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임신년육월십육일에(壬申年六月十六日) 두사람이 아울러 맹세하고 쓴다(二人幷誓記) 하늘은 두고 맹세한다.(天前誓)지금부터 3 년
동안(今自三年以後) 충성의 길을 갈 것이며(忠道執持)잘못이 없기로 맹세한다.(過失无誓) 만약 이런 사실을 망각하면(若此事失)하늘로부터 큰 죄를
받기로 맹세한다.(天大罪得誓) 만약 나라에 큰 난이있어 불안하면(若國不安大亂世) 가히 행동으로 임할 것을 맹세한다.(可容行誓之)또 이미 신미년에
7월 27일 약속한(又別先辛未年七月卄二日大誓) 시,상서, 예(예기), 전(춘추좌전)을 (두 사람이)차례로 읽고 익히는데 그기간을 3년으로
맹세하였다.(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
1935년경주시
월성군(月城郡) 현곡면(見谷面) 금장리(金丈里) 석장사지(石丈寺址)부근에서 발견되었으며 비문(碑文)의 첫머리에
'임신년(壬申年)'이라는간지(干支)가 있고 내용 중에 충성을 서약하는 내용이 있어,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라호칭되고 있다. 비문은 왼쪽이
아랫 쪽에 비해 약간 넓으며 구획 선이없이 5행(行) 74자(字)를 새겼다. 내용은 화랑도의 기본정신에 따른충도(忠道)의 실천을 서약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비석의 제작연대인'임신년(壬申年)'이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은 상태이나 화랑도가 번창하던552년, 또는 612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여인토용(女人土俑) 황성동(隍城洞) 돌방무덤[석실분(石室墳)]은 경주분지 내의
북편(北便)에위치한다. 봉분(封墳)의 바닥지름이 14m에 이르며 남쪽벽에 동편으로치우쳐서 짧은 길이 있는 「ㄱ」자형의 돌방이다.
여기에서는 토제 인물용(人物俑),동물용, 수레바퀴모양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무덤양식과
출토된 유물들은 통일신라 7세기 후반경의 것으로 여겨지고있다. 인물상들의 얼굴과 의복 등은 당나라 인물용의 영향을 받아서신라특유의 것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동물용은 신라특유의 익살스럽고 투박한 모습이 간직되어 있다.
이유물은 왼손으로
입을 가려고 수줍은 웃음을 띠는 모습으로 여인의 단정하고교태스러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머리는 가리마가 선명하고 한 손에는병을 들고 있고
발끝만 살짝 나와있다. 웃 저고리와 치마자락에 주름을표현하여 실재 옷과 같은 부드러움을 느끼게 한다
이차돈순교비(異次頓殉敎碑)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한지 290년이
지난 A.D.818년(憲德王 10년)에세운 6면 비석이다. 이 비석의 5면에는 정간(井間)을 치고 글씨를 새겼으나마멸이 심하여 읽기 어려운
실정이다.
6면중 1면에는
이차돈의 순교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즉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는 흰 피가 솟아 오르는 장면이 좁은석면(石面)에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차돈의순교장면을
살펴보면 머리에는 고깔같은 모자를 썼고, 저고리는 거의무릎아래까지 내려왔으며, 바지는 현대의 여자 작업복같은 모양을 하고있어서 이를 통해
통일신라시대 남성의 복식(服飾)을 엿볼 수 있다.
百濟金銅大香爐(국보(國寶) 287호) 충남 부여군 능산리사지의 부속건물인
工房址에서 출토되었다. 한 마리의큰 용이 용틀임하는 형상으로 연꽃봉오리 모양의 몸통을 받들고 있으며,꼭대기에는 봉황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편채
서 있는 상태이며, 부분별로크게 뚜껑부(蓋), 몸체(爐身), 다리(臺足)로 別鑄되어 하나로 만들어졌다.
문양틀에 의해
제작되었고, 금속 질은 성형된 동표면에 금을 분장한 금동제향로이다.뚜껑에 있어 봉황의 높이는 12.0cm이고, 봉황의 턱 밑에 汝意珠를
끼고날개를 활짝 편 모습으로 원형의 받침을 딛고 있는 상태로 묘사되고있다.
뚜겅은높이
18.0cm로 횡으로 돌아가며, 4~5단의 삼 산 형의 문양대로 장식되어있다. 삼산형의 둘레에는 선으로 장식되어 내부에 빗금무늬가 있다.먼저 윗
단에는 阮咸, 排簫, 長笛, 거문고, 북을 연주하는 5인의 주악선인을등 간격으로 배치하였다.
바로아래에는
5개의 산을 돌리고, 각 꼭대기에 기러기 모양의 원앙이 한마리씩 앉아있다. 다음 아래로는 꽃잎과 같은 삼산이 베풀어져 있고,각종의 인물상,
동물상등의 문양이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74곳의봉우리와 봉황, 용등과 호랑이, 사슴, 코끼리, 원숭이, 멧돼지등 39마리의동물과 5인의
악사, 산중의 신선등 16인의 인물상, 6군데의 나무, 12군데의바위,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등의 삼라만상이 입체적으로 표현된
상태이다.
뚜껑과몸체의
구연부는 음각 당초 문 띠가 돌려지고, 몸체는 높이 12.0cm로연꽃 잎이 3단으로 되어 있으며, 연꽃 잎 사이와 꽃잎 표면에는 신선과날개 달린
물고기, 수중생물, 사슴과 학등 26마리의 동물이 양각되었다.
각연단에는
종선문이 음각되었으며, 몸체 아래의 중앙에 연결된 다리부분은높이 22.0cm이고, 한마리의 용이 몸체를 떠받고 있다. 용은 머리, 뿔,다리,
비늘등과 특히 발은 4개의 발가락과 발톱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된것으로서 전반적인 분위기는 삼신산을 중심으로 한 신선의 세계, 불교관,문양에 있어
이상형의 세계, 현실의 세계등이 조화되어 있는 백제적인특징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蓮花文瓦當 드림새며은 양호하며, 후측면부에 접합된등기와(수키와)는 중앙부가
파손되어 접합되었고, 끝부분의 미구부분이완파된 상태의 회색 연질에 고운 점토로 성형된 수막새기와이다.
1.1cm높이의
주연 상면은 무문이고, 판내에 7엽의 연화문이 장식되었으며,연단 둘레에는 화륜권대가 돌려졌다. 연판 중앙에는 꽃술자엽이 자방과연결되었고,
중앙에는 넓은 원판형 자방이 배치되었다.
자방단둘레에는
꽃술대가 돌려지고 그안에 3중의 소연자가 장식되었으며 그안에는9과(1+8)의 반구형 연자가 배치되었다. 드림새의 후면은 정제되어 고르고측단에
접합된 수키와의 背面에는 굵은 선문이 타날되었으며, 중하단부에는0.8×0.8cm의 방형 고정못구멍이 관통되었다.
관통방법은밖->안으로 관통시켰으며 내면에는 밀린 태토가 부착되었다. 등기와분할면은 1차 분할한 후 2차 瓦刀로 정제시킨듯
고르다. 이 수막새의형식은 곡절소판형식에 양식은 꽃술자엽형식인 백제시대 한 막새형식이다.
무령왕지석(誌石)) (국보(國寶) 163호) 왕의 지석(誌石)으로
표면에 괴선을 긋고 그 안에 6행의 명문을
새겼다. '령동대장군백제사마왕년육십이세계묘년오월병무삭칠일임진붕도을사년팔월계유삭십이일갑신안(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癸卯年五月丙戊朔七日壬辰崩到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조등관대묘입지여좌(登冠大墓立志如左)'
명문의 '령동대장군사마왕(寧東大將軍斯麻王)'은무령왕의 책봉칭호와 휘(諱)이며 왕의 천수(天壽) 62세는 서기 523년에해당하며 이들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사와도 일치한다. 이 지석의 뒷면은음각선으로 테를 두르고 그 선에 걸쳐 십간십이지를
음각하였다 |