일전쟁의 격전지가 목포가 될 것이라는 소문 등은 선교사들의 선교의지를 꺾고 있었고 선교활동의 성과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게 되자 선교사들은 또 다른 지역의 선교기지 건설을 계획하기에 이르고 있다.

1901년 이후 러일전쟁의 발발은 목포를 거점으로 한 선교기지에서의 활동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고 있다. 예상과 달리 지리적으로 좋은 입지에 건설된 목포의 선교기지가 종교전파의 기능을 다하지 못한 원인에 대해 선교사들의 기록을 분석하여 차종순38)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첫째, 목포 선교기지는 선교사들의 기대와는 달리 선교거점으로 활발한 종교전파를 하지 못했다. 목포의 주민들은 남장로교에 대한 편견과 우상숭배의 정도가 상상을 초월하고 있어 전도가 어려웠다. 목포에 선교기지를 설립한 이후 6년 동안 예배처소는 2군데뿐이었고 세례교인도 없었으며 문답교인만 3명 있을 뿐이었다.

둘째, 자유무역항이 되면서 번성할 신흥도시로 예상했지만 목포의 발전은 느렸으며 인구밀도 또한 낮았다. 개항당시 선교사들이 낸 통계에 의하면 목포에서 조선인은 300명 정도였고 인근지역을 합쳐도 4,0005000명 미만인데다 총 인구의 약 1,000명은 일본인이었다

셋째, 선교 인력의 부족이었다. 선교사의 사망과 건강악화에 따른 도미 등으로 선교사의 숫자가 감소함에 따라 선교사들을 한 지역으로 집중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 시기에 목포에서 교인 수의 증가는 둔한 반면 광주에서 교인 수는 급증하고 있었고 동학잔당들의 광주 교인 박해로 교인들을 돌볼 필요성이 커지고 있었다.

넷째, 전쟁의 위협과 벨 선교사 부인의 죽음이었다. 러일전쟁이 항구 쪽으로 진행된다는 외부의 소식과 전쟁의 핵심지가 목포가 될 것이라는 소문 및 벨 목사 부인의 심장마비에 의한 사망 등은 선교사에게 심적인 부담을 주었을 것이다.

다섯째, 식수의 부족이었다. 식수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하였지만 식수를 확보하지 못해서 선교사들은 일본 영사관의 우물을 마시고 있었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목포와 주변지역에 석유를 이용한 등불과 화장지 등을 보급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있는데, 1899년의 가을에 쓴 오웬(C. C. Owen)의 편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우리 빛의 나라가 이 어둠의 나라를 비추고 있다. 밤이 밀려들 때 밤 그림자를 통해 아래 마을 내려다보면 불빛들이 별들처럼 어둠을 비추고 있다. 이 불빛의 출처는 우리의 모국이다. 왜냐하면 등불을 밝히고 있는 것은 미국산 기름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가 한국의 어둠을 밝히는 것처럼 생명의 빛으로 영적인 어둠을 파고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선교기지는 목포 중심가에서 다소 떨어진 언덕 위에 있었고 언덕아래는 갯벌이었지만 목포 개항과 함께 해안 둑을 쌓으면서 이전 갯벌은 동네로 변모되었다. 그래서 밤이면 목포 마을들의 반짝이는 불빛을 내려다 볼 수 있었는데 이 불빛을 미국산 기름이 밝히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건너온 기름통은 목포 주민들이 물통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1904년 목포 선교기지에서 호남지방의 사경회와 단기() 성경학교가 열렸다. 사경회는 호남지방에 살고 있는 세례교인과 학습교인을 중심으로 714일간에 걸쳐 성경을 공부하는 남녀 지도자 훈련과정이었고 단기 성경학교는 농한기를 이용하여 남녀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학습과정이었다. 이때 전주와 광주로부터 50%를 넘는 교인들이 숙식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여 선교기지내의 예배당과 숙소 또는 신자들의 가정에서 머물며 사경회와 성경학교에 참석하였는데 남녀를 구분하여 공부하였다.39) 사경회가 끝날 무렵에 선교사들은 선교기지의 개설 및 신앙공동체의 문제들을 논의하였고40) 목포의 지역성과 기대에 못 미친 선교성과 등은 영산강 상류에서 약 40마일 떨어져 있지만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행정 중심지 광주에 또 하나의 선교기지 개설을 결정하였다.

 

광주 : 남장로교 선교본부

광주는 삼국시대부터 행정군사상의 요충지로 전남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1896 13도제가 실시되면서 나주의 행정청과 전남 재판소가 광주로 여름에 이전되면서 인구가 증가되기 시작하였다.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이 광주 관찰사로 부임하고 진위대 장교와 사병 400명 정도가 광주로 이전하였다. 윤치호와 친분관계에 있었던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윤웅렬의 각별한 환대를 받았고 이후 선교기지 개설에도 큰 도움을 받았다.41) 나주와 인접한 광주는 장성곡성함평화순영광을 연결하면서 전형적인 농촌지역을 이루고 있었으나 나주에 비해 집성촌을 이루는 동족부락은 상대적으로 적은 지역이었다.

광주 최초의 교회로 불리는 송정리교회는 나주와 광주를 연결하는 결절지로 목포까지는 55마일 떨어져 있으며 영산강 수로를 따라서 목포까지는 하루거리였다. 목포에서 영산강 수로를 타고 영산포에서 남평을 경유해 광주로 올라오는 길이 짧은 거리지만 이 지역은 척사파를 구성했던 남인계 사림들의 본거지였던 곳이었기에 선교사들은 이 일대를 피해 송정리에서 광주 중심부로 내려오는 육로를 선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목포를 거점으로 하는 선교활동 지역은 목포 주변지역과 도서지방이기보다는 내륙지방이었던 것 같다.42) 이와 같이 추론하는 이유는 1897년 목포에 선교기지가 마련된 이후 신앙공동체의 형성지역을 추적해 보면 해안보다는 내륙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해로로 접근이 쉬웠던 군산과 목포에서 수로를 따라 내륙으로 선교활동을 확장하는 것을 의미하며 장로교 제도의 특징인 계층적 구조를 지역적 확장에도 적용하여 광주를 핵심부로 하여 중소도시로 종교를 전파시키는 계층적 확산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주가 전라남도의 행정중심지로 승격한 이후 광주는 나주와 목포의 인구규모를 뛰어넘어 계속 증가하여 8,000명에 이르렀다. 인구의 증가는 선교사들에게 좋은 선교지로 인식되었을 것이고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에 중심 선교기지를 형성하고 하위의 도시로 종교의 지역적 영역을 넓혀가면서 선교사들의 이전확산에 의존한 종교전파의 단계에서 개종자들의 역할이 중요한 팽창확산의 단계로 전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도보에 의존한 지역이동의 한계로 선교인력의 역부족을 경험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입장에서도 실질적으로 선교활동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광주 등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 선교의 힘을 쏟고 싶었을 것이다. 또 광주를 중심으로 하나말과 영신교회의 신도들이 동학잔당에 의해 피해를 입고 있다는 소식 등도43) 광주 선교기지 개설의 필요성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추정하는 것은 변요한 선교사의 편지에 상기와 유사한 내용을 적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는 전라남도 인구의 중심지이다. 비록 목포에서 얻을 수 있는 문명의 편안함은 없다 할지라도 우리들의 일을 위해서는 가장 적합한 장소이다.44)

 

실제 통계자료를 보더라도 목포의 교세는 계속 침체되는 반면 광주의 교세는 계속 증가되고 있다. 1904년 자료를 보면 예배당, 예배인원 등을 비교했을 때 광주는 예배당 10, 예배인원 367명인데 비해 목포는 예배당 2곳 예배인원 60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목포에 비해 광주가 5배 이상 교세가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의 아름다운 자연경관 또한 선교사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선교사들은 광주의 아름다움을 시로 찬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 속에서 광주는 타원형의 동산으로 무등산을 배경으로 하는 아름다운 찻잔에 비유하고 있다.45) 실제로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광주는 전국 선교기지 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 꼽히고 있었다. 결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1904년 목포 선교사 연례회의에서 광주를 거점으로 하는 또 하나의 선교기지를 결정하였다.

 

순천 : 섬진강 유역과 도서 선교기지

순천은 호남지방의 동부지역에 있고 지형적으로 섬진강 유역의 산간지방과 광양만순천만에 접한 해안지방을 연결하는 가교 위치에 있다. 섬진강은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경계이면서 좁은 골짜기를 따라 흐르고 있고 그 유역은 영산강 유역과는 대조적으로 평지가 적고 산지가 많아 경지율이 적으나 농가 인구율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지역성은 식민지 지주제의 영향을 받아 소작조건 개선운동을 발발시켰고 경제적인 박탈감을 경험했던 지역이었다. 섬진강 중하류지역을 형성하고 있는 순천곡성과 남원의 일부 촌락을 중심으로 집성촌의 동족부락이 나타나고 있지만 대부분의 촌락들은 토호세력으로 볼 수 있는 사림양반층의 동족부락의 형성이 미약하게 나타나고 있다.46) 여수반도와 내륙의 가교가 되는 순천은 상업이 중심으로 호남지방의 동부지역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으며 득량만순천만과 인접한 여수반도와 고흥반도는 동남 해안지방 중 경제력이 우세한 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여수반도는 지형적인 조건이 도시 발달에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목포 다음으로 인구 규모가 큰 지역이며 고흥반도는 ‘해밀턴 항’으로 불리는 거금도를 전진기지로 하여 일찍부터 해외문물을 접한 지역이다. 이러한 지역성은 광주에서 순천을 중심으로 한 섬진강 유역의 남장로교 확장에 기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의 적극적 수용과 자립을 원칙으로 하는 선교정책과도 부합되어 섬진강 유역의 남장로교 확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또 공간적으로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였던 순천의 선교기지는 시장의 기능과 흡사하게 작용하여 정보의 수집과 전파의 통로가 됨으로써 남장로교의 서 전파에 유리한 지리적 요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진취적 성격도 남 장로교의 수용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이것은 섬진강 유역을 지배하는 사림의 토호세력이 여타의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에 신앙공동체 형성에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승주의 송광외서화순 등 순천의 서부지역은 송광사와 태고종 본산 선암사 등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어 타종교와의 갈등이 있는 지역으로 남장로교의 침투가 가장 느렸던 지역이었다.

광주를 거점으로 내륙으로의 지역적 확장을 도모하기 위해 활동하던 오원(Dr. & Rev. Clement C. Owen) 선교사의 순회 선교구역이었던 순천과 남동해안지방은 장천광양벌교 등지와 여수반도 일대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면서 광주와 순천간의 거리때문에 변요한전위렴(W. B. Junkin) 선교사가 중심이 되어 광주보다 하위도시인 순천을 거점으로 하는 선교기지 개설의 필요성이 논의되었다.47) 이와 같이 순천 선교기지의 형성은 개종자의 역할이 중요한 팽창확산이 이루어지면서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계층 확산의 모형이 적용되는 지역이다. 즉 종교 지도자나 신자에 의해 개별적인 수준에서 주로 사회적인 연결망에 의해 전해지면서 확산되었기 때문에 거리 및 도시의 규모나 인구밀집지역을 뛰어넘고 아주 서서히 인구규모와 균형을 이루며 확산해 간다

벌교와 순천 가운데 어느 곳을 선교기지로 할 것인가를 논의한 결과 교통의 중심지인 순천을 선교거점으로 정하여 광주 배유지 선교사의 조사였던 김윤수와 순천의 김억평 신도가 매산(매산동)을 매입하여 1912년 순천 선교기지가 형성되었다

 

3. 선교지구 조직 및 지리적 확장

 

(1) 선교루트 : 해안접근과 육로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거점 확보를 위한 전도여행은 이후 호남지방에서의 선교기지를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적 확장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서울의 ‘딕시’에서 머물던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호남지방으로 빨리 가기 위해서는 육로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해로를 따라 배편을 이용한 해안접근이 필요했다. 서울에서 호남지방을 가는 배편은 인천의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군산까지 이동하였는데 이동에 소요되는 시간은 약 하루였고 배 삯은 2불이었으나 한국인들은 1불씩을 받았다. 배편으로 하루가 걸리는 20시간의 이동시간은 육로에 비해 이동시간이 상당히 단축된 시간거리였다. 배편으로 군산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임피로 이동을 했다. 당시 임피는 군산을 포괄하는 관할청이 있어 현감이 살았던 규모가 큰 도시였고 여행자들이 쉬어갈 수 있는 숙박시설이 있었던 지역이었다. 군산에서 임피까지는 도보로 한나절이 걸리는 거리였고 임피에서 하룻밤을 숙박한 선교사들은 또 반나절 거리를 두고 있었던 전주 선교기지 은송리로 이동하였다. 전주에서 정읍으로 내륙로를 따라 전도여행을 한 후 흥덕에서 숙박을 하거나 전주로 귀가하였다.

선교사들은 흥덕에서 고창으로 이동을 했다. 고창은 정기시장이 형성되었던 곳이지만 1894년에는 정기시장이 형성되지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선교사들이 장날을 택하여 전도하러 갔으나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창은 동학군의 영향을 받았던 지역이면서 동학군의 이동로에 속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선교사들은 고창에서 영광으로 서남해안 연안로를 따라 이동하였고 함평으로 내려가 인심 좋은 무안에서 숙박하였다. 숙박요금은 1인당 백전씩 지불되었고 한국인은 5060전이 지불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48) 무안을 출발하여 하루거리에 있는 목포에서는 쌀 상인들이 모여드는 선창가로 가서 전도 여행을 하고 목장이 있었던 해남을 지나 우수영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숙박을 하였다. 우수영에서는 진도로 갔고 이곳에서 배를 타고 완도로 들어갔다가 다시 고흥녹동을 거쳐 벌교를 지나 순천에 도착하였다. 순천에서는 여수로 내려와 배로 부산까지 갔고 다시 배를 갈아타고 제물포로 올라와 서울로 상경하였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초기 선교루트는 서남 연안로였다. 군산을 기준으로 호남중심부를 관통하는 조선시대의 주요도로인 역로(驛路)를 따라 이동하지 않은 것은 선교사들의 지역접근 방식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의 식민지 개척에서도 접근이 용이한 해로 및 육로를 이용하여 거점을 확보한 이후 내륙으로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선교사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호남지방의 해로와 육로의 관문인 군산과 목포를 거점으로 하는 선교기지의 형성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거주지인 조계지가 형성되었던 지역이었음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신변의 안전을 보호하기가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내륙의 중심지인 전주 선교기지를 중심으로 서부로 선교루트를 개척하고 있다. 전주보다 하위 도시인 군산과의 네트워크 형성도 있지만 동부는 소백산지를 이루는 지역으로 인구가 희박하며 접근이 어려운 오지들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서부지역으로 루트를 개척했을 것이다.

목포 선교기지는 비금도도초도자은도 및 임자도 등 신안군에 속하는 도서지역을 중심으로 해로를 이용한 선교루트가 형성되었고 목포에서 영산강 수로를 따라 영산강 내륙으로 선교루트가 형성되었다. 영산강 유역의 나주 선교기지는 내륙으로의 확장을 위한 것이었지만 나주의 유교적 문화기반인 동족촌락은 남 장로교 지역확장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여 기지 건설은 실패하였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당시 개항장이었던 목포에 선교기지를 개설하고 영산강 수로를 따라 55마일 거리에 있던 광주를 내륙진출의 중심기지로 결정하고 광주를 거점으로 영산강 내륙과 섬진강 유역 그리고 남동해안 지역으로 선교루트를 개척하고 순회전도를 시작하였다. 광주 선교기지는 남장로교의 계층확산의 초석이 되어 이후 호남지방 전지역으로 남장로교를 전파하는 핵심이 되었다.

순천 선교기지는 개종자의 역할이 중요한 팽창확산의 결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1909오원 선교사가 과로로 순교한 후 변요한배유지 선교사가 순회전도여행 중에 순천에 들려보니 50명의 신자들이 회집하여 예배를 드렸고 장천, 이미, 무만동 일대의 개종자들에게도 문답과 세례를 주었다49)고 기록하면서 이처럼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성장하고 있지만 지역적인 격리 때문에 보살필 수 없어 순천 선교기지 개설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순천을 중심으로 섬진강 유역의 선교루트는 광주를 출발하여 나주남평에서 보성으로 남하하여 낙안순천광양을 경유하여 광양의 섬거장에서 구례까지 섬진강 수로를 따라 이동 후 구례에서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는 압록에서 화순으로 이동하여 섬진강 유역의 중심부를 장방형을 그리며 루트가 형성되어 있다. 특징적인 것은 섬진강 유역의 5일장 등 정기시장이 형성되는 루트와 일치하여 선교루트가 형성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장막전도라는 남장로교 선교방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호남지방의 선교루트는 해로와 수로를 이용하여 접근이 용이한 군산과 목포에 먼저 선교기지를 형성한 후 내륙으로 접근하고 있다. 내륙의 광주를 중심 센터로 하여 하위도시로 계층확산을 꾀하는 선교루트를 형성하고 있다. 전주군산목포광주 등은 선교사의 이전에 의한 이전확산의 유형으로 시작되고 있지만 순천은 개종자에 의한 팽창확산의 유형으로 출발하고 있다. 선교기지가 모두 개설된 1912년 이후에는 이전확산과 팽창확산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가족친지친구 등 사회적인 연결고리를 통한 전염확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림 3】 선교지구의 구분

 

 

 

(2) 선교지구의 조직 및 지리적 확장

 

장로교는 장로회 정치를 이용하여 신앙공동체를 이끄는 계층적 구조체제로 선교지구에는 중심이 되는 노회조직이 있고 이 노회를 중심으로 종교활동이 전개되면서 선교지구의 조직 및 지역적 확장이 이루어지고 있다. 선교사들은 접근이 용이한 선교거점을 확보한 이후 내륙으로 지역적인 확장을 하고 있다. 내륙에서는 도시의 규모가 큰 도시에서 하위 도시로 지역적 확장을 하는 계층확산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선교사들의 순회루트는 계층적인 구조체계의 남장로교 정치방식을 선교지역에도 그대로 반영하여 큰 지역에서 작은 지역으로 접근하며 지역적 확장에 장애요인 되고 있는 동족촌락이 집중 분포하는 지역과 불교 영향이 큰 지역, 그리고 서원 등 유교 영향이 큰 지역을 피하면서 장날을 이용하여 직접적인 대면접촉을 하며 병원과 학교 등의 매체를 병용하여 남장로교에 대한 오해와 선교사들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1892년 조선에 도착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선교사들간의 정보교환과 선교 지역 분할 등의 협의는 물론 공동활동50)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조선의 독립교구를 조직하여 교세를 성장시키고 지리적인 확장을 도모하기 위한 노력으로 1907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를 평양에서 조직하면서 조선을 7개 선교지구로 편성하고 대리노회라 명명하였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호남지방에 전라대리노회를 조직하고 전주목포광주를 거점으로 남서해안과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순회구역을 편성하여 종교의 지리적 확장을 도모하였다. 1911년 전주군산목포광주 등을 거점으로 호남지방 전체를 지경으로 하는 전라선교지구(전라노회)를 조직하였다. 광주를 거점으로 전남지방의 교세가 성장하면서 전라선교지구는 전주를 거점으로 하는 전북선교지구(전북노회)와 광주를 거점으로 하는 전남선교지구(전남노회) 1917년 분리되었다. 이때 제주도는 전남선교지구에 속한 지경이었다. 섬진강 유역의 순천을 중심으로 교세가 크게 성장하면서 구례곡성광양여수를 지경으로 하는 순천선교지구(순천노회)1922년 전남선교지구에서 분립되었다. 따라서 1922년까지 호남지방은 3선교지구가 형성되었으며 선교거점은 전주목포광주순천 등이었다. 1930년 제주도에 형성된 17개 신앙공동체를 중심으로 제주선교지구(제주노회)가 조직되어 전남선교지구에서 분립되어 호남지방에는 1930년까지 전주광주순천제주 등을 거점으로 하는 4선교지구로 교구수가 증가되어 1940년대까지 지속되었다.51) 전라선교지구(전라노회)는 전주를 중심으로 전라북도를 지경으로 하고 있다가 1917 10월 전북선교지구(전북노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군산을 중심으로 교세가 커지면서 1939년 군산을 중심으로 김제, 익산과 이리를 지경으로 하는 군산선교지구(군산노회)가 조직되어 전북선교지구(전북노회)에서 분립되었다. 따라서 1940년 초까지 호남지방은 전남지방에 4개의 선교지구가 조직되었고 전북지방에는 2개의 선교지구가 조직되어 6개의 선교지구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북지방에 비해 전남지방의 교구조직이 빠르게 진행된 것은 1912년 순천 선교기지를 중심으로 한 섬진강 유역에서의 교세 성장으로 순천 선교기지는 내륙과 해양을 잇는 가교 위치에 있고 정치적 기반이나 경제적 기반이 약했던 지역들과 인접하고 있으면서 광주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오원 선교사와 해당지역 출신의 조사들에 의해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균형 있는 선교 인력의 배치 및 알렉산병원과 애양원의 나병원 등 의료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서양인과 남장로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불식되고 장막전도에 의한 많은 개종과 소문 등의 정보가 사회적인 연결고리가 되어 주변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또 초기 신앙공동체를 주도했던 계층이 주로 상업과 수산업에 종사하여 자립적인 교회의 형성이 광주에 비해 빠르게 진행됨으로 교세의 지리적 확장도 빨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호남지방에서 남장로교의 지역적 확장은 내륙에 가장 먼저 선교기지가 형성되었지만 해로 접근이 용이한 군산과 목포거점을 확보한 후 내륙으로 진행하고 있다. 전주를 거점으로 서부지역으로 지역적 확장이 되었고 목포를 거점으로 영산강 유역의 내륙지역과 남동해안지방으로 지역적 확장이 이루어졌다. 또 다시 영산강 유역의 내륙지방에서 북서 해안지방과 섬진강 유역으로 지역적 확장이 이루어졌다. 1912년까지 전주군산목포광주순천 등을 거점으로 선교기지가 형성된 이후 1915년을 기준으로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교세가 크게 성장하면서 전라북도는 2개의 선교지구가 조직되었고 전라남도는 3개의 선교지구가 형성되었다. 선교지구의 조직은 큰 도시에서 하위도시로 진행되었으며 순천선교기지의 경우 개종자가 중심이 된 팽창확산에 의해 지역적 확장이 이루어지고 있다.   

 

4. 맺음말

 

호남지방의 선교기지들은 선교사들이 지역사회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가를 보여준다. 선교기지가 유물적이든 기능적이든 남장로교 전파의 중심지, 종교확산의 통로 역할을 하면서 사회경제환경의 문제들을 다루는 방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선교기지를 구성하고 있는 예배당, 분묘, 부속건물 등 유물적 종교경관은 종교의 화석이기 때문에 종교와 경관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간을 구분하고 조직하는데 따른 종교의 영향도 보여 주고 있다. 개신교 전파 중심지인 선교기지는 특정 지역에서의 지리적인 역할에 영향을 주고 종교와 관련된 부수적인 활동을 발생시킴으로 주민의 생활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호남 선교기지들은 배, 사과, 돼지사육, 누에치기 등을 소개하여 지역경제에도 영향을 주고 신안군 일대의 염전 및 개간 등 토지이용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구를 창조했고 환경을 인간이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전통적인 기독교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지구 자원을 사용하고 관리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책임으로 간주해 청지기의 개념으로 발전된 결과였다.

호남지방의 선교기지 중 수로 및 해로와 접한 군산과 목포 등은 내륙진출에 토대로서 역할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해의 도서지방으로의 남장로교 전파의 중심지로서 기능을 하고 있다. 해안에서 내륙의 중심부로 선교활동을 전개하는 선교루트에도 영산강과 섬진강 수로를 이용하고 있다. 내륙의 거점인 광주선교기지에서 선교루트는 하위의 중심도시로 계층확산의 방식을 취하며 형성되었고 지역적 확장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계층적으로 혹은 독립적으로 조직되는 지역범위는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호남선교기지 형성은 종교의 이전확산의 예로 볼 수 있으며 전주목포군산이 선교사들의 역할이 중요한 선교사들의 거주지 이전에 의한 종교전파로 출발한 반면 순천 선교기지는 개종자의 역할이 중요한 팽창확산으로 선교기지가 형성되고 있다.

지역적 확장은 먼저 서부 해안에서 영산강 내륙으로 진행되었고 영산강 내륙에서 섬진강 유역과 남동 해안지방으로 확장되었다. 남동 해안지방의 교세 성장이 큰 것은 경제기반과 촌락의 구성 및 정기시장의 분포 등과 관련이 있는데 이는 종교의 전파방식이 가족, 친지, 친구 등 사회적 연결망을 통해 이루어지고, 기후지형바다 등 지리적 요인이 생존과 직결되면서 강한 종교의식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형과 거리가 전파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지 못하는 것은 전파의 방식과 관계가 있다. 즉 사회적 연결망에 의한 직접적인 대면접촉방식이기 때문인데 이는 농촌의 가옥구조(사랑방)와 가족제도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불교 및 유교와 같은 타종교 우세지역은 전파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어 종교의 지역적 확장을 차단 또는 지연하는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호남지방의 선교기지의 형성은 접근이 용이한 해로와 수로와 인접한 지역을 거점으로 하고 있다. 군산목포 등이 전형적인 예이며, 이곳을 거점으로 내륙진출을 도모하였고 전주와 광주가 내륙의 거점으로 형성되었다. 군산목포전주광주의 선교기지는 선교사들의 이전에 의한 이전확산에 의해 형성되었으나 순천은 개종자가 중심이 된 팽창확산에 의해 형성되었다. 지리적 환경은 적극 활용하면서 접근이 용이한 지역과 도시의 규모가 큰 지역에서 접근이 불리한 지역으로, 하위 도시로 종교를 전파할 수 있도록 계층구조로 형성되었다. 교구의 조직 및 지역적 확장은 계층확산의 방식을 따르고 있는데 접근이 용이한 곳에서 불리한 곳으로, 대도시에서 중소도시로 확장을 하고 있다. 18931912년까지는 전파 중심지의 형성시기였으며 19131940년까지는 미국 남장로교의 확산시기로 5개의 교구가 조직되면서 지역적 확장이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현재 호남지방은 한강 이남에서 기독교 인구가 가장 많은(30%)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시기별 확산요인과 과정, 분포 패턴, 종교 경관에 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주제어 : 선교사, 선교기지, 선교루트, 전파, 지역적 확장과정


* 고려대 지리학과 박사과정

* 고려대 지리학과 박사과정

1) mission station은 보통 선교사들이 상주하는 곳을 말하며 선교부 또는 선교회 설치를 뜻한다. 조직을 강조했을 때는 선교부이고 지역을 강조할 때는 선교거점 또는 교두보를 말한다. 백낙준은 선교의 본거기지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선교지에서 선교대행기관이 선교본부요 또 외지선교회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낙준,《한국기독교사》, 연세대출판부, 1993, pp. 9697.

 

2) Levine, G. J. On the Geography of Religion,Transactions, Institute of British Geographerds 11, 1987, pp. 428440.

 

3) 김수진, “군산초기기독교사연구,”〈호남기독교사연구〉제2, 1994 ; 《광주초대교회사연구》, 호남기독교연구회, 1994 ;《호남기독교100년사》, 쿰란출판사, 1998 ; 김수진한인수,《한국기독교회사》(호남편), 범론사, 1980 ; 김수진주명진,《일제의 종교탄압과 한국교회의 저항》, 쿰란출판사, 1996.

 

4) Presbyterian Church, U. S., Annual Report 18921927, Executive Committee of Foreign Missions.

 

5)《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상,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영인본), 2002.

 

6) 권혁재,《한국지리》, 법문사, 1995, pp. 291415.

 

7) 박영신, “초기 개신교 선교사의 선교운동전략,”〈동방학지〉44-48합본, 연세대 동방학연구소, 1985, pp. 529553.

 

8) Presbyterian Church, U. S, Annual Report 18921927, Executive Committee of Foreign Missions 

 

9) 류대영,《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p. 181. 미국 선교사들이 쓴 한국 관계서적을 도표로 잘 정리해 놓았다.

 

10) 돌발적인 상황이라 함은 희랍을 개척하고자 했던 남장로교의 입장을 희랍정부가 심각한 반대를 함으로 선교활동이 중지되었고 북장로교 전도국 위원이었던 언더우드의 형인 존 언더우드가 남장로교 한국선교를 지원하는 기부금 전달로 재정이 확보된 것을 말한다. 김수진한인수,《한국기독교회사》(호남편), 1980, pp. 8896. 

 

11) 류대영, 앞의 책, pp. 2829.

 

12) 김수진한인수,《한국기독교회사》(호남편), p. 88.

 

13) Presbyterian Church, U. S,, Annual Report 1892, Executive Committee of Foreign Missions, pp. 5457.

 

14) 이만열, “한말 기독교와 관련된 외세 의존의 문제,”〈동방학지〉61,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 1989, pp. 119174.

 

15) 이만열,《한국 기독교 수용사 연구》, 두레시대, 1991, pp. 325370.

 

16) 권역(Circular region)은 지역과 유사한 내용을 가지나 그보다 약간 한정된 의미를 포함하는 지리용어이다. 구체적으로 도시권이나 경제권같이 권 구조를 갖는 지역 혹은 결절지역의 성격을 갖는 지역을 가리킬 경우에 지역이라기보다는 권역이라 부를 때가 많다. 남영우,《도시구조론》, 법문사, 1985, p 358.

 

17) 권혁재,《한국지리》, pp. 67.

 

18) 1892 11월 초에 남장로교 선교사들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당시 연합공의회가 북장로회와 호주장로회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었으나 데이비스 목사의 사망으로 폐지되었다. 그래서 연동에서 북장로교 선교사 8명과 남장로교 선교사 3명이 빈턴의 집에 모여 장로회 정치기구를 채용하는 선교부간의 협의회를 구성하였고 이를 선교회공의회라고 한다. 이만열,《한국기독교 수용사 연구》, 두레시대. 1998.

 

19) 백낙준,《한국기독교사》, pp. 400401.

 

20) Presbyterian church, U. S, Annual Report 1893, Executive Commitee of Foreign Missions, pp. 5457.

 

21) 최영준, “천주교 확산,”〈대한지리학회지〉제34 4, 1999, p. 396.

 

22) Richard H. Jackson,  Cultural Geography, west publishing company : U.S.A, 1990, p 24.

 

23) 류대영, 앞의 책, pp. 5859.

 

24) 전도여행의 시작은 성경에서 비롯되고 있다. 성경 중 사도행전은 초기 사도들의 전도여행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예수의 지방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여행을 말한다.

 

25) 최영준, 앞의 논문, p. 398.

 

26) Hildegard Binder Johnson, The Location of Christian Missions in Africa,The geographical review, vol 57, No 2, 1967, pp. 172176.

 

27) 최영준, 앞의 논문, p. 398.

 

28) 박찬승, “전남지방의 동학농민전쟁,”〈호남문화연구〉제23, 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 1995, pp. 1629.

 

29) 김수진한인수,《한국기독교회사》(호남편), pp. 109112.

 

30) 박정신,《근대한국과 기독교》, 민영사, 1997, pp. 4547.

 

31) Presbyterian church, U. S, Annual Report 1898, Executive Committee of Foreign Missions, pp. 4647.

 

32) 노길명, “조선조 종교문화의 성격과 그 변동,”《백석 홍승직 교수 회갑 기념논문집》, 1989, pp. 274281.

 

33) 최재석은 동족부락의 형성이 조선중기까지는 민중은 물론 양반 계급에서도 별로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양란을 겪은 이후에 급속히 수용되기 시작하여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민중세계까지 일반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최재석,《한국 가족 제도사 연구》, 일지사, 1983.

 

34) 목포노회사편찬위원회,〈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목포 선교부 보고서〉2(18951911), 1997, pp. 89.

 

35) 목포노회사편찬위원회,〈목포 선교부 보고서〉2(18951911), 1997, pp. 18

35) 목포노회사편찬위원회,〈목포 선교부 보고서〉2(18951911), 1997, pp. 18

   19.

 

36) 초분이란 한겨울에 사람이 죽었을 경우 땅이 얼어 시신을 무덤 속에 안치하지 못해서 볏집으로 엮어 만든 지붕을 시신 위에 덮어 일시적으로 놓아두었던 장소를 말한다.

 

37) 김수진,《호남기독교100년사》, 쿰란출판사, 1998, pp. 3036.

 

38) 차종순,〈호남교회사에 있어서 사회운동에 대한 연구〉, 계명대 신학과 박사논문, 1998, pp. 3136.

 

39) 금산교회는 ‘ㄱ’ 구조의 예배당으로 남녀의 좌석구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교회건축 양식이다. 김수진,《금산교회 이야기》, 쿰란출판사, 1999.

 

40) 김수진,《호남기독교 100년사》, pp. 135136.

 

41) 안영로, “전라도 지방의 초기 선교사역에 관하여,”〈호남교회사연구〉제1, 호남교회사연구소, 1995, pp. 115118.

 

42) 김수진한인수,《한국기독교회사》(호남편), pp 107129.

 

43) 김수진한인수, 위의 책, pp. 103106.

 

44) J. P. Preston, Letter to Jim, 1904, 12. 14.

 

45) Kwangju-The Mountains rim an emerald cup. from fruitful fields of velvet green To cloud patched sky of deep sea blue, A fairer spot I've never seen.

 

46) 정승모, “농촌 定期市場體系와 농민 地域社會構造,”〈호남문화연구〉제13, pp. 232244.

 

47) 순천노회,《순천노회사》, 1991, p. 41.

 

48) “한국교회의 뿌리를 찾아(4),”〈한국기독공보〉1996 10 5.

 

49) 순천노회,《순천노회사》, 1991, pp. 4142.

 

50) 4개 교단의 장로교 선교사들이 장로회 정치를 사용하는 연합교회의 설립을 목적으로 선교회공의회가 조직되었지만 공의회는 노회(Presbytery)가 행사할 수 있는 교회 치리권이 없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본국 노회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공의회 조직을 알리고 공의회가 노회의 역할을 대행할 수 있도록 승인을 요청하였고 ‘대리회’로 하여 노회를 대신하여 교회 정치를 하였다.(이만열,《한국기독교 수용사 연구》, pp. 343364)

 

51) 총회회의록 제9-26회 내용을 요약정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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